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96
95. 활약하는 대표님 >
트리즈의 최 대표는 자신의 상상과 전혀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현실을 믿기 힘들었다. 재벌 3세로 사람을 압박하고 마음대로 조종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 자기가 알고 있는 누님이었다.
자신과 그녀가 벌인 말다툼 같은 건 친한 사이에나 하는 장난이었다. 만약 그녀가 제대로 밟기로 마음먹었다면, 배우 한 명 정도는 그대로 묻혔을 것이다. 물론 자신이 있는 한 자기 배우가 그런 일을 당할 일은 없을 테지만.
‘누님 아들은 앞이 아니라 옆자리요. 대체 이 배우를 언제 봤다고 아들 같다는 말이 나와요.’
“호호호. 이거, 이것도 들어요. 이 인삼말이가 좀 쓰지만, 요즘 같은 더운 계절에 딱 이에요.”
“네, 잘 먹겠습니다. 여사님도 드세요.”
“호호호.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먹어요. 어쩜 먹는 것도 이렇게 복스러울까.”
자신에겐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친절한 모습으로 태주를 챙겨 주는 누님과 그런 누님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고 상냥하게 받아주는 태주까지. 그 옆에서 불퉁한 얼굴로 밥을 먹는 이지명은 논외로 쳐도, 최 대표에겐 다른 의미로 불편한 자리였다.
일행은 직원이 테이블을 정리하고 차를 내려놓은 다음에야 차분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자리가 마련되고 대화의 포문을 연 것은 이지명이었다.
“남의 배역 가로채더니, 촬영 열흘 전에 때려치워요? 이렇게 경우 없는 짓이 어디 있어요?”
“네?”
– 짝!
“악!”
“뭐? 경우 없는 짓? 경우 없는 짓은 지금 네가 하는 거고.”
“아! 엄마!”
최 대표는 눈앞에서 벌어진 일에 입을 떡 벌렸다. 그녀가 자기 아들을 철없게 여기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밖에서 그런 티를 내는 것은 본 적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아들의 등 짝을 남들 앞에서, 그것도 원래라면 협박이든 회유든 해서 드라마에 다시 출연시키려던 사람 앞에서 찰지게 때리고 있었다.
“호호호. 얘가 하는 얘기는 못 들은 것으로 하세요. 워낙 철이 없어서.”
“허.”
어이없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낸 ‘허.’ 소리를 들었는지, 그녀의 눈이 쫙 찢어졌다. 매서운 눈초리에 최 대표는 살짝 움츠러들고 말았다.
“출연 준비한다고 고생했을 텐데, 미안해요. 이 녀석이 억지를 부려서.”
“엄마! 그건 원래 내가….”
“이지명!”
그렇지 않아도 억지 부탁을 들어주게 한 최 대표에, 실질적인 피해를 본 당사자를 만나는 자리였다. 굳이 따라오겠다는 말에 입도 뻥긋 안 하는 조건으로 데려왔는데, 시작부터 헛소리였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이태주 배우님 나가고 편성에서 빠질 위기에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배우님이 죄송하실 일은 없죠. 애초에 문제는 다른 데 있으니까요.”
“누님. 왜 이러세요?”
“내 말이. 엄마 왜 이래?”
낮게 닥치라는 말이 실내에 울렸다. 최 대표는 저 말이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들인 이지명을 향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조용히 입을 닫았다.
“드라마 다시 하세요.”
“네?”
“얘가 문제 일으킬 일은 없을 거예요.”
“엄마!”
그녀는 이지명은 화면에만 나오면 된다면서 대사를 줄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태주는 그녀의 말에도 선뜻 다시 하겠다는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후우. 누님. 쟤는 대사만 문제가 아니야. 전부 다 못해. 연기고 나발이고 그냥 공부나 시켜요.”
“최 대표!”
