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32)
16. 사관생도 살인사건
“지면은 단단해. 파도 문제없어.”
기골만 장대한 농부의 건아, 어셔스는 지하 배양실 확장 공사에 앞서 토질 체크를 끝마쳤다.
혹여라도 지반이 약한 곳을 건드렸다가 건물이 폭삭 무너지진 않을지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다행히 결론은 공사를 진행해도 무방.
지금보다 더 깊게 세 배쯤 넓은 지하실을 만들어도 건물과 지반에는 문제없다는 판단이었다.
공사 방식은 간단했다.
리지가 대지 계열 마법으로 땅을 부드럽게 만들고 파내면 다른 부원들이 파낸 흙을 농장 밖으로 퍼 나른다.
그런 다음 어셔스가 내벽을 단단하게 마감한 뒤 다시 리지가 결계 마법을 걸어 둔다.
목표는 대략 서른 뿌리 정도의 머라고라를 배양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드는 것.
영약이야 다다익선이라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무한정 늘린다고 하더라도 갈아 넣을 수 있는 아카샤는 한 명뿐이고 하늘석도 그만큼 수급되지 않을 테니까.
“루트비히의 결계 마법은 진짜 대단하구나. 이런 건 흉내도 못 내….”
배양실 입구에 처진 결계를 본 리지가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자신이 본 결계 마법 중 가장 강력하고 세밀하게 전개된 술식이라 덧붙였다.
기실 당연한 일이었다.
밤의 일족의 결계는 애초부터 마신의 힘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술법이었으니까.
인간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마법보다 아득히 높은 수준의 상위 권능이었다.
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리지가 땅을 솎아내고 흙을 파내면 부원들이 먹이를 나르는 개미들처럼 그걸 옮기는 과정.
에뜨랑제와 아카샤는 물론이고 학신목에서 늘어져 있던 미마마저 꼬리를 붙잡혀 노동의 현장으로 끌려왔다.
나는 킥킥 웃으며 투덜거리는 미마에게 물었다.
“할 만하냐?”
“아니.”
“왜, 힘들어?”
“배고파.”
“후딱 끝내고 간식 먹자. 밤이랑 고구마 구워 줄게.”
“……좋아.”
미마는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제 몸보다 몇 배는 큰 흙무더기를 번쩍 들어 올리고는 총총거리며 걸어갔다.
학년 최상위권 생도들이 흙투성이가 돼서 노가다를 뛰는 장면은 좀처럼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생각보다 좀 걸리네. 휴고랑 애들 좀 데려올 걸 그랬나.”
한 번에 흙을 파냈다가는 지반이 무너질 염려가 있었기에, 작업은 조금씩 신중하게 진행됐다.
“내일부터라도 부탁해 볼까?”
“일단 우리끼리 해 보고. 거기도 자기들 일정이 있을 테니까. 리지! 쉬엄쉬엄하자!”
“응!”
내 외침에 반응한 리지의 목소리가 지하에서부터 왕왕하게 울렸다.
어느덧 해가 짧아져 금방 사위가 어둑해졌다. 이 속도라면 며칠은 걸릴 것 같다.
나는 ‘여름에 미리 해 둘걸.’이라는 짧은 후회를 삼킨 뒤 코리가 건넨 음료수를 들이켰다.
“불 지필까?”
“그러자.”
잠깐의 휴식 시간.
여자애들은 씻고 싶다며 2층 휴게실에 줄을 섰고 어셔스는 인부들이 없는 틈을 타 마감 작업을 한다며 지하 배양실로 들어갔다.
그래서 공교롭게도 화톳불 가에는 나와 코리만 남아 있었다.
녀석의 진짜 얼굴을 알게 된 이후 처음 대면하는 둘만의 시간이다.
항상 보던 낯짝인데 어쩐지 어색한 기분이 든다.
“야.”
“응?”
“넌 목표가 뭐냐.”
다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어쩌면 조금은 충동적인 물음이기도 했다.
이 녀석에게 더 이상 심력을 소모하지 않기로 했건만.
