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63
62. 한 번의 도움 >
촬영장을 나서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태주의 표정이 풀어지지 않았다. 덩달아 견우의 표정도 굳어있었다.
의상을 반납하고 밴 쪽으로 먼저 와 있던 미나가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의아해했다. 좀 전 그녀가 분장실을 나올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그새 무슨 일이 생긴 건지 표정이 딱딱했다.
“무슨 일이에요?”
“춥습니다. 우선 밴에 타시지요.”
일행이 모두 탄 후에 태주가 윤비의 매니저와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다. 듣고 있던 미나의 입에서 삼키지 못한 욕설이 튀어나왔다.
“미쳤나! 별 거지 같은 것들이!”
“큼. 미나 씨.”
견우가 헛기침하며 그녀를 달랬다.
태주는 화르르 타오른 미나 덕에 화가 좀 식었다. 그렇게 진정되고 나니 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는지 궁금해졌다.
“그쪽은 무슨 생각으로 저한테 부탁했을까요? LT에 연기 선생님이 안 계실리 없을 텐데요.”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태주, 네가 우습게 보인 거 아니니? 안 그럼 지금 같은 때에 어떻게 그런 부탁을 해.”
“역시 그런 걸까요?”
출연진 중 막내라 그런가, 아니면 김은형을 도와주니 자신들도 부탁만 하면 도와줄 거로 생각한 건가. 만약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거야말로 오산이었다.
김은형을 도와주는 것은 그가 정말 노력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방향만 제시해주어도 혼자 고민하고 연습하고 몸에 익혀서 온다. 그렇게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돕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차라리 연기 연습을 돕는 게 마음 편해질 만큼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준다.
“아침에 리딩 할 때만 해도 그런 낌새가 없었는데. 거절하긴 했지만, 그 매니저분 정말 간절한 것 같았거든요.”
“또, 또. 김은형 한 명만 해라. 그러다 네가 연습할 시간도 없겠어.”
“흠흠. 알았어요.”
연기 연습은 주로 정원에서 하고 있었다. 덕분에 현실에선 본인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는 일이 많았다. 그런 모습이 주변에는 걱정스럽게 보였나 보다. 태주도 미나의 말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신경 쓰이긴 한다.’
미나는 괜히 자기 일 잘하는 태주를 타박했나, 슬쩍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태주는 연기자나 스태프하고 관계가 괜찮았다. 촬영도 성실하게 하고 주변에서 건들지 않으면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굳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했다.
“윤비 때문에 일정이 늘어질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잘 따라가고 있네. 촬영 밀린 것 없지?”
“어떻게든 그날 분량은 다 찍고 있어요. 이를 갈고 있다고 해야 하나? 트집잡힐 거리를 주지 않으려는 것 같아요. 무슨 일이 벌어질 때를 대비해서 주변을 정리해두는 느낌이랄까.”
태주의 대답을 들은 미나가 견우에게 일정에 변화가 있는지 물었다. 만약 변화가 없다면, 그의 말처럼 무슨 일이 정말로 벌어질지도 몰랐다.
“매니저님 촬영 일정 변경 없었죠?”
“네, 그대로입니다. 미나 씨도 원래대로 준비해 주시면 됩니다.”
기사도 나갔는데, 너무 미지근한 반응이었다. LT도 SBC도 아직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면 자신들의 역량을 과신하고 있다거나.
“미쳤나 보네. 기사까지 나갔는데, 신경도 안 써? 이게 뭐, 노이즈마케팅, 그런 거로 보이나?”
“곧 반응할 겁니다. 대응은 회사에서 할 테니, 저흰 저희 일만 하면 됩니다. 태주 씨도 촬영만 신경 쓰십시오.”
“네, 그럴게요.”
트리즈와 박지헌의 소속사에서 SBC 출연거부를 한다고 하지만, 바로 효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인 효과는 시간이 더 지난 후에 SBC 출연 계약이 여러 차례 무산되고, 양사의 배우들이 다른 방송국의 프로에만 출연한 후에야 볼 수 있다.
그래서 지금도 향후 SBC 출연거부라는 방침을 받은 박지헌도 촬영은 열심히 하고 있었다. 홍보나 그런 부분에 얼마나 협조할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계약서상의 협조는 할 것이다. 그러니 태주도 지금은 촬영에만 신경 쓰는 것이 맞았다.
*
집에 돌아왔지만, 아무래도 윤비 매니저의 부탁이 신경 쓰였다. 이미 거절한 일을 되돌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연기 준비도 안 해오고 매번 예의 없게 구는 사람을 도와줄 마음도 없었다.
다만 작품의 완성도가 걸렸다. 이미 편성도 받은 작품인 데다, 투자도 광고도 제대로 들어오고 있었다. 차라리 엎어질 거면 신경을 끊을 텐데, 꾸역꾸역 촬영 일정도 맞추고 있었다.
“여러모로 마음에 안 드네.”
“뭐가요?”
“응? 아, 촬영. 골칫거리가 하나 있어서.”
“윤비요? 기사에서 봤어요. 도깨비 무사 촬영현장 얘기 맞죠?”
