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venly Demon Can’t Live a Normal Life RAW - chapter (609)
609화 출병(出兵) (8)
세 번의 삶.
단 하나의 검법.
로만 드미트리는 삶의 밑바닥에서 정점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 마계를 정벌하고 새로운 세상에 도달한 지금도. 천마검법을 발전시켜 왔다.
오래전에는 분명히 상식의 수준에서 발휘되던 천마검법이, 천의 경지를 넘어 신의 경지에 도달하는 순간 불현듯 하나의 의문이 떠올랐다.
‘검(劍)이란 무엇인가.’
근본적인 의문이었다.
매일같이 피땀을 흘려 가며 강하게 움켜쥐고 있는 이 검을 통해서, 자신은 대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가.
한때 무림에서 검선이라고 불리던 인물은, ‘검’은 단순한 매개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어떤 무공을 익히든 만류귀종(萬流歸宗)의 이치에 따라 같은 도착점에 도달하며, 그때는 검의 형태를 초월하여 무공을 통해 본인이 원하는 의지를 관철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말인즉.
검선이 말하는 매개체는 의지의 발현이었다.
어떤 무기를 사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발현되는 의지를 강조했다.
그리고 얼마 뒤.
검선은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의 행방불명에 말이 많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검선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고 우화등선(羽化登仙)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자하고 신선다워 검선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나,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내뱉는 말과 행동에는 인간으로서의 미련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중혁은.
아니, 로만 드미트리는.
검선과는 생각이 달랐다.
그조차 도달하지 못한 까마득한 경지에 오른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단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검은 살생(殺生)을 위한, 내 목적을 가장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무기다. 내가 검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경지로 구분되는 성취가 아닌, 눈앞에 존재하는 적을 단번에 베어 버릴 힘. 나는 그것이면 족하다.’
목적에 충실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삶의 밑바닥에서 검을 처음 잡았을 때처럼, 로만 드미트리는 그때와 똑같이 검을 대했다.
의지가 검에 녹아들었다.
볼피르를 상대로, 자신과 드미트리의 세상을 갈라놓은 존재를 상대로. 정말 대단한 검법을 발현해 본인의 우월함을 표출하는 것이 아닌, 오로지 그를 죽여 버리겠다는 단 하나의 목적에 집중했다.
‘지금부터 눈앞의 존재를 죽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어떤 깨달음을 통해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우월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신의 경지에 도달한 로만 드미트리는 검으로 최대한으로 낼 수 있는 파괴력을 바랄 뿐이었다.
상대가 절대자든, 아니면 신이든. 그 누구라도 절대 자신을 막아 낼 수 없도록 파멸적인 힘을 분석하고 손아귀에 넣었다.
팟.
콰르르르르르르릉.
땅을 박찼다.
볼피르의 표정은 자신만만했다.
동족을 넷이나 흡수한 그는 존재감을 부풀렸고, 로만 드미트리를 찢어발길 수 있다는 확신을 보였다.
천마군림보를 밟았다.
동시에.
‘천마검법 전반부 일초식.’
콰앙!
파파파파파파팟.
격렬하게 부딪혔다.
땅을 내딛는 발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분출되는 힘에, 볼피르는 밀리지 않겠다는 듯이 정면에서 맞닥트렸다.
서로 부닥칠 때마다 엄청난 폭발이 일었다.
볼피르는 천마검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막아 내면서, 검은 마력으로 일렁이는 손톱을 휘둘러 오히려 상대의 틈을 노렸다.
두 번째 걸음.
‘천마검법 전반부 이초식.’
번뜩.
콰르르르르르르릉.
“겨우 그딴 공격에 내가 당할 것 같으냐!”
천마군림보.
천마검법이 반복되었다.
조금 전보다 더 강렬한 힘이 휘몰아쳤지만, 볼피르는 광오한 웃음을 터트리며 로만 드미트리를 밀어붙였다.
온몸에 파멸적인 힘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애초에 동족들을 버리고 그들을 모두 먹어 치웠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아쉬움이 생길 정도였다.
사실.
크게는 상관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파악하는 그는, 지금으로도 완전무결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걸음.
전반부 삼초식, 중반부 일초식, 중반부 이초식.
로만 드미트리의 힘이 폭발적으로 증폭되었다.
상대와의 공방에 단 한 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으며, 로만 드미트리는 살의(殺意)로 번들거리는 눈빛을 보였다.
목적에 충실했다.
강력한 검법.
강력한 무공.
상대를 죽이기 위함이다.
서로 격렬하게 뒤얽히면서도, 상대의 허점을 찾았다.
팟.
피가 튀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얼굴에 생채기가 생기는 순간, 상대의 공간을 파고들며 여섯 번째 걸음을 내디뎠다.
‘천마검법 중반부 삼초식.’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릉.
“?!!”
볼피르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단순히 서로의 파괴력을 겨루는 공격이 아니라, 정확히 허점을 파고드는 공격에 그는 자세가 무너진 상태로 공격을 맞받아쳐야만 했다.
이번에는 충격이 대단했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상황에, 볼피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며 분노를 표출했다.
“하찮은 인간 주제에!”
팟.
콰콰콰콰콱!
밀릴 수 없었다.
동족을 무려 넷이나 잡아먹은 자신이, 생명체의 한계를 초월한 자신이.
이렇게까지 하고도 한낱 인간에게 패배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일반 사람들은 눈으로 좇아갈 수도 없을 만큼 엄청난 속도였고, 로만 드미트리의 사각을 연속해서 파고들며 손톱을 휘둘렀다.
매 일격이 재앙이었다. 쾅쾅 폭발하는 그 파멸적인 기운은, 단순하게 손톱을 휘두르는 공격인데도 김판석이 발현한 ‘10서클의 파괴력’을 넘어섰다.
고로.
패배는 생각하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를 몰아붙이는 상황에, 볼피르는 정말 상대를 끝내겠다는 생각으로 전력을 표출했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설령 신조차 찢어발길 공격.
그렇게 공간을 파고드는 순간.
일곱 번째 걸음.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번뜩.
콰콰콰콰콰콰콱!
일말의 틈.
로만 드미트리가 공간을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파멸적인 기운을 모두 찢어발기더니, 당황으로 얼룩진 볼피르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볼피르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인간은.
로만 드미트리라는 인간은.
이 와중에도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내고 있었다.
자신의 움직임을 끊임없이 파악하며, 허점을 공략해 반드시 죽이고자 했다.
스스로 강해지고자 동족을 집어삼킨 볼피르와는 다르게, 로만 드미트리의 힘에는 세 번의 삶 동안 반복해 왔던 고뇌와 노력이 녹아들어 있었다.
볼피르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강력했고, 육식이라는 편리한 방법으로 강해진 그와는 다른 세계였다.
그 순간.
여덟 번째 걸음.
‘천마검법 후반부 이초식.’
사악-
빛이 밀려들었다.
그 강렬한 빛을 맞닥트리는 순간, 볼피르는 난생처음 느껴보는 끔찍한 고통에 휩쓸렸다.
퍼퍼펑!
콰콰콰콰콰콰콰콰콱!
* * *
볼피르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대로 무너질 뻔했던 몸을 억지로 지탱하며, 그가 충격받은 얼굴로 검붉은 피를 쏟아 냈다.
“우웩.”
후두둑.
방금의 일격.
치명적이었다.
온몸이 난도질을 당했고, 볼피르는 생명이 경각에 달하는 느낌을 받았다.
“……대, 대체 어떻게?”
믿을 수 없었다.
상대는 인간이다.
100년도 살지 못하는 하찮은 생명체에 불과하며, 그들이 평생을 반복해서 훈련한다고 한들 절대자들이 태어난 직후에 갖춘 힘에도 미치지 못했다.
절대자들의 오만은 오만이라고 할 수 없다. 오만(傲慢)은 건방진 태도를 말하는 것이나, 실제로 그만큼 갖추었다면 그것은 자신감이었다.
볼피르는.
절대자들은.
이와 같은 미래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신이 되기 위해 태어난 축복받은 존재이니만큼, 이따위 현실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절대자 볼피르다. 겨우 한낱 인간 따위에게, 나 볼피르가 패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힘을 끌어 올렸다.
생명력을 불태웠다.
자신이 이제까지 먹어 치웠던 동족들의 생명력도 같이 불태우며, 볼피르의 존재감이 무섭게 부풀었다.
마지막이었다. 이 한 번의 일격에 모든 것을 걸 생각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를 죽이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볼피르는 승리할 수 있다면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로만 드미트리만이 예외일 뿐이다.
그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자신을 넘볼 수 없기에, 볼피르는 파멸적인 기운에 자신을 헌납했다.
콰드드드드드득.
차원이 뒤틀렸다.
세상이 비명을 질러 댔다.
종말이었다.
볼피르가 일으키는 파멸적인 힘을 바라보며,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를 좁혔다.
저 앞에 파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물러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항상 궁금한 것이 있었다. 신의 경지. 내가 대체 어떤 경지에 도달한 것일까.”
그동안 단 한 번도.
완전한 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것은 마왕을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지금은 ‘살생’이라는 목적을 위해 발현하고자 했다.
아홉 번째 걸음.
콰득.
콰드드드드드드득.
발바닥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치밀었다.
전신이 붉게 달아오르며 핏줄이 곤두섰고, 감당하지 못할 힘에 로만 드미트리의 눈도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에 맞춰 볼피르도 준비를 모두 끝마친 상태였다.
절대자의 육체로도 감당하지 못할 힘에 피부가 일어나며 톡톡 터졌고, 검고 거대한 태양처럼 엄청난 마력이 형성되었다.
마지막.
정말 마지막이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내더니, 마력이 몰아치는 공간을 뚫고 나가며 볼피르를 향해 일격을 준비했다.
‘천마검법 후반부 삼초식.’
전력.
세상이 멈추었다.
서로의 힘이 격돌하는 순간, 아주 잠시 생명체의 감각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무언가가 펼쳐졌다.
이윽고.
파파파팟.
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콰콱!
검은 마력이 찢겨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가 앞으로 계속해서 치고 나가며, 파멸적인 기운 너머에 존재하는 볼피르의 존재를 정확하게 파악했다.
오로지 살생을 위한 전력. 볼피르는 로만 드미트리를 찍어 누르기 위해 전력을 발현한 반면, 파멸적인 기운이 범람하는 지금에도 로만 드미트리는 일말의 틈을 공략했다.
목적에 충실했다.
로만 드미트리는 자신을 가로막는 적을 도륙하기 위해, 단 한 번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렇게.
번뜩.
푸확.
볼피르의 팔이 날아갔다.
* * *
끝났다.
팔을 날려 버림과 동시에 볼피르의 머리를 베어 버리려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의 의식이 어딘가로 빨려들어 갔다.
화악.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백색의 공간.
이미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그 세계에서, 미지의 존재가 로만 드미트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로만 드미트리. 절대자를 죽여서는 안 된다.]상대는 신이었다.
이제까지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았던 그 존재가, 볼피르의 죽음에 모습을 드러냈다.
