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93
92. 주연배우가 할 일 >
첫 리딩을 마친 후, 작가와 감독은 맥주를 한 캔씩 들고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리딩에 대해 나눌 얘기가 많았다. 하지만 둘 다 입을 여는 게 힘들었다. 입을 열면 못난 소리만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최 감독은 그래도 연장자인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게 낫겠다 생각했다.
“우리 참 못났다.”
“그러게요.”
“내가 감독인데…. 미안해, 박 작가.”
“아니에요, 누님. 솔직히 저도 할 말 없어요. 그나마 태주 씨가 나서줘서 다행이었어요.”
두 사람 모두 자신들 대신 태주가 나서주었다는 것을 안다. 사실 그가 나섰다기보단, 자신들이 등을 떠밀어서 못 이기고 나서주었다.
“괜히 주연을 맡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우리보다 열 살은 어린데. 시선을 모으는 것도 그렇고, 자연스럽게 분위기를 바꾸는 것도 그렇고. 대단했어요.”
“확실히 대단했지. 박동진 배우도 태주 씨가 나서니, 아무 말 안 하더라.”
“박동진 배우. 후우. 그분, 참.”
박동진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은 비슷했다. 말투도 태도도 마음에 드는 구석은 손톱만큼도 없는데, 맞는 말만 하고 있으니, 욕하기도 뭐했다. 분명히 태도는 잘못되었는데, 연기 준비는 가장 열심히 해왔다.
“아으! 진짜! 진상도 그런 진상이 없는데. 왜 또 준비는 그렇게 잘해와서!”
“크흠. 특이하긴 하셨어요. 선생님이 박동진 배우 섭외된 거 보시고 차라리 잘 됐다 하셨었어요. 저는 솔직히 그게 무슨 소린가 했었거든요. 근데 오늘 보니 알겠더라고요.”
“이정임 선생님이 뭐라 하셨었어?”
박 작가는 이정임이 출연진 리스트를 보고, 이 작품을 무사히 찍으면 앞으로 어떤 배우랑 해도 편할 거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으아! 선생님은 이 사태가 될 걸 아셨구나.”
“그러신 것 같아요.”
“에효. 만약 태주 씨가 아니라, 그 왜? 처음에 제작사에서 밀었던 배우 있잖아. 그 사람이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편성 밀렸죠, 뭐.”
신조선 사또 전은 태주가 주연으로 계약한 후에야 편성을 확정 받았다. 그 전까지 얼마나 속을 태웠던가. 그들에겐 사실 태주가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제작사에서 밀던 주연배우에 있었다. 그가 주연이 되면 투자를 받기로 했는데, 무산되는 바람에 제작비가 줄어버렸다. 그때문에 섭외한 배우들의 급이 낮아졌다.
보다 못한 작가와 감독, 둘이 제작사에 찾아가 지역 유지 역할만이라도 중견 배우를 섭외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가 박동진이 난리 친 오늘의 리딩 현장이었다.
“편성과 제작비 중에 뭘 고를 수 있겠어요.”
“그렇지. 그 배우 썼으면 편성은 못 땄지. 뭐, 편성 따고 투자는 나가리 됐지만.”
“돈 많은 사람이니 어쩜 편성도 받았을지 모르죠.”
“아니. 그건 받아도 문제야. 도저히 편집으로도 가망이 안 보였어.”
오늘 리딩에서 태주를 보고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 배우를 썼다면 끝까지 촬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자신들뿐 아니라, 같이 촬영하는 배우들이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제! 너를! 여기서 봤다! 는! 큭. 아, 힘들어.”
“푸하하. 누님. 그거 그 사람 흉내에요?”
“어. 뭐 이리 흉내 내기도 힘드냐.”
한바탕 웃고 나니 답답했던 것이 좀 풀렸다.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얘기를 나누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늘의 추태는 다음 리딩에서 반드시 만회한다.”
“힘냅시다. 마셔요. 마시고, 잘 해봐요.”
