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2)
3. 비루한 필력 속 고고한 꽃송이
얼마나 더 기었을까.
눈앞에 드디어 출발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출발점 인근에는 교관 알렉사와 몇몇 훈련병들이 기다리는 중이었다. 복장이 바뀐 걸 보아 쭉 기다린 건 아닌 듯싶다.
아마 계측기의 숫자를 전해 받고 나왔겠지.
남은 시간은 6시간.
정오쯤 출발해서, 다음날 동틀 무렵까지 이어진 기이한 시험이 거의 마무리에 다가섰다.
나를 향하는 훈련병들의 눈빛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아마 내가 개처럼 뛰는 동안 무슨 영문인지 훈련병들 사이에 쫙 소문이 퍼졌을 테니까.
어떻게 이걸 해냈는지 놀랍다는 시선 반.
굳이 군대 빨리 오려고 이 짓거리를 하는 내가 이해 안 된다는 시선 반이다.
나는 헉헉거리며 출발선에 도착했다. 그리고 알렉사 교관의 앞에 여봐란듯이 드러누웠다.
“아오, 죽겠다.”
“수고했어요, 훈련병. 훌륭합니다. 이제 일어나요. 정식 입소 절차를 밟게 해 줄 테니.”
“죄송한데….”
몸이 말을 안 들어.
마음은 널 좋아한다 하는데.
내 눈이 네 눈을 아, 이게 아니고.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을 안 들었다.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교관님.”
“아. 그래 줄래요.”
누군가 내 팔을 들고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어느 비위 좋은 인간인가 싶었는데, 그놈이다.
주인공 놈.
“왜 이렇게 무거워. 너 운동 좀 했구나?”
실없이 웃으며 농담을 건네는 녀석은, 휴고 엘클레어.
팬픽 속 주인공이다.
이 세계는 원작 게임 스토리의 주인공인 라스가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는, 비튼 세계관 설정을 기반으로 만들어냈다.
기존 성약을 깨울 힘이 남지 않았던 여신이 마지막 힘을 불어넣은, 멸망을 막아내기 위한 차기 성약으로서 선택받은 한 인간.
전용 권능인 [성약의 계승자]를 통해 찾아올 미래의 일부를 엿볼 수 있어 세계 구원이란 사명을 갖고 사관학교에 입학하는 인물이다.
내가 원작의 주인공을 쓰지 않고 자캐 주인공과 히로인들을 대거 투입한 이유는 간단했다.
비록 게임 소설을 파쿠리친 아류 팬픽이었지만, 누군가가 애정하는 캐릭터들을 내 욕망을 배설할 활자 집합체로 소모하기 싫었었다.
그건 집착이자, 원작을 향한 일종의 존중이었고 배려였다.
그 때문에 이게 무슨 에픽 팬픽이냐고 욕도 많이 먹었지만…. 사관학교에 입학하며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원작 캐릭터들이 등장하니 독자들의 원성은 제법 희석됐다.
다시 내 시선이 앞으로 고생길 훤한 주인공 놈에게 향했다.
참고로 주인공 특, 재능충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불리는 별명은 ‘멍청이 휴고.’
워낙 단순무식한 정의파인데다, 불의를 못 참아 매번 사고를 몰고 다니는 설정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땀 냄새가 나다 못해 온몸이 땀으로 절여진 상황에서도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부축하는 것만 봐도 얼마나 설정이 충실하게 구현됐는지 짐작이 갔다.
“고맙다.”
“뭘. 그나저나 너, 대단하다.”
휴고는 감탄했다는 듯 말했다.
“솔직히 알렉사 교관님한테 네 얘기를 들었을 때는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
“훈련소에 중간 입소한 게 불합리한 게 아니라?”
“응. 비록 앞선 훈련을 받진 못했지만, 국방의 의무를 지닌 소년병이라면 언제든 누구든 입소할 수 있잖아. 하지만 이렇게 불합리한 요구를 시험이랍시고 내놓는 건 잘못됐다고 생각해.”
“개 같긴 했지.”
“그런 의미에서 대단하다. 너. 감탄했어.”
그렇게 말하고는 씩 웃는 휴고.
물론 시커먼 사내놈이 환하게 웃어 봤자 눈살만 찌푸려질 뿐이지만, 어쨌든 주인공과 첫인상 도장을 원활하게 찍은 건 호우재 아니, 호재였다.
“대화 중에 미안하지만, 저 아직 듣고 있어요. 훈련병들.”
“앗, 죄송.”
