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10)
14. 와이번 토벌전
포장하자면 그렇고… 진짜 속뜻을 말하자면 이렇다.
‘신경 거슬리니까 좀 쳐내.’
내 말의 진의를 정확하게 파악한 에뜨랑제는 곧바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더니, 홱 돌아서서 예의를 벗어던졌다.
“리비툼 선배님. 죄송합니다만, 위험 지역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건 조금 불쾌합니다. 자꾸 이렇게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임무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사관생도 선배로서의 모범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녀는 우다다 쏟아낸 뒤 홱 돌아서 버렸다.
에뜨랑제의 칼 같은 선 긋기에 당황한 리튬 선배는 멍청한 얼굴로 어버버 말을 더듬다가 후다닥 사라졌다.
다행히 발끈해서 소란을 일으키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정지!”
때마침 지휘부에서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아직 해가 지기엔 이르다 싶어 행렬 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보니 양쪽에 가파른 협곡이 있는 내리막길이었다.
누가 봐도 기습하기 딱 좋아 보이는 지형.
“오늘은 여기서 야영한다!”
지휘부는 협곡을 돌파하는 무리수를 두기보다는, 신중하게 주변을 파악하기로 결정한 듯 보였다.
‘신중한 건 좋긴 한데….’
나는 간이 텐트를 설치하며 불안감을 느꼈다.
아직까지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토벌이 너무 길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러셀 후배님. 석식입니다.”
“아. 고마워.”
에뜨랑제가 우리 것까지 식량을 받아 와 건네주었다.
구운 밀빵과 물.
한눈에 봐도 양이 처음 출정했을 때보다 심각하게 줄어들었다.
슬슬 보급의 압박이 찾아오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물자가 슬슬 떨어져가나 보네요.”
“그런 것 같네.”
에뜨랑제도 그걸 느꼈는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고, 미마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제 몫의 빵을 건넨다.
“먹을래?”
“너 먹어라. 잘 먹어야 조금이라도 더 크지.”
내 장난에 그녀가 솜방망이 펀치를 가슴께로 날렸다.
그 요망한 손놀림에 대한 복수로 미마의 꼬리를 확 잡아당겨 바짝 기강을 잡아 주려던 그 순간이었다.
콰과과과광―!!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누군가의 고성이 울려 퍼졌다.
“기습이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사방에서 마수들이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거대한 인간형 마수 트롤과 나가, 드라고나들이었다.
“어쩐지 얌전하다 싶더라니….”
우리는 곧바로 나타난 마수들을 향해 덤벼들려 했다.
“정지!”
언제 나타난 건지 모를 알렉사가 우릴 가로막았다. 그녀는 빠르게 예비대를 통제하더니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금세 지원부대를 감싸는 진형을 만들었다.
“좋습니다. 그 자리를 지키세요. 예비대 여러분.”
“하지만 수가 많습니다. 알렉사 경. 본대를 도와야….”
“여러분은 예비대입니다. 본대를 뚫고 달려드는 마수들만 처리하시면 돼요. 설령 마수가 보이더라도 가급적 나서지 마세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알렉사의 발끝에서부터 전투 슈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목, 허벅지, 허리를 감싸 올라간 아머드 슈트가 금세 전신을 휘감는다.
뒤이어 가볍게 그러쥔 쌍검으로 붕붕 소리를 내며 가볍게 몸을 풀었다.
전열이 마물 떼와 맞부딪혔다. 특히나 북극곰을 연상케 하는 거대한 몸체의 트롤들은 그 앞에 선 엘프 기사가 너무나 왜소해 보일 만큼 위협적이었다.
“저, 저, 토벌대장님이….”
“괜찮습니다. 자리를 지키세요.”
누군가 적진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이세리아가 걱정된다는 듯 손가락으로 가리켰으나, 알렉사는 그저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저런 마물들 따위는, 아무리 몰려와도 자랑스러운 우리 이세리아 님을 어찌할 순 없어요.”
그 신뢰 가득한 미소에 화답하듯, 꽃 하나만 그려진 소박한 흰색 전투 슈트를 착용한 이세리아가 높게 도약한다.