[스스로를 절대자라고 말하는 열셋의 존재는 실제로 ‘신의 파편’이다. 그들은 본래 하나의 존재로서 일부 차원을 관리하는 신이어야 했으나, 차원에 문제가 생기면서 열셋의 파편으로 나누어져 차원의 틈에 방치되었다. 나머지 열둘의 절대자를 죽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볼피르마저 죽으며 파편이 모두 사라진다면, 그때부터 지금 네가 살아가는 세상을 기점으로 차원의 경계가 무너질 것이다. 로만 드미트리. 진정한 평화를 바란다면 볼피르를 죽이지 마라.]그의 말.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로만 드미트리는 신으로 추정되는 빛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볼피르는 수많은 인간을 죽였다. 그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또 다른 위험을 맞이할 것이다.”
[인간들의 세상에는 로만 드미트리, 네가 존재하지 않는가. 생명력을 모두 불태워 버린 지금, 볼피르는 더는 인간들의 세상을 위협하지 못할 것이다.]틀린 말은 아니었다.
볼피르.
그는 동족의 생명력을 불태워 최후의 일격을 시도했고, 그것마저도 실패한 이상 더는 로만 드미트리의 상대가 되질 않았다.
아니, 절대자를 쓰러트렸던 다른 사람들만으로도 충분히 볼피르를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로만 드미트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예상했다.
드미트리의 세상을 떠나 절대자를 조우한 것은 절대 우연이 아니며, 그 이면에는 분명히 신의 안배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생각. 알렉산드르 때와 마찬가지였다.
로만 드미트리로 인한 결과라고는 하나, 알렉산드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신은 그 대항마로 장본인을 직접 불러들였다.
만약.
정말 만약에.
신이 자신이 원하는 결말을 막아선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에는 섣불리 답을 내리지 못했던 그 생각을, 최근에 이르러 확고하게 정립할 수 있었다.
“네 말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절대자들은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존재들이다. 그들을 처리하는 대가로 또 다른 위험을 감수하라는 말은, 그간의 고통을 기억하는 인간들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신.
그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신은 차원을 다스리는 존재이나, 그렇다고 그들을 따를 이유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전의 삶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신이라 불리는 존재는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닌 한발 물러나 상황을 방관했다. 만약 내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파멸적인 결말을 받아들여야만 했겠지. 지금도 마찬가지다. 앞으로의 삶은 내가, 그리고 인간으로서 살아갈 우리가 감당할 몫이다. 그러니…….”
이전과는 달랐다.
선택의 갈림길.
로만 드미트리는 신의 말을 받아들였다.
드미트리에 남으면 위험하다는 그 말에, 그때는 무조건 떠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확고하게 말했다.
“너는 언제나 그랬듯 방관하라. 그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 * *
화악-
빛무리가 흡수되었다.
다시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온 상황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가운 눈빛으로 팔을 잃은 볼피르를 내려다보았다.
“로, 로만 드미트리. 내 패배를 인정하겠다.”
질질.
볼피르가 바닥을 기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고개를 숙이며,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 제발 살려다오. 날 살려만 준다면, 앞으로 내 힘을 인간들을 위해 쓰겠다.”
같잖았다.
우스웠다.
스스로를 신이라고 말했던 존재가,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을 마주하자 공포에 질려 목숨을 구걸했다. 그의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절망과 패배를 경험해 보지 못한 절대자가 드디어 현실을 받아들였으니, 신의 조언대로 그를 살려 둔다면 인류에게 평화가 허락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며 단 한 번도 예외를 두지 않는 대원칙이 있다.”
슥.
검을 겨누었다.
공포로 얼룩진 볼피르의 얼굴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갑게 말했다.
“나는 적으로 규정한 존재를 절대 살려 두지 않는다.”
그렇게.
번뜩.
볼피르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 * *
툭.
데구루루.
볼피르의 머리가 땅바닥을 굴렀다.
허망한 최후였다.
인류는 저 존재로 인해 십수 년을 지옥 속에서 살았건만, 죽음 외에 복수를 행할 방법은 없었다.
잔인한 현실이었다. 복수를 행한다고 한들 그들로 인해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익숙한 목소리였다.
파르르 떨리는 그 목소리에, 로만 드미트리는 차마 뒤를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케빈이었다.
간절하게 재회하길 바랐던 존재였다.
하지만 30년의 세월이 떠오르자, 절대자를 상대하는 순간보다도 감당하기 힘든 감정이 휘몰아쳤다.
‘나는 그 세월을 감히 이해할 수 없다.’
30년.
대체 그 기나긴 세월을 감당하는 동안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무리 로만 드미트리가 세상을 구원했다고 한들, 감사한 마음만으로는 30년이나 기다리는 일은 쉽지 않은 문제였다.
케빈도 마찬가지였다. 절대자를 단숨에 베어 버리고, 신의 요구마저도 거절한 로만 드미트리였지만, 케빈의 진실을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덜컥 겁이 들었다.
저벅저벅.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바로 뒤에서 존재가 느껴졌다.
로만 드미트리가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케빈은 그대로 무릎을 꿇으며 울음을 삼켜 내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쿵.
“신 케빈, 드디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그 말.
그것 하나면 충분했다.
로만 드미트리가 케빈을 바라보았다.
빈민가에서 처음 만났던 어린 소년.
앳되기만 했던 얼굴에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왜일까.
막상 얼굴을 보자 복잡했던 감정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음을 보였다.
“보고 싶었다, 케빈.”
그것이면 된 것이다.
그간의 이야기.
그간의 세월.
그간의 노력.
마침내 케빈을 만난 지금,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웃을 수 있었다.
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1)
대한제국, 인천.
A구역 쉘터 안.
밖에서 들려오는 엄청난 충격음에, 쉘터로 대피한 민간인들이 공포에 떨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공간이 뒤흔들렸다.
김준혁의 설명대로라면 쉘터는 마법 방어를 10중으로 겹겹이 설치했건만, 천장에서 우수수 떨어지는 돌가루에 사람들은 창백한 표정을 보였다.
인간은 상상력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엄청난 충격음이 들려올 때마다, 눈앞에서 돌가루가 떨어지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불길한 상상력이 몸을 부풀렸다.
“……설마 대한제국군이 패배한 건가.”
“그럼 우리도 끝이야. 아무리 마법 방어를 겹겹이 설치해도, 절대자를 상대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맙시다!”
“뭐라고? 재수 없는 소리라니! 현실을 말했을 뿐이야!”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처음에는 로만 드미트리에 대한 믿음으로 버틴 사람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언성을 높이는 것 이외에 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최소한 외부에서 어떤 메시지가 도착할 때까지, 대부분은 로만 드미트리가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굳게 믿었다.
사실 애초에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불안한 마음에 다들 한 소리들을 하는 모습에, 강민아는 쪼그려 앉아 두 귀를 막았다.
‘……아빠.’
눈물이 핑 돌았다.
밖에서 들리는 저 소리.
그 현장에 아빠가 존재할 것이다.
쉘터가 쾅쾅 울릴 때마다 아빠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자, 강민아의 작은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되었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 그녀는 엄마를 잃었다.
강민호는 최대한 딸의 그림자를 없애 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편부(偏父) 가정의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다들 존재하는 엄마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친구들은 철없이 물어 왔고, 현실을 깨달은 이후부터 절대 아빠 앞에서 엄마를 언급하지 않았다.
철이 들어 버렸다.
철이 들어야만 했다.
홀로 아등바등 살아가는 아빠를 위해서라면, 철없는 딸의 역할은 그녀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만약 아빠마저 죽는다면 나는 앞으로 살아갈 이유가 없어. 그러니까, 제발 무사해 줘.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우리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나쁜 몬스터들로부터 우리 아빠를 지켜 주세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강민아의 모습에, 삼촌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르르릉.
울림은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불안감이 점점 증폭되는 그때, 어느 순간부터 갑작스럽게 충격음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뭐지?”
“끝난 건가.”
“섣불리 움직이지 마! 방어 병력이 모두 전멸한 것일 수도 있다고!”
혼란스러운 시선이 뒤얽혔다.
생각보다 일렀다.
최소 보름에서 한 달을 예상한 대재앙이니만큼, 이렇게 단시간에 소음이 사라지는 상황은 희망적일 수가 없었다. 공포감이 밀려들었다.
어쩌면 더는 ‘소음’을 일으킬 만한 인간들이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하자, 서로 언성을 높이던 사람들조차도 함부로 부정적인 말을 내뱉지 못했다.
그때였다.
칙, 칙.
스피커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패전일지, 승전일지.
김장감이 팽배하게 차오르는 상황에, 사람들의 얼굴을 밝게 만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한제국 국민 여러분. 로만 드미트리입니다.]“헉!”
“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시다!”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로만 드미트리라니!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 마지막 절대자 볼피르를 처리하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려 확실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인류가 승리했으며, 마지막 남은 몬스터들마저 모두 정리한 이후 국민 여러분에게 ‘온전한 평화’를 선물해 드리겠습니다.]툭.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한제국 전체에 알리는 통신에, 통신이 끊기자마자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고 환호성을 질러 댔다.
“살았다!”
“우리가 살았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만세! 만세!”
감정이 격정적으로 끓어올랐다.
그러고는.
강민아는 보았다.
끼익.
쿠르르르르르릉.
쉘터의 문이 열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순간 집중되자, 어둑어둑했던 하늘에서 햇볕이 내리쬐며 한 인간의 형상이 보였다.
“여러분, 무사하십니까?”
강민호.
그의 등장에, 강민아가 삼촌의 손길을 뿌리치며 앞으로 뛰쳐나갔다.
“아빠!”
* * *
툭.
통신을 끊었다.
대한제국 전역에 승전 소식을 알린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정부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넓은 공간.
원래는 광장으로 이용되던 그 공간에, 폐허가 되어 버린 땅에 수많은 사람이 도열해 있었다.
휘잉.
바람에 깃발이 펄럭였다.
각자 형형색색의 군복을 맞춰 입은 사람들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보란 듯이 그들의 국기(國旗)를 자랑스럽게 치켜세웠다.
국기는 한둘이 아니었다. 현생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설 수밖에 없는 문양이지만, 로만 드미트리는 그 국기가 의미하는 나라들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드미트리, 카이로, 헥토르, 움베르토 등등.
샐러맨더의 모든 나라가 집결했다.
그 숫자는 눈으로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각국의 선두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보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구나.’
드미트리.
그곳에는 로드웰 드미트리가 있었다.
자신보다 동생이었던 존재가 중년의 남성이 되었고, 앳된 소년이었던 로렌 드미트리조차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 옆으로 크리스, 케빈, 펠릭스 등등. 얼굴을 확인할 때마다 감정이 들끓었다.
그들이 살아온 세월을 생각할수록, 로만 드미트리는 이 만남이 더욱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로의 진영에는 다니엘 카이로가.
헥토르의 진영에는 에드윈 헥토르가.
모두가 모였다.
감정을 삼켰다.
아직 전쟁이 완벽하게 끝나지 않은 지금, 감정에 젖어 여유를 부릴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앞으로 나섰다.
자신을 바라보는 충혈된 눈빛들에, 로만 드미트리는 그 시선들을 일일이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내가 드미트리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내렸던 그때, 나는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비록 나를 희생하는 일일지라도 ‘결정권자’로서 그에 걸맞은 책임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너희를 마주하는 이 순간, 나는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에 확신을 얻었다.”
돌고 돌았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고 할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똑같은 선택을 반복했을 것이다.
아직 준비되지 않은 그로서는, 백성들을 위해 최선을 선택해야만 했다.
지금은 달랐다.
