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56
55. 무섭게 친절한 동료 >
첫 번째 리딩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견우는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서 그 모습을 보던 태주는 무슨 좋은 일이 있었나 궁금했다.
“매니저님 기다리시면서 무슨 좋은 일 있으셨어요?”
“예?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견우는 복도에서 마주쳤던 기자들의 표정을 생각하면서 웃고 있었다. 윤비와 김은형의 연기도전을 취재 왔던 기자들이 리딩이 시작된 후엔 태주를 주목했다. 견우가 태주의 매니저인 것을 알고 있던 몇몇은 인터뷰 좀 하자는 얘기를 건네기도 했다.
다른 배우의 매니저들도 태주를 보고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태주가 박지헌과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을 눈도 깜빡이지 않고 지켜보더니 급하게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던 견우는 뿌듯했다. 선율이 아니었다면, 진작 TV로 데뷔하고 여러 프로에서 이름을 알렸을 텐데 그러지 못 했다. 특히 예능으로 화제가 됐을 때와 OST가 인기를 얻었을 때 기회를 놓친 것은 아직도 아쉬웠다.
예능과 OST가 좋은 반응을 얻자, 우 팀장이 이 여세를 이어가자며 영화 스케줄을 조정하자고 제안했었다. 하지만 태주가 영화 스케줄은 절대 바꿀 수 없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평소 주변 사람의 의견을 잘 들어주던 태주의 그런 모습이 낯설었다.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던 우 팀장이 아쉬워했지만, 결국 태주의 의견을 받아들여 영화 스케줄을 최우선 순위로 둔 채 일정을 잡았었다.
“오늘 윤비 씨는 왜 참석 안 했데요?”
“해외 스케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대만에서 팬 미팅을 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아아. 예정보다 열흘 늦춰져서 일정이 꼬였나 보네요.”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은 아니었다. 연기 준비가 부족한 윤비를 LT에서 스케줄을 핑계로 불참시킨 것이었다. 기자들에게 공개되는 리딩이라 LT에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사흘 뒤에 다시 리딩 잡혀 있으니 그때 보면 되겠죠. 그나저나 힐링 인터뷰가 빠진 뒤로 굉장히 자유롭네요.”
“하하. 일주일에 한 번이었지만, 고정이라는 게 그렇지요.”
새해에 들어서면서 힐링 인터뷰를 그만두게 된 태주였다. 프로그램이 개편되면서 코너가 사라져버렸다. 비슷한 콘셉트로 단독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얘기가 도는 중이었다.
태주는 만약 새 프로그램이 생기면 MC를 다시 맡아달라는 부탁을 PD에게 받았다. 앞으로 일정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새 프로그램도 태산이가 다른 동물들과 어울리는 콘셉트라면 출연을 고려해 볼 생각이었다.
드라마는 예정보다 대본이 늦게 나왔지만, 받아 본 대본이 재밌어서 괜찮았다. 시놉시스 상의 도깨비 왕은 장난을 치거나, 엉뚱한 일을 벌여 분위기를 전환하는 캐릭터였다. 하지만 실제로 받아 본 대본에선 좀 더 다양한 모습이 나와 있었다.
도깨비 왕은 무사의 사랑을 반대하면서도 은근히 둘을 이어준다. 또 대신들이 무사를 해치려 할 때도 벌을 내리는 척 인간계에 묶어두며 보호한다. 인간을 혐오하면서도 불쌍하게 여겨 재난을 막아주고 힘을 잃기도 한다. 왕은 변덕스럽고 유치한 성격에 때론 위엄있고 때론 강압적인 제멋대로인 인물이었다.
“형님들은 요새 뭐 하세요? 이상하게 조용하시네요.”
“진혁 배우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영화 촬영 중이십니다.”
“진혁 형님도 슬슬 다음 작품 들어가실 때가 된 것 같은데….”
“아마 차기작은 케이블에서 의학 드라마를 선택하실 것 같습니다.”
의학 드라마? 태주는 속으로 견우가 잘못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시기 케이블에서 방영한 메디컬 드라마의 주인공은 진혁이 아니었다. 진혁은 이상한 퓨전 사극을 찍고 한동안 고생한다. 견우가 말한 의학 드라마는 다른 배우가 찍어서 상당한 인기를 얻는다.
