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48
47. 12월
선율의 촬영은 문제없이 쭉 이어지고 있었다. 세트촬영이 대부분인 영화라 다행이었다. 여름엔 무섭게 덥더니, 겨울도 그만큼 추울 모양이었다. 아직 연말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바람이 차고 매서웠다.
태주는 영화 촬영이 끝나가는 지금 꽤 감상에 젖어있었다. 영화든 드라마든 작품이 끝날 때마다 느끼는 아쉬움과 상실감을 마지막 촬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느끼고 있었다.
이제영 감독이 쓰러진 일을 겪은 후, 김윤선과 태주 둘은 촬영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심혈을 기울여 도자기를 빚는 장인처럼 한 씬, 한 씬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보여줬다. 촬영이 끝날 때마다, 마라톤이라도 뛰고 온 것처럼 지쳐 하는 그들을 곁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나서서 말릴 정도였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둘이 달려들어서, 보다 못한 이제영 감독님이 제지할 정도였으니.’
이제 선율의 전체 촬영 일정은 많이 남지 않았다. 태주의 배역 중 몇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장면인, 쓰러진 마에스트로를 설득하는 씬, 마에스트로를 위해 병실 밖에서 연주하는 씬 등은 모두 찍었다.
가장 어려웠던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장면도 찍었다. 전생에선 솔로 연주가 대부분인 영화여서 몰랐는데, 오케스트라와 협연 장면은 촬영하기 쉽지 않았다.
해외 유명 오케스트라와 몇 년간 꾸준히 협연해 본 바이올린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무사히 찍지 못했을 것이다. 그땐 정말 바이올린 선생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남은 촬영은 거의 김윤선의 씬이었다. 태주는 단 한 번의 촬영만 남겨두고 있었다.
“김윤선 선배님이 체중을 너무 줄이셔서 걱정이네.”
병에 걸린 역할을 맡은 김윤선은 촬영하는 동안 감량을 계속했다. 시간 흐름을 따르며 촬영을 해서, 촬영하는 내내 감량해야 했다.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트레이너와 상담하며 진행하는 감량이었지만, 김윤선이 가끔 체력이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몇 번 본 후, 태주는 그 몰래 회복 약이 섞인 주스를 건넸다.
이제영 감독도 마찬가지, 태양의 조각이 깃든 기타연주도 들려주고, 허브 티도 타주고 했지만, 촬영 후반으로 갈수록 부쩍 체력이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래서 그에게도 김윤선처럼 회복 약이 섞인 주스를 건넸었다.
영화 촬영하는 내내 둘은 수시로 태주가 건네는 음료를 마셨다. 주스, 차 가리지 않고 두 사람의 음료수에 몰래몰래 회복 약을 넣었다. 체력회복 효과를 느꼈는지 둘은 가끔 먼저 나서서 태주의 음료수를 찾기도 했다.
게다가 기타가 가진 효과가 끊이지 않게 시간 맞춰 연주를 들려줬다. 덕분에 바이올린이 주제인 영화인데 촬영장에 매일 기타 소리가 울려 퍼졌었다. 다들 좋아하는 편이라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는 태주의 곁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촬영 끝나기 전에 허브 티를 좀 챙겨드려야겠다.”
정원의 허브는 현실의 것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태주가 직접 블렌딩한 허브 티는 가벼운 두통이나 불면, 피로는 약을 먹지 않고 차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효과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태주의 허브 티를 찾는 사람이 많았다. 특히 여성 스태프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때때로 그가 가져오는 허브 티를 구매하고 싶다고 얘기를 꺼내는 사람도 나왔다.
물론 그는 허브 티를 팔지 않았다. 가끔 정원에서 커다란 유리병에 담아와 필요한 사람에게 조금씩 덜어서 나눠줬다. 어쩌다 상급의 허브가 재배되면 이제영 감독이나 우 팀장 같은 고마운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
“냐아앙.”
집 안에 들어서자 태산이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태우가 오후 내내 집에 있을 거라는 얘기를 들어서 두고 갔더니, 화가 난 것 같았다.
“미안, 미안. 두고 가서 미안해. 형이 이따가 산책시켜 줄게.”