지금은 새로운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정말 고맙다. 나를 잊지 않아 준 너희를, 그리고 이 순간을 나는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담담하게 내뱉은 말.
그 순간.
“와아아아아아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만세! 만세!”
사람들 전부가.
광장 전체가 열광적인 환호성으로 물들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인류를 위협하던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차원의 균열이 사라지며 더는 몬스터들이 넘어오지 못했고, 남아 있는 몬스터들을 해결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드미트리의 지원군. 그들의 도움으로 모조리 쓸어버렸다. 차례로 각국의 문제를 해결함에 따라, 로만 드미트리는 며칠 내내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브라질의 피해가 매우 심각합니다. 피해 복구를 위해서는 원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해 왔습니다. 그들도 상당한 피해를 받았지만, 강대국으로 분류되는 나라들이 주도적으로 나서겠다고 서로 논의를 끝마친 모양입니다.”
“스페인이…….”
“호주가…….”
각국의 소식이 모두 집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
대한제국의 황제이자 세계 정부의 수장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드미트리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개인적인 감정에 의무를 내팽개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았다.
드미트리가 아무리 특별하다고 한들. 대한제국과 각국의 사람들 또한 로만 드미트리를 믿고 이번 전쟁을 준비해 왔다. 그들을 끝까지 책임질 의무가 그에게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어느 정도 상황이 정리되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펠릭스를 불러들였다.
“준비는 끝났나.”
“예, 드미트리로 통하는 차원의 통로를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황제 폐하의 조언대로 절대자의 부재로 인해 발생할 차원의 균열을 역으로 이용해, 오히려 두 차원을 통합하는 계획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물론 차원의 균열이 계속된다면 차원 자체에 문제가 생길 확률이 높지만, 지난 30년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세계수의 마력을 지속적으로 차원의 균열로 흘려보내 그 후유증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30년의 세월.
드미트리의 세상은 많은 것을 이루었다.
단순히 로만 드미트리와의 재회만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로만 드미트리가 떠나야만 했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가 노력했다.
처음 그 보고를 들었을 때 고맙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혼자만 판단하고 결단을 내렸다면 몰랐을 해결책에, 지도자로서의 자신도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드미트리로 떠날 차례였다.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섣불리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그 모습에, 펠릭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걱정되십니까?”
“걱정……. 그래, 걱정이 맞겠구나. 최근 들어 생소한 감정에 스스로가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일들이 많다.”
시선을 마주쳤다.
펠릭스를 마주 보며, 로만 드미트리가 웃었다.
“그런데, 그리 나쁘지 않은 기분이구나.”
걸음을 옮겼다.
드미트리.
고향으로 돌아갈 차례였다.
* * *
그야말로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귀환에, 드미트리의 수도는 발 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인파가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 보고 싶었습니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다시는 이곳을 떠나시면 안 됩니다!”
30년 전.
마계 정벌에 성공할 때만 하더라도 어린아이였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본인의 자식들을 데리고 나와 열렬하게 환호했다.
그들의 기억 속에 로만 드미트리는 영웅이었다.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 그가 귀환했다는 사실에 이대로 목소리를 잃어도 좋았다.
사방에서 소리쳤다.
열광하고 목소리를 높이며,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로만 드미트리는 인파를 헤치며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과 짧게 인사를 마친 그는, 30년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드미트리의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한때.
드미트리는 무채색의 도시라고도 불렸다.
철광산과 대장간이 발달하면서 인부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그래서 수도의 귀족들은 눈살을 찌푸리는 그런 광경이 도시에 펼쳐졌었다.
지금은 달랐다. 드미트리 제국 수도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낡은 건물들이 철거되며 마법 문명에 부합하는 웅장한 건물들이 올라섰고, 대장장이의 도시라는 드미트리의 특색과 묘하게 어우러지며 오히려 강인한 인상을 풍겼다.
감격스러웠다.
로만 드미트리가 잘 닦아 놓은 기반을 바탕으로, 이렇게 꽃을 피운 모습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선사했다.
하지만 감상도 잠시.
지금 바로 가야 할 곳이 있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드미트리가 차원의 경계를 넘어섰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로만 드미트리는 덜컥 겁이 드는 부분이 있었다.
30년은 노화하여 삶의 마침표를 찍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처음에는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통해 몇몇 인물들의 생사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진실을 들었다간 곧바로 드미트리로 돌아가고 싶을 것 같아 직접 확인하겠다고 말했다.
불길한 마음이 들었다.
초조했다.
볼피르를 상대할 때도 이토록 불안하지 않았던 로만 드미트리건만, 지금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드미트리를 벗어났다.
풀숲이 형성되고 조금은 한산한 분위기가 펼쳐지자, 멀리서부터 아주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카앙-
카앙, 카앙-
그것은 강철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심장이 뛰었다.
걸음을 서둘렀다.
그리고 풀숲을 벗어나 홀연히 존재하는 작은 주택에 도달하는 순간.
두 사람을 발견했다.
나이를 많이 먹었어도 여전히 건재하게 강철을 두드리는 남성과 건물 밖에서 차를 마시는 여성.
“……아버지, 어머니.”
그들을 불렀다.
감정이 들끓는 그 목소리에 두 노인.
로메로 드미트리와 리한나 드미트리의 얼굴에 균열이 일었다.
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2)
탁.
찻잔이 식탁에 놓였다.
곱고 아름다웠던 손에 자글자글 생겨난 주름에, 로만 드미트리는 찻잔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허브차란다. 노화 방지에 좋다고 해서 매일같이 마시고 있는데, 우리 아들은 30년 전 모습 그대로네.”
어머니가 웃었다.
맞은편에 앉는 그녀의 모습에,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따뜻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직 건강하다는 사실에, 이렇듯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로만 드미트리는 마음까지도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드미트리의 진실을 듣고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 바로 부모님의 건강이었다.
30년의 세월이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지만, 부모님은 세월의 흔적이 역력할 뿐 안색은 오히려 전보다 좋은 느낌이었다.
로메로 드미트리가 말했다.
“말도 마라. 네 엄마가 우리 아들은 반드시 돌아온다면서, 지난 30년간 건강에 좋다는 것을 하루에도 수십 개나 먹였단다. 이걸 봐라. 내 나이면 모두 방구석에서 앓아누워야 하는데, 나는 힘이 넘치다 못해 다시 대장간 일을 시작했단다. 예전만 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네가 돌아오면 근사한 검을 하나 만들어 주고 싶었거든.”
“여보도 참. 그래도 제 말이 맞았잖아요. 우리가 건강하니, 아들의 모습도 보고 얼마나 좋아요?”
“그렇긴 하지, 껄껄껄.”
부모님의 말.
감정이 벅차올랐다.
백중혁으로 살아가던 시절의 그에게, 부모님이란 핏줄의 가혹함을 강요하는 잔인한 존재였다.
이번 삶은 달랐다.
드미트리의 얼간이라고 해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고, 아무리 무모한 일을 벌인다고 한들 끝까지 믿고 지지해 주었다.
지금의 로만 드미트리는 부모님으로부터 완성되었다.
그렇기에 드미트리에 도착했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가장 먼저 부모님을 만나 뵙겠다고 일정을 모두 뒤로 미루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하다니. 뭐가?”
“그냥 전부, 전부 감사합니다.”
낯부끄러웠다.
자신도 다른 자식들처럼 말랑말랑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딱딱하게 굳은 말투를 푸는 건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래도 감사하다는 말만큼은 꼭 전하고 싶었다.
드미트리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내렸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부모님에게는 아무런 말도 전하지 않은 불효자였다.
시간이 흘러 그 사실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부모님을 만날 기회가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었다.
“로만아.”
“예.”
“돌아와서 고맙고, 사랑한다.”
“……예?”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랑한다니.
아버지답지 않은 말이었지만, 로메로 드미트리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람이 말이다. 때를 놓치면 할 수 없는 말이 있단다. 내가 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30년 전에 꼭 말하고 싶었는데, 그 기회를 놓쳐 정말 많이 후회했었거든. 그런 내 진심을 알아다오.”
순간.
감정이 요동쳤다.
사랑한다는 말.
로만 드미트리의 인생에 허락되지 않는 단어였다.
입술을 씰룩이며 똑같은 마음을 전하고 싶었지만, 역시 이번에도 쉽지 않은 문제였다.
그렇게 망설이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이 웃긴 모양인지, 부모님은 웃음을 터트리며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정말 화기애애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부모님과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로만 드미트리는 드미트리로 돌아온 선택이 옳았음에 확신을 얻었다.
그러다 문득.
로만 드미트리가 물었다.
“한스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그 말에.
부모님의 표정이 굳었다.
로메로 드미트리가 차를 한 모금 마시더니,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방으로 돌아가 보거라. 그곳에 가면 한스에 대해 알 수 있을 거다.”
* * *
끼익.
방문을 열었다.
그 익숙한 공간을 확인하는 순간, 가장 먼저 떠오른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아.”
무려 30년.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드미트리의 수도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한 것처럼, 이 공간도 당연히 세월의 흐름이 적용되었어야 했다. 그런데도 예전과 똑같았다.
매일같이 청소하지 않았다면 유지되지 않을 깔끔함이었고, 로만 드미트리는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이 공간에 스며든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스. 너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다행이었다.
책상 위에 정돈된 물건들, 가구의 배치, 침구류 등등 한스라면 알지 못할 디테일들이 녹아들었다.
확실했다.
한스의 손길이었다.
부모님만큼이나 걱정스러웠던 한스가, 3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매일같이 자신의 방을 청소하고 있었다. 그 따뜻한 손길에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리 감정적인 사람이 아니었지만, 드미트리의 사람들을 만난 이후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린 기분이었다.
정돈된 방.
한 인간의 마음이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30년간 이 공간이 변하지 않도록 매일같이 정성을 들인 한 인간의 마음.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부모님보다도 먼저 울타리 안에 들였고, 자신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 단 한 번도 일반적인 하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얼른 한스를 만나 보고 싶었다.
그와 함께 살아갈 때는 매일같이 조잘대는 그의 잔소리가 귀찮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잔소리를 온종일 들어 줄 수 있었다.
그때였다.
쿠당탕!
“화, 황제 폐하?!”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을 확인하자, 3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이 놀란 얼굴을 보였다.
그런데 왜일까.
여성이 떨군 물건들.
청소를 위한 도구들임을 확인하는 순간, 로만 드미트리는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불길했다.
뒤늦게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방으로 돌아가면 한스에 대해 알 수 있다는 말.
로만 드미트리가 차가운 얼굴로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냐?”
* * *
한스는 책임감이 대단한 사람이다.
본인이 맡은 바를 절대 남에게 맡기지 않았고, 나중에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해서 업무가 많아지자 추가로 사람을 뽑으면서도 방만큼은 절대 본인이 청소했다.
그런 한스가 정말 좋았었다. 한결같은 한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따뜻한 마음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기에.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차가운 물음에, 여성은 오히려 살짝 기쁜 듯한 반응을 보였다.
“황제 폐하. 제가 기억나지 않으세요? 한스 남작의 손녀인 한나예요.”
“……한나라고?”
“예. 드미트리를 떠나시기 전에, 매년 제 생일을 챙겨 주셨다고 할아버지에게 들었어요.”
기억이 났다.
한스의 아들 해리슨.
