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06)
14. 와이번 토벌전
‘아버지.’
에뜨랑제는 델 위오가 사가 뒤쪽에 세워진 묘비 앞에서 양부를 불렀다.
떠오르면 눈물부터 왈칵 차오르는 얼굴이라, 가급적 잊고 살고자 했다.
기억도 추억도 모두 잊고, 복수만 가슴에 남기겠다고 다짐했다.
“복수귀가 되려고 했던 다짐은 지키지 못했어요. 비겁하게 아버지 핑계를 대지 뭐예요.”
하지만 모두가 없으니 조금… 외롭더라구요.
그러니 가끔 웃고 즐거워하더라도, 너무 서운해 하진 마세요. 아버지.
제가 죽는 그 순간까지 원수의 이름과 얼굴만큼을 절대 잊지 않을 테니.
자주 찾아오지는 못할 것 같아요.
이 기억들은 너무나 소중해서, 제 마음을 갉아먹어요.
다음에 올 때는, 원수의 수급을 들고 올게요.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고해성사 같은 읊조림을 끝맺고서, 에뜨랑제는 돌아섰다.
와이번 토벌대.
그것은 함께 복수의 길을 걸어 주겠다 약조했던 사내가 처음으로 제안한 이정표다.
비록 지금의 경지로 봤을 땐 까마득히 멀어 보이는 목표지만, 이 한 걸음이 분명 대업을 완수하는 첫 발자국이 되어 줄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기쁘고, 이렇게 설레는 거다.
‘사흘 뒤에 출발할 테니까. 그때까지 복귀해야 해.’
‘충분해요. 말을 타고 다녀올 거니까.’
에뜨랑제는 양부와 가신들의 묘비 앞에 흰 꽃을 하나씩 하나씩 올려 둔 뒤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쩐지 마음이 조급해 애꿎은 말의 옆등만 자꾸 차게 된다.
말은 충분히 최선을 다해 주고 있는데도, 재촉하게 되는 건 왜일까.
상념을 지우기 위해 와이번 토벌대에서 해야 할 일들을 미리 예습하듯 짚어 본다.
둘만 있으면 어색하진 않을까?
가장 처음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분명 티렐에서 그림로어까지 오는 동안 함께했던 기억이 있는데도,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를 일이다.
사람은 그대로고 상황만 바뀐 것인데.
머릿속으로 와이번을 열댓 마리쯤 도살했을 즈음, 그림로어 정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고생했어.”
여기까지 쉴 틈 없이 달려와 준 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뒤 귀족들의 말을 보살펴주는 마방에 넘겨주었다.
그렇게 마침내 약속 도착했을 땐.
“어, 선배. 늦지 않게 왔네.”
“…….”
러셀의 옆에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농사 동아리의 동기 21기 후배 생도 미마였다.
그녀는 살짝 고개만 까닥여 자신에게 인사했다.
불안한 예감이 고개를 치켜든다.
“시간은 여유 있으니까 혹시 씻거나 더 챙길 짐 있으면 다녀와도 돼.”
“준비는 이미 충분하긴 한데, 미마 후배님은….”
“얘기 안 했던가? 같이 갈 거야.”
“둘이 가는 게… 아니었군요….”
“뭐, 그렇지? 위험한 일정이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많으면 좋지. 여럿이서 가면 심심하지도 않고.”
미묘한 감정이 싹틔웠다.
비이성적인 감정이다.
그는 어찌 보면 동행자일 뿐이다.
마신군의 척결이라는 숭고하고도 원대한 복수를 위한 길동무.
그러니 이런 사사로운 감정을 품는 게 잘못되었다는 건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왜일까, 이렇게 아쉬운 마음이 고개를 드는 건.
문득 고개를 돌려 미마 후배를 바라봤다.
그녀는 알고 있었던 듯했지만, 어딘가 마뜩잖다는 듯 심기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중이었다.
좀처럼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그녀이기에, 에뜨랑제는 미마 또한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다는 게 훤히 보였다.
동지가 있다고 생각하니 어째선지 마음이 편해지면서도….
역시 뭔가 아쉽다….
에뜨랑제는 다시 고개를 들어 러셀을 바라본다.