두 신인 감독과 작가는 술기운을 빌어 의기를 다졌다. 다음 리딩에선 감독과 작가의 권위를 제대로 보여 주겠다고, 여러 차례 다짐했다.
“두 자릿수. 딱 10%만 넘기자, 우리.”
“그 전에 리딩 먼저 잘 넘겨요. 무슨 김칫국을 사발로 들이켜요. 드라마는 아직 찍지도 않았구먼.”
“아니야. 지금부터 입에 달고 있어야 해. 내가 어서 들었는데, 원래 사람 말에는 힘이 있어서….”
“아, 이 누님. 또 뭘 이상한 걸 듣고 와선.”
*
술자리에서 의기를 다진 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대갓집 집사 역을 맡은 배우가 출연을 고사했다. 개인 사정이라고 얘기했지만, 누가 봐도 박동진에게 깨지고 때려치운 모양새였다.
작가와 감독, 두 사람은 피가 마르는 것 같은 심정을 느꼈다. 촬영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다시 배우를 구하고, 그 배우가 준비될 때까지 일정을 바꿔줘야 할 판이었다.
“태주 씨네 소속사에서 끼워팔기 같은 거 안 해주나?”
“감독님, 미쳤어요? 트리즈 배우 한 명 회당 출연료가 우리 편당 제작비 반이 넘을 텐데.”
“답답하니 그러지. 어디 쓸만한 배우 없어?”
“있긴 한데, 문제가 좀 있어요.”
뜸 들이는 박 작가를 닦달하는 손길이 매서웠다. 당장 쓸 배우가 있는데 왜 말을 안 하고 사람 애를 태우는 건지.
“대사 외우는 게 느려요. 연기는 잘하는데, 온종일 대본을 붙들고 있어도 한 페이지를 못 외워요.”
“그, 그래? 그런데 배우 일을 할 수 있어? 쪽 대본이라도 날아오면 어떻게 하려고?”
“연기는 잘한다니까요? 마임도 잘하고 목소리도 좋은데….”
박 작가는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다른 배우를 찾아보자고 얘기했다. 그 모습에 최 감독도 무슨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
두 번째 리딩 날짜가 돌아왔지만, 집사 역을 맡을 배우를 찾지 못했다. 제작사에서 뽑아준 리스트에선 도저히 고를 수 없었다. 캐스팅 담당자 때문인지, 출연료가 낮아서 그런 건지, 보는 족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후우. 나 떨고 있니?”
“언제 적 개그예요? 먼저 들어가요, 좀.”
배우 몇이 안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두 사람은 문 앞에서 망설였다. 집사 역 때문에 박동진에게 들을 욕설이 걱정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문밖에서 먼저 가라고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였다.
“빨리 안 들어와!”
“헛! 들어갑니다.”
두 사람은 문밖에서 망설이다 딱 걸렸다. 최 감독은 안에서 들려온 소리에 저도 모르게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교문 앞 학생주임처럼 딱 버티고 서있는 박동진과 마주쳤다.
“왜 어물쩍 대고 안 들어와? 죄지었어?”
“그, 그게요.”
“말은 왜 더듬어?”
“킥. 감독님, 선생님 나가시게 비켜주세요.”
“네? 네, 네네.”
“대답은 한 번만 해. 정신 사나워.”
작게 ‘네.’라고 대답한 최 감독이 박동진이 나갈 수 있게 문에서 비켜섰다. 옆에 있던 박 작가도 최 감독을 따라 잽싸게 비켰다. 그런 두 사람의 귀에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최 감독을 도와준 태주였다.
“두 분 왜 거기서 그러고 계세요? 들어오세요.”
“어훅. 태주 씨.”
“왜, 왜 이러세요?”
“태주 씨이.”
태주는 최 감독이 곤란한 것 같아서 가볍게 나섰다가 후회하고 있었다. 감독과 작가, 두 사람이 양쪽에서 그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기 때문이다. 당황한 태주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그의 팔에 매달렸다.