산책이라는 말을 알아들었는지, 뾰족했던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태산이는 화를 내던 것이 언젠지 금세 태주의 곁을 맴돌았다. 태주는 그런 태산이 귀여웠다. 솔직하게 짜증을 내고 기분 좋은 티를 내는 녀석은 가끔 장난이 심해서 고생하지만, 이제는 없으면 안 되는 가족이었다.
선율은 대부분의 촬영을 서울 근교에서 한다. 그래서 주말 촬영이 있는 날이나, 연우가 쉬는 날에는 태산이를 집에 두고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태산이를 집에 두고 외출하는 날은 사실 태주도 무척 아쉬웠다.
촬영을 기다리는 도중 태산이의 애교와 스킨십은 큰 힘이 된다. 보고만 있어도 팽팽하게 당겨진 신경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태산이가 없는 걸 아쉬워하는 건 견우와 미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태산이를 집에 두고 왔다고 할 때마다 매우 아쉬운 표정을 했다.
가끔 다른 배우의 스태프로 투입된 형식이 태산이 보고 싶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마다 태주는 태산이 사진을 찍어서 보내 주고 있었다.
“귀여운 녀석. 그런데 너 요새 너무 통통해진 것 아니니? 응?”
“냥.”
“아니야. 너 요새 정말 무거워졌어.”
태우와 연우 둘은 태산이에게 물러도 너무 물렀다. 본인도 무른 편인데 이 둘은 숫제 태산이 밥이었다. 태산이 무언갈 조를 때 둘이 거절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둘은 매일같이 태산이를 위해 온갖 간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대형 캣 타워를 만들고 있었다. 거실 소파 위로 지나가는 선반과 계단, 바닥의 터널을 연결하는 것이었다.
앞발의 힘이 센 태산인 캣 타워를 자주 망가뜨렸다. 고양이도 아닌 녀석이 캣 타워를 어찌나 좋아하는지, 망가지면 고쳐줄 때까지 종일 울어댔다. 그 모습을 보고 태우가 목재를 주문해서 직접 제작하기로 했다. 단단하고 무거운 나무로 태산이 앞발에도 쉽게 망가지지 않게 만들고 있었다.
“태산이 간식이 이렇게 많으니 살이 찌지. 무슨 간식이 이렇게 많아.”
냉장고에서 물을 한 병 꺼내려다, 선반 한 칸이 모두 태산이 간식인 것을 보고 투덜거리는 태주였다. 또 다른 한 칸은 생고기가 가득했다. 전부 태산이에게 먹이려고 종류별로 고기를 갖춰둔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는 이래서 태산이가 매일 상전 노릇을 하는 거라며, 고기를 모두 사료로 바꾸는 상상을 잠깐 했다. 물론 그런 일을 벌이면 태산이 성질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 상상만으로 끝냈다.
태산이에게 어깨끈을 매어주고 나갈 채비를 마쳤을 때였다. 방에서 조용히 시험공부를 하던 태우가 우당탕거리면서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형. 눈 와!”
“눈?”
“응. 첫눈이야.”
태주가 창밖을 보자 꽤 어둑한 하늘에서 굵은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하늘이 흐리고 눈발이 굵은 게 한참 더 내릴 것 같았다.
“이러면 산책 못 할 것 같은데.”
“냥.”
“풋. 태산이 삐졌다. 얘는 정말 말을 다 알아듣는 것 같아.”
삐진 태산이 현관 앞에서 문을 보고 드러누웠다. 나가고 싶다는 시위를 하는 중이었다. 어깨끈까지 맸는데 산책가지 못하는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태우가 태산이 용 우비를 챙겨 왔다.
우비를 차려입은 태산이와 우산을 든 태주, 태우가 다 같이 산책 겸 마중을 나섰다. 연우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간식도 사고 잡지도 살 생각이었다.
*
지하철 입구 앞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버스정류장과 붙어있는 입구라 그런지 사람이 많고 어수선했다. 태주는 사람들에게 밟힐까, 태산이를 안아 들고 역 앞 편의점까지 갔다.
기상 예보 없이 내린 눈에 우산을 쓴 사람이 많지 않았다. 편의점 안엔 우산을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서고 있었다. 그 사람들을 헤집고 안으로 들어가 과자와 음료수, 잡지를 골랐다.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도 살까?”