“틀린 말은 아니지만 조심 좀 하세요. 이번 21기들은 정말 지켜보고 있으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들처럼 불안하다고요.”
알렉사는 인자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말을 덧붙이고선 설명했다.
“러셀 훈련병의 생활관은 3동 9생활관입니다. 조교를 시켜 물자를 전달하라 지시했으니 씻고 생활복으로 환복하세요. 내일부터 훈련에 참여하시면 돼요.”
“아… 감사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생활관 동기들에게 전해 들으면 될 거예요. 그럼 건승을 빕니다. 러셀 훈련병. 씩씩한 모습으로 훈련 때 봬요.”
알렉사는 휴고의 경례를 받아주고선 몸을 돌려 뒤돌아섰다.
어쩐지 그 뒷모습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예쁘긴 예쁘네.
교관 누님 날 가져요.
누님은 살려 드릴게.
그때 교관실 문이 열렸다가 닫히고 힐끔 나를 바라보는 크릭의 눈동자가 보인다. 하지만 문이 닫힐 때까지 콘레드는 한 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니들은 안 살려줘.
* * *
그렇게 나는 우리의 주인공, 휴고의 도움을 받아 생활관에 도착했다.
깨끗한 시설임에도 퀴퀴한 냄새가 나는 듯한 군 시설을 보자, 첫 번째 고비를 넘겼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또다시 군대에 왔다는 역겨움이 들었다.
젠장. 그냥 아카데미물이나 열심히 쓸걸. 뭔 군대 훈련소 설정을 넣어가지고….
진짜 뭐라 말하기 힘든 거북함이다.
물론 시설은 말도 안 될 정도로 좋았다.
이 세계관 자체가 중세 배경에 현대 과학 기술이 적당히 섞인 부대찌개 짬뽕이긴 하지만, 4인실에 생활관마다 실내 훈련 도구까지 있는 널찍한 공간은 그야말로 괴리감 그 자체였다.
나 때는 말이야, 침대는커녕 딱딱한 평상 바닥에서 10명, 12명씩 다닥다닥 붙어서 자고, 어? 그랬어!
“나는 옆 옆 6생활관이야. 혹시 도움 필요하면 찾아와. 그럼 푹 쉬고, 내일 보자! 러셀!”
나는 과하게 파이팅 넘치는 우리의 주인공을 향해 손을 대충 성실히 휘저어 준 후 생활관 안으로 들어섰다.
20평은 될 법한 넓은 생활관 가장자리에 놓은 네 개의 침대. 그리고 창가를 기준으로 훈련용 목각인형과 허수아비, 각종 체력 단련 도구들이 즐비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보다도 실력 정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훈련소의 신조다웠다.
그다음에 눈에 띈 것은 각자 침대 위에서 널브러져 있는 세 명의 생활관 동기들이었다.
나는 [간파의 눈]으로 세 동기들의 상태창을 펼쳤다.
3주 차부터 훈련소 일정은 일부 개인 평가와 많은 팀 평가로 치러진다. 즉, 이놈들은 좋으나 싫으나 함께 끌고 가야 할 모래주머니라는 뜻이었다.
첫 번째 목표는 사관학교 입학권을 따내는 것.
절대평가였지만, 평균적으로 1,000명의 훈련병 중 대략 100명 정도가 사관생도 자격을 얻는다.
한 학년이 100명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대륙의 총 5개 훈련소에서 이수한 훈련병들이 사관학교로 모여드니까.
두 번째 목표는 수석, 차석, 적어도 우수 생도로 입학하는 것.
이 커트라인은 5등이다.
21기 주인공 세대의 주연이 7명이니, 적어도 재능빨 사기캐를 3명 이상 제쳐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어디 한번 면면을 볼까, 웬수들.’
내 시선이 생활관 동기들을 향했다.
“네가 새로 온다던 그 편입생이구나? 환영해!”
“엉. 러셀이야.”
밝게 인사하며 악수를 청해 오는 소년의 이름은 코리.
[칭호]아피흐 상단 막내아들
[권능]황금손(C)(전용):★☆☆
아피흐 상단의 막내아들? 이건 뭐야, 재벌집 막내아들도 아니고.
아피흐 상단이라면 제법 유력 상단이기에 장기적으로는 좋은 인맥이지만, 당장 도움 되는 전력은 아니었다.
특출나 보이는 기술도 하나 없고, 체력훈련은 어떻게 통과했나 싶은 정도로 깡마른 체격.
모래주머니 1이네.
나는 확신했다.