“지금이야 한 작품 말아먹은 게 다지. 얘가 이번에도 말아먹으면 무슨 소리 나올 줄 알아요? 믿고 거르는 이지명이라는 말이 나올걸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슨 말은. 너 연기 못한다는 소리야. 안 봐도 네가 드라마 말아먹을 거란 뜻이다.”
태주는 최 대표의 적나라한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고 친분이 있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말을 막 할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아아. 대표님도 재벌 3세였지.’
그렇다 해도 역시 최 대표라는 생각을 했다. 트리즈에 속한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최 대표의 눈이 얼마나 높은지, 배우를 고르는 그의 안목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지명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뻔했다.
“얘 단속할 사람도 붙여드릴게요.”
“예?”
“엄마!”
“전 실장이라고 있어요. 얘가 문제 일으키면 바로 나한테 연락하도록 조치해둘게요.”
“전주영 실장? 내가 아는 그 전 실장? 그런 인재를 얘한테 붙인다고요?”
그래도 발 연기라 안 된다며 최 대표가 판을 깨는 소리를 했다. 그런 그에게 그녀가 이를 악물고 연기 수업도 받게 하고 감독의 지시도 성실히 따르게 하겠다고 말했다.
“누님, 내가 솔직하게 말을 할게요. 얘는 그냥 공부를 시켜요. 정 연기가 하고 싶으면, 어디 입봉 못한 감독 한 명 고용해서 모노드라마를 찍어요. 괜히 남한테 피해 주지 말고. 아니지, 그 감독은 또 무슨 죄야.”
“최 대표! 도와줄 거 아니면 좀 닥쳐.”
“큭, 크크 으흠. 여사님 진정하세요. 대표님도요.”
태주는 두 사람의 말다툼을 듣다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래도 너무 과열된 듯한 두 사람의 반응에 나서서 말리기 시작했다.
이지명은 그런 두 사람 곁에서 입만 벌리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자신을 깎아내리는 최 대표도 그런 그에게 자신을 두둔해주지 않는 엄마도 야속했다.
“… 할아버지.”
“할아버지 같은 소리 한다. 그 손가락 놀리는 순간 러시아로 보내버릴 거니까, 어디 한번 눌러봐.”
매번 징징대며 그룹 회장인 제 할아버지에게 달려가는 막내아들이 못마땅한 그녀였다.
자기 드라마에 투자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고 들어주었다. 하지만 업무상 일도 아닌, 철없는 아들의 취미를 위해서 지인에게 빚을 지는 일이 달가울 리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는 상대가 최 대표 배우라 대리인이 아닌 자신이 나온 것이 불편했었다. 가자미눈을 뜬 그녀의 화가 섞인 협박이 다시 이어졌다.
“왜? 왜 안 눌러? 넌 네 할아버지한테 전화해. 엄마는 네 형한테 전화할 테니까.”
이지명은 폰을 든 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러시아. 그가 가족 중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큰 형이 사업차 머무르는 곳이었다. 그는 지금 이게 마지막 경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더 떼를 쓰면 정말로 자신을 러시아행 비행기에 태울 것이다.
태주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그는 내심 오늘 이 자리가 상당히 불편할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전혀 아니었다.
성덕 여사님도 이지명도 그가 알던 모습과 달랐다. 여사님은 철없는 아들 때문에 피곤한 어머니였고, 이지명은 그냥 떼쟁이였다.
“최 대표, 도저히 안 되겠어?”
“단역부터 시작해요. 단역부터. 외모는 좋아요. 그런데 그게 끝이에요. 누님 이쪽 보세요. 그리고 옆에 봐봐요. 느껴져요?”
“…어휴.”
“원래 그래요. 누님도 연예인 많이 봤잖아요.”
태주와 이지명을 번갈아 보게 시킨 최 대표가 우리 배우 옆에 굳이 누님 아들을 붙여서 비교당하게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듣고 태주는 속으로 최 대표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취소했다. 좀 전의 말은 사람을 수치사 시킬 생각이 아니라면 대놓고 하긴 너무 부끄러운 말이었다.
