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41)
17. 도망치치 않는 소녀
파는 유나의 옆에 앉아 그녀가 펼쳐놓은 설계도와 기계 장치들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설득하고 변심하게 만드는 건 자신 없지만, 곧 들이닥칠 동료들의 면면을 생각하면… 결국 그 자신이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러셀은 조금만 수틀리면 무력으로 그녀를 제압하려 들 거다.
휴고는 수줍어서 제대로 말도 못 하겠지.
미마나 루트비히는 아예 남의 사정에 관심이 없고, 로벨리아는 사회성이 한없이 바닥에 가깝다.
리지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주디는 워낙 여리고 감수성과 공감 능력이 뛰어나 오히려 학생회장을 붙잡고 함께 엉엉 울어 버릴지도 모른다.
결국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로 누군가를 설득해 내는 일에 그나마 걸맞은 건 자신뿐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다만 그 방법이 마땅치 않아 고민일 뿐.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야?’
그의 시선을 의식한 유나는 연신 파를 힐끔거리며 장치들을 조물조물하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집중하기 쉽지 않다….
“그, 너무 쳐다보는 거 아니야?”
“실례가 안 된다면 왜 신수와의 계약을 거부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
곧바로 들어오는 역질문에 유나가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 태도가 사뭇 예의 발라 거절하기도 마땅찮다.
“이유부터 물어보는 사람은 처음이네….”
“궁금해서 말이지.”
“왜냐니…. 그냥 하기 싫으니까. 싫은 데 이유가 어딨어?”
단호한 대답에 파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모든 불호에는 이유가 있는 법인데. 아무런 이유 없이 싫은 음식이 있어? 그냥 싫은 사람은?”
“그냥 싫을 수도 있지. 나는 떡을 싫어하거든.”
“왜? 어떤 계기가 있는 건가.”
“그냥 싫다니까…. 목에 걸리는 퍽퍽한 느낌도 싫고 맛도 별로 없고.”
“그럼 네가 그 음식을 싫어하는 이유는 퍽퍽하고 맛이 없어서네.”
“…….”
“모든 불호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라고 했잖아.”
논리의 벽에 부딪힌 유나를 빤히 바라보며 파는 다시 한번 물었다.
“왜 싫은데?”
“…난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나 하면서 살고 싶어.”
“그렇군.”
파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순순히 납득하자 당황한 쪽은 도리어 유나였다.
“너무 쉽게 수긍해 주니까 더 불안하네….”
“왜? 충분히 공감되는 이유잖아. 자유는 소중한 가치고, 연구는 훌륭한 삶의 목표야. 소속감이란 건 누군가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헤. 너, 말 잘하는구나. 내 주변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답이 안 나오면 그 답을 들을 때까지 계속 다그치기만 했거든. 그러면서 나한텐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며 짜증만 내고 말이야. 아빠의 뒤를 이어야 한다,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마라. 학생회장이 되어야 한다. 신수와 계약해서 마신과 싸워라.”
“…….”
“왜 타인의 선택으로 내 삶의 방식을 강요받아야 하는 건지 난 도저히 모르겠는데. 거절하는 것도 설명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어.”
“그렇군. 유감이다.”
“응? 아니, 네가 미안해할 필요까진 없는데.”
“내가 미안하다는 건 다른 의미야. 나도 결국은 네가 신수와 계약하게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라.”
“역시 그렇구나….”
머리 위로 마법 지팡이를 탄 리지가 휙 날아가는 게 보였다.
제법 근거리에서 저공비행 하는 중인데다 이곳은 시야를 가리는 높은 나무가 없는데도 보지 못하고 지나쳤다.
파는 근처에서 빛을 뿜는 기계장치를 바라봤다.
“결계를 만드는 장치 같은 건가?”
“응. 원래 외부인은 보지도 들어오지도 못하는 건데… 너는 어떻게 들어왔는지 모르겠어.”
“아마 이것 때문일 거다.”
파는 상의 속에 감춰 두었던 목걸이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일족의 차기 지도자에게 대대로 전해지는 고대 아티팩트다.
어떤 축복과 그에 따른 대가를 착용자에게 부여하는 물건인데, 파는 그 정확한 내막을 알지 못했다.
그저 결계 마법이나 현혹, 환상 마법 등에 대한 면역을 부여해 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 정도만 알 뿐.
“그래서 날 설득하려고?”
“설득? 아니. 네게 선택지가 없다는 걸 알려 줄 거야.”
“그게 무슨….”
“곧 마신군의 습격이 시작될 거다. 신수 카즈란의 힘이 없다면 도시 전체가 폐허가 되고 많은 사람이 죽겠지. 아마 너도 전쟁에 휩쓸리면 죽거나 다치겠지? 네 연구실도, 연구자료도, 이 학원도시의 모든 연구 기반시설까지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질 거다.”
“하지만 마신군은 성약의 계승자가 막을 수 있다고 들었어.”
“틀렸어. 성약의 계승자는 없어.”
“…뭐?”
“여신이 힘이 다해서 깨어나지 못했으니까. 앞으로도 깨어나지 못할 거고. 다만 그 의무를 이은 아직 덜 자란 멍청할 만큼 정의로운 소년이 있을 뿐이지.”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톱을 까드득 깨물었다.