해리슨에게는 딸이 있었고, 한스가 금지옥엽(金枝玉葉)처럼 여기는 손녀를 위해 로만 드미트리는 직접 성대한 파티를 열어 주었다.
그건 매년 진행되는 행사였다. 드미트리의 귀족들은 한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물 공세를 퍼부었고, 로만 드미트리의 도움으로 손녀는 명문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한스를 대체해 손녀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은, 한스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잔인한 현실을 의미했다.
한나가 말했다.
“할아버지가 어디에 계신지 궁금하신 거군요. 사실 3년 전만 하더라도 할아버지가 황제 폐하의 방만큼은 무조건 본인이 청소하셨는데, 나이를 먹어 기력이 쇠약해지시면서 저에게 모든 일을 물려주셨어요. 저도 할아버지의 손녀로서 이것을 가업(家業)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였고요.”
10년 전.
한나는 훌륭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했다.
실제로 드미트리 제국에서 행정적으로 여러 직책을 맡았던 그녀였지만, 막상 많은 것을 경험하자 오히려 할아버지의 일을 물려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하인이라는 존재가 하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하인으로서 드미트리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 일을 물려받아 할아버지처럼 드미트리 가문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드미트리.
그 나라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뿌리가 되어 준 가문이기에, 한나는 그렇게 할아버지의 일을 배웠다.
로만 드미트리의 반응.
기뻤다.
할아버지를 기억한다는 사실에, 그의 부재에 적대적인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에.
한나는 기쁜 마음으로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안내해 드릴게요. 황제 폐하를 본다면, 할아버지는 분명히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 * *
장소를 옮겼다.
단출한 방이었다.
수도 한복판에 있는 것과는 다르게, 수수한 그 방 침대에 한스가 누워 있었다.
“……화, 황제 폐하십니까?”
“일어나지 마라.”
한스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예전과 달랐다.
기력이 쇠약해져 반쪽이 되어 버린 얼굴에, 흐릿한 눈동자는 로만 드미트리를 제대로 바라보는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슬픈 감정이 밀려들었다. 자신이 너무 늦게 돌아왔다는 사실이, 인간에게 30년의 세월은 절대 적지 않은 시간이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체감되는 순간이었다.
“……한스, 괜찮느냐.”
옆에 앉았다.
한스를 눕히고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에, 한스는 이빨이 없어 오물거리는 입으로 조잘조잘 말했다.
“괜찮다마다요. 황제 폐하는 잘 지내셨습니까? 챙기는 사람이 없어 불편한 점이 많았을 텐데, 황제 폐하를 생각할 때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먼 길을 오느라고 많이 시장하시지요? 지금 바로 제 손녀에게 말해 점심상을 준비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가 맛있게 드셨던 음식들로요. 그나저나 얼굴은 왜 이렇게 상하신 겁니까? 제가 항상 몸을 챙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말이 꼬리를 물었다.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한스는 끝날 것 같으면서도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황제 폐하, 혹시 기억나십니까? 갑작스럽게 마을 최고령자에게 안내하라고 했을 때, 저는 도련님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악독한 무리를 단번에 처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제가 그동안 모셔 왔던 도련님에게 특별한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상했다.
호칭이 변했다.
흐릿해지는 한스의 눈빛은, 기억 너머 어딘가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은 그때 이후로 달라진 도련님의 행보에 말이 많았습니다. 드미트리의 장자가 변화했다면서 감탄했지만, 저는 처음부터 도련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도련님이 어렸던 시절에. 맛있는 것을 먹을 때면 항상 제 입에도 넣어 주셨습니다. 그때 그 군것질거리들이 얼마나 달았는지, 아직도 잊질 못합니다.”
“황제 폐하. 드디어 만나 뵙는군요. 저는 정말, 황제 폐하 걱정에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습니다.”
“도련님. 도련님입니까?”
한스의 말들.
계속해서 시점이 바뀌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그 말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주름이 가득한 한스의 손을 잡은 채 가만히 들어 주었다.
한스와의 세월.
로만 드미트리는 빙의 이후의 삶을 기억하지만,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가 유년기였던 시절부터 자신과의 기억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30년을 기다렸다. 자신을 기다리며 매일같이 방을 청소했을 그 마음에, 언제나 자신을 최우선으로 생각해 주었던 한 인간의 진심 어린 마음에.
슬픔을 삼켰다.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황제 폐하라 부르면 황제로서 답해 주었고, 도련님이라 부르면 도련님으로서 답해 주었다.
똑똑.
“황제 폐하, 시간이 늦으셨습니다.”
해가 저물었다.
한나의 목소리에, 로만 드미트리는 한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괜찮다. 오늘은 이곳에 머무르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지금은.
눈앞의 순간이 중요할 뿐이었다.
한스의 말을 계속해서 들었다.
30년이다.
자신이 사라지고 30년이 지나도록 기다렸으니, 한스로서는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겠는가.
“황제 폐하. 정말 너무하십시오. 그렇게 말없이 사라지면 남겨진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미안하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십시오.”
“알겠다. 내 약속하마.”
한결같았다.
언제나처럼, 한스의 잔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는 조잘조잘 떠들어 대는 한스를 바라보며, 따스하게 붙잡은 손을 한시도 떼지 않았다.
그렇게 밤이 새도록.
해가 저물고 다시 해가 떠오를 때까지.
로만 드미트리는 한스의 옆을 지켜 주었다.
* * *
짹짹.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려왔다.
날이 밝아 따사롭게 비추는 햇살이, 아주 오랜만에 걱정 없이 평화롭게 잠든 한스의 얼굴을 비추었다.
은은히 웃으며 잠이 든.
그 행복한 얼굴에, 로만 드미트리는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3)
며칠 뒤.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이번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한스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자리였다.
이른 아침부터 드미트리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은 아직 장례식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지키는 로만 드미트리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들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알았다.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에게 매우 특별한 인물이었기에, 주요 인물들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카이로의 국왕.
다니엘 카이로가 로만 드미트리 옆에 나란히 섰다.
“저는 카이로의 국왕으로서 만인(萬人)의 목숨이 똑같이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그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게도 특별한 존재가 있었습니다. 니콜라스 백작. 아무것도 아니었던 어린 국왕을 지지해 준, 그분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고개를 돌렸다.
이제 어린 국왕이라는 표현과는 어울리지 않는, 강인한 사내의 눈빛이 로만 드미트리를 향했다.
“한스 남작은 행복했을 겁니다. 적어도 마지막을 함께하지 않았습니까.”
“고맙다.”
“아닙니다.”
감사한 마음이었다.
니콜라스 백작은 크로노스와의 전쟁에서 처참하게 죽었기에, 그에게 이와 같은 조언은 쉽지 않은 문제였을 것이었다. 그런데도 로만 드미트리를 위해 선뜻 용기를 냈다.
3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카이로의 전부라고 불리는 그는, 이만한 감정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거인이 되었다.
다니엘 카이로가 물러나고.
이번에는 플로라 로렌스가 다가왔다.
“괜찮으세요?”
“……괜찮다.”
“인생이라는 게, 참으로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것 같아요. 처음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만났을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에 불과했는데, 지금의 저는 50대 중년이 되어 그때와 똑같은 모습의 황제 폐하를 만나 뵙게 되었네요. 제게도, 그리고 황제 폐하에게도. 한스 남작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어요. 맹목적으로 감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그리 흔치 않잖아요.”
로렌스와 드미트리.
혼인으로 결합한 관계이니만큼, 플로라 로렌스는 드미트리와의 만남이 잦았다.
사실 조금은 불편할 때가 있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정략결혼을 맺었던 자신이 차남인 로드웰 드미트리와 결혼하면서, 몇몇 사람들이 뒤에서 나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때마다 한스는 보란 듯이 플로라 로렌스를 챙겨 주었다.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를, 이곳에서 대우받아 마땅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한스 남작이 보증했다.
로만 드미트리에게 한스가 소중한 사람이라면, 플로라 로렌스에게 그는 정말 좋은 사람으로 남았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신 걸 정말 축하드려요.”
마지막 말이었다.
플로라 로렌스도 물러났다.
그렇게 차례로 사람들이 말을 걸어왔다.
드미트리의 주요 인물들이, 각국의 인사들이, 로만 드미트리의 마음에 깊게 공감하며 한마디라도 거들려고 노력했다.
그들도 로만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드미트리로 돌아오자마자 한스의 곁을 지킨, 한스 남작의 마지막 길을 끝까지 지켜보았던 로만 드미트리의 이야기를.
그렇게.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로만 드미트리는 담담하려고 했다.
하지만 울먹거리며 슬픔을 참아 내던 유족들이 결국에는 무너지며 울음을 터트리는 모습에, 엉엉 울며 가족을 부르짖는 목소리에.
더는 담담할 수 없었다.
* * *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처음 로만 드미트리로서 눈을 떴을 때, 로만 드미트리는 한스의 걱정 어린 시선을 마주했었다.
“괜찮으십니까?”
“도련님? 도련님!”
“어서 약을 가져와라! 도련님이 아프시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결국에 로만 드미트리가 정신을 차리면서 일단락되었지만, 그때부터 한스라는 사람은 로만 드미트리에게 특별한 존재로 기억되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와의 벽을 허물었다. 자신을 걱정해 주던 눈빛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 특별한 계기가 없이도 그를 울타리 안으로 들였다.
백중혁과 로만 드미트리.
사실 둘의 시작은 비슷했다.
아비에게 버림받았던 백중혁과 드미트리의 얼간이라는 평판에 아버지 눈 밖에 나 버린 로만 드미트리.
비슷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었던 상황에, 한스는 로만 드미트리의 곁을 지키며 전생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인간으로서 인간다운 감정을 전달받았다.
아무런 싹도 트지 않은 감정에는 다른 감정을 받아들일 여력이 존재하지 않지만, 한스의 맹목적인 감정은 로만 드미트리의 가슴에 씨앗을 뿌렸다.
스스로 자양분이 되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한스 덕분에.
로만 드미트리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그와 있었던 추억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로만 드미트리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제국의 황제로서.
만인의 지도자로서.
눈물을 참아야만 했다.
천마신교의 가르침대로라면, 전대 교주이자 아버지의 가르침대로라면.
인간의 눈물은 나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것이며, 그 순간 절대적인 군림은 불가능하다면서 항상 냉혹하게 말했었다.
실제로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아들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에도, 아버지는 아들의 나약함에 오히려 이죽거리는 반응을 보였을 뿐이다.
그런 아버지를 백중혁은 증오했다.
그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버지를 닮아 스스로의 감정을 통제해 왔다.
“……한스.”
그래서였을까.
더는 눈물을 참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정말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다른 유족들의 감정처럼.
스스로에게 솔직해졌다.
고개를 떨구었다.
한참을 울었다.
한스를 보냈던 그날 남몰래 울었던 울음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아무도 그 모습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든.
황제든.
그 누구든.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는 자리에서는, 모두가 똑같은 사람일 뿐이었다.
* * *
대재앙.
차원의 균열.
인류를 괴롭히던 문제가 해결되면서, 드미트리와 대한제국 두 세상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지난 일주일.
특별한 변화가 있었다.
일단 로만 드미트리가 다시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로 복귀하면서, 대한제국을 김준혁에게 맡겼다.