회귀 전 태주의 TV 데뷔 드라마와 진혁의 복귀작이 같은 시간대에 방영해서 기억하고 있다.
‘그 퓨전 사극 찍고 망해서 이 년 넘게 쉬시나 보네. 이걸 말해줘 말아. 에이 괜히 물어봤네.’
괜히 근황을 물었다, 고민을 떠안은 태주였다. 의학 드라마에 출연해 인기를 얻은 배우도 무명 생활이 긴 배우였기 때문에 더 고민됐다. 그저 그런 배우였다면 진혁에게 넌지시 의학 드라마를 선택하라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 배우가 연기도 잘하고 성실한 배우여서 문제였다.
‘아이 진짜. 내가 출연할 것도 아닌데. 아는 사람이 망할 게 뻔한 작품을 선택하게 그냥 둘 수도 없고.’
태주는 결국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나중에 진혁을 만나 퓨전 사극은 별로라는 말만 하기로 정했다. 진혁이 퓨전 사극을 고르지 않으면 의학 드라마를 찍을 거라는 보장도 없었으니, 그정도 힌트를 주는 것은 괜찮을 것 같았다.
*
1차 리딩이 있던 날 저녁. 견우에게 스타라이즈의 매니저에게서 연락이 왔다. 도깨비 무사를 같이 촬영하는 김은형이 태주의 연락처를 얻고 싶어한다는 얘기였다. 촬영에 관해서 물을 게 있다는 말에, 견우는 태주에게 허락을 받고 연락처를 건네줬다.
김은형은 연락처를 받자마자 태주에게 통화할 수 있는지 문자를 보냈다. 연기 연습 외에 스케줄이 없던 태주가 괜찮다고 답하자마자 전화가 왔다.
“그러니까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2주 뒤에 촬영인데요?”
“그게, 네.”
“연기 선생님은 뭐래요? 아니, 리딩 할 때 보니까 괜찮던데요. 뭐가 문제죠?”
김은형에게서 만나고 싶다는 전화가 왔을 때, 왜 자기를 만나려는지 물었다. 연기에 관해 묻고 싶다는 얘기에 두말없이 나왔는데, 이런 황당한 질문을 들을 줄 알았다면 만나러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속으로 괜히 왔다고 후회했다.
“지난 리딩에서 작가님도 감독님도 아무 말씀 없으셨잖아요. 그건 은형 씨 연기가 괜찮았다는 얘기인데요.”
“그게 제 상대역이 윤비 씬데 그날 오지 않으셔서요.”
“아아. 대만에 팬 미팅하러 가셨다고 했었죠.”
윤비 얘기에 묘한 표정을 지은 은형이었다. 하지만 곧 태주에게 자신의 연기에서 고칠 부분이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태주가 보기에 김은형은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하는 연기에 확신이 없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배역이 느끼는 감정이 이게 맞는 건지, 이렇게 표현해도 되는 건지, 그 확신이 없어, 불안해하는 것이었다.
“연기 언제부터 배우셨어요?”
“아, 반년 정도 됐어요. 저희 3집 활동 끝나고 유닛 활동할 때 전 연기 수업 들었어요.”
“ 반년이요?”
“네, 그래서 너무 실력이, 너무 부족해서 이렇게 부탁드리는 거예요.”
태주는 이 김은형이라는 사람이 자신을 놀리려고 이런 말들을 꺼낸 게 아닐까 잠시 의심했다. 하지만 그는 정말 연기를 배운 시간이 짧아, 자신의 연기가 부족하다 느끼고 있었다.
‘6개월 배워서 그 정도 연기력이면 그냥 배우 해도 되겠던데. 놀리나?’
“태주 씨?”
“아, 죄송해요. 실제로 연기하는 걸 본 건 아니라서 고칠 부분은 모르겠어요.”
“그런가요? 그,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연습실이 근처인데, 연기 좀 봐주실래요?”
“네?”
김은형은 태주가 정말로 처음 보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소심한데 적극적이고, 조심스러운데 거침없었다. 전혀 상반된 태도와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에서 진심이 느껴져서 곤란했다.
