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venly demon will gives you a massage RAW novel - Chapter (309)
천마님 안마하신다-309화(309/309)
천마님 안마하신다 309화
순간, 핏빛으로 물든 세상에 변화가 생겼다.
당장에 천지개벽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핏빛만이 존재하던 어두컴컴한 세상에, 희미하게나마 빛이 내리쬐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곳은 강태한의 심상, 그 자체.
찰나의 고뇌에도 마음이 무너질 수 있지만… 반대로, 작은 결심만으로 심상 그 자체에 직접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는 곳이다.
흐르는 강물은 여전히 짙은 핏빛이다. 하지만 그 외의 다른 것들은… 아주 조금씩이지만, 희미하게나마 본래의 색상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잠시 후, 강태한의 몸이 떠올랐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때는 상황을 이해하기도 전에 의식 바깥으로 튕겨 나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저… 한없이 몸이 가벼울 뿐이었다. 희미한 빛이 그의 몸을 감싸안았다. 강태한은 오랫동안 얽매여 있던 고뇌(苦惱)에 해답을 내렸고, 이제는 자신의 의지로 이곳을 떠나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준비가 된 모양이구나.”
흐릿하게 울리던 목소리는 어느새 선명해져 있었다.
형태를 감추고 있던 뿌연 안개도 걷혀있었고, 덕분에 강태한은 그의 모습을 또렷이 볼 수 있었다.
“…스승님.”
오랜 기억 속에만 존재하던 은인의 모습.
그는 떠오르는 강태한을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곳은 심상세계. 그의 생각이 만들어 낸, 허상의 존재일지 모른다.
허나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강태한은 스승에 대한 예를 올렸고, 그를 지켜보던 스승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마지막 인사를 받아 주었다.
* * *
“아니, 그래서 이대로 내버려 두고 계셨다고요?”
“어쩔 수 없잖아. 먼저 철수할 수도 없고.”
“철수가 아니라 억지로 대피시켰어야 했다는 뜻이죠! 있어 봐요, 제가 업고 나오겠습니다.”
“어어, 이 사람이? 안 된다니깐……?”
아직 대피하지 않은 민간인을 두고 구조대원들이 옥신각신하고 있던 와중,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 민간인, 강태한에게로 집중되었다.
먼저, 강태한의 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생명력과 따스함이 느껴지는 듯한, 선명한 초록빛이었다.
이윽고 그 앞에 누워 있던 최성현의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강태한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으며, 몸에 감싸여 있던 초록빛은 그 궤도를 따라 흘러가 최성현의 몸을 감싸안기 시작했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신비로운 광경이기도 했으나, 그 어떤 방해도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감쌌던 빛이 서서히 희미해져 가고.
마침내 최성현의 몸이 다시 땅으로 내려온 순간.
“어… 뭐야?”
최성현이 천천히 눈을 뜨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강태한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다, 조그맣게 한숨을 쉬며 웃음을 터트렸다.
“에휴, 운도 지지리도 없는 새끼. 있을 데가 없어서 무너지는 터널 속에 있냐?”
“뭐? 이 자식이… 으어어억!”
살짝 몸을 일으키려 했을 뿐이었으나, 전신에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근육통. 그 고통에 최성현이 절규와도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와도 같은 비명이었다.
* * *
삑.
짧은 전자음과 함께, 한참 뉴스가 나오고 있던 티브이 화면이 캄캄해졌다. 그와 동시에 쇼파에 누워 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아, 황 전무! 남이 잘 보고 있는 티비를 왜 꺼?”
“아니, 성훈 씨. 이미 천마안마 사람들 다 알고 있는 소식인데 왜 또 그걸 뉴스로 듣고 있어?”
“우리끼리 이야기하는 거랑 뉴스로 보고 듣는 거는 느낌이 또 다르지! 안 그래?”
“미안하지만 나는 당분간 올림픽의 ‘올’ 자도 듣기가 싫네요. 여기 좀 봐 봐. 아직도 처리해야 할 일이 이렇게 남았는데, 내가 티브이로도 저걸 듣고 있어야겠어?”
황 실장… 아니, 황 전무가 안경을 고쳐 쓰면서 테이블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온갖 곳에서 들어온 일거리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정말 왜 이렇게 일거리들이 많은지.
