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50
49. 두더지
“제피르 먼저 가.”
태주는 온실 쪽으로 달려가면서 제피르에게 소리쳤다. 제피르는 보호막을 걸어준 후에 빠른 속도로 날아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온실 앞 텃밭에 도착해 가장 먼저 본 것은 거대한 닭이었다. 에이프런을 걸친 닭이 텃밭 바깥에서 겁에 질린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앞에는 짙은 밤색 털의 두더지 여러 마리가 위협을 하고 있었다.
“캬악!”
“꼬끼오!”
“이게 무슨! 제피르 그녀를 보호해줘.”
태주가 말하기도 전에 제피르가 닭에게 보호막을 걸어주었다. 그는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아 주변을 훑어보다 경계를 나눈 말뚝을 발견했다. 빠른 걸음으로 말뚝이 있는 곳에 다가간 태주가 힘을 주어 말뚝을 뽑았다.
어렸을 때지만 펜싱을 배웠었다. 말뚝이지만 손에 쥐니 조금이나마 용기가 생겼다. 다른 손엔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을 주워들었다. 여차하면 던질 요량이었다.
“저리 가. 못생긴 두더지야.”
“캬악.”
못생긴 두더지라는 말을 듣자마자 두더지들은 흉포한 소리를 지르며 태주를 노려봤다. 그 거친 모습에 그의 몸이 잠깐 굳었다. 그런 그에게 두더지들이 달려들려던 때였다. 근처 나무 뒤에서 맹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크아앙.”
“캬악.”
갑자기 들린 맹수 울음소리에 두더지들이 그쪽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모습을 드러낸 맹수가 자신들보다 훨씬 작은 새끼라는 걸 알고, 다시 위협적인 소리를 냈다.
“태주, 피해.”
태산이 두더지의 주의를 끄는 사이 태주는 닭이 있는 곳으로 몸을 피했다. 어느샌가 희가 그곳에 와있었다. 태주가 자신의 뒤로 온 것을 본 희가 그물 총을 두더지에게 겨눴다.
슈웅!
촤라라락!
다행히 희가 그물 총을 쏠 일은 없었다.
희가 보낸 비상 신호를 받은 정원 협회에서 요원이 왔기 때문이다.
“잡아.”
“옛.”
요원 S가 부하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 지시를 내린 후에 태주에게 다가왔다.
“괜찮으십니까?”
“휴, 덕분에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헉! 이 분은?”
“아! 저희 정원에 머물고 계신 손님이세요.”
“그, 그렇습니까?”
태주는 요원 S가 왜 저러나 하다 금세 이유를 알았다. 그는 닭을 보고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엄청 부끄러워하네.’
요원 S는 얼굴을 붉힌 채 닭을 슬쩍슬쩍 훔쳐보고 있었다.
태주는 그 모습을 보다, 요원 S를 조금 도와줄 의도로 입을 열었다. 멋진 모습을 보여서 닭의 호감을 살 수 있게 도와줄 생각이었다.
“저 두더지들이 손님을 위협했어요. 엄청 무섭게요.”
절대 고자질은 아니었다. 그냥 요원 S가 그 단단한 근육질의 몸으로 저 두더지들을 좀 혼내줬으면 하는 마음이 조금, 아주 조금 섞여 있을 뿐이었다.
“맙소사. 레이디를 위협했단 말입니까?”
“네. 여럿이서요.”
정말 고자질은 아니었다. 그냥 사실만 말했다.
요원 S의 눈에 불이 켜졌다.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좀도둑 두더지들이 감히···.”
요원 S가 허리에 매고 있던 로프를 풀어 머리 위로 휘휘 돌렸다. 공중에서 무서운 소리를 내며 돌던 로프는 곧 두더지들의 몸 위로 떨어졌다.
“키에엑.”
