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1)
3. 비루한 필력 속 고고한 꽃송이
하지만 내가 타인의 악의를 얼마나 안이하게 받아들였는지 깨닫기까지는 채 몇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헉, 헉…… 후, 하…….”
단순한 달리기다.
나름대로 빙의 버프도 받았고, 신체 능력은 동 나이대 세계관 최상위에 가깝다.
그렇기에 하루에 150km라는 거리를 현실감 없이 받아들였다.
나는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바짝 메마른 목구멍에서 반복적으로 올라오는 신물과 탈수 증상에 허덕였다.
체력검정 코스에는 오르막길, 산길, 내리막길, 평지가 뒤섞인 채였다. 특히나 기어 올라가야 할 정도로 가파른 산길에서는 체력이 급속도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남은 거리 90km.
남은 시간 16시간.
거리 대비 남은 시간은 충분하다.
다만 문제는 내 체력. 그리고 수분이다.
최근 30분 정도는 거의 진전이 없다 싶은 상대로 느리게 뛰었으니까.
페이스 조절에 실패한 건 아니다.
애초에 뒤로 갈수록 체력이 떨어지고 코스가 험해질 걸 감안해서 초반부 페이스를 잡은 거였다.
그저 이걸 시험이랍시고 낸 놈들의 악의가 더러웠을 뿐이다.
‘물 정도는 지급해 줄 줄 알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그거였다.
경로상에 마실 물이 없다는 것.
차라리 계곡이든 물웅덩이든 뭐라도 있다면 개처럼 엎드려 먹기라도 하겠는데, 이 코스에는 정말 단 한 모금의 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코스를 벗어나면 실격.
지급된 군장에는 ‘식료품’이 빠져 있었다.
악의적이다.
원래대로라면 수통과 건식량이 포함되어야 할 군장엔 딱 그만큼의 모래가 더 채워져 있었다.
어떻게든 자신이 운영하는 훈련소에 예외 따위는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지독한 집착이 엿보였다.
나는 꾸역꾸역 산길을 오르는 대신 그 자리에 대자로 벌러덩 드러누웠다.
시간은 넉넉하다.
컨디션만 적절하다면 남은 16시간 중에 절반의 시간으로도 충분히 완주할 수 있을 만큼.
후욱. 후욱.
거칠게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면서 호흡을 정돈했다.
달리는 속도와 달린 거리는 다르지만, 과거 군인 시절 행군을 떠올리게 할 만큼 지쳐 버렸다.
군대가 두 번….
군대가 두 번이라니.
군대가 두 번인 것도 개 같은데, 취급까지 이런 이단아 취급이라니.
결국 어차피 다 멸망할 세계, 한번 막아 보겠다고 눈물의 똥꼬쇼를 하는 건데.
이건 X발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개새끼들….
삐뚤어져 버릴 테다.
‘아. 모르겠고 일단 좀 쉬고 생각하자.’
얼마나 호흡을 골랐을까. 감고 있는 눈꺼풀 너머로 희미한 시선이 느껴졌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봤을 때, 눈에 보이는 건 곱슬곱슬한 금발 파마머리를 아래로 늘어트린 채 생매장 뷰로 날 내려다보는 여자애였다.
태양빛이라곤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을 것 같은, 새하얗다 못해 투명한 피부를 가진 소녀.
끔뻑, 끔뻑.
뭘 잘못 보고 있는 건가.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봐도 생매장 뷰는 여전하다.
벌떡 상체를 일으키자 소녀는 머리끼리 부딪히기 전 휙 한발 물러섰다.
“너는….”
“안녕?”
소녀는 손가락을 살랑거리며 인사했다.
그녀의 정체는 리지.
리지 로즈 뎁.
차후 주인공 일행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은 ‘변덕쟁이 리지.’
팬픽 주인공의 하렘 선두주자 중 한 명인, 히로인 후보였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시험 중에 끼어들면 안 된다는 말 못 들었냐.”
“응. 못 들었는데?”
“아…? 그래.”
그럼 말고.
나는 다시 상체를 바닥에 눕혔다.
그녀는 ‘변덕쟁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릴 만큼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향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격.
마법 명가의 후계자인 주제에 인생 목표는 ‘잘생긴 남자와 결혼해 인생 재밌게 사는 거’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다닐 정도로 통제 불가인 녀석이다.