“인천 시장 김준혁은 중앙 정부의 핍박을 받아 온 시절에도, 국민의 안위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인물이다. 나는 그라면 대한제국의 다음 황제로서 부족하지 않다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대한제국을 건국하며 너희에게 약속했던 말이 있다. 반드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 주겠노라고. 비록 내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난다고는 하나, 드미트리 제국의 황제로서 대한제국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열광했다.
김준혁.
그는 충분한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다.
물론 로만 드미트리가 물러난다는 사실에 다들 아쉬운 반응을 보였지만, 드미트리와의 관계를 알기에 억지로 붙잡을 수는 없었다.
아무도 무책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대한제국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약속은, 자리와는 별개로 그의 책임감을 증명한다고 생각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만 드미트리가 또 다른 문제를 거론했다.
“드미트리의 백성들은 들어라. 내가 자리를 비운 지난 30년, 내 동생이자 대리인이었던 로드웰 드미트리는 훌륭한 지도력을 보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드미트리는 결코 올바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번 일을 경험하며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내가 언제고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날이 찾아온다면. 드미트리의 후계(後繼)는 나의 자식이 아닌, 그동안 이 나라를 위해 훌륭한 모습을 보여 준 로드웰 드미트리와 같은 인물들이 그 자리를 이어받을 것이다. 철저한 검증을 통해 증명받은 인물이, 드미트리 제국을 이끌 자격을 부여받을 것이다.”
파격적이었다.
권력의 대물림을 차단했다.
훗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을지라도, 로만 드미트리는 세습으로 인한 문제들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시련을 경험했다. 특히 절대자와의 결전. 그 싸움에서 승리하며, 대한제국과 드미트리는 하나가 되었음을 증명했다. 앞으로 두 세상, 두 차원은 활발히 교류하여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갈 계획이다. 신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시련을 부여했으나, 우리는 언제나 그랬듯 그 시련을 감내하며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다.”
새로운 미래.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화창한 오후였다.
당장 피크닉을 가야 할 날씨건만, 드미트리의 한 건물에 수많은 사람이 바글바글 몰려들었다.
이유는 바로.
김판석의 재판 때문이었다.
혼란스러운 현실이 모두 정리된 이후, 사람들을 충격에 빠트릴 진실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마법사. 백의의 마법사가 사실은 알렉산드르였다!”
충격적이었다.
드미트리의 세상에서는 알렉산드르를 악의 상징으로 기억했다.
교과서에도 이름이 거론되며, 악마 같은 그 존재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가족을 잃었다.
그런데 하필.
알렉산드르의 환생이라니!
문제가 심각했다.
처음에 사람들은 당장에 김판석을 심판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환생’한 존재에게 전생의 죄를 대물림하는 것이 맞는지를 따져 물었다.
정말 복잡한 문제였다. 갑론을박(甲論乙駁)이 격렬하게 이루어지는 사이에, 결국에 죄를 판단하는 재판 일정이 결정되었다.
법정 안.
배심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판사가 입을 열었다.
“죄인 김판석. 그는 전생에 알렉산드르라는 이름으로 감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악행을 저질렀다. 우리는 모두가 그 이름을 기억하며, 그것은 김판석으로 환생했다고 해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곧 판결을 앞둔 지금, 죄인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최후의 항변을 하라.”
시선이 집중되었다.
최후.
마지막 발언 기회였다.
드미트리의 시스템에는 변호사가 존재하지 않기에, 김판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판사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따가웠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판사나, 적의 어린 시선을 보이는 배심원들이나.
모두가 그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정체를 밝히고 이 자리에 참석한 지금까지, 알렉산드르였다는 과거를 부정하려 하지 않았다.
김판석이 말했다.
“제 죄를 전부 인정합니다. 알렉산드르라 불리던 그 시절의 저는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김판석으로 환생해 회개(悔改)의 기회를 얻은 저는, 뒤늦은 반성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최대한 전생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백의의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많은 선행을 했지만, 지난날을 되돌아본다면 저는 부정할 수 없는 쓰레기입니다. 저 자신을 변호하지 않겠습니다. 만약 전생의 악행으로 현생의 제가 처벌받아야 한다면, 저는 기꺼이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죄를 인정하는 것.
그것이 김판석이 선택할 수 있는, 알렉산드르의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그의 최선이었다.
* * *
새로운 삶.
새로운 기회.
김판석은 살고 싶었다.
천마를 모실 기회를 부여받았기에, 정말 간절히 살아남아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악행을 저질렀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때는 흑마법에 물들어 인간임을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변명이 가족을 잃은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없겠지. 앞으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내 업보를 청산해야만 해.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이를 악물었다.
막다른 길목에, 김판석은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지.’
선택권을 맡겼다.
지금부터는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자신을 살리든 말든, 김판석은 그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일 생각이었다.
생각해 보면.
충분히 행복한 삶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무지렁이였던 자신이, 정말 한때였지만 천마의 사람으로 살지 않았던가.
판사가 배심원들의 의견을 전달받았다.
한참 중요한 이야기를 논의하더니, 모두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마침내 판결을 말했다.
“이번 재판은 배심원들이 참석, 죄인의 판결에 대해 국민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알렉산드르는 부정할 수 없는 악인이다. 그가 저지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나, 재판부는 알렉산드르의 악행과 김판석의 존재 사이에 책임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한번 죽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이 마음을 돌린 이유가 있었다.
“죄인은 환생의 기회를 얻은 이후 실제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백의의 마법사라 불릴 정도로 선행을 베풀었으며, 무엇보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만난 직후 본인의 정체를 곧바로 밝히며 많은 부분을 도왔다. 만약 죄인이 단순히 살아남길 바랐다면. 정체를 밝히지 않거나, 아니면 차원의 통로를 연결하는 일에 비협조적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죄인은 많은 부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고, 드미트리의 국민들은 그 부분에서 죄인의 진심을 높이 평가했다. 고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용서받는다고 한들.
무기 징역과 같은 판결이 나온다면, 김판석은 앞으로 살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아야 했다.
마침내.
판사가 재판의 종지부를 찍었다.
“죄인 김판석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대신, 전생의 죗값을 청산하기 위한 무기한 사회봉사를 명령한다.”
그 말에.
무죄라는 단어에.
‘천마이시여. 제가 살아남았습니다! 천마신교의 이인자인 제가, 정당한 방법으로 살아남고야 말았습니다!
김판석이 남몰래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세 번의 삶.
천마와의 질긴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4)
재판이 끝났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재판장을 나선 김판석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이질적인 존재(?)들을 발견했다.
파파파팟.
사방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차원 너머의 기자들이 김판석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었다.
“김판석 씨!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한제국, 나아가 전 세계 사람들은 김판석 씨를 백의의 마법사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렉산드르 황제의 전생이라니요. 그동안 백의의 마법사로 활동해 온 것은 전부 거짓입니까?”
“결국에 무죄 선고를 받으셨습니다. 그게 과연 올바른 판결이라 생각하십니까?”
난리였다.
그들은 드미트리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김판석과 관련한 이슈로 취재 허가를 받았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신기한 눈으로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잘 차려입은 정장과 플래시를 터트리는 카메라는, 마법 문명이 발달한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확실한 것은.
백의의 마법사.
김판석과 관련한 문제가 대한제국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문제라는 사실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와 같이 절대자를 쓰러트리며, 이번 대재앙에서 손에 꼽히는 활약을 선보였던 인물.
단언컨대 그는 전쟁 영웅이었다.
사람들은 김판석을 향해 환호성을 내질렀고, 드미트리의 세상에 대단한 마법사가 있다고 한들 백의의 마법사야말로 제일이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사실 전쟁에서 활약한 사람들이 대부분 드미트리 출신인 것과는 다르게 그는 대한제국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는데, 알렉산드르의 전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크나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오히려 드미트리의 세상보다도 더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차원 너머에 알렉산드르의 환생이 존재한다고?’ 정도로 현실을 받아들였다면, 대한제국의 사람들/은(에게는)/ 김판석을 알아 온 세월이 있었다.
차곡차곡 쌓여 왔던 기억들. 아무것도 아니었던 존재가 백의의 마법사라는 평판을 얻은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만큼, 김판석이 무죄 선고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배신감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기자들의 시선.
분노가 가득했다.
드미트리의 사람들은 죽음과 회개로 자비를 베풀었지만, 대한제국 사람들의 분노는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
‘이 또한 내가 살아가며 갚아야 할 업보겠지.’
수많은 카메라 중 하나.
그 렌즈를 바라보며 김판석이 말했다.
“사실 새로운 삶을 허락받았을 때부터 지금까지 시련의 연속이었습니다. 이미 전생에 많은 악행을 저질렀던 저에게, 새로운 삶이 처음에는 달갑지 않았습니다. 백의의 마법사로 활동해 왔던 시간이 전부 진심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상당 부분 제 진심을 억눌러 가며 억지로 선행을 이어 나갔던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알렉산드르로 살아온 삶보다 백의의 마법사로서 존재할 수 있어 행복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죄송합니다. 여러분들을 실망시킨 것에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재판부의 처벌에 따라 앞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였다.
재판과는 별개였다.
새로운 갈림길에 선 지금, 김판석은 전생의 업보를 짊어지는 방향을 택했다.
* * *
한 번의 사과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기자들의 추격을 겨우겨우 따돌린 김판석은, 사람들이 한적한 공간에서 의외의 인물을 맞닥트렸다.
“알렉산드르. 아니, 이제는 김판석이라고 불러야겠지.”
적발의 머리칼.
날카로운 눈빛.
그는 바로 케빈이었다.
케빈은 묘한 적의를 드러내며, 김판석의 앞을 막아섰다.
“참 재밌는 일이야. 같이 힘을 합쳐 절대자를 무너트렸던 백의의 마법사 정체가 실제로는 알렉산드르 황제였다니. 마음 같아서는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발기고 싶지만, 내 진심과는 별개로 너를 살려 두는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도왔기 때문이야. 재판부에서도 그 점을 높이 사서 너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으니, 전생의 잘잘못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치고는 눈빛이 상당히 위험한데?”
묘한 분위기였다.
당장에라도 검을 들고 달려들 것 같은 기세에, 김판석은 마력을 끌어 올리며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케빈이 웃었다.
“하나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거든. 사람들이 말하길, 명실상부(名實相符) 백의의 마법사야말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이인자라고 하던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확실해졌다.
케빈의 의도.
바로 서열 정리였다.
김판석은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예나 지금이나 로만 드미트리를 향한 케빈의 열망은, 가히 광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대답하기 전에 먼저 묻지. 너와 크리스. 둘 사이에 서열이 정리되지 않았을 텐데, 너는 스스로 드미트리 제국의 이인자라고 생각하는 건가.”
“크리스 님은 아직 해결하지 못한 난제(難題)지. 하지만 내가 서열 정리를 요구하자, 크리스 님은 내게 곧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어.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돌아왔으니,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평범한 삶을 살겠다고 말하더군. 그러니까 대답해 봐. 너는 대체 누가 드미트리의 이인자라고 생각하지?”
의외였다.
크리스.
로만 드미트리를 반드시 넘어서겠다는 그의 열망은, 30년의 세월이 흐르며 발전과는 별개로 목적의식이 흐릿해져 버렸다.
천의 경지를 경험하며 현실을 깨달았다.
