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18)
15. 너희 조상님, 훌륭하시더라…?
“러셀?”
내가 대답 없이 시선을 피하자 파는 무슨 일이냐는 듯 다시 나를 불렀다.
“어, 그래. 가야지. 가야겠지.”
“불편하면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
“아냐.”
지금은 불편하지 않지만, 곧 불편해질 거야….
처음 [그림자 걷기]를 슬쩍할 때까지는, 솔직히 이렇게 친해질 줄 몰랐다.
서로 무슨 권능을 가졌는지까지 알 정도로 친해져 버릴 줄이야.
곧 있으면 집 숟가락 개수랑 팬티 색깔까지 알게 되겠어….
나는 어쩐지 얹힐 것 같아 화제를 돌렸다. 희생양은 구석에서 죽상을 지은 채 포크를 깨작거리고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리지다.
“그보다 쟤는 왜 맛이 갔어?”
“아… 그게.”
평소라면 날 보자마자 키우는 강아지처럼 달려들어서 뭐 재밌는 거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눈으로 보던 애가 정신이 쏙 빠진 채 앉아 있다.
가끔씩 뭐라고 중얼거리는 게 흡사 귀신 들린 것만 같다.
“방학 때 좀 사고가 있었나 봐.”
나는 대략 내용을 알고는 있었지만, 모른 척 파의 설명을 들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오랜 꿈이었던 해변의 낭만을 실현하지 못한 리지는 백작저의 반감금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어코 호위를 따돌리고 탈출을 감행했다.
하지만 딸내미에게 추적 마법을 걸어 둔 미친 딸바보 백작에게 곧바로 발각, 추격대를 마주했다.
백작은 철저했으나 간과한 게 있었다.
정신 나간 수준으로는 그를 쏙 빼다 박은 게 바로 자신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리지는 자그마치 ‘광범위 살상 마법’을 냅다 갈겨 버렸고, 그 바람에 가문 호위 기사들이 크고 작은 상처를 입었다.
이에 부친은 원로원의 항의 어린 등쌀에 이기지 못하고 금지옥엽 딸에게 벌을 내려야만 했다.
그렇게 한 달 내내 꿀 같은 방학을 즐기지도 못하고 벌만 받다가 복귀한 리지였는데….
처벌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마법부 수석 못하면 그냥 자퇴하래….”
“뭐어?”
리지의 울먹이는 말에 주디가 호들갑스럽게 반응했다.
“진짜 너무하네. 방학 때 놀러 못 가는 것도 심한데 벌까지 주고 자퇴 협박까지?! 아니! 우리 나이가 몇인데! 과보호도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자퇴하면 또 그 답답한 백작저 생활을 평생 이어 가야 하는데… 콱 죽어 버릴까….”
“리지!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하, 참! 안 되겠어. 정식으로 백작가에 투서를 넣자!”
주디는 제 일이라도 된 듯 씩씩거리며 양팔을 걷어붙이는 모션을 취했다.
저게 여자애들의 의리란 건가…?
뭔가 기개가 느껴지긴 하는데… 묘하게 영혼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너희들도 뭐라고 해 봐!”
하지만 애초에 주인공 동료란 것들은 공감 능력이 딱히 좋은 인간들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먼 산만 바라보며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할 뿐이었다.
“러셀! 빨리 너도 뭐라고 말 좀 해!”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나야.’라고 중얼거리며 적당한 위로 문구를 골라 건넸다.
“원로원 사람들이 자비롭네. 전체 수석이었으면 절대 불가능했을 텐데. 날 이기지 못할 거라 생각하고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워 준 거 아니야?”
“진짜 미친놈일까 저건…?”
나는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주디의 호들갑과 달리 리지는 그다지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자신만만한 모습이 러셀의 매력이긴 해…….”
“그렇지. 역시 네가 뭘 아는구나.”
“그래도 이럴 땐 ‘와 자퇴라니, 원로원이 너무 심했네.’라고 말해 줬으면 좋겠어…….”
“아. 그러냐? 와 자퇴라니, 원로원이 너무 심했네.”
“고마워…….”
나와 리지의 영혼 없는 대화를 듣던 주디는 어지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쟤는 우리가 늘 이렇게 논다는 걸 알면서 저런다.
“아무튼 마법부 1등이라. 그럼 일단 얘를 어떻게든 해야겠네.”
내가 얌전히 식사에 열중하던 루트비히를 가리켰다.