“보셨죠? 지명이는 배우 할 재주 없어요. 차라리 제작사 대표를 시켜요.”
“응? 최 대표, 지금 뭐라고?”
최 대표는 태주의 속마음은 모른 채, 그가 생각했던 것을 풀어놨다. 대본이나 배역을 골라내는 이지명의 눈썰미가 괜찮다는 얘기였다.
“전작 ‘위대한 기억’도 내가 어제 대본 쫙 봤거든요. 영상은 도저히 못 봐주겠는데, 대본은 좋았어요. 이번 신조선 사또 전도 대본 아주 좋아요. 얘는 대본 고르는 쪽으로는 확실히 소질이 있어요.”
“그래?”
“사또 전 전에 접촉했던 작품들도 보면, 시청률이 괜찮아요. 내가 오늘 이 얘기는 꼭 해줄 생각이었어요. 쓸데없는데 투자하지 말고 차라리 제작사를 하나 차리라고요.”
“흐응. 그렇단 말이지.”
태주는 최 대표의 말을 듣는 두 모자를 흘깃 봤다. 여사님은 확실히 그쪽으로 관심이 기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이지명은.
‘귀가 얇은 타입이구나. 넘어갔네.’
최 대표가 슬슬 시동을 걸었다. 그는 이번 기회에 사기꾼 하나 치운다는 생각으로 신조선 사또 전의 제작사 얘기를 꺼냈다.
“후우. 솔직히 이번에 우리 이 배우가 제작사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내가 지금까지 우리 배우들 데리고 작품을 많이 했지만, 이렇게 무례한 곳은 처음이에요.”
“왜? 어땠는데?”
“아니, 어떻게 주연 배우한테 말 한마디 없이 같이할 배우를 바꿔요? 아무리 우리 배우가 어리고 착해도 그렇지, 사람들이 참. 이렇게 우리 배우를 무시하다니….”
“누굴 무시해? 이 배우님을?”
“아! 그러고 보니 지명이가 들어가서 좋은 점도 있겠네요. 예산이 똑바로 쓰였는지 현장에서 바로 알 수 있잖아요. 누님도 잘 아시겠지만, 이쪽 업계에 사기꾼이 워낙 흔해요.”
최 대표의 옆에서 태주가 고개를 크게 끄덕여 동의했다. 제작사의 반이 사기꾼이었다. 아니 사기를 치고 싶지 않아도 작품을 말아먹으면서 사기꾼이 되고 마는 일이 흔했다.
최 대표는 배역 교체 문제를 시작으로 제작사 대표가 신인 작가와 감독을 어떻게 대했는지, 두 사람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 조금씩 이야기를 풀어놨다.
그리고 제작사에서 주로 투자자의 돈을 유용하는 부분을 과장을 섞어서 얘기했다. 지금 제작사 얘기는 아니라면서 의심이 들도록 살살 얘기를 흘렸다.
“지명이 네가 고생해라. 감독도 작가도 제작사에 많이 시달려서 예민할 거야. 네가 주연이니 많이 도와줘.”
“네, 네? 내가 주연이요?”
“원래 네가 하기로 했었다며. 잘 해봐.”
“어, 아니, 원래 그러….”
이지명을 정신없게 만든 최 대표는 조용히 생각에 잠긴 성덕 여사를 방해하지 않고 태주를 데리고 일어났다. 성덕 여사는 둘이 자리를 벗어날 때까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태주는 대표를 다시 봤다. 처음 자신을 데려올 때는 선택을 전부 넘길 것처럼 얘기하더니, 어느 순간 나서서 대화를 주도했다. 거리끼는 것 없이 하고 싶은 말을 다 꺼내더니, 화두를 툭 던져두고 먼저 일어났다.
“크크크킄. 이 배우 그 누님 표정 봤어요?”
“네.”
“제작사 대표 양반 피 좀 마르겠어요. 그 누님네 법무팀이 좀 깐깐해야지.”