전용 권능은 C급 ‘황금손’.
비전투계열 권능이다.
“너 때문에 오늘 훈련소가 시끌벅적했던 거 알아? 완전 대스타라고!”
코리는 상인의 혈족답게 친화력과 외향성을 자랑하며 친근하게 굴었다.
“이쪽은 어셔스. 인사해.”
코리가 가리킨 놈은 어셔스.
칭호도, 권능도 없는 그냥 평범한 사내아이다.
단지 덩치가 제법 컸다.
“덩치가 이래도 순한 친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말수는 원래 거의 없대. 목소리가 콤플렉스라 웬만하면 입을 안 연다나.”
또래 남자들과 비교해도 머리 두 개는 크고 근육이 다부졌다. 거기에 햇볕에 잔뜩 탄 듯한 피부.
“그러냐. 뭐 하다 왔는데, 농사?”
어셔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전 농사로 단련된 몸이라 이거군.
넌 고기방패 1이다.
‘농부에 장사꾼이라. 망했네. 이거 일부러 이렇게 집어넣은 거야?’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러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난 내 눈을 의심했다.
‘……??’
[루트비히]성별 : 남자
나이 : ???
직업 : 마도사
전투 능력치 : 290
[칭호]①마지막 밤의 일족
②만월의 묘지 파수꾼
[권능]밤의 지배자(A)(전용):★★☆☆☆
만월의 부름(A)(전용):★☆☆☆☆
달빛 강타(C):★☆☆
별빛 강타(C):★☆☆
부유(C):★☆☆
잠깐만. 뭔 훈련병 전투 능력치가 290이라고?
아니, 그 전에 네가 왜 거기서 나와?
스턴기라도 한 대 맞은 듯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눈앞에 있는 건 거의 초등학생이나 될까 말까 한 보랏빛 도는 꼬맹이였다.
머리카락도 보랏빛. 눈동자도 보랏빛.
문제는 녀석의 외형이 아니었다.
‘루트비히’라는 녀석은 설정상 여기에 등장하는 녀석이 아니다. 스토리에선 한참 뒤에, 그것도 거의 엑스트라 수준으로 잠깐 등장하는 네임드 캐릭터란 말이다.
그런데 네 녀석이 왜 이 팬픽 속에, 그것도 메인 스토리 흐름의 중심인 주인공 기수에 훈련병으로 있는 거냐고!
“뭘 쳐다봐요.”
그것도 존댓말로 싸가지 없는 대사를 내뱉는다는 설정까지 덧붙여서.
“너, 네가 왜 여기에?”
“…? 왜 아는 척이죠?”
“너는.”
나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잠깐 멈칫해서 머리를 굴렸다.
녀석이 밤의 일족이란 사실이 과연 드러나 있나? 아니면 정체를 숨기고 이곳에 와 있는 걸까?
어찌 됐든 저놈은 이레귤러다.
스토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니 신중, 신중을 기해야 할.
나는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개발자 노트’ 권능을 발동했다.
변경 사항 : 최후의 전쟁에서 세계를 지탱하는 주축인 마지막 밤의 일족 ‘루트비히’가 참전하지 않는 것은 설정 오류라 판단, 마지막 밤의 일족이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세로 나와 주인공 기수에 지원하는 것으로 설정을 변경합니다.
‘이런 식이구나.’
지금까지 사용되지 않았던 권능의 활용법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렇게 기본 설정과 충돌해도 되는 건가.’
마지막 밤의 일족 루트비히.
인간사에 관여하거나 인간과 연을 맺는 것을 금기 중의 금기로 여기는.
세계의 탄생을 지켜본 자이자, 세계의 종말을 주시할 운명을 지닌 자.
20년 전 마신 전쟁에서 루트비히를 제외한 모든 일족이 그 대신 참전해 모두 목숨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마지막 밤의 일족.
나는 표정 관리에 어려움을 느꼈다.
루트비히의 배경과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인간을 증오하고, 제 일족을 모두 사지로 끌고 간 이제라의 여왕을 원망하는 이다.
그가 지금 무슨 심경으로, 어떤 연유로 이 자리에 서 있을지는 본인만이 알고 있을 것이었다.
“러셀 훈련병. 보급품 문 앞에 두고 간다.”
때마침 문밖에서 조교의 목소리가 들렸다. 러셀은 잠깐 뒤를 돌아봤다가 고래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사람 잘못 본 것 같네.”
나는 일단 일 보 후퇴했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자.
《마지막 밤의 일족, 루트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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