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51
50. 태산이와 멧돼지
겨울 여행은 꽤 재밌었다. 특히 여행 온 사람이 별로 없어서, 태산이 끈을 길게 매어줄 수 있는 게 마음에 들었다. 자유롭게 풀어주면 더 좋았겠지만, 이곳은 정원이 아니라서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태산이도 새로운 곳이 마음에 드는 듯, 이곳저곳의 냄새를 맡고 다녔다. 호랑이는 영역동물이라 낯선 곳을 싫어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태산이는 아닌 것 같았다. 백호라고는 하지만 종을 넘어서 무언가 다른 게 있는 듯했다.
“어휴. 그렇게 좋아?”
“냐아앙.”
펜션에 마련된 스파 풀을 이용하는 태산이 기분이 풀어진 게 보였다. 찬바람을 맞고 온 태산이를 따뜻한 풀에 넣어주자, 마음에 드는지 고롱고롱 거리며 즐기고 있었다.
‘두더지를 견제할 때는 우렁찬 소리를 낸 것 같은데. 이후엔 한 번도 안내네. 태산이는 1차 성장에서 어떤 기술을 익힐까? 역시 공격 기술인가.’
평소에는 장난꾸러기 같은 모습만 보여주더니, 위험해지자 용감하게 나서서 두더지들을 견제했다. 게다가 단단이 위험한 걸 알자, 바로 도와주러 달려가기도 했다. 태주는 그런 모습을 보고 태산이 1차 성장 때 공격 기술을 얻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앞발 힘이 무척 세니까, 앞발 휘두르기 같은 기술이 생기려나. 아니면 사자후(獅子吼) 비슷한 기술이 생길까?’
수인의 성장에 관해 해나에게 설명을 들은 후로 태주는 태산이의 성장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물론 이대로 자라지 않아도 괜찮지만, 태산이가 자라면 얼마나 멋질지 조금 기대됐다.
“태산아 형이 영양제 사줄게. 좋은 거로.”
정원에 돌아가면, 태산이가 먹을 수 있는 영양제를 골라봐야겠다. 예전에도 영양제 덕을 톡톡히 봤었다. 이번에도 종류별로 골고루 먹일 생각이었다.
태주가 태산이를 털을 잘 말려주고 숙소로 돌아올 때였다. 옆 동의 예비작가가 그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네?”
“그, 조심하세요.”
“네? 뭘요?”
펜션 뒤편 산에 멧돼지가 나타났다는 얘기였다. 겨울의 굶주린 멧돼지가 새끼까지 데리고 인근의 밭을 헤집었다며, 어두워지면 위험하니 나가지 말랬다는 얘기를 전해줬다. 태주는 얘기 전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태우야? 연우야?”
멧돼지 얘기를 전하려 애들을 찾았지만, 숙소에 없었다. 바비큐를 먹으면서 촬영 얘기를 한참 하더니, 그새 촬영하러 둘이 나간 것 같았다. 둘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받지 않았다. 촬영할 때 무음으로 해두는 것은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 아직은 해가 남아있지만, 겨울 해는 빨리 지니 금세 어두워질 것 같았다. 이런 외진 곳은 어두워지면 여러 가지 위험한 게 많았다.
“태산아. 이리 와.”
태산이에게 겨울 패딩을 입혔다. 좀 전 나갈 때는 스파를 시켜줄 생각으로 그냥 나갔지만, 동생들을 찾는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니 따뜻하게 입혀야 했다.
과한 것 같았지만, 태주는 꽤 많은 물건을 백팩에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담요, 핫팩, 비상약, 보온병, 랜턴까지. 필요해 보이는 물건을 모두 챙겼다. 나가기 전 한 번 더 동생들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등산용 피켈 같은 게 있으면 좋겠는데.”
무기가 될 만한 걸 찾아보았지만, 펜션 안에선 찾지 못했다. 태주는 잠시 고민하다 주차장으로 갔다. 손에 쥐면 어쩐지 남에게 예의를 가르쳐야만 할 것 같은 우산을 꺼낼 생각이었다.