그는 적극적으로 부탁한 후에 혹시 불쾌하진 않을지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또 태주를 연습실로 바로 이끌어놓고는 세 걸음에 한 번씩 그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 그의 태도에 태주 역시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그가 안내하는 길을 따라 연습실로 갔다.
연습실은 그의 말대로 정말 가까운 곳에 있었다. 건물 입구부터 보안이 철저해서 신원이 확실하지 않으면 출입이 어려웠다. 태주는 만약 나중에 개인 연습실을 구하면 이런 곳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은형의 연기를 확인하기 위해 태주가 상대역을 자처했다. 그가 맡은 배역은 윤비와 함께 나오는 씬이 많았다. 확인을 위해 연기하는 장면 역시 둘이 같이 등장하는 장면이었다. 윤비가 자신의 언니 주변을 맴도는 무사를 의심하는 씬이었다.
“오빠, 그 사람 진짜 이상하다니까. 손도 안 대고 물건을 들어 올렸다니까.”
“네가 잘 못 봤겠지. 그 사람이 무슨 초능력자도 아니고.”
“아니야. 제대로 봤어. 됐어. 오빠 도움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무슨 짓을 하려고?”
“우리 언니한테서 떼어놓을 거야.”
태주는 대사를 맞춰주면서 김은형의 연기를 관찰했다. 그러는 한편 자신이 대체 여기서 뭘 하는 건지 의아해했다.
“그, 어땠어요?”
“음. 표정은 괜찮아요, 동작도. 그런데 발음이 좀.”
“발음이요? 어떡하죠. 발음 교정 많이 했는데, 많이 이상한가요?”
“네. 좀 이상해요.”
김은형이 울상을 지었다. 하지만 태주는 자신의 말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 리딩에선 몰랐는데, 실제 연기를 하면서 확인하니 발음이 듣기 안 좋았다.
“아나운서도 아닌데 왜 그렇게 또박또박 장단음까지 맞춰서 발음하세요?”
“네?”
“이게 뉴스도 아니고, 연기인데. 대사를 정보 전달하는 것처럼 하고 계셔서요.”
표정이나 작은 몸동작까지, 뛰어나다고 할 정돈 아니었지만, 나름 괜찮은 편이었다. 단지 일부러 신경 써서 발음하는 대사가 귀에 거슬렸다.
“정확하게 발음해야 한다고…. 선생님이.”
“우리가 평소에 아나운서처럼 말하지는 않잖아요.”
“그, 그렇죠?”
“사람마다 다 각자 말투가 있고, 상황에 따라 말을 끌거나 강조하기도 하잖아요. 은형 씨는 배역에 몰두했을 때는 괜찮아요. 그런데 몰입이 풀리고, 연기라는 걸 의식하기 시작하면 발음이 아나운서처럼 또박또박 나와서 듣기 불편해요.”
설명만으로 잘 이해하지 못하자, 태주가 은형이 연기했던 부분을 그대로 보여줬다. 또박또박 발음하던 부분까지 똑같이 흉내 냈다.
“제, 제가 그렇게 연기했어요?”
“네, 응? 연기 연습할 때 촬영해서 확인 안 해요?”
“아! 그러면 되는구나.”
마치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이 놀란 표정을 짓는 은형을 보고 태주가 인상을 썼다. 대체 왜 놀란 건지.
“무대 준비할 때 녹화해서 확인하지 않아요?”
“하는데요. 그게, 연기할 땐 잊었었어요.”
답답한데 전혀 악의나 고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 순하고 착했다. 순하게 웃는 얼굴에 뭐라 할 수도 없고, 이상하게 불편해진 태주였다.
태주가 잠깐 생각에 잠긴 사이 은형이 자리를 비웠다. 주저하면서 무언가 말하려다 그냥 나가버리는 바람에 태주도 나갈 타이밍을 놓쳤다. 어쩔 수 없이 주인 없는 연습실에 남아 은형을 기다려야 했다.
‘어떻게 손님을 데려다 놓고, 아무 말도 없이 자리를 비우는 거지?’
십분 좀 넘게 기다리자, 은형이 숨을 몰아쉬며 다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커다란 봉투가 여러 개 들려있었다. 태주가 연습실에 여전히 있는 것을 본 그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것 좀 드세요.”