“어, 맞아.”
태주는 혼자 골치 아픈 것보다 그냥 연우에게 얘기하고 털어버릴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아침에 촬영장에서 봤던 윤비의 모습과 그 매니저가 도움을 부탁했던 얘기도 했다.
가만히 그의 얘기를 듣던 연우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전 정말 앞이 캄캄했어요. 뭘 해야 할 지도 뭘 할 수 있는지도 몰랐어요.”
“연우야.”
“전 그래도 형을 만나서 도움을 받았잖아요. 그 전엔 정말,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단 한 번만 누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매일 바랐어요.”
“….”
“고마워요, 형. 형 아니었으면 전….”
태주는 손을 들어 연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제가 한 말이 부끄러운지 연우의 목덜미가 빨개졌다. 그래도 다른 곳으로 피하지 않고 얌전히 태주의 손길을 받고 있었다. 이 이상 머리를 쓰다듬었다간 연우의 얼굴이 다 익어버릴 것 같았다.
태주는 마무리로 톡톡 머리를 가볍고 도닥여 주고 손을 내렸다. 그러자 연우가 바로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연우는 때때로 불안한 표정을 했다. 가끔은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 있어도 되는지 묻는 것처럼 떨리는 눈으로 볼 때도 있었다.
되도록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자주 같이 시간을 보내는 태우는 쉽게 알아차렸다. 태우의 말을 들은 후, 주의해서 보다 보니 그도 연우의 상태가 나쁠 때는 바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은 줄었지만, 같이 지내게 된 초기에는 자주 그랬었다.
그런 연우가 해준 말이라 그런지 더 가슴에 와 닿았다.
“한 번이라. 그거면 되려나.”
귓가에 조세라의 욕설이 퍼지는 것 같았다. 조금 소름이 돋았지만, 알려지지 않게 도울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니 괜찮을 것이다.
아니, 꼭 괜찮아야 한다. 그는 정말 그녀가 가진 정체를 알 수 없는 대본의 상대역을 하고 싶지 않았다.
회귀 전 조세라와 같이 작품을 했었다. 프라이드가 높고 그 프라이드만큼의 실력을 갖추려 노력하는 그녀는 충분히 멋진 배우였다. 하지만 그렇게 느끼는 것과 별개로 그녀의 대본은 아주 별로였다.
그녀가 직접 제작한 게 분명한, 온갖 욕설의 향연이 벌어지는 대본은 읽기는커녕 손도 대고 싶지 않았다.
*
윤비의 매니저가 서울 근교의 사람이 없는 카페에서 만나자고 얘기했지만, 태주가 거절했다. 바쁜 촬영 스케줄 때문이 아니더라도 윤비를 위해 그런 수고를 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매니저님은 이런 자리가 만들어진 자체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윤비와 그 매니저를 만나기 위해 태주가 직접 교외까지 간다고 했다면, 반응이야 뻔했다. ‘거절하시죠, 태주 씨.’였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렇게 도와주셔서 뭐라….”
“잠시만요. 말 끊어서 죄송하지만, 정확하게 짚고 넘어갈 게 있어요. 윤비 씨가 좋다거나 무언가 바라서 이 자리에 나온 건 아니에요. 바라시는 도움이 제가 드릴 수 있는 것보다 크다면 거절할 생각이고요.”
“네, 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입장이 입장이라 저자세로 나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지나치게 저자세였다. 게다가 같이 나온 윤비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윤비 씨는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럼 없었던 일로 할게요.”
“아, 아니에요!”
“엇, 네.”
‘깜짝이야. 이 사람은 또 왜 이러는 거야?’
태주가 불쾌함을 드러내며 일어서려 하자 윤비가 큰 소리를 냈다.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은 사실이었던 듯, 절박한 표정이었다.
“정확하게 어떻게 도와드리길 바라는 거세요?”
“연기를….”
“후우. 그러니까 어떤 부분이요. 이미 촬영 한참 했잖아요. 이제야 배역연구를 도와달라거나 하는 소리를 하신다면 일어날 거예요.”
“어, 어?”
‘뭐야? 진짜야? 이제야 배역을 연구하겠다고?’
옆에 앉은 견우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설마 이렇게나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촬영하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허! 농담은 아닌 거죠?”
“…네.”
‘미친 거 아니야? 그랬으면 출연을 거절했어야지. 이게 무슨 민폐야.’
태주는 입술을 사리 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저도 모르게 욕설을 뱉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상태가 참.”
“…죄송해요.”
“사과하지 마세요. 사과받을 생각 없어요.”
“….”
윤비의 매니저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사태에서 뭘 가리세요. 얘기해보세요.”
“변명입니다만, 윤비도 연기 준비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기 선생에게 배운 게 이상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연기라며 지문을 무시하게 하거나, 얼굴이 예쁘게 나오는 자세로 움직이는 것들만 배웠다고 합니다.”
“쯧, 그건 변명이 될 수 없습니다. 확인에 소홀했던 건 그쪽 책임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희가 허술했습니다. 다만 오해하시는 점이….”