그는 우산 손잡이를 쥐고 허공에 몇 번 휘둘러본 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탄 기능도 있으니, 만약의 상황에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두더지에 이어 멧돼지라니. 이게 무슨 액션 영화도 아니고.”
우산이 마음에 드는 것과 별개로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얼마 전 정원에서 두더지에게 위협을 당했는데, 현실에선 멧돼지라니.
멧돼지 출몰 뉴스를 가끔 봤지만, 당사자가 되는 일은 생각해본 적 없었다. 한겨울에 먹을 게 부족해지면 민가까지 내려온다는 얘기는 알고 있었지만, 좀 이른 게 아닐까 싶었다.
이곳이 북부지방이라 눈이 빨리 내리긴 했지만, 아직 12월 중순이었다. 눈이 군데군데 쌓인 정도지, 눈 때문에 먹을 걸 찾기 힘든 수준은 아니었다.
“태산아, 작은 형들 어디로 갔는지 찾아보자. 작은 형들 어디로 갔는지 알겠어?”
태주는 태산의 추적 능력에 기대를 걸었다.
“킁킁. 냐앙.”
태산이 작은 형들의 냄새를 찾았는지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그는 태산이 어깨끈을 꼭 붙잡고 뒤를 따랐다.
“이쪽으로 갔다고?”
펜션 뒤쪽 산책로를 따라서 간 것 같았다. 산책로는 산 뒤 편 주택가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작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와 산 아래를 둘러서 지나가는 길이었다. 길 중간엔 차도와 이어진 곳도 있었다.
‘다행히 펜션 들어올 때 봤던 좁은 길을 따라서 갔나 보네. 뭘 찍느라 전화도 안 받는 건지.’
산책로를 따라 한참을 쫓던 중 길을 벗어난 곳으로 태산이 가려 했다. 바닥에 쌓인 눈에 발자국이 남은 거로 보아, 주택가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산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태주는 태산이 어깨끈을 풀어줬다. 산에서 끈을 매고 움직이는 건 무리로 보였다.
“가자.”
“냥!”
힘찬 대답이 들렸지만, 태주는 출발하지 못했다. 갑작스럽게 웃음이 터져버렸기 때문이다. 등짐을 지고 사냥개를 앞세운 포수들의 사진이 떠올라서였다.
호랑이 사냥을 나서던 포수와는 정반대 상황이었지만, 어쩐지 그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긴 우산을 들고 호랑이 태산이를 앞세운 채 산으로 들어서자, 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슬쩍 흥이 오른 태주가 긴 우산을 들고 서서 쏘는 자세를 취했다. 입으로 ‘탕탕’ 작게 소리를 내보곤, 혼자 멋쩍어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본 사람은 없었다.
“아이 춥다. 빨리 태산이 작은 형들 찾으러 가자.”
민망함에 괜히 태산이를 재촉했다.
*
태우와 연우는 산 중턱쯤에서 찾을 수 있었다. 둘은 조용히 나뭇가지 위의 무언갈 촬영하고 있었다. 다행히 근처에 멧돼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뭐 찍어?’
‘어? 형. 청설모예요.’
둘은 나무 위를 오르내리는 청설모를 찍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열매를 주워서 나무 위 구멍으로 가져가는 청설모의 모습을 숨소리도 죽인 채 찍고 있었다.
‘어휴. 정말.’
태주는 쪼그려 앉은 두 사람 위에 가져온 담요를 둘러주었다. 태산이를 산책시키고 씻긴 시간까지 하면 못해도 두 시간은 지났을 텐데. 둘은 그동안 계속 이렇게 청설모를 찍고 있었던 것 같다.
담요를 덮어준 후엔, 핫팩을 꺼내서 건넸다. 보온병도 건네주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낙엽이 깔린 바닥에 군데군데 눈이 쌓여있었다. 낙엽 사이로 밤송이의 가시도 보이는 것을 보면 밤나무가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주위엔 청설모가 먹을 만한 것이 많았다. 이곳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십 분 정도를 그렇게 촬영하다 청설모가 구멍에서 나오지 않자, 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으, 다리 저려.”
“난 발이 언 것 같아.”