이제 막 추진되기 시작한 해외지부와 분점들은 물론이고, 개업을 시작한 곳, 꽤 시간이 지나 자리를 잡고 이미 안정적으로 운영을 하고 있는 곳에서도 일감이 쉴 새 없이 밀려들어 왔다.
다만 가장 결정적인 건 올해 열리게 되는 올림픽!
이야기 자체는 예전부터 나왔었고, 정식으로 협력업체가 된 지도 꽤 시간이 지난 상태였지만, 이렇게 개최 직전이 되니 몇 배로 일거리가 늘어나 버렸다.
“뭐… 이젠 아래에 직원들도 많잖아? 그 사람들한테 맡기고 좀 쉬면 안 되나?”
“책임자는 나잖아. 그리고 그 많은 직원이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나마 이만큼이 남은 거라고.”
황 전무는 손을 휘휘 저으면서 답했다.
확실히, 직원의 숫자는 많이 늘어났다.
예전에는 천마안마의 본점에서 대부분의 일거리를 처리했지만, 새 건물로 옮기고 팀을 따로 옮긴 이후에는 깔끔하게 분리가 된 상황이었다.
안마는 안마원에서, 지원 및 관리는 회사에서.
물론 당시에는 제법 혼란스러운 부분도 많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그래도 자리를 잡아, 제법 제대로 된 회사 느낌이 나고 있었다. 규모도 많이 커졌고 말이다.
사실 당연한 일이기는 했다.
처음 인도 지부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것부터 시작해서 영국, 미국, 중국과 브라질 등, 그야말로 세계 곳곳에 해외 지부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지금 진행되고 있는 대형 프로젝트만 열 손가락을 넘어가고 있었다.
사업의 규모는 말 그대로 글로벌. 굴리는 돈의 규모도 어마어마해졌다. 그걸 감당하기 위해서라도 회사가 커져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보면, 황 실장에서 황 전무가 되었는데도 딱히 하고 있는 짓이 크게 바뀐 것 같지는 않네.”
“하… 짜증 나는 소리인데 반박을 못하겠네.”
덕분에 번지르르한 직급을 달았지만, 매일같이 업무에 시달리는 것은 여전한 황 전무였다. 그는 들고 있던 볼펜을 내려놓고 기지개를 펴며 말했다.
“그래도… 아무래도 올림픽 시작하고 나면 좀 한가해질 테니까. 그때까지만 버텨야지.”
“몸이 좀 찌뿌둥해? 안마 한번 해 줄까?”
김성훈이 앞으로 살짝 손을 뻗는다. 순간적으로, 그물의 형태를 한 기감이 한 차례 황 전무의 몸을 훑는다. 그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뭉쳐 있는 곳은 없는데?”
“당연하지. 여기가 어딘데? 천마안마 본사잖아. 여기도 안마사들은 항상 대기 중이지.”
“아… 그것도 그렇네.”
김성훈은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피식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났는지 새삼스런 말을 입에 올렸다.
“그때 말이야…….”
“그때 언제.”
“태한 씨 따라가길 정말 잘했다.”
“아아…….”
황 전무는 씨익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렇지. 그리고 그 태한 씨를 가장 먼저 알아보고 붙잡았던 게 바로 나, 이 몸 아니겠어.”
“에이, 또 헛소리.”
“헛소리는 무슨! 원래 아르바이트로 잠깐 일하러 왔었던 거, 내가 프리미엄 붙이고, 정산 비율도 올려 가지고 따로 잡아 온 거라니깐?”
“그래그래.”
이미 듣고 또 들은 내용이다.
김성훈은 손을 휘휘 흔들며 다 알겠다는 시늉을 하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 * *
“어, 진짜? 그럼 성현이 너도 오는 건가?”
“응. 그렇게 결정이 됐네.”
한참 도로 위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 안.
되묻는 정가인의 말에, 최성현은 그렇게 답했다.
“간단한 행사도 아니고 무려 올림픽이잖아. 같이 처음으로 일하는 만큼 힘도 빡! 주는 게 좋으니까… 태한이가 직접 움직이진 않아도, 나 정도는 가 주는 게 아무래도 모양새가 좋지.”
천마안마의 안마사들은 모두 기감을 다루며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강태한과 최성현은 격을 달리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 한 명이 직접 파견된다는 건, 단순히 실력 좋은 사람을 보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만큼 중요히 여기고 공을 들인다는 상징적인 의미이기도 했다.