“이게 무슨 꼴이야? 어디 초상났어?”
“선생님.”
“한심하긴. 리딩 들어가기 전까지 해결해.”
두 사람을 떼어내지 못하고 쩔쩔매던 태주는 박동진이 반가웠다. 그는 박동진이 특기인 독설로 두 사람을 떼어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박동진은 태주와 그에게 매달린 둘을 보고 그냥 가 버렸다.
결국, 태주는 다른 배우들이 볼 새라 두 사람을 매달고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휴게실은 리딩 장소에서 좀 떨어진 곳이라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 이러세요?”
“어훅. 그게요. 집사 역할을 맡은 배우가 때려치웠어요.”
“그게 왜요? 다른 배우 구하시면 되잖아요. 아직 시간 있는데.”
“쓸만한 배우가 없어요.”
그렇다고 그게 이럴만한 일인가 싶었다. 태주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에 박 작가는 어쩐지 서러워져 코끝이 시렸다.
“으허헝. 내가 처음부터 그렇게 그 배우는 아니라고 했는데….”
“울지마, 박 작가. 미안해. 내가 확실하게 잘라야 했는데.”
“울지 마세요. 감독님, 좀 말려보세요.”
‘그리고 두 분 제발 절 좀 놔주세요.’
두 사람 사이에 낀 태주는 본인이 더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대체 왜 자신을 붙들고 안 놔주는 것인지. 그리고 왜 자신의 리딩은 매번 이 모양인지. 그 역시 두 사람 사이에서 울상을 짓고 있었다.
태주는 겨우 진정된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 음료수를 건넸다. 그러면서 대체 어떤 배우를 원하길래 그러냐며 물었다.
대갓집 집사 역은 원래 비중이 크지 않았다. 사또에게 증거품을 가져다주고 도망가는 역으로, 초반 몇 화에만 출연한다. 굳이 깐깐하게 배우를 고를 필요는 없었다.
“후우. 사실 집사 역이 문제는 아니에요.”
– 훌쩍!
“감독님 말이 맞아요.”
사실 박 작가가 운 것에는 집사 역 캐스팅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배우들에겐 말하지 못했지만, 제작사에서 방자역을 교체하려 하고 있었다. 지금 방자 역을 자르고, 태주 전에 사또 역을 주려던 배우를 방자로 쓰려 하고 있었다.
그 배우를 방자 역으로 쓰면 투자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사극이라 제작비가 많이 드는 데다, PPL도 받기 힘든 상황이라 제작사는 투자자의 제안에 이미 반쯤 넘어간 상태였다.
작가와 감독, 둘이 반대하고 있었지만, 제작사에서 언제 그 배우를 데려올지 몰랐다. 박 작가는 배우 한 명도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 하는 상황에 서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쌓인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태주의 눈치를 보며 서로 눈을 맞췄다. 혹시 방자 역할 교체를 막는 데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태주 씨, 혹시 이지명 배우라고 아세요?”
“이지명 배우요?”
“네. 혹시 아세요?”
“알죠. ‘위대한 기억’에 나왔었죠? 평균 1.6%였나요? 역대 최저 시청률 2위.”
태주가 수치까지 기억할 줄은 몰라서 두 사람은 깜짝 놀랐다. 하지만 만약 두 사람이 그가 떠올린 다른 수치를 알았다면 놀라는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회귀 전, 이지명의 신조선 사또 전이 2.0%로 역대 최저 시청률 8위였지. 대단하네. 최저 시청률 기록보유자야.’
작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지명의 이 름을 말하는 태주의 표정이 눈에 띌 정도로 좋지 않았다. 만약 제작사에서 방자 역할을 교체하면 집사 역과는 차원이 다른 여파가 생길 것 같았다.
“혹시 말이에요. 혹시 이지명 배우가 방자 역으로 같이 촬영하면 어떨 것 같으세요?”
“…전.”
“네, 네네. 어떠세요?”
“하차할 겁니다.”
“네에?”