윤비의 연기 선생이 정말 그런 소리를 했을까 싶은 얘기가 이어졌다. NG 내면 사과하느라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다음 촬영을 시작할 수 있게 얌전히 있으라 하고. 신인 배우는 감독이 괜히 NG를 내면서 트집을 잡으니 자기가 알려준 대로 연기를 하라거나, 기선제압을 해야 촬영이 편해진다며 스태프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게 한 것들을 얘기했다.
‘그 말대로 따른 게 이상한 거 아닌가?’
태주 일행이 못 믿는 눈치이자, 윤비의 매니저가 알아본 사실을 말했다.
“일부러 윤비를 망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알아보니 예전에 아이돌에게 배역을 몇 번 뺏긴 적 있었습니다. 그 일로 앙심을 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을 구하면서 그런 것도 확인 안 합니까? 자기 연예인을 맡길 사람인데, 주변 평판이나 됨됨이는 확인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 점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에게 추천을 받았던 것이라….”
말을 아끼는 걸 보니 숨겨진 사연이 더 있는 것 같았다.
윤비의 매니저가 장황하게 말을 늘어놓은 의도는, 윤비가 처한 환경이 그만큼 좋지 않으니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요. 도와드릴 테니까, 다시 말해보세요. 어떻게 도와드리길 바라시죠?”
“아니, 그게….”
“연기의 기초부터 하나하나 가르쳐달라는 건 아니겠죠?”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저희가 연기에 대해 아는 게 없어서.”
‘악!’ 태주는 속으로 악을 지르고 있었다. 답답해 미치기 직전이었다. 평소 그는 요구사항을 정확하게 얘기한다. 애매한 표현을 써서 일 처리가 늦어지거나 질문이 여러 번 오가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견우가 태주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웬만해선 제 몸에 손을 대는 일이 없는 그가 자신을 토닥이며 달래주는 걸 보면, 그가 보기에도 상황이 썩 좋지 않았나 보다.
“후우. 윤비 씨는 앞으로 연기를 계속할 건가요?”
“무슨 뜻이신지?”
“이 작품 끝나고 또 다른 작품에 들어갈 거냐고요.”
“아니요! 절대 안 해요.”
윤비의 태도 중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앞으로 연기를 절대 하지 않겠다는 대답이 마음에 들어 조금 너그럽게 대하기로 했다.
“흉내 내기 아시죠? 그대로 따라 하는 거요.”
“네.”
“윤비 씨 배역을 제가 연기해서 영상으로 드릴게요. 그거 보시고 그대로 따라 하세요. 따로 지도는 못 해드려요. 그 정도까지 시간을 낼 수는 없어요.”
“…그걸로 될까요?”
태주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 사람들이 지금 뭘 얼마나 더 바라는 건지. 너그럽게 대해주기로 한 건 취소다.
“지금 그럼 뭘 얼마나 더 배우시게요? 그럴 실력이나 돼요? 기본도 없는 사람이 바라는 게.”
“태주 씨!”
날카로운 말을 뱉기 시작한 태주를 견우가 말렸다. 시기적절하게 말리지 않았다면 더한 말이 나왔을 것이었다.
“태주 씨가 윤비 씨 배역을 연기해서 전해 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건지 아십니까? 차라리 말로 몇 마디 알려주는 게 쉬운 겁니다.”
“아뇨, 아뇨. 오해하지 마세요. 저희가 뭘 몰라서 그러는 겁니다.”
“본인 배역도 아니고, 남의 배역을 연구하고 연기한 걸 교보재로 전한다는 겁니다. 들이는 시간도 노력도 무시할 수 없는 겁니다.”
“네, 네.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정말 연기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
몇 번 더 사과를 받고 헤어졌다. 태주는 괜히 도우려 나섰다고 잠시 후회했다. 한 번 만이라도 도와주길 바랐다는 연우의 얘기가 아니었다면 진즉 자리를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요. 대본은 뭐, 이미 다 외우고 있고. 윤비 씨가 하도 NG를 내는 바람에 확인차 윤비 씨 배역도 연기해 본 적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얼마나 어려운 장면들이길래 저렇게 NG를 내나 궁금했거든요. 그리고 솔직히 직접 가르치면 한두 시간으론 답이 없어 보여서요. 앞으로 연기를 계속할 사람도 아니고, 이 정도 도움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해요.”
“맞는 말입니다. 사실 오늘 같은 일은 거절하셨으면 하는 게 제 솔직한 바람입니다. 일 처리도 처신도 제대로 못 한 주제에 바라는 게 지나치게 컸습니다.”
“모르니까 할 수 있는 부탁이었죠. 매니저님 작품 끝나면 윤비 씨한테 넘길 영상 지우는 일 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이번 일에 관한 비밀 서약도 받고, 어기면 법적 소송도 각오하라 경고할 생각입니다. 그쪽과 같이 거론되는 건 저희 쪽도 바라지 않는 일입니다.”
태주는 이걸로 제발 윤비의 연기가 나아져 촬영이 순탄하게 끝나길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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