“너희 대체 얼마나 여기서 이러고 있었어?”
시간을 확인하고 청설모를 한 시간이나 촬영한 걸 깨달은 둘은 놀란 얼굴을 했다. 청설모가 귀엽긴 했지만, 이 추위 속에서 한 시간이나 찍은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아래 길 쪽에서부터 따라오면서 찍었어.”
“한 번 놓쳤다가, 다시 발견해서 계속 찍었어요.”
다큐멘터리라도 찍은 듯 둘은 흥분해서 영상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멧돼지의 출몰에 대해 말하려던 태주는 그냥 둘의 얘기를 들어주면서 길을 재촉했다.
펜션에서 나온 지 삼십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더 어두워지면 산길에 미끄러질 수도 있어서 두 사람을 다독여 멈추지 않고 걷게 했다.
“태산아. 내려가자.”
“냐앙. 킁킁킁.”
호랑이는 보통 5백 미터 거리의 사물까지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들었다. 멈춰 선 태산이 무언가 냄새를 맡은 것 같았다.
태주의 머릿속으로 멧돼지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다.
‘큰 소리 내지 말고 바위나 나무 위로 피하라고 했지.’
바로 주변을 돌아봤지만, 올라갈 만한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나무 역시 굵기가 굵지 않았다. 태주는 태산이가 경계하는 방향과 반대 방향으로 동생들을 데려갔다.
‘쉿. 소리 내지 말고, 조용히 산에서 내려가자. 멧돼지가 있는 것 같아.’
‘멧돼지?’
‘응. 서둘러서 내려가자.’
태주가 둘을 재촉했지만, 둘은 태산이를 가리키며 데려가야 한다고 버텼다.
‘태산이 엄청 날쌔. 지금 우리가 빨리 피하는 게 나아.’
둘은 태주의 말에 마지못해 수긍하고, 비탈을 내려갔다. 태주는 둘이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다 태산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멧돼지는 아직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태산이 경계를 풀지 않는 걸 보면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여차하면 태산이를 안고 도망칠 생각이었다.
타타타탓.
멧돼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태주는 고개를 돌려 동생들이 어디까지 내려갔나 확인했다. 둘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걸 보고 그가 손짓으로 빨리 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둘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산 아래로 향했다.
태주도 멧돼지가 오기 전에 태산일 데리고 피할 생각이었다. 그가 태산이 곁으로 다가가 안으려고 할 때였다.
“크르릉.”
‘악. 자극하지 말라고 했는데.’
새끼라도 맹수가 맞는지, 멧돼지에 겁먹지 않았다. 자세를 낮추고 경계를 하는 것이 아무래도 얌전히 돌아가진 않을 것 같았다. 태주가 급하게 태산이를 다시 안아 들려 할 때였다, 태산이 슬쩍 태주의 손을 피해 자리를 옮겼다.
멧돼지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덩치는 크지 않았다. 중형 견보다 조금 큰 새끼로, 무리에서 홀로 떨어진 것 같았다.
“크르르.”
태산이 낮은 울음소리를 내자 멧돼지가 그쪽으로 몸을 돌렸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대치했다. 태주는 함부로 끼어들지 못하고 사선으로 몇 미터 떨어진 곳에서 둘을 지켜봤다. 혹시 멧돼지가 태산이에게 달려들면 바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차라리 내가 다치는 게 낫지. 아직 어린데.’
태주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멧돼지가 예상보다 덩치가 작은 점도 있었지만, 슬라임킹 사건에 두더지 사건까지 겪고 난 후라 이성을 유지하기 쉬웠다.
게다가 손에 든 것이 무기는 아니지만, 충분히 무기 대용으로 쓸 수 있는 방탄 우산인 것도 한몫했다. 길이는 살짝 짧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멧돼지는 태산이의 위협을 가볍게 본 듯 점점 흥분하는 기색이었다. 얌전히 돌아가면 좋으련만 둘은 한바탕 붙을 생각인 것 같았다.
‘젠장. 그냥 갈 것이지.’
“쉭쉭.”
거친 숨소리를 내던 멧돼지가 태산이에게 뛰어들었다.