“흐음… 그렇구나.”
“왜? 신경 쓰이나?”
“당연히 신경 쓰이지! 현지에서도 성현이 보고 싶어지면, 언제든지 보러 갈 수 있는 건데, 후후.”
정가인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럼 거기서 특별안마도 받을 수 있겠다.”
“…아니, 아무리 너라도 안마는 사전에 정해진 대로만 해 줄 거야. 최고의 컨디션을 낼 수 있는, 딱 그 정도로만.”
천마안마의 안마사라 해도 다 같은 실력인 것은 아니다. 막말로 이제 막 아카데미 수료를 마친 안마사와 강태한이 안마를 한다면, 그 효과는 터무니없이 차이가 날 테니까 말이다.
평소에는 상관이 없는 문제지만… 올림픽과의 협력이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공정한 대결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때문에 그 기준은 명확하게 정해 둔 상태였다.
경기에 임할 때 최상의 컨디션으로 임할 수 있는, 딱 그 정도. 얼핏 두루뭉술해 보이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다. 전신의 근육을 풀어 주고 막혀 있는 기혈을 뚫어 주는 것. 딱 여기까지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이 기준은 그의 연인인 정가인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조금 서운할 수도 있겠지만, 최성현은 딱 잘라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 그런 이야기 한 거 아닌데?”
다만 정가인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뭔데?”
“그 있잖아. 저번에 해 줬던 특별안마. 그거 말하는 거였는데.”
최성현은 운전대를 잡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문득 그녀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닫고는, 오른손으로 가볍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고개는 돌리지 않았지만, 그녀가 무슨 표정을 하고 있을지 뻔히 보였다.
“왜 귀가 빨개졌지?”
“나 원래 귀 빨개.”
“아니었는데?”
최성현은 일부러 시큰둥한 목소리로 답하며 얌전히 전방을 주시했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슬며시 속도를 줄이며 물었다.
“잠깐 차 좀 세울게?”
“음? 아… 그래, 다녀와.”
비상등을 켠 채 구석진 곳에 세워져 있는 자동차.
딱히 사고가 난 건 아닌 것 같고… 차체가 기울어진 것을 보아하니, 차가 도랑에 빠져 있는 모양이다. 차에서 내려 다가가 보니, 아니나 다를까 측면의 배수로에 한쪽 바퀴가 빠져 있는 상태였다.
“좀 도와드릴까요?”
“아이고, 말씀은 감사한데, 꿈쩍도 안 해요. 누가 여기 뚜껑을 부숴 놨는진 몰라도 그냥 쏙 들어가더니, 그대로 꽉 끼어서 옴짝달싹을 않네요.”
조급한 듯 옆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던 차주는, 최성현에게 말도 말라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오늘 아들놈 결혼식인데…….”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뭐… 안 될 건 없죠.”
본다고 물어보긴 했지만, 최성현은 바퀴가 빠진 곳으로 가더니 곧바로 양손으로 차체의 밑바닥을 붙잡았다.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읏차.”
곧바로 번쩍, 하고 들리는 차체.
어떻게 된 건지 들어 올린 부분뿐만 아니라 차 전체가 들리더니, 이내 도랑이 없는 도로 안쪽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올려졌다.
“이제 괜찮을 것 같네요.”
“어, 어… 감사합니다……?”
최성현은 탁탁 손을 털며 자신의 차로 걸어갔고, 남자는 어안이 벙벙한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는지, 그를 불러 세우며 외쳤다.
“선생님, 그 사람이죠? 몇 년 전에 뉴스에서 나오던, 그 왜, 무너지는 터널을 들어 올렸다던 그 사람!”
“아… 예. 맞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최성현은 머쓱한 표정으로 멈칫했으나, 그래도 제법 익숙한 듯 능숙하게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 * *
천마안마.
그 이전부터 빠른 속도로 인지도를 넓혀 가고 있던 중이었으나, 올림픽과의 공식 협력을 시발점으로 요 몇 년간 그야말로 전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었다.
더군다나 한 번이라도 방문을 해 본 이들에게, 천마안마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신뢰는 절대적이었다.
가게의 안마사들은 모두 따로 운영되는 전문 교육 시설에서 수료를 받으며, 기존 체계의 안마 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기감(氣感)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활용하는, 그야말로 다른 곳에선 느껴 볼 수 없는 차원이 다른 안마라는 평가.