“케이크?”
“응. 첫눈 기념하게.”
편의점 옆 베이커리에서 케이크도 사고, 펫샵의 강아지도 구경하며 연우를 기다렸다. 둘은 기다리는 동안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곧 있을 기말고사 얘기, 연말에 어딘가에 놀러 가자는 얘기 등을 도란도란 나눴다.
“연우야!”
“어?”
사람들 사이에 섞여서 나오던 연우를 태우가 불러세웠다. 앞만 보고 지나치려던 연우는 길옆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태우야. 형이랑 태산이까지.”
“이거 받아.”
태우가 손목에 걸고 있던 우산을 연우에게 건넸다. 눈은 첫눈답지 않게 아직도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빨리 써. 다 젖잖아.”
우산을 펴지 않고 들고만 있는 연우가 걱정되는지 태우가 제 우산으로 연우를 받쳐주었다. 그런데도 연우는 우산을 펴지 않고 가만히 쥐고만 있었다.
“왜 그래?”
“흡. 아니야. 고마워.”
무슨 일인지 연우의 목소리에 울먹임이 섞였다. 태주와 태우는 이유를 몰랐지만, 연우를 달래서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짧은 산책에 태산이가 칭얼댔지만, 길이 많이 젖어서 더 산책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첫눈 기념 파티하자.”
“잠깐 사진 좀 찍고 먹어.”
치킨에 케이크, 과일 샐러드. 조촐한 파티가 태주네 집에서 벌어졌다. 연우는 언제 울었냐는 듯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태우도 기말고사 공부는 잊고 파티를 즐겼다.
크리스마스도 아니고 신년도 아니었지만, 세 명과 백호 한 마리는 흥겹게 파티를 즐겼다.
*
태주는 오랜만에 사무실에 들렀다. 평소와 다르게 오늘은 직접 차를 운전해서 왔다. 견우를 통해서 구한 SUV 차량이었다.
레저용으로 쓸 생각에 배우 한정민이 구매한 차였는데, 전혀 쓰지 않아 새 차나 다름없었다. 내부 공간도 꽤 넓어서 짐이 많은 태주가 쓰기에 나쁘지 않았다.
“연말이라 그런가 어수선하네요.”
“그렇죠. 시상식뿐 아니라, 여러 곳에서 참석 요청이 많이 들어옵니다.”
“이태주 배우님 앞으로도 초대장이 꽤 왔어요. 뭐 아직은 그런 자리에 나갈 필요가 없어서 거절했지만요. 크리스마스 파티나, 신년파티에 참석하고 싶으시면 말씀하세요.”
“아니요. 괜찮아요.”
연말은 연예 기획사에 업무가 쏟아지는 시즌이었다. 평소에도 24시간 근무라고 농담처럼 말하지만, 연말연시는 그것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바쁘다.
사람들이 정신없이 전화기를 붙들고 일하는 모습을 본 태주는 선물로 챙겨온 것들을 두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버스킹이요, 독립영화제 관객 평이 괜찮아요. 그리고 그곳 시상식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이건 참석하셔야 해요.”
“네. 다음 주였죠?”
“네.”
정한선이 연출한 버스킹은 몇몇 독립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부산도 있었고, 지방의 이름도 모르던 작은 영화제도 있었다.
그 와중 서울에서 치러지는 독립영화제에서 본선 경쟁부문에 올랐다.
우 팀장님과 매니저님은 우수상이나 심사위원 선정상 정도는 타지 않을까 예상했다. 물론 스타상은 태주가 받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태주가 민망해했지만, 그 둘은 의심의 여지 없이 태주가 받을 거라고 말했다.
“수상하시면 기사 내보낼 거예요. 아마 인터뷰도 하겠지만, 연말이라 서면 인터뷰가 많을 거예요.”
“네. 다른 일정은 없죠?”
“네. 새로운 소식 생기면 알려드릴게요.”
우 팀장님은 정말 많이 바쁜 것 같았다. 태산이가 아래에서 올려다보고 있는데도 일을 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태산이에게 장난감을 주고 한참 동안 같이 놀아 줄 텐데.