아무리 발악한다고 한들, 로만 드미트리를 쓰러트리고 대륙 제일의 검사가 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동안 일상과 기다림의 경계에서 살았다면, 지금부터는 온전히 일상과 가족에 집중하고자 했다.
김판석이 케빈의 말을 되뇌었다.
사실 적당히 원하는 대답을 말해 주고 돌려보내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다.
방금 재판을 마치고 돌아온 자신이 케빈과 한바탕 전투를 벌인다면, 그건 나중에 뒷말이 나올 여지가 충분히 존재했다.
마음속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였다. 자신도 당당하게 로만 드미트리의 이인자 자리를 요구하고 싶었지만, 죄가 많은 그에게 그것은 강함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김판석이 말했다.
“진짜 개염병을 떠네.”
머릿속 생각과는 달랐다.
분명히 머릿속으로는 평화적인 그림을 그려 놓았는데, 김판석은 본능적으로 삐딱한 태도를 보였다.
죄는 죄고.
이건 이거다.
앞으로 착하게 살 생각이나, 그 범주에 이인자의 자리를 빼앗기는 것은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
“자신 있냐? 날 상대로 이인자의 자리를 빼앗을 자신이?”
물을 엎질렀다.
케빈의 눈빛에 피어오르는 살기에, 김판석은 시선을 전혀 피하지 않았다.
* * *
자리를 옮겼다.
드미트리의 주요 인물들이 사용하는 비밀 대련장.
마법 방어가 겹겹이 설치된 그 장소에 도달하자, 케빈이 검을 뽑아 들며 사나운 눈빛을 보였다.
“룰은 간단해. 한쪽이 패배를 시인하는 것. 이런 문제로 누군가가 죽는다면, 그것 또한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에게는 불충일 테니까.”
“오케이. 심플하네.”
더는 대화가 필요하지 않았다.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팟.
콰르르르르르르릉.
케빈이 달려들었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그 빠른 움직임에도, 김판석의 눈빛에는 조금의 당황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루전(illusion).”
파파파팟.
환영이 일어났다.
김판석의 존재가 수백 명으로 나누어지더니, 케빈의 정신을 현혹하며 동시다발적으로 마법을 발현했다.
“익스플로전.”
화륵.
화르르르륵.
사방에서 불길이 일었다.
김판석은 절대자를 제단의 제물로 바치면서, 지금은 힘을 잃었으나 심장에 10번째 고리를 형성하는 것에 성공했다.
실제로 10서클에 도달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것은 존재만 남고 힘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지만, 10번째 서클의 존재는 9개의 고리에 이전과는 다른 폭발력을 부여했다.
수백 개의 마법.
그것이 모두 실체화되었다.
각자가 강력한 힘을 분출하며, 케빈의 빠른 움직임을 쫓아 엄청난 폭발을 일으켰다.
퍼퍼퍼펑.
퍼퍼퍼퍼퍼퍼퍼펑!
불길이 넘실거렸다.
화마(火魔)가 일렁이는 세상 속에서, 케빈은 자신을 집어삼키는 불길을 향해 검을 뻗었다.
‘천마검법 후반부 일초식.’
콰앙!
콰콰콰콰콰콰콱!
화염이 그대로 찢겨 나갔다.
마력이 휘몰아치며 화염이 쓸려 나갔고, 그 와중에도 케빈의 시선은 수많은 환영 중에서도 정확하게 김판석의 위치를 찾았다.
추가적으로 발현한 마법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모조리 베어 버리며 치고 들어오는 케빈의 모습에, 김판석은 예리한 눈빛으로 케빈의 움직임을 포착했다.
“이글아이(eagle eye).”
번뜩.
팟.
공격을 피했다.
간발의 차이로 피해 냄과 동시에 마법을 폭발시켰고, 케빈이 막아 내며 반격하자 이번에도 공격을 흘려보냈다.
파파파팟.
콰르르르르르르릉.
경악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케빈과 같은 전사를 상대로는 근접전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건만, 로만 드미트리를 상대해 왔던 김판석은 근접 전투에서 밀리지 않았다.
워 메이지의 대명사라고 평가받는 에드윈 헥토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감히 드미트리의 악귀를 상대로, 대담하게 근접전으로 맞받아치는 마법사는 없었다.
서로가 뒤얽혔다.
마법이 폭발하고 검이 공간을 찢어발기는 일련의 상황에서, 유의미한 공격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감히!”
콰릉.
콰르르르르르릉.
김판석이 눈을 부릅떴다.
케빈.
인정했다.
그가 절대자를 물리치며 이전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했으나, 김판석은 케빈이 빈민가 소년이었던 시절을 알고 있었다.
고로 그와 비등한 현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계 마법으로 케빈의 추격을 떨쳐 내더니, 9개의 서클이 미친 듯이 폭주하며 하나의 마법을 발현했다.
“라이트닝 퍼니쉬먼트(Lightning Punishment).”
번뜩.
콰콰콰콰콰콱!
번개 다발이 내리쳤다.
케빈의 존재를 집어삼키는 그 공격에, 이번만큼은 충분한 타격을 입히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확-
번개를 뚫고.
케빈이 나타났다.
전투가 격렬해질수록, 서로 공방을 주고받을수록.
케빈의 눈빛이 붉게 물들었다.
귀혼마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리고도 이성을 통제하며, 그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움직임을 보였다.
콰앙!
콰르르르르르릉.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을 시작으로 1초 만에 수십 번의 번개 공격이 작렬했지만, 케빈은 득달같이 따라붙으면서도 모든 공격을 흘려보냈다.
그건 김판석조차 쫓아갈 수 없는 속도였다. 블링크로 공간을 이동하며 케빈과의 거리를 떨어트리려고 했지만, 어느 순간 코앞에 나타난 케빈의 존재를 발견했다.
‘천마검법 후반부 이초식.’
번뜩.
콰콰콰쾅!
콰콰콰콰콰콰콱!
마법이 찢겨 나갔다.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드미트리의 악귀.
그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절대자를 쓰러트렸던 결과처럼, 30년 만에 케빈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정말 경악스러운 성장세였다.
대체 어떻게 이 정도로 발전할 수 있단 말인가. 30년의 세월을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천마검법에 투자했음을, 그 노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김판석은 알지 못했다.
팟.
피가 튀었다.
얼굴이 베였다.
김판석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패배한다.’
고로.
“항복! 항복할게!”
흠칫.
케빈이 멈추었다.
갑작스러운 항복 선언에, 케빈이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김판석을 바라보았다.
* * *
케빈과의 승부?
중요했다.
어떻게든 승리해 이인자의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지만, 케빈과는 다르게 김판석은 뒷일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제단 스킬로 절대자의 힘을 흡수한다면, 10서클 마법으로 케빈을 쓰러트리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그것은 일회성에 불과해. 다음번에 패배한다면, 이번 승리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아.’
김판석은 먼 미래를 보았다.
본인이 보유한 절대자의 시체는 하나에 불과했다.
그건 비장의 무기였다.
10서클의 영역을 허무는 순간 케빈조차도 무너트릴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김판석에게 중요한 문제는 절대자의 힘을 분석해서 온전한 10서클에 도달하는 것. 분노를 삭였다.
무지렁이에서 알렉산드르로, 알렉산드르에서 백의의 마법사가 되었던 삶의 기간만큼, 미래를 걸고 현실을 베팅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케빈이 사납게 말했다.
“왜지? 아직 전력이 아닐 텐데.”
“전력이 아닌 것은 맞아. 하지만 지금 내 전력을 발현한다면, 나는 두 번 다시 너에게 대적할 수 없겠지.”
사실대로 말했다.
그 또한.
자존심이 상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김판석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며 힘을 잃었지만, 그건 자존심을 달래 줄 명분이 되지 않았다.
짜증이 났다.
그래서일까.
“그냥 이번에는 네 승리를 받아들여. 다음번에 내가 네 자리를 넘본다면, 그때는 장담컨대 내게 이인자의 자리를 내어 주게 될 테니까. 지금은 그 승리를 충분히 즐기라고.”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케빈이 검을 거두었다.
김판석은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지만, 케빈에게 있어 백기를 내건 지금의 결과면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다.
케빈이 웃었다.
“단언하지.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치열했던 이인자 대전.
마침내 그 승부에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었다.
물론 완전한 끝은 아니었다.
김판석과 케빈.
로만 드미트리를 따르는 한, 둘의 악연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5)
그 무렵.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바로 로만 드미트리가 본인이 사용하던 검을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아버지인 로메로 드미트리로부터 검을 선물받으면서, 로만 드미트리는 기존에 사용하던 검을 시장에 내놓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절대자와의 결전은 압도적인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그간의 깨달음을 녹여 낼 새로운 검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이 기존의 검과 이별할 적기라고 판단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품질만으로도 명검(名劍)들을 모두 압살하며, 절대자를 처리했다는 상징성마저 갖추어 미래의 값어치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돈이 좀 있는 사람들로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할지라도, 이번 경매는 반드시 참여해야 할 가치가 있었다.
경매 당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두 세상이 서로 통합되면서, 미국은 가장 먼저 드미트리의 세상을 받아들일 여러 사업을 진행했다. 그중에서 가장 각광받는 영역이 바로 경매였다.
양쪽의 값진 물건들을 구분 없이 내놓으면서,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낙찰을 받겠다고 지폐 다발을 흔들어 댔다.
경매장 안.
한 사내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빌어먹을 아흐메드. 이번에도 날 또 방해할 작정이구나.’
사내의 정체.
왕위룡이었다.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시중에 나왔다는 사실에, 그는 발끝에서부터 전율이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반드시 낙찰받아야 했다.
김판석에게 이인자의 자리를 빼앗기고, 케빈을 상대로는 감히 천마검법을 사용한다고 명함조차 내밀지 못하는 상황.
본인의 유일한 무기인 중국의 지도자라는 강점만이라도 내세워야 했다.
국가 비상령을 내려 여유 자금을 전부 끌어모았고, 호기로운 기세로 이번 경매에 참석했다.
문제는 아흐메드였다.
돈과 관련한 경쟁에서 정말 상대하기 힘든 난적(難敵).
사우디의 국왕으로서 엄청난 부를 확보했기에, 지난 경매에서도 아흐메드를 상대로 패배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소문에 의하면 그날 아흐메드는 발렌티노의 전승자가 되었다고 한다.
엄청난 재력에 수집품에 대한 열망마저 더해졌다면, 억 소리 나는 돈으로는 결판이 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에는 쉽게 당하지 않을 거다. 서로 재력의 뿌리를 뽑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먼저 물러나는 일은 없을 거야. 나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천마의 검을 얻는 것에 사활을 걸었거든.’
숨을 골랐다.
긴장감이 차올랐다.
아흐메드 외에도 익숙한 대부호들의 얼굴이 보였지만, 그들은 크게 견제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사실이 있었다.
‘그 어디에도 발렌티노 공작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발렌티노.
탐욕의 수집가.
아흐메드가 그의 전승 능력을 부여받으면서, 드미트리의 세상에 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왕위룡은 아흐메드보다도 발렌티노의 존재를 견제했다.
재산을 탈탈 털어 드미트리의 검을 낙찰받았다는 그의 화려한 명성(?)은, 웬만한 출혈로는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사전에 인상착의를 충분히 익혀 두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발렌티노의 건강이 악화되어 일선에서 물러났다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발렌티노의 존재를 배제한다면, 이번 경매는 자신과 아흐메드의 이파전일 것이 분명했다.