최 대표는 제작사 대표가 투자받은 돈의 1원도 빼돌리지 못할 거라면서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누님이 원래 저렇게 억지스러운 사람이 아니에요. 지명이 할아버지가 애를 너무 오냐오냐해서 어쩔 수 없어요. 사실 누님 아니면 그분 막을 사람도 없어요.”
그는 어쩌면 곧 괜찮은 제작사가 하나 생길지 모른다면서 기대하라고 얘기했다.
그러면서 태주에게 줄 게 있는데 태산이를 언제 사무실로 데려올 건지 물었다. 요새 새로 출시된 용품이 많다면서 은근히 태산이를 데려오라고 눈치를 줬다.
*
태주는 우 팀장의 호출에 회사 사무실로 나갔다. 그녀는 태주에게 다시 한 뭉텅이의 대본을 넘겼다. 그가 신조선 사또 전에서 하차한 것이 알려지자마자 들어온 대본들이었다.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는데 벌써 산처럼 쌓였다.
“이 배우님 이쪽은 제가 추천하는 거예요. 호호호.”
“팀장님, 왜 이렇게 기분이 좋으세요?”
“호호호.”
대본을 챙기면서 태주가 이유를 물었지만, 그녀는 그저 웃기만 했다. 그는 한 번 더 이유를 물으려다 그녀의 기분을 망칠까 그냥 두었다. 만약 그가 알아도 좋을 소식이라면 견우가 알려줄 것이다.
그리고 태주의 예상은 맞았다. 견우가 태주를 바래다주면서 소식을 들려주었다.
“편성에서 아예 빠진 건 아니라니 다행이에요.”
“맞습니다. 시기는 3월로 밀렸지만, 빠진 것보단 낫습니다.”
“박동진 선생님은 어떻게 하신대요?”
“듣기로는 작감 두 분이 붙잡고 매달리셨다고 합니다.”
“네? 두 분이 박동진 선생님께요?”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박동진을 무서워하던 두 사람은 제작준비를 처음부터 다시 하게 되자, 제일 먼저 그를 찾아가서 매달렸다. 두 사람이 매달리는 것을 못 견딘 박동진은 결국 드라마에 다시 합류했다.
두 작감은 생각보다 제대로 된 동아줄을 잡았다. 박동진이 성격은 못됐지만, 쌓아온 경력은 진짜였다. 만약 사극에 익숙한 촬영 감독이나 미술감독이라도 소개받는다면 작품을 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제작사는 신조선 사또 전이 밀리면서 대타로 넣을 작품을 급하게 찾게 된 방송국 사람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제작사 대표는 처음에 감독과 작가만 보내서 사과하고 입을 닦으려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누군가에게 듣고 알게 된 투자자가 나섰다. 투자자는 제작사 대표가 직접 방송국을 돌며 사과하게 하고 선물도 돌리게 했다.
그 덕분에 신조선 사또 전에 아주 깐깐한 투자자가 붙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투자자가 예산부터 집행까지 하나하나 확인한다는 얘기도 있었다.
*
전 실장은 자신이 모시는 이사님이 내린 지시를 수행하면서 먹고 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막내아들 뒤치다꺼리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할 만했다. 하지만, 최근 이사님의 지시는 굳이 자신이 할 필요가 있나 싶었다.
‘검색만 하면 나오는 사진을 액자로 만들어서 걸어둘 필요가 있나? 하여간 부자들은.’
그녀는 얼마 전에 전시관처럼 리모델링 한 집의 벽 한쪽에 액자를 걸었다. 그 후 방 중간에 자리한 유리관의 먼지를 닦았다. 유리관 안엔 성별을 알아보기 힘든 화려한 전통 의상이 있었다. 장신구 하나까지 빠뜨리지 않고 꼼꼼하게 진열해 두었다.
이런 소품을 구하는 일은 전 실장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가장 힘든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아듣기 힘든 게시판의 글을 요약해서 이사님에게 보고하는 일이었다.
“댕청미 커여워 아파트 뿌셔! 이게 대체 무슨 말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