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19)
15. 너희 조상님, 훌륭하시더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며, 영웅은 죽으면 권능을 남긴다.”
「권능의 이해(중급)」 첫 수업에서 교수가 꺼낸 말이었다.
“영웅의 시신에서 오르비스의 숨결이 생성되는 원리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생성 조건은 명확하다. 한 인간이 특정 권능을 대성(大成)한 순간 그 조건이 달성되지. 그렇기에 자신의 권능을 후대에 물려주고 싶거든, 그 권능의 성급을 한계까지 달성해야 한다.”
교수는 이후로도 권능이 창조된 사례, 성급이 올라간 사례들을 차례차례 설명하며 강의를 이어 갔다.
권능을 성장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머라고라를 이용한 영약이지만, 머라고라가 영약의 재료임이 밝혀지지 않았던 시절. 그때의 영웅들은 권능의 성장을 오로지 깨달음에 의존했었다.
깨달음이란,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하는 성장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거의 사장된 수련법에 가까웠다.
오랜 시간 성찰과 고뇌가 필요한 깨달음보다는 실전 경험과 공적을 쌓으며 영약을 얻는 속성 성장이 필요한 시기.
전시(戰時)였기 때문에.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 휴고의 성장은 대부분 깨달음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간중간 발생하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러셀 애시그린.”
“예?”
교수는 길디긴 설명을 하다 말고 나를 호명했다.
보통 그가 날 부를 땐 졸거나 졸기 바로 직전의 상태였기에, 나는 절로 긴장감에 몸이 굳었다.
안 졸았는데…?
정신 멀쩡한데?
“모처럼 수업 태도가 양호하구나.”
“하하하….”
“내 수업 때마다 졸려 죽겠다는 표정으로 매번 허벅지를 꼬집고 있는 모습이 안타깝기도 자괴감 들기도 하였는데 말이다. 생도는 내 15년 교수 인생의 가장 난적이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그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전쟁의 순기능도 구술할 수 있겠구나. 나사 빠진 생도에게도 긴장감을 불어넣을 수 있다고.”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교수의 말에 수강생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강의가 끝난 뒤.
농장으로 향하던 나는 새삼스레 저주에 걸리지 않은 러셀 본체의 머리가 제법 좋다는 걸 깨달았다.
긴 강의였는데도 시작부터 끝까지 교수의 설명이 머릿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긍정적인 일이었다.
필기시험에 쏟을 시간을 훈련에 더 할애할 수 있을 테니까.
[개발자 노트]가 설정값을 변경하지만 않는다면 1학년 2학기는 훈련에 매진하기 딱 좋은 시기였다.나는 복기 차원에서 2학기 에피소드들을 떠올렸다.
9월. 그림자 일족의 무덤 발견.
10월. 사관생도 살인사건.
11월. 레인가르 교류전.
12월. 6대 상단과 도난당한 신수 병기.
‘그림자 일족의 무덤 발견’은 그냥 쉬어가는 에피소드고, ‘사관생도 살인사건’과 ‘도난당한 신수 병기’는 잠깐 추리 뽕에 맞아 썼던 사이드 에피소드라 큰 부담이 없다.
과정과 결과를 다 아는 추리물에 무슨 어려움이 있을까.
하지만 방심할 순 없었다.
내가 조금씩 비틀어 놓은 정사가 어떤 나비효과로 돌아올지 모르고, ‘폴리티아의 침략자들’ 에피소드처럼 뜬금없는 에피소드 배치나 설정 변경으로 날 엿 먹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증상만 없어졌다 뿐이지, 아직 저주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니었다.
내 머릿속의 시한폭탄은 아직도 그대로 있었다.
시곗바늘만 멈춘 채로.
‘그래도 중요한 건 11월이지.’
11월 ‘레인가르 교류전’은 메인 에피소드 3막이다.
정사 본편에서 최초로 신수 병기가 등장하는 전투가 치러지기도 하는 데다, 사도 ‘환영의 테네브리아’가 등장하는 강도 높은 에피소드.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상자가 나오는 3막인 만큼, 이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추고 지금부터 철저하게 준비해야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며 농장에 도착하니 이미 와 있던 동아리 동기들이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러셀!”
“어서 와.”
이제는 완전히 농사꾼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비주얼이 되어 버린 코리와 어셔스가 밀린 농장 일을 보고 있었다.
갓 수확한 채소들을 한데 모아 놓고 각종 과채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농장이다.
“방학 때도 가끔 와서 농장을 돌봤다며? 애들한테 들었다.”