처음에는 이러한 평가를 보더라도 ‘설마 그 정도일까’라는 생각으로 찾아오지만, 언제나 그 이상을 맛보게 된다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업계에서 일컫기를, 안마 문화를 확장시키고 열풍을 일으킨 선봉이요, 심지어 현대인들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린 건강관리의 혁명이라고까지 불리니, 그야말로 극찬을 받고 있는 중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천마안마의 사장이자 창립자로 알려진 강태한은… 그야말로 수많은 전설을 지닌 존재.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우며, 오랫동안 앓아 왔던 불치병 환자도 한순간에 쾌유시켜 버리고, 심지어 죽은 사람조차도 되살린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과장된 헛소문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이었으나… 달리 생각하면, 그런 소문이 돌 정도로 강태한이란 안마사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기도 하리라.
다만, 그런 소문들과는 별개로.
강태한 본인은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 * *
“아버지, 요즘 일은 좀 어떠세요?”
[아유, 너무 잘돼서 탈이지. 찾아오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수타면만 뽑다가 하루가 끝난다니깐?]아버지의 말에 강태한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 강호연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쾌활하였다. 그 목소리의 어조만 들어도 거짓 하나 없는 진실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좋아 보여서 다행이네요.”
[다 네 덕분이지, 뭐. 하하! 저번에 보내 준 인삼차, 브레이크 타임마다 직원들이랑 잘 마시고 있다. 다들 기운이 펄펄 난다고 야단들이야.]“다음에 또 보내 드려야겠네.”
[됐다. 정~말 남아돌면 그때나 좀 보내 줘.]“남아도니까 이런 말을 하죠.”
[하하, 그러냐?]오랜만의 아버지와의 통화.
내용은 자체는 거의 항상 비슷하게 이어지는 잡담이지만, 그래도 기뻐하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 보면 언제나 미소가 지어진다.
“아버지,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어, 그래. 일 좀 쉬엄쉬엄하고.]그러다 어느 기척을 느끼고는, 통화를 마무리하고 슬슬 나갈 준비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머지않아 직원이 노크를 하고 원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원장님, 손님이 좀 일찍 오셨는데요.”
“예. 바로 가겠습니다.”
안 그래도 준비를 마쳐 둔 참이었기에, 강태한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스로 얽매여 있던 오랜 고뇌를 깨트리고 난 이후.
강태한은 생사경(生死境)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제 막 입구에서 한 발자국 내밀었을 뿐이긴 해도 분명 다음 경지에 들어섰다.
그 이름 그대로 생사(生死)를 초월하는 경지.
느낄 수 있는 의식의 영역이 달라지게 되고, 세상을 바라보고 느끼는 관점 또한 한층 달라졌다. 분명, 많은 것이 바뀌었다.
다만… 그의 일상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천마안마를 순조롭게 키워 나가고 있었고, 강태한 본인은 한 명의 안마사로서 직접 손님을 받아 가며 안마를 하고 있었다.
거창한 일을 할 필요는 없다.
대단한 사명감을 짊어질 필요도 없다.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보내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천천히 걸어갈 뿐이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하다.
적어도 지금의 강태한에겐 그것이 가장 만족스러운 생활이었으며, 스승의 의지를 잇는… 아니, 이제 자신의 꿈이 된 목표를 이루는, 가장 착실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이었다.
“어디 보자…….”
방 안으로 들어선 강태한은 가볍게 기감을 펼쳤다. 그러고는, 손님의 등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려놓았다.
이윽고, 천마안마의 복도에는 평소처럼 고통으로 가득 찬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 * *
무(武)와 협(俠)이 아직 세상의 이치였을 무렵.
그 땅 위에 천마라 불렸던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며 정점에 올라섰으나.
지나온 길을 돌이킬 수 없음을 후회할 뿐이었고.
그 이름만으로도 두려움과 경의를 일으켜 세웠으나.
스스로 그것을 바랐던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토록 위명을 떨쳤던 천마는 어느 날 스스로 은거에 들어가고, 언젠가부터 홀연히 자취를 감춰 어디서도 그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 후로 천 년도 넘는 시간이 흘러간 뒤.