제게 시선이 몰리자 루트비히가 배운 예법을 훌륭히 소화하듯, 우아하게 입 주변을 닦은 뒤 슬쩍 고개를 들었다.
“어때? 양보해 줄 생각은?”
“딱히 학사 성적에 미련 두지는 않아요. 하지만 성적 조작은 도덕적이지 못한 행위죠. 열심히 해 보세요. 응원합니다.”
“…….”
정말이지 영혼이라곤 1g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응원이었다.
나는 새삼스레 하나같이 이상한 놈들만 모였다는 생각에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여기 애들 다 이상해….”
주디도 나와 생각이 같은 모양이었다.
“참, 볼일은 잘 보고 왔고?”
내가 루트비히에게 묻자 녀석이 살짝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 때문에 갔다 온 건데. 말해 주면 안 되냐?”
“…평범한 인간들에게 말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에요.”
루트비히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식기를 깨작거렸다.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제법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 정도는 아닌 모양이다.
* * *
“반갑다. 특별반 장학생 전담 교수 다이크 로필런이다. 새로 보는 얼굴들도 있고 익숙한 얼굴들도 보이는구나.”
개학 이후 첫 조례.
다이크 로필런은 새로이 모인 특별반 앞에서 2학기 첫 강의의 포문을 열었다.
“다들 이야기 들었겠지만, 전시 상태가 선포됐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낸 주제는 성검기사단의 ‘와이번 토벌대’ 보고서였다.
“성왕국 안팎으로 뒤숭숭하지만, 여러분이 신경 쓸 것은 없다. 일부 외부 일정을 제외한 사관학교 커리큘럼은 모두 정상 운영되니까.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지. 그저 너희들은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자신을 단련하면 된다. 아마도 강의의 강도는 더 높아질 거다.”
확실히 학사 분위기는 1학기 때와 많이 달랐다.
지금까지는 취업을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해 왔다면, 앞으로는 생존과 직결된 과정이 될 수도 있었으니까.
“중도 제적되는 생도는 곧바로 징집돼 전선에 투입될지도 모른다. 제 한 몸 지킬 힘을 다 기르기 위한 기회를 박탈당하는 셈이지. 그러니 목숨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고 임하도록.”
학기 시작부터 잔뜩 기합을 넣은 뒤, 다이크는 조교수를 통해 유인물을 배포했다.
“2학기 시작에 앞서 클래스 선택과 수강 과목 선택이 있을 거다. 작성하여 제출하도록. 왕실 원로원에서 차출된 교수진들의 강의는 임시 폐강되었으니 참고해라.”
다이크의 말을 듣고 수강표를 확인하니 몇몇 강의에 취소 선이 그어져 있다.
알렉사, 제나, 마야 등등 양대 기사단이나 장미의 사도회 등에서 파견 나와 겸업하고 있던 교수들이 교수직을 반납하고 현업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나도 놓치고 있었던 부분이다. 알렉사 누님의 명강의를 더 들을 수 없다니. 갑자기 슬픔이 찾아와 기분이 곤두박질쳤다.
“2학기에는 교양필수 과목이 사라질 거다. 그 시간은 실전 대련 수업으로 대체할 거고, 담당 교수는 나다. 매 수업 너희 전부를 의무실로 실려 보낼 각오로 들어올 테니, 너희도 단단히 준비하도록.”
가장 꿀 시간이었던 교양필수까지 없어졌다.
빡세질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확실히 몸으로 체감되는 게 달랐다.
“오늘 조례는 여기까지다. 수강표와 지망 클래스를 작성하여 조교에게 제출하도록. 러셀, 미마. 두 생도는 날 따라와라.”
“……예?”
우리는 그렇게 첫 시간 만에 교수에게 소환을 당했다.
* * *
“부디 사고 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교수동에 도착한 다이크가 우리에게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미마는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고, 나는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사고를 친 건 아닌데요….”
“누가 1학년이 토벌대에 참가해도 된다고 했지?”
“안 된다는 말은 없었잖습니까, 교수님.”
“그래. 덕분에 사관학교 교칙에 한 문장이 더 추가될 예정이다.”
“하하하….”
“웃지 마라.”
“하지만 교수님. 비록 저희가 주제넘게 참여하긴 했어도, 공로가 만만치 않은데요. 못 들으셨어요?”
“들었다.”