훈련소 중간에 웬 놈이 난입해 교관들 사이에서 비상이 걸릴 정도의 사건이니 그녀의 호기심 레이더가 발동할 만했다.
“너는 왜 이러고 있는 거야?”
즉, 그녀가 갑자기 내 눈앞에 나타난 건 단순히 호기심 때문이란 뜻이다.
“왜긴. 훈련소 중간에 꼽사리 끼려다가 참교육 당하는 중이지.”
“너… 말투가 재미있다?”
그녀는 별종을 본다는 듯 푸흐흐 웃었다.
“가라. 귀찮게 하지 말고.”
호기심 왕성한 그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정말 대꾸해 줄 기력이 없다.
어차피 알아서 주인공 주변에 꼬일 인물이니 벌써부터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내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니 그녀는 되레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성격 이상한 녀석일세.
“도와줄까?”
“아서라. 괜히 다른 사람이 개입했다고 다 된 밥에 콧물 비비긴 싫으니까. 이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해. 목이 겁나 마르긴 하지만.”
“하긴. 그래 보이긴 해.”
그녀는 계측기 위에 떠 오른 숫자를 힐끔 바라보고는 말을 이어갔다.
“체력훈련도 건너뛰고 왔는데 벌써 이 정도나 왔을 줄은 몰랐거든. 훈련병들 전체 합쳐도 1등이지 않을까 싶네.”
“그래? 그건 희소식이네.”
“근데 너,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 같아.”
“어. 뒤지겠다.”
내 가감 없는 말투에 그녀가 살짝 이마를 좁혔다.
아, 고귀한 귀족 영애에게는 너무 센 말투였나.
“그보다 진짜 가 주면 안 되냐? 누가 보고 있을 것 같단 말이야.”
“걱정하지 마. 인비저블 마법을 걸어 뒀으니깐. 너 말고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여.”
“아. 그러냐.”
인비저블 마법. 자신의 몸을 투명화시키는 고급 마법이었다.
문득 그녀의 상태가 궁금해진 나는 시선을 돌려 떠오른 상태창을 일별했다.
[리지 로즈 뎁]성별 : 여자
나이 : 17세
직업 : 마도사
전투 능력치 : 201
마력 : 49/100
[칭호]①마법 명가의 후계자
②호기심 많은 사고뭉치
[권능]최상급 마법 운용(S)(전용):★★☆☆☆☆)
로즈 뎁 가문 비전(A):★☆☆☆☆
‘최상급 마법 운용.’
러셀과 같은 S급 전용 권능이다.
8종류의 마법을 거의 노 캐스팅으로 즉발할 수 있는 사기급 권능.
지금 그녀가 사용 중인 ‘투명화’ 마법 또한 그 일환이다.
‘마력이 거의 50이면… 엄청나긴 하네.’
상태창에는 나나 에뜨랑제에겐 없는 마도사와 정령사 고유의 스탯, ‘마력’도 추가된 상태였다.
전투력은 현 1학년 차석인 에뜨랑제와 비벼 볼 만한 수준.
각종 재능충이 넘쳐나는 21기 주인공 세대 중에서도 압도적인 재능이다.
이 정도 재능이면 가만히 놔둬도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충분히 밥값은 하리라 생각될 정도로.
“아, 해.”
리지의 말에 나는 눈만 깜빡거렸다. 그러자 다시 한번 재촉한다.
“입 벌려 보라구.”
마지못해 입을 쩍 벌리자 그녀의 손짓 한 번에 머리 위로 풍선만 한 물방울이 만들어진다.
철퍽!
시원한 물줄기가 안면을 강타했다.
메말랐던 입 안을 단숨에 해갈시키는 시원한 물 폭탄이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나를 바라보며 리지가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감사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선물이야. 너는 왠지 이상해 보여서 같이 있으면 재밌을 것 같거든. 꼭 시험 통과하라구.”
“고맙다, 이 자식아.”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지만.
뭐. 아무튼 말라 죽을 것 같던 상황을 구해 준 건 맞으니까.
“더 줘.”
“얍.”
이번엔 더 큰 물 폭탄이 떨어졌다.
나는 양손까지 활용해서 양껏 받아먹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젖은 머리칼과 얼굴을 후드득 털어냈다.
마치 스프라이트 CF를 찍는 여신 광고 같은 포즈로.