“냐앙.”
“헙.”
우 팀장님이 움찔하는 걸 잠시 지켜보다 태산이를 데리고 나왔다. 이 이상 방해하는 것이 미안했다. 옆에 서 있던 견우의 어깨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아마도 우 팀장님이 참고 있는 걸 그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내년 일월 하순까지 별다른 일정이 없습니다. 선율 촬영이 한 달 가까이 빨리 마무리될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김윤선 선배님 촬영이 남았잖아요.”
“그래도 전체 일정이 빠르게 마무리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주연배우 둘이 말 그대로 폭주하는 것처럼 촬영을 해버렸다. 김윤선과 둘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NG도 거의 없었다. 감독님의 재촬영 지시도 별로 없었다. 예정보다 한 달 가까이 촬영 기간이 단축된 데에는 두 사람의 공이 컸다.
“그럼, 도깨비 무사 연습이나 하죠.”
“하하하.”
1월 중순에 예정되었던 도깨비 무사의 촬영이 조금 연기되었다. 1월 하순으로 날짜가 열흘 정도 늦춰졌다. 덕분에 한 달 좀 넘게 일정이 비었다.
예정된 일정은 독립영화제 수상식 참가와 힐링 인터뷰밖에 없으니, 휴식도 하고 차기작 연습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았다.
버스킹의 독립영화제 출품은 솔직히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촬영이 빨리 끝났지만. 9월 초, 마감기한을 맞추지 못할 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태주의 생각과 다르게 기한 안에 무사히 출품하고, 본선 경쟁부문에도 올랐다. 평도 나쁘지 않아서 수상 가능성도 있었다.
“버스킹이 예상 밖으로 선전해서 기분 좋네요. 하하.”
“당연한 결과입니다.”
“에이. 매니저님은 너무 좋은 말만 해주세요.”
“하하. 그보다는 휴가를 어떻게 보내실 건지 생각해 두신 게 있습니까?”
“여행 좀 다녀오고 쉴 거예요. 연습도 하고요.”
올 한 해는 바쁘게 일했다. 생각지도 못한 인터뷰어 일에 예능, OST 회귀 전과는 다른 일 년을 보냈다. 바빴지만 재밌는 일 년이었다.
휴가 기간은 재충전하는 기간으로 삼을 생각이다. 내년에 고3이 되는 태우와 여행도 다녀오고. 영화랑 연극도 보면서 느긋하게 보낼 예정이다.
물론 정원 관리에도 신경을 쓸 생각이다. 정원은 몇 가지 장식만 추가하면 레벨 3이 된다. 레벨 3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다. 카페도 차릴 수 있고, 오두막도 확장할 수 있다. 제피르를 정식 펫으로 등록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실. 레벨 3은 정원의 지형 일부를 개조할 수 있다. DP가 많이 필요하겠지만, 정원 일부의 지형을 강이나 산으로 바꿀 수 있었다.
‘정원 한쪽에 흐르는 강이라니.’
해외 유명 정원의 사진을 보면, 강가로 산책로를 만들어 둔 정원이 꽤 있다. 사진으로 보면서 부러워만 했는데, 레벨3이 되면 그렇게 바꿀 수 있었다.
태주의 정원이 사진의 정원 같은 넓이는 아니었지만, 어지간한 농장보다는 넓었다. 한쪽 경계를 강으로 만들어도 충분히 여유 공간이 남았다.
‘상자만 열지 않으면 충분히 바꿀 수 있어. 힘내자.’
태주는 몇 달간 붉은 상자가 있는 탭은 열지 않았다. 그런데 요새 들어 한 번씩 눈길이 가는 것이 또 상자를 열고 싶었다. 하지만 정원 레벨3을 생각해서 참고 있었다.
상자 운이 나쁜 건지, 좋은 건지 구분이 힘들어 참는 것도 있었다. 열 개를 열면 한 개정도 아주 좋은 게 나오는 걸 보면 좋은 것 같은데, 나머지가 모두 꽝이었다.
“운만 높일 방법이 있으면, 상자 여는 게 남는 건데.”
상자를 여는 짜릿함을 잊지 못하는 태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