이 녀석은 뭘 위해 이곳에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들어서.
“…갑자기?”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갑자기 궁금해져서. 유난히 너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
“꿈이든 목표든 소원이든 뭐든 있을 거 아냐.”
내 물음에 코리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시선을 맞췄다.
“알았구나?”
“뭘.”
“딱히 실수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역시 러셀은 대단하네….”
순순히 인정하는 듯한 발언에 도리어 당황한 건 나였다.
별말 안 한 것 같은데, 어떻게 눈치챈 거지?
“하여튼 눈치 빠른 새끼.”
“헤헤.”
나름대로 큰 비밀을 걸렸으니 눈치를 보거나 당황할 법도 한데 여상하게 웃으며 불을 지피는 모습에 부아가 치밀었다.
“뭘 웃으세요. 확 죽여 버릴라. 에시드 옆으로 보내줘?”
“자기 눈앞만 보고 달려가던 친구가 갑자기 주변을 돌아보게 됐다는 건,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생겼다는 거거든. 지금 시점에서 추측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지. 그리고…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읽는 게 우리의 천성이기도 하구.”
코리는 말을 이어 나갈수록 조금 민망하다는 듯 불씨를 뒤적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사과를 하는 게 좋겠지?”
“아까 뒤통수 갈긴 걸로 조금은 갈음해 준다.”
“역시 일부러 때린 게 맞구나….”
“원래는 적당히 모르는 척 이용하다가 날 배신하면 코리를 코와 리로 만들어주려고 했는데, 말 나온 김에 변명할 기회 주마. 씨부려 봐.”
이것도 어쩌면 충동적인 결정.
서로 한마디도 안 하고 음흉한 속내만 품고 있다가 상황을 악화시키는 고구마 전개는 사양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녀석의 대의가 나의 대의와 상충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품고 갈 수 있는 인간이니까.
“나와 형제들은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하기 위해 어머니께 입양된 사람들이지만… 정작 상단은 후계자를 여럿 두지 않아.”
코리의 첫 마디는 상단에 관한 이야기였다.
“상단을 지배하는 권력이 분산되면, 그만큼 힘의 집중도가 떨어지고 약해지거든. 그래서 후계 구도는 오로지 한 사람. 승자 독식 구조로 설계되어 있어. 우리도 마찬가지고.”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형제들은 어릴 적부터 서로를 엄청나게 견제해 왔어. 조금만 두각을 드러내도 곧바로 물어뜯어 경쟁자가 되기 전에 쓰러트리려고.”
“그런데?”
“난 가장 손쉬운 먹잇감이었지. 막내였고, 전투 쪽으로는 아예 재능이 없었으니까. 이쪽 세계도 힘을 숭상하는 건 마찬가지거든. 그래서 내 생존 전략은 의태였어. 나 자신을 지킬 힘을 얻을 때까지 전혀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 것. 훈련소에서도 그랬구.”
모든 것을 가지거나, 모든 것을 잃거나.
녀석은 나와 다른 의미에서 자신만의 생존을 위한 혈투를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까지는 예상 범위 내였다.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 뒤에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왜, 지금 이 타이밍에 의태를 벗어던지고 사건을 키웠는가.
내 생각에는 다소 이른, 위험천만한 시기였다. 아직 기반이 다 쌓이지도 않았고, 자칫하면 지금까지 쌓아 온 동료들이라는 모든 기반을 잃을 수도 있었다.
“이번 계획은 사실 내가 원했던 방식의 싸움은 아니었어. 이런 방식은 어머니도 원하지 않으니까, 혹시라도 발각된다면 난 그대로 버림받았을 거거든. 굳이 이렇게 급진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어도 학사 내 싸움에서 이길 자신도 있었구.”
“그럼 뭐 때문에 벌인 일인데. 야, 일단 거기 밤 좀 넣어라. 미마 주게.”
내 손짓에 코리가 희미하게 웃으며 밤을 껍질째 화톳불에 밀어 넣었다.