뒤이어 허공에서 나타난 여섯 자루의 검이 하나로 합쳐지더니 마수들을 쓸어 담기 시작한다.
“…찢었네.”
이세리아 경은 마수를 찢어….
이 세계에 빙의한 뒤 처음 마주한.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 * *
첫 번째로 격돌한 마신군의 부대는 4시간 만에 제압됐다.
사망자는 1명. 부상자는 4명.
재생할 수 없을 정도로 신체가 훼손되거나 신체 일부를 먹혀 버린 이들이다.
기습적인 공격이었으나, 워낙 방비를 탄탄하게 해 둔 터라 싸움의 규모에 비해 피해가 크진 않았다.
러셀 생도에게 의견을 구하니 ‘전력을 가늠해 보기 위한 버림패인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이세리아 역시 그 말에 동의했다.
마인 퀼튼은 마치 부대를 한입에 잡아먹기 위해 뜸을 들이는 것만 같았다.
치욕스러운 취급이다.
마주하게 된다면 반드시 이제라의 힘과 저력을 보여 줄 것이라고, 그렇게 다짐했다.
그녀는 부대를 한 바퀴 돌며 진형을 정비한 뒤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서 잔뜩 흐트러진 체르미아가 신체 내부 소독용 럼을 맥주처럼 퍼마시는 중이었다.
“체르미아 경.”
“응~ 왔어?”
“임무 중에 음주는 안 된다고 했잖습니까. 심지어 그건 군 보급품이잖아요.”
“딱 한 잔만 하고 자려고 했어. 아까 독 쓰는 마수 상대하다가 식도를 좀 다친 것 같아서. 후후.”
“…독을 쓰는 마수는 없었던 걸로 아는데요.”
“아 있었어~ 한 마리!”
윙크를 하며 검지를 올려 보이는 모양새가 정말로 얄밉다.
그 실력만큼만 진중함을 갖췄으면 더없이 훌륭한 기사였을 텐데.
이세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바로 했다.
진중해진다면 그건 체르미아가 아니다. 자유분방함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발적인 성격이 그녀가 강한 원천이라 들었으니까.
“그 꼬꼬마들, 잘 싸우더라?”
“알렉사 님의 제자들 말씀이세요?”
“응. 혹시 뚫리는 곳 없나 지원하러 예비대 쪽으로 갔는데, 진짜 화려하게 싸우더라구. 요새 사관학교는 수준이 높은가 봐.”
마신군이 지원 부대까지 닿는 일은 없었다.
종종 본대를 뚫고 안쪽으로 파고든 마수는 있었지만, 대부분 2선에서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그중 가장 많은 적을 참수한 것이 러셀과, 그와 함께 참여한 2명의 생도들이었다.
에뜨랑제의 검술과 러셀의 창술은 수준급이었고, 미마의 화력은 탈 생도 수준이었다. 정규군 병사들과 비교해도 전혀 꿀리지 않는 전력이다.
이제라의 미래가 밝다고 느껴질 정도로 잠재력 있는 아이들이다.
“최상위권 생도들이라고 들었어요.”
“알렉사나 몽모랑시도 최상위권 졸업생이잖아. 근데 걔들은 견습 시절 때 완전 폐급이었다구.”
“…무례한 발언은 조심하세요. 당사자들이 들으면 상처 받습니다.”
“후후. 하지만 사실인걸? 같이 한잔할래?”
“됐습니다.”
“왜 지난번처럼 또 ‘언니~ 가지 말아요~’ 할까 봐?”
“…….”
“언니이~ 가지말아요우~”
이세리아는 인상을 찡그린 뒤, 천막에서 나가 버렸다.
아마 문이 있었다면 쾅, 닫고 나가지 않았을까 싶은 행동이다.
체르미아는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나가고 텅 빈 적막한 막사 안. 체르미아는 소독용 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제 눈앞에서 숨을 거둔 병사 한 명의 마지막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 * *
“능선을 타고 저기 보이는 고지를 점할 거예요.”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는 토벌대의 일정에 이세리아는 결단을 내렸다.
눈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봉우리.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보았던 것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봉우리다.