그는 두 사람의 감정 따위는 전혀 모른다는 듯, 혹은 알고 있어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덤덤했다.
천하의 눈치 없는 목석한이거나.
천하에 눈치 볼 일 없는 독불장군이거나.
그런 것도 아니라면….
그녀의 머릿속에 차마 입에 담기 힘든 사사스러운 단어가 떠올랐다.
종종 남자들 중엔 성욕이나 이성에 대한 관심을 전혀 느끼지 않는 무성애자가 있다고 들었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혹시… 남색가?
망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점점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런데 마지막 단어는 어쩐지 신빙성 있는 근거들이 하나둘 고개를 치켜든다.
생각해 보면 휴고라든가 루트비히라든가 코리라든가 하는 다른 남자 생도들에겐 유난히 더 신경 쓰는 것 같던데.
서, 설마… 진짜로?
아니겠지….
그녀는 이내 홱홱 고개를 저었다.
너무 실례되는 생각이다.
아무튼, 그는 자기 자신의 감정밖에 신경 쓰지 않는 무신경의 아이콘 그 자체였다.
러셀이 설마 미마와 같은 안드로이드 로봇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선배, 왜 눈을 그렇게 떠.”
“네? 제가 뭘…….”
“뭐라 표현은 못 하겠는데, 뭔가 굉장히 바로잡아줘야 할 것만 같은 표정이야.”
“기분 탓입니다….”
에뜨랑제는 차마 말로선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망상에 죄의식을 느끼며 고개를 수그릴 수밖에 없었다.
* * *
우리는 토벌대의 집결지인 국경지대로 이동했다.
이동 과정에서 묘하게 불편한 기류가 있긴 했지만, 동행에 점차 적응했는지 사흘째가 되어서는 점점 편해지는 게 느껴졌다.
미마는 남한테 관심이 없고, 에뜨랑제는 남한테 폐를 끼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의외로 죽이 잘 맞는 듯도 싶다.
“예비대 지원자입니다. 그림로어 현역 사관생도고, 세 명이요.”
우리는 사전에 지원자를 모집했던 와이번 토벌대 예비대에 지원서를 넣었다.
우리의 사관학교 학생증과 아머드 파츠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면접관은 살짝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참가 확인증을 내어 주었다.
준비된 막사 안쪽으로 들어서니 기본적인 전투용 복장과 무장을 지원하고 토벌대원들이 대기할 수 있도록 안배된 공간이 드러났다.
급하게 모집된 토벌대일 텐데도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제법 지원자가 많다.
현역 성검기사단 영웅 4명.
대마수 전투를 전문으로 하는 특수전투병 2부대.
보급, 의료지원 등등 부대 운영을 서포트하는 지원 부대.
부족한 토벌대 전력을 보충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모집한 떠돌이 모험가, 용병, 및 경험과 보상을 노리고 참여한 사관생도들로 이루어진 예비대.
소규모 전투를 치를 수도 있는 크기의 토벌대였다.
“어, 에뜨랑제 아니냐?”
그때 막 도착한 우리에게 사관학교 제복을 입은 생도 한 명이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오 그래. 여기서 보네? 너도 토벌대 참여하려고 왔구나?”
멀끔하게 생긴 제복남은 반갑다는 듯 인사한 뒤 우리를 쳐다봤다.
“이쪽은?”
“아, 1학년 후배님들이에요. 이분은 리비툼 선배님이세요. 4학년이시고.”
“안녕하십니까, 리튬 선배님.”
나는 적당히 예의를 차려 인사했고, 미마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만 까딱였다.
“하하. 리비툼이야. 발음이 좀 어렵지? 리-비-툼.”
“아, 예…….”
기분이 나쁠 법도 하지만, 리비툼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에뜨랑제에게 시선을 돌렸다.
“1학년들이 참가하기엔 좀 위험한 여정 같은데, 잘 챙겨 줘라. 너도 너무 위험한 데 끼지는 말고.”
“예.”
자기 걱정이나 해야 할 것 같은데….
나는 [간파의 눈]으로 느끼한 제복남의 스펙을 확인한 뒤 관심을 껐다.
4학년치고는 좀 떨어지는 능력치다. 뭐, 그래도 인상이 나쁜 것 같지는 않다.