“불초 제자, 외람되오나 혼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기에 더더욱 바로잡아야 마땅하다. 만약 너희가 그 자리에서 비명횡사했다면, 우리는 차후 영웅이 될 재목을 어이없게 잃는 상황이 벌어졌을 테니까.”
“…….”
“칭찬이 아니니 웃지 말도록.”
나는 히죽거리는 입꼬리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어쨌든 순화해서 표현하면 ‘너희 같은 인재를 다 성장하기 전에 잃을 뻔한 건 너무 슬픈 일이구나.’ 정도로 해석할 수 있겠다.
“너희에게는 완벽하게 성장을 이룬 뒤 더 힘들고 위험한 전장을 누벼야 할 의무가 존재한다. 너희가 먹고 자는 모든 비용이 대가 없는 호의라고 생각하지 마라.”
“…….”
정정한다.
‘어디 노예 새끼들이 돈 발라 놨더니 함부로 죽으려고 하냐’라는 뜻이었다.
진짜 매정한 인간 같으니….
“그리고 너희들을 이곳에 불러들인 사고는 애초에 그게 아니다. 하이엣지령에서 자작 영식을 폭행한 사건 때문이지.”
“아…….”
“내가 교수직을 오래 한 건 아니다만, 1학년 1학기 방학 때 이런 항의 서신은 처음 받아 본다.”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설마 그 사건이 사관학교까지 들어올 줄은 몰랐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사건은 아니었다.
영약 재료를 구하러 갔던 지방 소도시에서 아낙네를 희롱하고 있던 귀족 녀석을 발견했고, 에뜨랑제가 그놈의 뚝배기를 깬 사건이다.
알고 보니 그 지방 유력 귀족이어서 경비대까지 출동하고 난리였지만 에뜨랑제가 더 높은 귀족인 걸 알고 사건이 유야무야 처리된, 아니 처리된 줄 알았던 사건.
근데 그 귀족 놈이 차마 대귀족인 에뜨랑제는 건드리지 못하고 엄한 구경꾼이었던 우리에게 항의 서신을 보낸 모양이다.
이건 진짜 억울하다.
폭행은 에뜨랑제가 했고 나는 그냥 낄낄대며 웃기만 했다. 심지어 미마는 상대가 약하다며 구경도 안 했다. 밤 쿠키를 먹고 있었지.
“그건 에뜨랑제 선배가 한 겁니다.”
“안타깝게도 서신에 그러한 내용은 없다.”
“저흰 손 하나 까딱 안 했어요. 선배에게 직접 물어보세요. 그놈이 선배한테 따지기 무서워서 괜히 우리한테 트집을 잡은 모양이네요.”
“……네 말에 하나도 신뢰가 가지 않는다. 평소 품행을 반성하도록.”
“와 씨… 진짜 억울해 죽겠네. 야, 뭐라고 말 좀 해 봐.”
나는 분통 터지는 마음으로 미마를 툭 쳤으나, 미마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기억 안 나.”
망할 날다람쥐는 아예 기억에서 삭제시켜 버렸다.
그 정도로 우리에겐 별거 아닌 사건이었던 거다.
다이크는 내 억울한 표정을 읽었는지,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신을 쓰레기통으로 휙 던져 넣었다.
“특별벌점을 주고 싶으나, 그 마을 촌장의 정성 가득한 투서가 함께 날아와서 상쇄하기로 했다. 따지고 보면 좋은 일을 했다고도 볼 수 있겠지. 다만 너희의 신분과 상황을 자각하도록 해라.”
“저처럼 모범적인 생도가 어디 있다고요. 저는 억울합니다. 스승님.”
“교수님이라 불러라.”
“……예.”
거참. 이쪽 세계 인간들은 호칭에 민감하기도 하지.
“2학기 때는 부디 사고 치지 말도록.”
다이크는 간곡하게 부탁했으나,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면 2학기 때도 다달이 일어날 사고들이 줄 서 있기 때문에.
하지만 교수님.
진짜 내가 원해서 치는 사고들은 아니라고요….
“참, 러셀 애시그린.”
“네. 교수님.”
“클래스는 정말 이걸로 결정한 건가?”
다이크는 내가 온 김에 제출한 수강표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
“1학기 시작 때도 말했지만, 좋은 선택은 아닐 거다. 네 주 무기나 재능을 고려할 땐 전사나 기사가 어울린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만, 저는 전장에서 하고 싶은 포지션이 있어서요.”
“그런가. 알겠다.”
다이크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 담백한 성격이 그의 장점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