“상인들의 정보력은 어마어마해. 러셀, 네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지. 표적을 정하고 알고자 하면 어떤 것이든 알아낼 수 있으니까. 가령, 왕도의 파수꾼을 포섭해 누가 언제 왕성에 드나들었고 누굴 만났는지 아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지.”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녀석의 말속에 숨은 행간을 파악한 탓이었다.
“네가 마인들의 표적이 되어서 저주를 받았고, 그 안젤리카 회장을 만나 저주를 치료했다는 정보가 마인들에게 넘어가면 위험해진다는 사실 같은 것도 말이야.”
“그걸 에시드 녀석이 알아낼 수 있다고? 좀 지나친 비약 아니야? 그거 고구마도 좀 넣자.”
코리는 ‘얘기 듣고 있는 거 맞지?’라고 중얼거린 뒤 고구마를 은박에 싸 장작 밑으로 쑤셔 넣었다.
“에시드의 기숙사에서 그가 보고받은 문서 중 네 저주에 관한 게 있었어. 확보하자마자 폐기했지만.”
“…….”
불을 쑤시던 내 손짓이 멈췄다.
“증거가 없기에 상인들 사이의 공공연한 비밀이긴 하지만, 네헨쿠이 상단이 마인들과 결탁한 지는 좀 됐어. 절대로 네게 접근하도록 놔둬서는 안 되는 놈들이었다는 뜻이야.”
“그놈을 죽여 버린 게, 날 위해서였다고?”
“그렇게 말하면 믿어 줄래?”
“아니. 납득 가능하게 설명해 봐. 왜?”
“처음이었으니까.”
코리는 어느 때보다도 더 심지 굳은 얼굴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함께했던 코리와 내 눈앞에 있는 코리가 과연 같은 인물일까 하는 의심이 들 만큼 생소하게 느껴진다.
“세상엔 딱 세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고 믿었어. 날 잡아먹으려는 적들. 내 호의를 받고 호의를 되돌려 주는 거래 파트너. 내 호의를 받고도 날 배신하는 배신자.”
수면 아래서 대륙을 움직이는 6대 상단 중에서도 최선두를 달리는 대상단.
그런 곳에 차기 상단주 후보로서 입양된 삶이란, 고작 20년도 지나지 않았으나 어지간한 삶보다 더 많은 풍파를 겪었을 거다.
녀석은 자신의 삶을 역설하듯, 변명이 아닌 주관을 설파한다.
“지금까지 내 편은 늘 내가 먼저 호의를 베풀어야만 만들어졌어. 너만 제외하면. 내가 아무것도 건네지 않았는데, 날 챙겨 주고 먼저 호의를 보여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었거든.”
기억은 다소 미화된 것 같긴 하지만.
나는 내 생각보다 후한 녀석의 평가에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소를 내뱉었다.
“그래서 좀 욕심냈어. 친구라는 거, 설령 내가 위험해지더라도 신뢰만으로 유지될 수 있는 관계를 나도 가질 수 있을까 싶어서.”
“솔직히 말하면… 딱히 널 처음 만났을 때 호의를 베풀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데.”
“진짜?”
“그땐 진짜 개폐급이라고 생각했거든. 내 발목이나 잡지 말길 바랐지.”
“뭐? 말이 너무 심한걸….”
“지금은 좀 다르긴 한데. 그냥 치워야 할 놈이 있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하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으려나? 딱히 신경 쓰이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
녀석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
녀석은 [개발자 노트]가 선택한 살인자다.
하지만 지금까지 설정값 변경은 내 행동으로 인한 흐름 변화는 반영하지 않았었다.
그렇다는 건 코리의 이번 청소는 내가 없었어도 벌어졌을 일이란 뜻이다.
에시드가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건드려서 코리의 발작 버튼이 눌렸을 수도 있고, 어쩌면 이 또한 상황을 넘어가기 위한 녀석의 임기응변일지도 모른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이상, 나는 지금처럼 코리를 마냥 선의로만 바라볼 수 없을 거다.
하지만 이해해 줄 수는 있다. 나조차도 내 본질을 속이고 녀석을 이용해 왔으니까.