“응. 마냥 방치해 두기는 불안해서.”
“뭘 그렇게까지 진심으로 하고 그러냐고….”
“헤헤. 다른 건 몰라도 스티그마 나무는 신경이 쓰이더라구. 워낙 귀한 묘목이기도 하고… 덕분에 상단 내 입지도 좋아졌으니까. 보고 있으면 뿌듯하고 기쁘다고 해야 하나…?”
3그루의 스티그마 나무는 이제 묘목을 벗어나 얼추 성목이라 부를 만한 모습을 갖췄다.
비록 지금은 가물에 콩 나듯 잎을 틔우고 있었지만, 좀 더 시간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질 좋은 포션을 제작할 수 있을 거다.
나는 이번 토벌에서 얻은 하늘석을 빻아 정령의 샘물에 섞은 뒤, 스티그마 나무의 뿌리 부분에 뿌려 주었다.
누가 보면 미친 짓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이래야 나무가 죽지 않는다.
스티그마 나무라는 놈은 굉장히 예민해서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 스트레스로 죽어 버린다.
그래서 평소엔 코리가 수급해 오는 정령의 샘물을 뿌려 주고, 가끔 이렇게 하늘석을 갈아 넣은 특식을 먹여야 하는 거다.
스티그마 잎은 자연채집이 정설이라 여겨지는 세간엔 알려지지 않은 방식이었다.
여느 때처럼 학신목에서 꼬리만 내밀고 잠들어 있는 미마에게 꼬리 잡아당기기로 반갑게 인사했다.
“……!!”
미마는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머리에서 김이 뿜어져 나오는 표정으로 날 노려보았으나, 난 그녀가 튀어나오기도 전에 짓궂게 웃어 주고는 동아리실 안으로 휙 들어와 버렸다.
나날이 반응이 맛있어지는 게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단 말이지.
지하 머라고라 배양실에서는 아카샤가 [고속 생장]을 흩뿌리는 중이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니 작업을 시작한 지 한참 지난 모양이다.
“뭐야, 와 있었네? A클래스 입성 축하한다?”
“에, 네? 오셨네요. 감사합니다….”
“개강하고 지금까지 매일 와서 그러고 있다며.”
“네… 이거 뭔가 묘하게 중독성 있는 게… 하루라도 거르면 좀이 쑤시고 견딜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려….”
아카샤는 말하다 말고 본인도 민망함을 느꼈는지 입을 뚝 다물었다.
훌륭한 농장 노예의 자질이다.
“뭔지 알아. 미마 꼬리 당기기 같은 거잖아.”
“당신은 언젠가 암살당하고 말 거예요….”
나는 ‘그 녀석으로는 어림도 없어’라고 대꾸해 준 뒤 어느새 꽃을 피우기 시작한 머라고라들을 바라봤다.
“2개만 남기고 수확하자.”
“네? 지금요?”
“응. 어차피 이 정도 공간에서는 열 뿌리에서 열네 뿌리 정도 기르는 게 한계야. 나중에 배양실을 늘리기로 하고 일단 수확하는 게 낫겠어.”
“네에…….”
아카샤는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 표정이 마치 달걀을 도둑맞은 암탉 같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끼에에에에엑―!
귀를 울리는 비명과 함께, 머라고라들이 하나둘 머리채를 뜯기기 시작했다.
일곱 뿌리의 머라고라들이 일제히 일어나 비명을 지르며 발광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생에 대한 의지를 울부짖는 뿌리식물들을 무력으로 제압한 뒤 운과 위치 선정이 좋은 두 뿌리만 남겨 둔 채 제조실로 올라왔다.
* * *
부글부글.
하늘색 액체가 커다란 마녀 솥에서 끓어올랐다.
그래도 한 번 해 봤다고 두 번째는 제법 수월했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음험한 제조실에서 실험복을 차려입고 정체불명의 액체를 제조하는 미친 화학자 비주얼이었다.
이건 마치 미국 드라마 「브레이킹 배드」의 하이젠버그 박사가 된 것만 같은 기분….
몸이 찐득거린다. 영약 제조는 딱히 힘들지는 않았지만, 이 찐득거리는 슬라임 액체에 몸을 담갔다가 뺀 듯한 느낌이 문제였다.
심지어 이건 잘 씻기지도 않는다.
신성한 약물 제조 시간이 끝나고 제조실 밖으로 나오자 아카샤가 2층 창가에서 전공 서적을 보고 있다.
제작한 영약은 총 다섯 병.