요원 S가 나서자 두더지들이 순식간에 모두 제압됐다. 요원 S는 제압에 성공하자마자 뒤를 돌아보았다. 태주를 보는 것 같았지만, 실은 그 뒤의 닭을 보고 있었다. 태주는 그 사실을 알았지만, 요원 S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게 도와주기로 했다.
“멋져요. 요원 S. 와! 정말 순식간이네요.”
“하하하. 이런 일은 저 같은 요원에겐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대단하세요.”
“요원 S, 대단해.”
요원 S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내심 태주 뒤에 있는 닭도 한마디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이들은 좀도둑 무리입니다. 사실 정원의 일꾼이었던 이들인데, 차를 좋아하는 신사의 ‘달의 문’을 여는 아이템을 훔쳐서 여러 정원을 망가뜨리고 다니고 있습니다.”
“좀도둑이요?”
“네, 얼마 전에 차를 좋아하는 신사 일족에서 신고가 있었습니다. 달의 문을 여는 아이템 중 하나가 도난당했다는 신고였습니다. 일족이 아니면 쓰기 힘든 물건이라, 문이 무작위로 열려 추적이 쉽지 않았는데, 이곳에 침입했군요. 이들이 침입한 정원은 화초고 나무고 모두 엉망이 되곤 합니다.”
설명을 마친 그는 두더지들을 돌아보다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주가 이유를 묻자, 두더지 무리의 숫자가 부족하다고 말했다.
“한 마리가 부족합니다. 정원에 숨어있을지 모르니 잠시 건물 안에 계십시오. P 건물 입구를 지켜라.”
“예.”
온실 안으로 태주와 닭, 희가 들어왔다. 태산이와 제피르는 들어오지 않았다. 태주가 그 사실을 알고 그들을 부르려던 때였다. 미로 쪽에서 비명이 들렸다.
“단단!”
정원 식구 중 이곳에 없는 이는 단단밖에 없었다. 태주는 온실을 나서 미로로 가려 했다. 하지만 P라고 불린 요원이 그를 막았다.
“제피르! 단단에게 가줘.”
“히히힝.”
제피르가 빠른 속도로 날아 사라졌다. 그리고 태산이도 곧바로 사라졌다. 태주는 둘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상황에 속이 탔다.
“정원사 씨. 진정해. 요정 아가씨가 불안해하잖아.”
“아! 미안, 희.”
“술탄호크는 아주 강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랬으면 좋겠어요.”
미로 쪽에서 연신 캭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불안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소식을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요원 S를 선두로 일행이 돌아왔다. 입구를 막고 있던 P가 옆으로 비켜줬다. 태주는 입구를 비워주자마자 뛰쳐나가 단단을 살폈다.
“괜찮아?”
“단단.”
단단을 확인한 후 태주가 다른 일행의 몸도 살펴봤다. 다행히 누구도 상처를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골든 유니콘이 보호막을 둘러줬습니다.”
“고마워, 제피르. 정말.”
하지만 단단을 무사히 구한 것치고 요원 S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같이 갔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숨어있던 한 마리가 문을 여는 아이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이 틀어진 것을 알자, 바로 문을 열고 도망갔습니다.”
“그런···. 그럼 어떻게 하나요? 지금부터 추적하나요?”
“좌표 추적이 불가능한 문이었습니다. 무작위로 열리는 데다, 좌표도 추적이 불가능하다니 아무래도 신사 일족에 문의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평화로운 정원의 일상에 좀도둑 두더지라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태주는 당황스러웠지만, 도와주러 온 사람들에게 감사인사는 잊지 않았다.
“오늘은 정말 고마웠어요. 나중에 정원에 꼭 한 번 들러주세요. 좋은 차를 대접할게요.”
“네, 꼭 들리겠습니다.”
“요원 씨, 좋아하는 음식이 있어?”
“예? 그, 단 음식이라면 아무거나.”
“호호호. 좋아. 다음에 오면 제대로 대접하지. 오늘은 고마웠어.”