그때였다.
“지금부터 경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침내.
경매의 막이 올랐다.
* * *
경매장의 마스터가 말했다.
“이번 경매 물품에 대해서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이 검으로 절대자의 머리를 베었고, 앞으로의 밝은 미래를 축복하기 위해 광명(光明)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이셨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경매 물품을 다루었던 제가 단언하겠습니다. 단순히 이 검이 지닌 상징성을 떠나서, 광명은 그 어떤 명검보다도 가장 압도적인 품질을 갖추었습니다.”
경매에 사용되는 화폐.
대한제국의 원(won)이었다.
금화를 사용하는 드미트리 또한, 통합 과정에서 차츰 지폐를 사용하는 방식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스터가 소리쳤다.
“자, 경매의 시작가는 100억입니다. 낙찰을 원하시는 분은 표식을 들어 주십시오!”
100억.
엄청난 액수였다.
경매장에서도 시작가를 이렇게 높게 잡는 경우는 없건만,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방에서 신호를 보내왔다.
착.
차차차착.
모두 100억을 호가하겠다는 신호였다.
마스터는 당연한 반응이라는 듯이, 빠르게 신호를 읽어 경매를 진행했다.
“100억, 200억, 300억, 400억, 500억, 지금부터는 1000억 단위로 호가를 받겠습니다. 1000억, 2000억, 3000억…… 아, 지금 32번이 1조 원을 호가했습니다! 경매 시작 10초 만에, 무려 1조 원이 책정되었습니다!”
1조.
살벌한 액수였다.
아무리 돈이 많은 대부호라고 할지라도, 1조라는 돈은 함부로 사용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32번은 왕위룡이었다.
그는 어중이떠중이들을 모두 떨쳐 내기 위해, 그리고 확실하게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베팅을 걸었다.
‘자, 지금부터는 꾼들끼리 한바탕해 보자고.’
경매는 멈추지 않았다.
1조라는 액수에도, 보란 듯이 호가를 부르는 존재가 있었다.
“19번이 2조를 호가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32번이 10조를, 아아아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19번이 20조를 호가하며, 광명을 반드시 낙찰받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상대로였다.
아흐메드.
그가 문제였다.
19번을 달고 있는 그가 집요하게 따라붙더니, 오히려 낙찰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표출했다.
‘빌어먹을 새끼.’
왕위룡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20조가 넘어서는 순간부터 이건 별들의 전쟁이었지만, 이렇게 물러나려고 이번 경매에 참석한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조 단위 싸움으로 결판이 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흐메드는 사우디의 국왕으로서 막대한 부를 갖추었지만, 중국의 지도자인 왕위룡도 밀리지는 않았다.
세계적인 강대국.
특히 다른 나라들보다 빨리 대한제국을 따르면서, 중국은 상당한 부와 명예를 갖추었다.
왕위룡은 전력을 끌어모았다.
자신의 위치에서, 중국의 지도자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을 이 경매에 모두 쏟아부었다.
착.
하나의 표식.
그것에 마스터가 기절할 듯이 소리쳤다.
“으아아아아아아, 100조입니다. 무려 100조가 나왔습니다. 경매 역사상 이런 말도 안 되는 금액은 처음입니다!”
“이런 미친.”
아흐메드가 고개를 홱 돌렸다.
그로서도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출혈 경쟁을 벌인다고 할지라도 수십조의 단위에서 끝날 줄 알았건만, 왕위룡은 경매를 끝으로 나라를 말아먹을 작정인지 100조라는 말도 안 되는 금액을 불렀다.
그때부터 아흐메드는 고민에 빠졌다. 그만한 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겨우 검 하나를 낙찰받겠다고, 무려 100조라는 돈을 이번 경매에 투자해도 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치솟았다.
그 모습에.
‘끝났다.’
왕위룡이 웃음을 삼켰다.
경매장에서의 고민은 패배를 의미했다.
스스로 불신하는 순간, 천문학적인 액수를 베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 호가하실 분 없으십니까? 그럼 지금부터 5초의 카운트를 세겠습니다. 5초 안에 더 높은 금액을 말씀하는 분이 없다면…….”
그때였다.
“200조.”
순간.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런데 시선이 머문 그곳에는, 난생처음 보는 인물이 담담한 얼굴로 표식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 * *
며칠 전.
발렌티노 가문에 비상이 걸렸다.
노쇠해 늙어 버린 발렌티노 공작은, 시름시름 앓는 얼굴로 자식들을 불러모아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이 아비의 목숨은 얼마 남지 않았다. 많아야 일이 년, 그 이후에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그동안 너희가 내게 가진 불만은 잘 알고 있다. 일부 재산을 나누어 너희가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지만, 정작 발렌티노 상단은 그 누구에게도 물려주지 않았지.”
드미트리.
아니, 대륙 제일의 거부.
발렌티노는 정말 천문학적인 재산을 모았지만, 죽음을 앞둔 지금도 상속 대상을 정하지 않았다.
자식들은 얌전히 기다렸다.
괜히 욕심을 부렸다가는 본전도 찾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지난 30년이 흐르는 동안 묵묵하게 본인의 위치를 지켜 왔다.
그리고 지금. 발렌티노 공작이 처음으로 상속에 대해 언급했다.
여섯 명의 자식.
그들은 그 의미를 알았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의 자식으로서 상당한 부를 갖추었지만,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와는 상관없이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은 단 한 명이 앞으로 상계를 휘어잡는 거물이 되겠지.’
‘반드시 내가 상속받고야 말겠어.’
‘아버지!’
다들 열망에 찬 눈빛을 보였다.
아버지를 닮은 자식들로서는, 아버지를 따라 대륙 제일의 거부가 되겠다는 야망을 마음에 품었다.
자식들의 눈빛.
발렌티노는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는 항상 자식들이 탐욕이 있는 삶을 살기를 바랐다.
발렌티노 공작이 말했다.
“이제 나는 발렌티노 상단을 물려받을 상속자를 결정하고자 한다. 조건은 단 하나.”
꼴깍.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켰다.
병상에 누워 있는 노인을 중심으로 모여 있는 남녀의 모습은, 참으로 가관이라고 할 만한 풍경이었다.
차오르는 긴장감.
경매장에서 호가되는 수백조의 돈보다도, 발렌티노가 내뱉는 말 한마디가 더 중요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검을 낙찰해 오는 자식에게, 내 전부를 물려주겠다.”
그 순간.
자식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왕위룡과 아흐메드는 진실을 알지 못했다.
발렌티노의 참전.
이번 경매는 둘의 이파전이 아니라, 발렌티노의 집안싸움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200조는 시작에 불과했다.
그동안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발렌티노의 자식들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매섭게 호가를 몰아쳤다.
“250조!”
“300조!”
“나는 350조!”
표식을 들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마스터로서도 당황한 얼굴로 땀을 흘려댔다.
한 번에 50조씩 호가되는 경매를, 아니 애초에 100조 이상으로 낙찰되는 경매조차 경험해 보지 못했다.
발렌티노의 자식들.
그들은 각자가 대륙에서 알아주는 대부호였다.
엄청난 부를 쌓은 그들은 이번 경매에 사활을 걸었고, 그동안 알고 지냈던 인맥의 재력까지 모두 끌어모았다.
그건 순수한 재산이 아닌 레버리지(leverage)를 활용한 재력이었다.
엄청난 액수에 빌려주는 사람들조차 망설일 수밖에 없었지만, 단 하나의 전제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뭐가 문제야? 발렌티노 상단을 물려받으면 다 해결될 문제인데.”
모두가.
발렌티노의 자식들에게 힘을 실었다.
그건 그야말로 세력의 싸움이었고, 각자가 웬만한 국가를 찜 쪄 먹을 재력으로 호가를 외쳐 댔다.
“400조!”
“450조!”
“500조!”
그 중심에서.
왕위룡은 넋을 잃었다.
현기증이 일었다.
한 300조 정도에서 호가를 선언해 보려고 했지만, 겨우 몇 초 사이에 500조까지 치솟아 오르는 금액에 손만 움찔거리고 표식은 들지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정말 이것이 아니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달려드는 사람들을 상대로, 그에게 승산은 조금도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마침내 낙찰가가 결정되었습니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명검은 950조라는 천문학적인 액수에, 발렌티노 가문의 장자인 샤르넬 발렌티노가 낙찰받습니다!”
“예쓰으으으으.”
벌떡 일어나는 사내.
기뻐 날뛰는 그의 모습에, 왕위룡은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하아.”
천마를 만난 날.
자신은 시대를 잘 타고났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천마를 기다려 왔던 왕씨 가문은, 로만 드미트리를 만남으로써 그 존재 의미를 보상받았다.
그리고 지금.
“인생 진짜 X 같네.”
이인자 자리를 빼앗기고.
천마검법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광명마저도 눈앞에서 강탈당하고 말았다.
역시나 행복은 상대적이었다.
중국의 황제이자 손에 꼽히는 권력자인 왕위룡이지만, 그는 정말 이번 생이 불행하다고 생각했다.
* * *
드미트리의 장례식.
김판석의 재판.
광명의 경매 등등.
두 차원이 통합되고 여러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시간도 빛처럼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년.
세상에는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에필로그, 끝이 아닌 시작 (6)
마지막 대재앙 이후.
3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한제국 사람들은 그때의 악몽을 극복한 모양인지, 평화롭고 일상적인 하루에 녹아들었다.
“아씨, 늦었네.”
한 사내가 표정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는 헐레벌떡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예전에는 단순한 출퇴근용으로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텔레포트 마법진을 찾았다.
[텔레포트 설정] [정기권 회원] [목적지 강남으로 이동하겠습니다.]확-
사내가 밝은 빛무리에 휩싸였다.
그야말로 마법 혁명이었다.
예전에도 텔레포트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드미트리의 마법 기술을 전수받으면서부터 마법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다.
지금은 텔레포트를 대중교통으로 사용하는 시대가 도래했다. 덕분에 빠르게 강남에 도착한 사내는, 입사 첫날부터 회사에 늦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해 달렸다.
그의 머리 위로.
거대한 전광판이 보였다.
전광판의 존재는 세상이 얼마나 안전한지를 증명했으며, 전광판 화면에서 실시간으로 뉴스가 보도되었다.
[최근 피닉스 마탑에서 진행되었던 ‘균열 실험’이 매우 고무적인 성과를 얻었다는 소식입니다. 절대자의 죽음으로 차원의 균열이 심각해지면서, 드미트리는 그동안 세계수의 마력을 불어넣어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인 해결책일 뿐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지적들이 많았는데, 이번 실험을 통해 대마법사 펠릭스는 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확신한다고 발언했습니다. 한편, 미국과 헥토르가 관광 산업을 체결하면서…….]세상이 변했다.
마법이 일상이 되고.
대한제국은 새로운 세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건 당연하게도 드미트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현상이었다.
-드미트리 제국-
“으아아!”
“이런!”
“저 멍청한 새끼는 왜 저기서 헛발질이야!”
옹기종기 모인 사람들.
그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들은 거대한 TV 화면을 통해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잉글랜드 프로 리그였다.
“내가 보기에는 구단주 새끼를 당장에 쫓아내야 해. 아니, 이따위 멤버로 대체 어떻게 시즌을 치르려는 생각인 거지? 단언컨대 시즌 중반이 지날 즈음에는 이보다 문제가 심각해질 것이 분명해.”