“혹시 부정행위로 시비 걸리면 네 핑계 댄다. 여차하면 네 가문 백으로 내 퇴소 좀 막아 줘라. 로즈 뎁 가문이 그 정도는 되잖아?”
“뭐어?”
“그러게 왜 멋대로 나타나서 물장난을 치고 그래. 고맙게 말이야.”
“…진짜 웃긴 애구나, 너?”
“이왕이면 근처에 물웅덩이라도 만들어 둬라. 오는 길에 마시게.”
“바닥에? 더러운데.”
“괜찮아. 내가 가릴 때냐, 지금. 오줌이라도 받아먹게 생겼다.”
“으. 더러워라. 알겠어.”
“땡큐. 나중에 이 빚은 적당히 내 방식대로 갚을게. 까먹어 주면 더 좋고.”
“꼭 기억해 둬야지. 잘해. 화이팅.”
나는 손을 들어 인사해 주고선 곧바로 발을 굴렀다.
확실히 갈증이 사라지고 한숨 쉬고 나니 몸이 가벼워진 기분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내달렸다.
서늘한 날씨인데도 전신에서 땀이 가득 흘러내려 물 폭탄을 맞아서인지 땀을 흘려서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계측기의 남은 거리가 줄어들수록 수명도 함께 줄어드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도리어 정신은 선명하다.
잘하라며 손을 흔들던 리지가 남긴 것은 단지 해갈뿐이 아니었다.
그것은 무너지려던 정신을 다잡는 동기.
내가 만든 세상.
내가 만든 인물들.
그리고 무책임하게 내던진 결말을 주워 담고 두 번째 삶을 완성하겠다는 목표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계기다.
그저 설정된 대로 흥미로운 상황을 보면 꼭 한 번은 참견해야 하는 ‘변덕쟁이 리지’라는 캐릭터 덕분에.
그녀의 말버릇처럼.
‘재밌게’도.
* * *
이제 남은 것은 고작해야 10km 남짓.
리지는 정말 고맙게 내가 되돌아오는 경로에 깔끔한 물웅덩이를 만들어 주었다.
혹시 물이 더러워질까 봐 땅을 판 뒤 근처의 돌을 가져와 연못의 테두리를 잡고 물을 가득 채워 넣었다.
내가 돌아왔을 땐 이미 침전물이 바닥에 가라앉아 제법 맑은 물을 마실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입을 축이고 갈증을 해소한 뒤, 적당히 뭉개 물웅덩이의 흔적을 지웠다.
갈증과 별개로 이미 몸뚱어리는 한계에 다다랐으나, 실패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알렉사 교관의 말대로 이건 말 그대로 의지의 시험이었다.
어떻게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통과할 수 있는 시험.
“헉, 흐억….”
되돌아보면 흑역사가 될 법한 거친 숨소리가 절로 새어 나왔다.
몸은 천근추에 가깝고 다리엔 감각이 없다.
옷가지는 땀에 젖은 솜처럼 축 늘어졌다.
입에서는 욕이 반복해서 흘러나온다.
마신을 막아도 니들 목숨은 안 보장해 준다. 교관 놈들.
창조주도 몰라보는 호로자식들.
다른 건 몰라도 하나만큼은 확실해졌다.
멸망을 막는 건 내 의무가 아니다.
내 선택일 뿐.
내가 가만히만 있어도 마신 진영은 승리가 보장되니까.
굳이 고된 길을 택한 나를 괴롭히지 마라.
솔직히 진짜로 수틀리면 그냥 마신의 편에 붙어 버리면 한 목숨 연명할 수는 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신 세력은 말 그대로 미친놈들이다.
인류를 멸종시키고 대륙에 퍼진 신의 조각들을 회수해 상위 차원에서 전쟁을 벌이려는 목적의 미친 전쟁광들.
마지막 에피소드를 막지 못한 순간, 이 세계는 폐허와 끝없는 전쟁밖에 남지 않을 거다.
간신히 얻은 두 번째 삶이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것만큼을 절대로 사양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적어도 말이야.
앞으로는 누군가 나한테 개 같이 굴면, 그냥 나도 개 같이 갚아 줄 거다.
원작이고 나발이고, 무슨 수단을 쓰든 이기기만 하면 되잖아?
진짜 광기가 뭔지 보여 줄 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