모아 놓은 하늘석을 다 털어 넣은 결과였다.
‘하늘석은 학사 내에선 구하기가 좀 힘든데.’
배양실을 완성한 이상 앞으로는 머라고라보다 하늘석이 모자라서 영약을 만들기 힘들어질 거다.
하늘석은 스티그마, 별가루꽃, 마혈초 등등 모든 영초 재배에 다 들어가는 기본 재료니까.
아무튼 게임에서나 이 세계에서나 하늘석이 모자란 건 똑같았다.
“아카샤.”
“네?”
“받아라.”
나는 아카샤에게 영약 한 병을 건넸다.
만들어진 5개의 영약은 농사 동아리 부원들에게 우선 배분할 생각이었다.
에피소드 진행에 중요한 역할을 할 건 주인공 일행이지만, 우리 생산직들을 먼저 챙겨 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래야 더 효율 높게 농장을 굴릴 수 있다. 이것이 자본가의 방식이란 거다.
내가 2개를 먹고 나머지 3개를 코리와 어셔스, 아카샤에게 배분할 예정이었다.
어셔스는 보유 권능이 없어서 원래는 안 줄 생각이었는데, 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서 대장장이 권능 하나를 배워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주기로 했다.
“우와….”
아카샤는 영롱한 하늘색 빛을 띠는 영약 병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식욕 떨어지게 생겼네요….”
“먹기 싫으면 반납해.”
“제가 언제 먹기 싫댔어요?”
아카샤는 누가 뺏어갈세라 영약을 품속에 후다닥 숨겼다.
“안 뺏어갈 테니 지금 먹어라. 빨리 먹어야 원하는 권능이 성장할 가능성이 크거든.”
“진짜요? 무작위인 줄 알았는데.”
“무작위 맞아. 근데 느낌이 그래. 샤머니즘이랄까.”
“사기꾼….”
아카샤는 입을 삐쭉이면서도 곧바로 영약 병을 꺼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얘는 묘하게 말을 잘 듣는단 말이지.
“눈을 감고 [고속 생장] 권능을 성장시키고 싶다고 계속 생각해. 간절한 마음으로.”
“네…….”
아카샤가 눈을 질끈 감고선 작게 입을 오물거리며 중얼댔다.
곧 영약의 기운이 그녀의 몸속에 퍼지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끝난 건가요?”
“어어.”
“뭐가 성장했는지는 어떻게 확인하죠?”
“써 보면 알지.”
나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간파의 눈]을 켜 그녀의 권능 목록을 확인했다.
[권능]만연화(A)(전용) : ★☆☆☆☆
고속 생장(C)(전용) : ★★★
마력 운용(C) : ★★☆
저속 회복(D) : ★★
[고속 생장]과 [저속 회복]의 성급이 올라 있다. [만연화]가 안 오른 건 아쉽겠지만, 나쁘진 않다.어차피 등급이 높은 권능은 확률적으로 잘 안 오른다.
1/2 확률 중 원하는 권능이 오른 걸로도 반은 성공이었다.
“[고속 생장]과 [저속 회복]이 올라간 것 같아요.”
권능을 이리저리 써 보던 아카샤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말했다.
“느껴져?”
“네. 권능을 발동할 때 캐스팅 속도가 조금 빨라졌어요.”
“좋네. 앞으로 더 훌륭한 생산직 노동자가 될 수 있겠어.”
“그 표현 너무 기분 나빠요…….”
“그나저나 넌 앞으로 조심해야겠다.”
“네? 갑자기 그게 무슨….”
“이제 [고속 생장] 성급 다 올렸잖아.”
“그런데요?”
“혹시라도 네가 죽으면 [고속 생장]이 권능석으로 변해서 떨어진다는 뜻이지.”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며, 영웅은 죽으면 권능을 남긴다. 오늘 배운 명언이거든.”
아카샤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내게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내가 확 다가가 양어깨에 손을 올리며 씩 웃자, 그녀가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한다.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 당연히 농담이지. 그렇게 사이코패스 살인마 보듯 쳐다보면 좀 서운하다?”
“하, 하하. 농담이… 맞죠?”
“아이 그럼, 당연히 농담이지. 그래도 열심히 해야겠지?”
“여, 열심히 할게요….”
나는 흡족하게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도닥였다.
역시 훌륭한 생산직 노동자의 자질이다.
“그럼 나도 랜덤박스를 좀 까 볼까나.”
주머니 속 영약 병 두 개를 호두마냥 굴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 작가 버프 너무 달다.
당뇨병 걸릴 것 같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