요원 S는 ‘아름다운 레이디를 돕는 일은 제 기쁨입니다.’라는 고풍스러운 대사를 남기고 두더지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인사를 하는 요원 S 외에도 P와 다른 이들이 슬쩍 닭을 훔쳐보는 게 눈에 띄었다. 이전에 들었던 대로 그들에겐 닭이 굉장히 매력적인 것 같았다.
“정원사 씨. 이렇게 되었으니, 정식으로 소개할게. 난 해나라고 해.”
“안녕하세요, 해나. 이태주라고 해요.”
“호호. 좀 어색하네. 우린 이미 꽤 오래 이웃이었는데 말이지.”
“하하. 그렇긴 해요.”
태주와 일행은 전부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해나도 함께였다. 오늘은 아무래도 일행이 모두 같이 모여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은신이요?”
“맞아. 은신하고 잠입. 내가 익힌 기술이야.”
“어쩐지. 전혀 기척을 잡을 수가 없었어요.”
해나는 어려서부터 인기가 많았다. 덕분에 귀찮은 일을 피하려 1차 성장 때 은신 기술을, 2차 성장 때는 잠입을 익혔다고 알려줬다.
“성장할 때 자신이 익힐 기술을 선택할 수 있어요?”
“당연하지. 수인(獸人)은 자신의 성장 방향을 자신이 정할 수 있어.”
“이런. 그럼 우리 태산이는 안 되겠네요.”
태주가 실망하자, 해나가 웃으면서 펫의 성장은 그 펫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뤄지니 실망할 필요 없다고 말해줬다.
“태산이는 용감하니까, 전투 기술 같은 게 생길까요?”
“호호호. 그럴지도 모르지.”
놀란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태주와 해나는 차를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 곁에는 태산이와 단단, 희와 제피르가 머물렀다.
*
태주와 동생들은 예약해둔 펜션으로 가면서 신나게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태주는 잘 모르는 걸그룹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전직 아이돌인 연우가 있어서일까, 꽤 듣기 좋았다. 물론 둘 사이에 앉은 태산이는 노래와 상관없이 간식을 먹고 있었다.
처음 태주가 여행 얘기를 꺼냈을 때, 셋은 캠핑을 생각했었다. 태산이도 있으니 캠핑이 낫지 않을까 했었던 것. 하지만 겨울 캠핑에 필요한 물건 목록을 보고 나서 그냥 반려동물 동반 펜션을 예약하기로 했다.
도착한 펜션은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울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울타리를 친 뒷마당도 있어서 반려동물을 풀어놓을 수도 있었다. 태산인 울타리 정돈 가볍게 타고 오르는 녀석이라 풀어줄 수 없었지만. 옆 동은 강아지를 두 마리나 풀어두고 있었다.
“우와. 귀엽다.”
“푸들하고 다른 애는 코기인가?”
태산이 옆 동의 강아지를 보고 흥분해서 내려달라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요새 부쩍 힘이 세진 태산이 강아지를 다치게 할까 걱정되어 내려 주지 않았다.
“조그만 녀석이 무슨 힘이 이렇게 센지. 어휴.”
품 안에서 버둥대던 녀석이 태우가 고기 팩을 꺼내자 얌전해졌다.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고기 팩만 바라보는, 욕구에 솔직한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준비해 온 고기와 소시지, 채소 등을 굽자, 고소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옆 동의 강아지들도 냄새를 맡았는지 울타리에 붙어서 낑낑대고 있었다.
“얘들이 민망하게. 이리 와.”
“낑낑.”
강아지들을 데리러 나온 사람을 본 태주가 멈칫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간 안 하고 그냥 구운 고기 조금 드릴까요? 얘도 먹을 수 있게 구운 거라 괜찮을 텐데요.”
“그, 그럼 조금만 부탁드릴게요.”