오랜 시간 방황했던 천마는, 그곳에서 비로소 자신이 걸어갈 새로운 길을 찾아내었으니, 이윽고 그 이름은 두려움과 경의가 아닌, 모두의 감사와 존경을 받는 이름으로써 세상에 널리 퍼져나갔다.
– 천마님 안마하신다. 完.
* * *
“짜잔!”
안마를 마치고, 원장실로 되돌아온 강태한.
이번이 마지막 손님이었으니, 이제 퇴근 준비를 하면 되는 상황인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평소와는 완전히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세아 씨?”
일단은 예상치 못한 손님이다.
“갑자기 이게 다 뭔가요?”
그리고 방 안은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다.
안마를 하고 돌아왔으니, 강태한이 자리를 비운 시간은 대략 30분. 엄청 좁지는 않아도 꽤 넓은 공간인데… 그 사이에 어떻게 이런 걸 다 해 놨는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뭐긴요! 깜짝 이벤트지!”
“오늘이 기념일이기는 한데…….”
“어? 태한 씨도 기억하고 있었군요?”
“예. 우리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던 날이잖아요.”
오늘은 10월 24일.
달력을 확인할 것도 없다. 따로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던 건 강태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는 피식 웃으며 쇼파에 앉았고, 유세아는 자연스레 그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아니 전 당일까지 별말이 없길래… 바빠서 잊어 먹고 있는 줄 알았죠. 한참 바쁠 때기도 하고.”
“잊고 있었던 건 아니죠, 당연히.”
강태한은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유세아는 그 말에 빙긋 미소를 짓고는, 테이블 아래에서 케이크를 꺼내 위에 올려놓으며 연이어 말했다.
“뭐 어쨌거나, 저도 막 거창하게 준비한 건 아니에요. 그냥 깜짝 이벤트에, 따로 주문 제작 맡겼던 요 케이크 정도.”
유세아는 별것 아니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왠지 모르게 아무것도 준비를 하지 못한 강태한을 달래는 듯한, 그런 느낌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강태한으로선 좀 억울했다.
강태한은 팔짱을 끼면서 넌지시 물었다.
“세아 씨, 저도 깜짝 이벤트 하나 해 드려도 되요?”
“깜짝 이벤트……? 언제요?”
“그야 지금이죠.”
그 말에 유세아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본인이 모르게 준비해야 하는 것이 깜짝 이벤트의 기본 조건이거늘, 여러모로 말이 안 되는 소리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태한 씨.”
“진짜로 준비했는데?”
“그럼 한번 해 봐요.”
유세아의 말에 강태한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테이블 아래에 감춰 두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앞으로 내밀었다. 거기엔 작은 함이 담겨 있었다. 이건 마치…….
“설마…….”
“우리 정식으로 사귀기로 했을 때, 기억나요?”
“…예? 그야…….”
함께 영화를 보러 갔었던 그날, 유세아는 ‘우린 무슨 관계’냐고 직설적으로 물어봤었고, 강태한은 ‘우리 이미 사귀고 있는 것 아니었냐’라며 되물었었다.
“당연히 기억나죠.”
뭔가 서로 어설펐었던 날.
당시에는 좀 여러모로 부끄럽기도 했었지만, 그래도 이제 돌이켜 보면 추억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유세아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때 굉장히 어영부영한 느낌이었었잖아요?”
“후후, 그랬었죠.”
“그래서… 예전부터 이건 확실하게 하려고 생각했었거든요.”
강태한은 오른손에 쥔 작은 함을 열었다.
거기에는 반지가 담겨 있었다. 그 의미를… 유세아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는 멍하니 반지를 쳐다보다, 강태한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제 옆에 항상 세아 씨가, 그리고 세아 씨 옆에는 항상 제가 있었으면 합니다.”
“아…….”
“받아 주시겠어요?”
강태한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는 유세아가 대답할 차례였다. 그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깜짝 이벤트가 되네요.”
확실히, 눈앞에서 대놓고 들어와도 놀랄 수밖에 없는 이벤트였다. 그녀의 말에 강태한은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그는 아직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좋아요, 태한 씨.”
두 사람은 미소를 지은 채, 서로를 마주보았다.
먼저 움직인 것은 강태한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반지를 집어 들어, 유세아의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유세아는 그런 그를 끌어안았고, 강태한은 그대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오랫동안 기억될 밤이었다.
<에필로그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