“옳소!”
“우리 같은 일반인도 아는 문제를 대체 왜 수뇌부들은 모를까?”
차원 너머의 문화.
축구 리그가 드미트리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TV야말로 현대 문명의 산물이었고, 그 외에 현대식으로 발달한 건물과 다양한 기계들이 두 세상의 조화를 증명했다.
물론 처음에는 혼란스러운 시기가 존재했었다. 워낙 다른 방향으로 발달한 세상이니만큼, 같은 인간일지라도 서로를 외계인을 보듯이 바라보았다.
하지만.
금방 현실에 적응해 나갔다.
로만 드미트리가 상황에 맞는 정책을 펼쳐 나가며, 두 세상이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기술의 교류.
문화의 교류.
서로의 장단점이 맞물렸다.
특히 화폐로서의 단점이 지적되던 금화를 폐지하고, 지폐를 받아들이면서 화폐 혁명도 일어났다.
세상이 빠르게 변했다.
30년을 기다려 왔던 사람들에게는 겨우 3년에 불과하겠지만, 실질적인 변화는 30년을 압도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도 존재했다. 모두가 변화를 달갑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단 하나의 사실만큼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인류는 평화를 되찾았다.’
3년 후의 현재.
사람들은 평화가 일상인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 * *
드미트리의 연무장.
그곳에서 한참 대련이 진행되었다.
금발의 중년이 머리칼을 팔락이며 달려들자, 로만 드미트리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상대의 공격을 받아 냈다.
파앗.
카카카카카캉!
빨랐다.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빠른 검술이었고, 금발의 중년은 로만 드미트리를 집어삼키겠다는 듯이 공격의 속도를 높였다.
확실히 드미트리의 섬광다운 모습이었다. 금발의 중년, 크리스는 일선에서 물러나며 일반인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검술 수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이번 대련.
3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한번 상대해 달라는 크리스의 부탁에, 로만 드미트리는 기꺼이 받아 주었다.
결과는 뻔했다.
크리스는 나름대로 선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만 드미트리의 검이 목에 겨누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도 분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검을 거두며 두 손을 들었다.
“항복입니다.”
“그래도 제법이구나, 크리스. 처음 나를 만났을 때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엉망이었는데 말이지.”
“왜 옛날얘기를 하고 그러십니까.”
로만 드미트리가 피식 웃었다.
크리스와의 첫 만남.
평범하지는 않았다.
드미트리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던 크리스는 로만 드미트리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대놓고 엿을 먹이려는 의도로 로만 드미트리와의 대련을 진행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던 크리스의 모습. 만약 그때의 일을 악의로 품었다면, 지금의 크리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법이라는 말.
진심이었다.
크리스의 검술은 드미트리의 그 누구보다도 날카로웠다.
크리스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황제 폐하. 다른 건 다 좋은데, 나중에 제 아들을 만날 때는 첫 만남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주십시오. 그래도 드미트리의 섬광이라고 불리는 아비인데, 된통 당해서 널브러졌다고 말한다면 꼴이 우습지 않습니까. 게다가 저도 아들에게 허풍을 조금 쳤단 말입니다.”
“그건 네 문제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3년.
로만 드미트리는 국정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면서도, 크리스와 같은 사람들과의 시간을 흘려보내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케빈과 따로 시간을 보냈다. 빈민가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들을 추억하는 가벼운 자리였지만, 케빈과 로만 드미트리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떠들자.
한나가 다가와 말했다.
“황제 폐하. 오전에 요청하신 책을 가져왔습니다.”
그녀의 말에.
로만 드미트리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 * *
그늘 밑.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한나가 구해 온 책을 확인하자, 고풍스럽게 꾸민 겉표지에 책의 제목이 보였다.
[드미트리를 빛낸 위대한 영웅들. 저자, 헨리 앨버트.]“참 한결같은 사람이야.”
웃음이 나왔다.
헨리 앨버트.
베스트셀러의 저자로도 유명한 그는, 로만 드미트리의 복귀 이후 ‘드미트리 아카데미’를 설립했다.
그 결과는 대성공. 이미 교수로서 압도적인 스펙을 가지고 있는 만큼, 드미트리는 물론이거니와 차원 너머의 세상에서도 자식들을 드미트리 아카데미에 보내겠다고 성화를 부렸다.
문득 궁금했다.
최근 엄청난 관심을 받는 이 책.
드미트리의 영웅들을 기록했다는 이 책에, 과연 어떤 내용이 기록되어 있을지.
팔락.
책장을 넘겼다.
아직 본문은 나오지도 않았건만, 로만 드미트리는 저자의 소개를 확인하자마자 실소를 터트렸다.
[저자, 헨리 앨버트]: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출간한 명실상부 이 시대 최고의 교육자. 사람들은 헨리 앨버트 교수와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냈던 남부 전선의 동료였으며, 앨버트 가문은 드미트리의 삼남인 로렌 드미트리와 결혼했고, 무엇보다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드미트리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해냈다. 사람들에게 묻겠다. 과연 이 세상에서 헨리 앨버트 교수만큼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삶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존재가 있는지를. 지금부터 이 책을 통해, 드미트리의 역사를 알아보고자 한다.
틀린 말은 없었다.
특히 차원 너머에 로만 드미트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이후, 헨리 앨버트의 입지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드미트리 학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불렸다. 남의 손길을 빌린 저자 소개는 낯부끄러운 말들이 많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이걸 보며 전혀 웃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 감격했다.
헨리 앨버트의 시작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는 정말이지 위대한 인물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었다.
책장을 넘겼다.
그러자 여러 인물의 소개가 나왔다.
그것을 간략하게 추린 내용은 이러했다.
[다니엘 카이로]:현재 사람들은 카이로 국왕이 한때 ‘허수아비 국왕’이라 불렸다는 사실을 듣는다면 경악할 것이다. 지금은 카이로를 강국(強國)으로 만들며 카이로의 거인이라고 불리는 다니엘 카이로지만, 그에게도 아픈 시절이 있었다. 지난 30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자리를 비웠을 때, 대륙을 지탱한 세 명의 지도자가 있었다. 드미트리의 로드웰 드미트리, 카이로의 다니엘 카이로, 헥토르의 에드윈 헥토르. 그중 유일하게 아무런 기반이 존재하지 않았던 다니엘 카이로는 오로지 지도력만으로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해 냈다. 만약 그가 드미트리에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이지 않았다면, 분명히 지난 30년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팔락.
[발렌티노 공작]: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상인. 사람들이 그를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갖춘 재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는 막대한 부를 쌓으면서도 드미트리를 향한 지원을 멈추지 않았다.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가 돌아와야 경제가 살아난다고 말하며, 매년 천문학적 액수의 돈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부했다. 하지만 이제는 고인이 되어 버린 발렌티노 공작의 진실을 아는 사람들은 다르게 말할 것이다. 드미트리를 향한 그의 호의는 진심이지만, 그가 그렇게까지 부를 축적한 이유는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의 검을 모으기 위함이었다. 공백의 30년.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기다리다 감당하지 못할 만큼 재산을 쌓았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탐욕의 수집가는 그 명성에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단언컨대 도굴꾼들에게 발렌티노의 묘는 군침이 도는 먹잇감일 것이다. 3년 전에 950조에 낙찰받았던 광명과 더불어 그의 컬렉션 전부가, 그와 함께 잠들었다는 소문은 아마도 소문으로 끝날 이야기는 아니라고 확신한다.
팔락.
[파비우스 후작]:드미트리를 대표하는 다산(多産)의 상징. 로만 드미트리 황제 폐하를 따라 혁혁한 공을 세운 그는, 하렘을 건설한 이후로 수많은 첩을 두었다. 그녀들 사이에서 무려 98남 79녀를 낳았으며, 아직도 정정한 그의 정력에 이대로 30년만 더 지나면 파비우스의 자손들로 일국을 세울지도 모른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본 저자가 직접 만나 본 결과, 그건 소문으로 치부할 이야기는 아니다.
팔락.
책장을 계속해서 넘겼다.
과거를 기억하게 하는, 지난 30년의 세월을 알려 주는 이야기에 로만 드미트리도 추억에 잠겼다.
재밌었다.
사람들이 왜 말장난 같은 이 책에 열광하는지를, 책의 주인공인 로만 드미트리조차 이해가 될 정도였다.
책에는 다양한 사람이 언급되었다.
세 인물 외에도 로만 드미트리와 관련한 모든 인물이 거론되는 상황에, 헨리 앨버트는 지금과 같은 부와 명예를 누를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망해 가는 귀족 가문 망나니에 불과했던 존재. 자신처럼 천마라는 전생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그는 스스로의 무기를 만들어 갔다.
인정했다.
그의 존재를.
그가 뭐라고 떠들든, 로만 드미트리가 제지하지 않는 이유였다.
물론 슬슬 간을 보다가 이제는 폭주 기관차처럼 폭주하는 모양새였지만, 그것 또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책을 거의 다 읽어 갈 무렵.
이번에도 한나가 찾아와 말했다.
“저녁이 준비되셨답니다.”
책을 덮었다.
기다렸던 순간에, 로만 드미트리는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 * *
드미트리로 돌아오고.
리한나 드미트리의 강력한 주장으로, 드미트리 가문은 1년에 한 번 만찬(晩餐)을 준비했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부모님이 직접 요리하는 자리에, 소중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했다.
“위험하십니다. 음식은 제가 옮기겠습니다!”
“아버지! 그러다 허리 나가십니다!”
“매년 먹는 음식이지만, 이번에도 정말 맛있어 보이는데요?”
파티장 안.
익숙한 광경이 펼쳐졌다.
조나단, 크리스, 케빈, 로드웰 드미트리, 로렌 드미트리, 플로라 로렌스, 펠릭스, 한나 등등.
매년 만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하인들의 도움을 받지 않는 만큼 직접 움직였고, 음식들을 나르는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로만 드미트리도 그들을 도왔다.
처음 만찬을 진행했을 때는 다들 기겁하며 황제를 말렸지만, 로만 드미트리가 부모님을 모시는 자리라고 말하자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였다.
모두가 힘을 합쳤기 때문일까. 금방 상이 마련되었다.
자리에 앉았다.
사람들을 대표해, 리한나 드미트리가 말했다.
“매년 이렇게 참석해 주어서 고마워요. 우리 장남인 로만이를 30년 동안 기다리면서, 소중한 존재와의 시간을 뒤로 미루지 말자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러니, 이 자리를 여러분 모두 즐겨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끝으로.
만찬이 시작되었다.
그건 예의를 갖춘 자리가 아니었다.
조용하게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닌, 다들 왁자지껄 떠들면서 과거의 이야기를 회상했다.
“아니, 제가 그랬다고요?”
“그랬다니까!”
“껄껄껄, 웃긴 사람일세!”
그 중심에서.
로만 드미트리는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따뜻한 김을 모락모락 피워 내는 음식을 바라보았다.
만약에 누군가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백중혁은 죽지 않기 위해 투쟁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로만 드미트리에게 똑같은 질문을 해 온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이 상황.
이 순간.
이 일상적인 즐거움을 위해, 자신은 살아가는 것이라고.
로만 드미트리는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 사이에 녹아들었다.
– 2부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