그때까지 태주는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셋, 둘, 하나.
멧돼지가 그의 앞을 지나는 순간 목덜미에 우산을 꽂아 넣었다.
콱!
“쿠에엑!”
“크릉.”
태주의 일격에 넘어진 멧돼지에 태산이 달려들었다. 앞발로 멧돼지의 머리를 여러 차례 후려쳤다. 그런 후 목덜미를 물었다가, 입이 작아 힘들자, 놓고 바로 코를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태주가 빠르게 다가서 우산으로 한 번 더 목덜미를 찍었다.
일어나려던 멧돼지가 다시 바닥에 나뒹굴었다.
태산이 멧돼지가 숨을 쉬지 못하게 코를 물고 버텼다.
태주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멧돼지를 공격했다. 목과 다리를 중심으로 충격이 누적될 만한 곳을 빠른 속도로 가격했다.
“헉헉.”
“냐아앙.”
멧돼지는 기절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걸 보니 죽진 않은 것 같았지만, 앞다리를 다쳤으니, 다시 일어나서 공격하진 못할 것 같았다.
“휴우. 태산아 이리와. 몸 좀 보자.”
“냐앙.”
태산인 흙투성이가 된 것 빼곤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안심한 그는 눈앞의 멧돼지 처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디에 신고해야 하는 거야? 112? 119? 산림청?”
멧돼지가 범죄자는 아니니 119에 신고해보기로 한 태주는 땀에 젖은 목도리를 풀어 멧돼지의 다리를 묶었다. 기절한 것으로 보였지만, 혹시 일어날지 모르니 미연에 방지할 생각이었다. 멧돼지의 기색을 살피며 빠른 손놀림으로 뒷다리를 모두 묶었다.
돼지를 묶어 두고 119에 신고 전화를 했다. 정확한 위치를 묻는 말에 산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펜션 이름을 대고 그 뒤의 산이라고 알려주었다.
태주는 전화를 끊고 바로 동생들에게 괜찮다는 톡을 보냈다. 태산이를 안고 사진도 한 장 찍어서 보냈다. 톡 방에 순식간에 메시지가 우르르 올라왔다. 손이 느린 태주가 답하기도 전에 온갖 걱정하는 말들이 올라왔다. 결국, 읽기를 포기한 그가 전화를 걸어서 괜찮다는 말을 한 후에야 안심했는지 조용해졌다.
가방의 랜턴을 꺼내서 켜놓고 기다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방대원이 찾아왔다.
“허허허. 진짜네요. 이걸 어떻게 잡았데요.”
“이게 새끼라도 20kg은 넘어 보이는데.”
태주는 놀라워하는 소방대원에게 멧돼지를 넘겨주었다. 처리를 묻는 그들에게 알아서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 펜션으로 돌아왔다.
‘태산이가 확실히 호랑이는 호랑이야. 멧돼지를 보고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다니. 정말이지 별일을 다 겪네.’
멧돼지 사냥의 시작을 돌이켜보면, 태산이 단순히 본능 때문에 나선 건 아닌 것 같았다. 태우와 연우, 그리고 태주를 지키기 위해 나선 것 같았다.
만약 사냥 욕구를 채우기 위해 나선 것이라면 멧돼지의 숨통을 끊었을 것이다. 하지만 태산인 멧돼지가 무력화되자 바로 물러나서 태주의 앞에 자리 잡았다. 또, 태주가 목도리로 멧돼지 다리를 묶는 순간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었다.
“아직 이렇게 작은데···. 고마워 태산아. 그래도 다음엔 그냥 도망가자.”
태주는 따뜻한 물에서 놀다 잠들어 버린 태산이를 타올로 닦아주며 감사를 전했다. 이제 한 살이 다 되어가는 태산이지만, 1차 성장 조건을 채우지 못해 여전히 어린 모습이었다. 게다가 현실을 오가느라 위장 기술이 적용되어 고양이를 닮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행을 위해서 멧돼지와 맞섰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 마음은 정말 고마웠다. 물론 다신 끈을 풀어주지 않겠다는 다짐을 단단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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