태산이를 들어 보이며 말을 건넸다. 그녀는 낯선 사람을 향한 경계심 때문인지, 거절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강아지들이 여전히 울타리에 붙어있자, 민망해하면서 고기를 부탁했다.
태주가 접시에 고기를 덜어서 건넸다. 강아지들이 그녀의 다리에 매달려서 콩콩 뛰는 게 보였다. 그녀는 태주에게 감사인사를 한 후에 강아지들을 데리고 들어갔다.
잠시 후 그녀가 깨끗하게 씻은 접시에 과일을 담아서 울타리 너머로 건넸다. 가벼운 고갯짓으로 인사를 한 후, 두 사람은 바로 돌아섰다.
“형?”
“응? 아아. 그냥.”
멍하니 생각에 잠긴 태주가 이상했는지, 태우가 그를 불렀다. 그는 옆 동 생각은 잠시 멈추고 바비큐에 집중했다.
옆 동에 머무는 그녀는 몇 년이 지나면 유명한 작가가 될 사람이었다. 아직은 지망생이지만, 공모전에 당선된 후, 연이어서 히트작을 쏟아낸다.
태주도 그녀의 작품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조선 시대와 비슷한 설정의 왕국이 배경인 퓨전 사극이었다. 젊은 나이와 맞지 않게 사극을 좋아하는 그녀는 정통사극이 인기를 잃은 걸 항상 아쉬워했다. 자신도 유행에 맞춰 퓨전 사극을 썼지만, 언젠가는 정통사극을 쓰고 싶다고 자주 얘기했었다.
‘돌아오기 전까지도 정통사극은 못 썼었는데, 이번엔 쓸 수 있을까 모르겠네.’
예전에 알던 지인의 젊은 모습을 보는 건 꽤 즐거운 일이었다. 때때로 혼자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 느낌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비밀의 일기장을 남몰래 훔쳐보는 느낌도 들었다.
‘산뜻한 모습에 엄청 놀랐네. 매번 떡 진 머리에 후줄근한 운동복 입은 것만 봤는데, 데뷔 전엔 좀 사람 같았구나.’
대본이 늦어져 다들 걱정하고 있었을 때, 그녀에게서 SOS 요청이 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태주를 콕 집어서 도움을 청해서 매니저인 운석 형과 작가의 작업실에 들렀었다. 태주는 그때 집에서 일하는 작가가 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보다 더 꼬질꼬질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곳은 지금 생각해도 악마의 소굴 같은 곳이었다. 생활하는 곳은 따로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면 이후 그녀와의 만남을 거부했을 것이다. 글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쓰는 사람이었는데, 작업실은 어찌나 지저분하던지.
‘도움 요청도 특이했지, 아니 민망했지.’
그녀는 드라마 촬영 전 리딩 현장에서 태주가 대사를 읊는 것을 보고, 그의 연기에 반했었다. 그 후 가끔 촬영장에 와서 태주의 연기를 보고 갔었다. 그러다 마지막 2화 대본을 남겨두고 막혀서 태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태주가 맡은 배역의 대사를 육성으로 듣길 원했다.
대본의 대사는 카메라 앞에서 분장을 갖춘 배우를 두고 할 때는 괜찮았다. 그런데 지저분한 작업실 의자에 앉아, 떡 진 머리를 한 작가를 상대로 하려니 세상 민망함은 다 모아놓은 것 같이 민망했다.
작품의 완성도를 생각해 민망함을 꾹 참으면서 그녀가 작업을 다시 시작할 때까지 대사를 읊어줬다. 태주의 도움 덕인지 그녀는 무사히 대본을 마쳤고, 드라마는 꽤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며 종영할 수 있었다.
만약 이번 생에 그녀의 다른 작품에 출연할 기회가 생긴다면, 태주는 망설이지 않고 출연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다시 대사를 읊어달라는 민망한 부탁을 받게 될지 몰랐지만, 그녀의 대본은 그런 민망한 부탁과는 별개로 정말 재밌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