“이게 다 뭐예요?”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서요. 이거 인터뷰에서 좋아하신다고.”
십분 남짓한 사이에 뭐 이리 많이 사 왔는지. 태주가 좋아하는 밀크티부터 탄산수와 주스까지 음료수를 종류별로 하나씩 사 왔다. 다른 봉투에는 베이커리를 통째로 털어왔는지, 샌드위치부터 조각 케이크까지 다양한 빵이 들어있었다.
은형이 돌아오면 사람을 불러놓고 무례하지 않냐고 따질 생각이었던 태주는 얼결에 그가 건넨 음료수를 마시고 있었다. 뚜껑을 열어 건넨 음료수를 자연스럽게 마시다 놀란 그가 입을 떼자, 은형이 바로 샌드위치를 건네줬다. 샌드위치는 잡기 편하게 냅킨으로 싸여있었다.
이후로도 같은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끼니가 될만한 것들을 먹고 나자, 태주가 좋아하는 푸딩을 열어서 건네줬다. 후식까지 전부 먹고 나자 손을 닦을 물티슈를 건네줬다.
‘이 사람 뭐야? 뭐지?’
태주는 저도 모르게 은형의 시중을 받고 있었다. 은형이 그가 건네는 것을 받을 때마다 너무 기쁘게 웃어, 태주는 차마 그의 친절을 거절하지 못했다.
*
태주는 아침 일찍 샵으로 가고 있었다. 의상팀과 마지막 미팅을 하기 전에 헤어스타일링을 받으러 가야 했다. 이른 아침부터 가는 게 좀 걸렸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한 스타일이라는 설명에 수긍했다.
“김은형 씨랑은 괜찮았습니까?”
“김은형, 그 사람은 좀….”
“왜? 이상한 사람이야?”
“이상하달까요. 굳이 정의 내리자면 천적 정도면 될 것 같아요.”
태주는 제가 말해놓고도, 김은형을 설명하는 말로 천적이라는 단어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김은형이 하는 모든 행동엔 손톱만큼의 악의도 없었다. 그는 태주를 순수하게 배려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덕분에 태주는 자신이 친절한 사람에게 아주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상대에게 속절없이 휘둘린다는 것도 알았다.
“천적?”
“무서운 사람이었어요.”
그는 그날 있었던 일을 시간순으로 천천히 설명했다. 처음 카페에서 만난 일, 연기를 봐달라고 부탁받고 같이 연습실에 간 일 등을 말하며 당시에 당혹스럽게 느꼈던 것들을 얘기했다. 또 자신이 어어 하는 사이에 김은형의 친절함에 휘둘린 얘기도 빼놓지 않고 했다.
“친절로 사람을 휘두르는 건 처음 당해봐요.”
“호호. 조심해야겠다. 말로만 들어선 잘 모르겠는데, 네가 그런 쪽에 약한 건 알겠다.”
샵에서 오전을 다 보낸 태주는 치렁치렁 길어진 머리를 하고 의상팀과 미팅을 했다. 화려한 의상은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정상적으로 보였다. 단지 예전엔 국적을 알 수 없는 의상이었다면, 이번엔 성별이 모호한 의상이었다.
‘뭐 어쩔 땐 여장도 하는데 이 정도야.’
여러 사람이 붙어서 태주를 꾸며줬다. 장신구까지 모두 착용한 후에 몸을 움직여 본 태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떤 장신구인지 모르겠지만 움직일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 장식 중에서 소리 나는 걸 빼고 의상 점검을 마쳤다.
“이거 입고는 혼자서 물도 못 마시겠어요.”
의상팀의 의욕이 과한 것 같았다. 진짜 활옷도 아닌데 소매도 옷자락도 너무 길어 움직이기 쉽지 않았다.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나지 않게 움직이려면 동작에 주의해야 할 것 같았다. 태주는 배경이 2화 만에 바로 현대로 바뀌는 것에 감사했다.
“내일 2차 리딩이지? 내일은 윤비도 온다고 하더라.”
“이제야 다 모이네요. 오늘은 연습 좀 제대로 해야겠어요.”
새삼 의욕을 다지는 태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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