생각보다 더 과격한 발언이었다. 태주의 하차 발언은 일반적으로 작가와 감독을 앞에 두고 입에 올릴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주는 경악한 두 사람을 향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박동진 선생님이 계신 촬영현장에 이지명 배우요? 누굴 말려 죽이시려고요?”
“헉!”
“으헉!”
두 사람의 머릿속에 미래의 촬영현장 모습이 그려졌다. 작가, 감독, 너나 할 것 없었다. 그곳의 모든 스태프가 숨도 편히 못 쉬는 상황이 두 달 내내 이어질 것이다. 벌써 귓가에 박동진의 고함이 울리는 것 같았다. 촬영현장을 상상한 것만으로도 위에 구멍이 날 것 같았다.
“두 분을 같이 출연시키겠다는 그런 끔찍한 말씀은 하지 마세요. 저는 평범하게 오래 살고 싶지. 욕먹으면서 수명을 늘리고 싶진 않아요.”
“그,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예요.”
“맞아요.”
태주는 생각대로의 반응이 돌아오자 만족했다. 지금은 박동진을 핑계 댔지만, 만약 정말로 이지명을 방자로, 자신의 파트너로 드라마를 찍어야 한다면 하차를 고려할 수도 있었다. 로봇보다 못한 연기력의 이지명과 16편을 내리 같이 촬영할 수 있을지는 그도 자신할 수 없었다.
*
작가와 감독은 집사 역할을 할 배우를 못 찾은 것은 이미 안중에 없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박동진과 이지명을 같은 촬영현장에 둘 수 없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은 리딩을 진행하면서도 그 생각을 머리에서 떨칠 수 없었다. 배우들 수십 명이 자신의 입만 지켜보는 상황도, 박동진의 따가운 눈길도 당장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리딩을 빨리 마치고 제작사 대표와 담판을 질 생각밖에 없었다.
“선생님, 지금은 좀 더 빠르게 치고 들어가셔야 해요. 사또가 의심하는 상황이라서요. 사또 시선을 양반을 해친 노비 얘기로 빨리 돌려야 하거든요.”
“알았어, 박 작가.”
첫 리딩에서 박동진 배우에게 말 한마디 하지 못했던 게 거짓이었던 것 같다. 박 작가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처럼 배우들의 실수를 잡아내고 수정을 요청했다. 2차 리딩은 1차와는 다른 의미에서 살얼음판 같았다.
“수고하셨어요. 다들 준비 잘하실 거로 생각해요. 아시다시피 저희 작품이 세간의 주목을 많이 받고 있어요. 오랜만에 제작되는 정통 사극이라서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시죠?”
“여기 그 뜻을 모르는 멍청이가 있겠어? 그런 멍청이가 있으면 데려와.”
“헉!”
“감사합니다. 선생님.”
박동진은 멍청이를 혼내주겠다고 나선 것뿐이었지만, 얼핏 들으면 마치 최 감독의 편을 들어준 것 같았다. 게다가 이어진 최 감독의 감사인사를 박동진이 부정하지 않았다.
리딩을 마치길 기다리던 배우들 사이로 긴장이 돌았다. 폭군 박동진의 지지를 감독이 받게 된다면 앞으로의 촬영이 절대 편할 것 같지 않아 보여서였다.
리딩이 끝난 후, 이번에는 박동진이 태주의 곁으로 왔다. 그는 태주의 어깨를 두드려주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했어?”
“예?”
“무슨 말을 했길래, 감독이랑 작가가 정신을 차렸냐고?”
“아! 아하하. 별말 안 했는데요.”
“어쨌는지 몰라도, 잘했어. 주연이 원래 그런 거야. 작감 고민도 들어주고 해야 해.”
“네.”
태주는 차마 박동진의 이름을 들먹이며 협박에 가까운 말을 했다는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방법이야 어떻든 작가와 감독이 제 역할을 해내서 만족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는 그를 들먹인 이야기는 앞으로도 절대 꺼내지 않겠다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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