“그나저나 에뜨랑제, 남자친구는 생겼어?”
정정한다. 저건 물소의 재질이다.
리비툼과 에뜨랑제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정확히는 안부 인사를 빙자한 집적거림을 일방적으로 무시하던 와중 멀리서부터 이 토벌대의 주역 성검기사단의 4영웅이 모습을 드러냈다.
확실히 멀리서부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게, 현직 영웅이다 싶다.
“어라? 익숙한 얼굴들이네요?”
영웅 중 한 명인 알렉사 러브레이스 교수가 곧바로 우리를 알아보고 알은체하며 다가왔다.
여기서 보니까 되게 반가운 얼굴이다.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아하하… 교수로 참여한 것은 아니니 여기서는 가급적 알렉사 경이라고 불러 주세요.”
“이야― 교수님? 교수니임? 진짜 살다 보니 네가 교수님 소리를 듣는 걸 다 보고, 별일이네.”
“체르미아 님!”
어느새 멀리서부터 재빠르게 달려온 기사 체르미아가 장난기를 잔뜩 담은 얼굴로 알렉사 근처를 기웃거렸다.
성검기사단 체르미아.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릿결이 사자 갈기처럼 삐쭉삐쭉 솟아있는 게 인상적인 기사다.
준 알코올 중독자에, 도박중독자, 성검기사단의 사고뭉치 등등 수많은 오명의 소유자였지만, 그 실력만큼은 확실한 이 토벌대의 2인자.
우리는 대선배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그녀가 해맑게 웃으며 다시 한번 알렉사를 놀리기 시작한다.
“후후후, 교수님이라니. 우리 깐깐한 엘프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던 코흘리개 기사님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이유가 있었구나?”
“체르미아 님!!”
“아이, 왜! 소리 좀 지르지 말라구. 귀청 떨어지겠어.”
“어휴 정말… 얼른 가요. 어차피 잠깐 인사만 하러 온 거니까….”
“교수님은 정말 깐깐하시다니까~ 그럼 잘 부탁해, 귀염둥이들.”
알렉사는 반강제적으로 체르미아를 보내 버린 뒤, 불만 가득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험담인지 아닌지 애매모호한 발언을 하나둘씩 주워섬기기 시작한다.
“미안해요, 여러분. 저분이 원래 좀… 격식이 없는 편이라. 그래도 실력 하나는 확실하신 분이니 걱정하진 마시구요.”
“네. 뭐 저희한테 해명하실 필요는 없는데….”
“실력으로만 따지면 이세리아 님과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분이에요. 물론 인품, 매력, 외모 기타 등등 모든 부분에서 이세리아 님이 훨씬 훌륭하셔서 부단장까지 오르시게 됐지만요.”
“예…….”
“아무튼, 예비대는 지원 부대를 호위하는 역할 및 기타 업무들을 보면서 혹시 모를 본대의 위협을 대비하는 역할을 할 거예요. 예비대의 통솔은 제가 맡게 되었으니 자주 보겠군요.”
“그렇습니까. 어쨌든 교수님이 계시니 마음이 좀 편안하네요.”
“그러게요. 조교수 시절 제자와 교수 시절 제자가 모두 있으니 반갑네요. 부디 조심해야 해요.”
알렉사는 몇 가지 정보와 당부의 말을 전한 뒤 곧바로 이세리아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체르미아에게 달려갔다.
“체르미아 님! 이세리아 님께 그렇게 딱 달라붙지 마세요!”
“아, 너나 달라붙지 말고 떨어져!”
우리는 그 모습을 멍청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순간적으로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다.
“그… 사관학교 교수님도 기사단에서는 어린아이 취급을 받네요. 조금 어색한 느낌…….”
“그러게 말이야. 워낙 어린 나이에 성공했으니 지금 모습이 오히려 본판에 가까우려나.”
교수로서 단상에 설 땐 뭔가 똑 부러지는 선생님 느낌이었는데, 성검기사단에서는 거의 막내 라인이다 보니 한결 풋풋함까지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체르미아를 질투하며 부단장 이세리아를 향해 눈빛을 빛내고 있는 걸 보니 설정에 충실한 캐릭터라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검기사단 체르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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