딱 저기서 보이는 광경들만 확인하고, 저곳을 거점으로 와이번 사냥을 진행하다가 때가 되면 후퇴할 생각이었다.
처음 맡는 중임을 잘 수행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녀에게는 임무 완수에 대한 영예보다 제 손에 걸린 수백 명의 목숨이 더 귀중했다.
돌아갈 일정과 식량을 고려한다면 여기까지만 전진하는 게 맞다.
그렇게 마지막 거점을 향한 등산이 시작되었다.
체르미아는 늘 그랬듯 가장 최선두에서 길을 열었다.
지나온 협곡 앞에서 기습했던 그 날 이후, 마신군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어느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은 조무래기 마수들만 간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가 체르미아의 검에 바스러졌을 뿐.
“아오, 귀찮아!”
그녀는 얼굴에 달라붙는 나무줄기들을 베어내며 불평을 터트렸다.
안 그래도 길이 가파르고 험해 힘들어 죽겠는데, 봉우리 정상을 향한 길목엔 유난히 시야와 길목을 가로막는 식물들이 많았다.
때때로 마물도 섞여 있어 촉수처럼 생긴 나무뿌리로 손발을 묶으러 다가오기도 하는데, 까딱하면 열 받아서 산불을 놓을 뻔했다.
정상까지 한참을 올라오니 아래쪽을 움푹하게 깎아놓은 절벽 너머로 시야가 훤하게 보였다.
봉우리 꼭대기에 거대한 기암괴석이 자리해, 산 너머 풍경을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괴석 위에 올라타 내려다본 광경은 실로 아름다웠다.
온통 붉은색, 회색, 적갈색뿐인 대지라 칙칙하고 음습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마저도 한눈에 바라보는 풍경 안에서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든다.
어쩌면 그저 조금 색다른 환경의 땅일 뿐인데, 인간이 너무 방치하고 버려둔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감상적인 생각이 든다.
시야를 가로막고 있던 산 너머에는 방해물이 거의 없었다.
탁 트인 내리막과 깊은 골짜기, 그리고 그 너머 진갈색의 평야만이 존재할 뿐.
꽤 멀리까지 시야가 확보되어 체르미아는 구석수석 지형지물을 눈에 담으려 했다.
그러다 문득 눈에 들어온 것은, 대평야를 까마득하게 가득 매우고 있는… 거대한 마신의 군대였다.
수천, 아니.
수만? 아니.
어쩌면 수십만. 그 이상.
눈에 담은 순간 전신이 얼어붙는 압도적인 마의 물결.
“식충식물이 많네. 여기서 야영하려면 벌목을 좀 해야겠….”
“체르미아 님. 뭐가 좀 보이시나요? 뒤쪽에는 아무것도―”
그녀의 뒤를 따라온 부관, 그리고 병사들.
이후에 그 광경을 목도한 이세리아까지.
비현실적인 수의 마물 앞에서는 그야말로 아뜩한 기분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와이번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이, 이건….”
“마신군이 부활했어. 단순히 마인 몇 마리, 마수 몇 마리가 등장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대사건이라고! 이세리아! 당장 돌아가야 해!”
“진정하세요. 체르미아 님.”
“지금 진정하게….”
“성급하게 퇴각해 봤자 혼란만 가중될 뿐이에요. 대열이 흐트러지면 피해가 커집니다. 저희는 이제 막 가파른 산길을 올라왔어요. 맨몸으로도 지칠 지경인데 보급품을 들고 다니는 병사들에게 휴식은 줘야 합니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후에 전열을 가다듬고 안전하게 퇴각할 거예요.”
뒤늦게 정상에 도착한 러셀과 두 사람도 그 광경을 목도했다.
‘압도적이네.’
비록 영웅들처럼 선명하게 적의 수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수를 재단하는 것조차 의미 없는 일이라는 건 알 만큼 많은 수였다.
영웅들이 빠른 퇴각을 준비하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곧바로 야영지 설치를 명령했겠지만, 빠르게 쉬고 체력을 회복하라는 말로 대신했다.
적당히 체력을 보충하면 곧바로 이제라까지 전력으로 퇴각할 거라는 의도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