결국, 동류(同流)라는 거다.
“하여간 두 번은 안 봐준다.”
“…….”
“그동안 유능한 걸 숨기느라 얼마나 입이 근질근질했냐?”
“헤헤. 충분히 보여 줬다고 생각하는데.”
타닥. 화톳불이 타오른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껍질을 한 풀 벗어던진 듯한 코리의 얼굴에는 시원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농장 여기저기서 질 좋은 작물을 호시탐탐 노리는 풀벌레들의 우는 소리가 찌르르 들려온다.
망할 벌레들. 농약을 치든가 해야지.
녀석은 잠시간 침묵을 지키더니 넌지시 물었다.
“러셀. 네 목표는 뭐야?”
“세계 구원. 그리고 마신 척결.”
“거, 거창하네…….”
녀석의 솔직한 고백에 보답하듯 나 또한 솔직한 답변을 내뱉었다.
물론 그걸 믿느냐 마느냐는 본인의 판단이다.
“어쩌면 네가 가는 길에는 지저분하고 더러운 일을 해 줘야 하는 사람이 필요할지도 몰라. 그때가 오면… 날 이용해.”
“그럴 생각이야.”
선과 악이 분명한 세계관에서 뒤처리해 줄 일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모르겠다만,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용해 줄 생각이었다.
녀석이 경쟁자를 단숨에 죽여 버릴 정도로 강단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어쩌면 주인공의 조력자로서 지금보다 더 활약하게 될지도 모르지.
아직 여전히 복잡한 마음이다.
“참, 루트비히도 대충 눈치챘거든? 그쪽은 알아서 해라.”
“루트비히도?”
“어어. 정확하게 확신하는 건 아냐. 하지만 정황상 네가 그랬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잡아떼든지, 어떻게든 설득하든지 해.”
“그렇구나… 루트비히는 워낙 착한 아이라서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지도 모르겠네. 만약 내가 불편하고 방해될 것 같으면 동아리 밖에서만 활동할게.”
“그건 뭐 알아서 하시고. 사업 확장은 바로 시작할 거지?”
“응. 그래야지. 형제들은 내가 벌인 사건이라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나한테 기회가 왔다고 생각할 거야. 그들에게는 내가 이제 막 경쟁의 출발선에 선 셈이지. 이제부턴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겠구.”
“필요하면 무력은 지원해 준다. 확실하게 잡아.”
“…고마워.”
“그리고 한 가지 알아봐야 할 게 있어.”
“응. 뭔데?”
나는 잠깐 뜸을 들였다. 이걸 얘한테 부탁하는 게 맞는 걸까.
짧은 고민 끝에 결정을 내렸다.
이건 신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험이기도 했다.
“사브와라에서 보관 중인 신수 ‘하니앤’을 노리는 세력이 있거든. 아마 네헨쿠이 상단인 것 같은데.”
“네헨쿠이 상단이 신수를?”
“그래. 그쪽으로 조사 좀 해 줘. 빠르고 정확하게.”
“아… 알겠어. 일단 알아볼게.”
원래의 정사대로라면 파괴되었어야 할 신수 병기 ‘하니앤’.
만약 그 전력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다면… 이어질 에피소드들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질 거였다.
“…맛있는 냄새.”
동아리실 안에서 군밤 냄새를 맡은 날다람쥐가 코를 킁킁대며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내 바짝 붙어 몸을 웅크리고는 빨리 간식을 꺼내 달라고 눈빛을 쏴댔다.
“기다려.”
“응.”
어느새 말 잘 듣는 애완 수인이 된 미마가 얌전히 앉아 꼬리만 휘휘 흔드는 모습은 뭔가 뿌듯함을 자아냈다.
나는 흐뭇하게 웃고는 장갑 낀 손으로 손수 군밤을 까 그녀의 입 안에 쏙 넣어 주었다.
“……!”
너무 뜨거웠는지 미마가 팔짝 뛰어올랐다.
맹세컨대 고의는 아니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