“네가 바라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자유롭게 연구나 하면서 살고 싶다는 꿈은 일단 네가 살아 있어야 이룰 수 있는 꿈이다, 유나. 생존이란 건 스스로 선택해서 스스로 이뤄내야 할 목표지. 동시에 이 대륙의 모두가 같이 짊어지고 있는 짐이기도 하고.”
“원해서 온 것이 아니야….”
“하지만 듣기로는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 하던데.”
“…그걸 어떻게?”
유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반문했다.
그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녀만의 비밀이었기에.
지구에 있던 시절, 그녀는 목숨을 잃을 뻔했었다. 정체불명의 외계 생명체들이 나타나 그녀가 지내던 과학 영재교육 시설이 반파되고 사람들이 죽어 나간 것이었다.
그때 신수 카즈란의 목소리가 들렸고, 살고 싶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내 목숨을 구해 준 대가라며 또다시 의무를 강요받을까 봐.
그 이기적이고 두려움에 떨었던 선택을 눈치챈 건 눈앞의 엘프가 처음이었다.
“아는 친구에게 들었다. 이상하게 아는 게 많은 녀석이지. 강제로 원치 않는 세계에 끌려와 의무를 강요받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 너는 원래 살던 곳에서 누구보다 벗어나고 싶어 했고, 누구보다 살아남고 싶어 했다고.”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구.”
“결국 네 선택이겠지만,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나는 결국 들고 있던 공구를 떨어트리곤 얼굴을 무릎에 파묻었다.
파의 목소리는 이상한 마력이 있는 미성이다. 분위기는 완고하면서도, 어투는 부드럽다.
그녀의 취향은 차치하고서라도 듣고 있다 보면 저절로 납득하게 되어 버리고야 만다.
하지만 또다시 떠오르는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기억들.
“네게 투자된 금액이 얼마인지는 아는 거냐?”
“엄마를 실망시키지 마. 넌 더 잘할 수 있잖아.”
“사실 천재 공학자라는 말은 와전된 게 아닐까? 거품이 낀 걸지도 모르겠어.”
“시설에는 초등학생 때부터 들어왔다며? 근데 왜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만들어낸 결과물이 고작 저 정체불명의 드론 하나야? 21세기 오펜하이머라는 칭호가 아깝네, 아까워.”
“연구소를 터트려 버렸대요. 정신 발작이라는데… 뭘 만들었나 했더니 허가도 없이 살상 무기를…”
“격리 조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수없이 받았던 기대와 실망이 트라우마가 되어 교차했다.
유나는 고개를 처박고선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렸다.
맞아. 지구에서 벗어나고 싶었어.
기대와 좌절과 실망 어린 시선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
하지만 죽고 싶진 않았어.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아 보고 싶었거든.
그저 소박하고 평범하게 살아 보고 싶었어.
그래서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이세계라는 사실에 설레기도 했어.
만화나 소설 속에서만 보던 자유롭고 흥미로운 삶이 내게도 찾아온 걸까 싶었어.
하지만 불안해. 무서워.
너희들이 기대하고 원하는 모습을 내가 보여 줄 수 있을까?
내가 정말 그런 힘을 갖고 있을까?
이번엔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을까?
도망치지 않겠다고 약속할 수 있을까?
“난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인데….”
“함께 싸우자. 모두의 평범한 삶을 위해서.”
아주 짧은 순간 파의 목걸이가 점멸했다.
유나는 깊숙한 내면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와장창 깨져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쩌적, 쩌저적.
평범하게 행복한 삶이란, 누구에게나 가벼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론 그 한없이 작고 소소한 평범함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쟁취하고, 살아내야 하는 것이었다.
이 별의 모든 생명체에게 주어진 멍에다. 누구도 삶을 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유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담는 그 ‘평범한 삶’을 위해 수백 년간 싸우고 있는 이들이다.
파는 그 잔혹한 사실을 그녀가 스스로 깨닫도록 기다려주었다.
파의 진심 어린 태도는 유나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고, 그녀는 여느 때보다 크게 갈등하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그녀에게 차분하게 고민할 시간을 주었다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해피엔딩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아니면 처음부터 기다릴 마음이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르르릉―!
마치 마른하늘에 벼락이 치듯 진동이 울려 퍼지고 조금 전까지 맑게 갰던 하늘이 순식간에 구름에 가린 듯 어두컴컴해졌다.
“엥? 튜나? 왜 그래?”
유나의 전투 드론 튜나가 곧바로 전력을 잃고 바닥으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그녀가 있는 공간을 숨겨 주던 결계 장치가 전력을 잃고 빛이 소멸한다.
파는 본능적으로 침공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황급히 허리춤에서 노란색, 초록색 신호탄을 꺼내 동시에 허공으로 발사했다.
허공을 바라본 순간 눈에 들어오는 건 하늘을 찢고 나타난 군단장급 마물, ‘파멸의 기간테스’.
현역 영웅들이라고 해도 부대 단위로 공략을 진행해야 하는 군단장급 마물.
사도 테네브리아를 제외하고 레인가르에 가장 막대한 피해를 주는 재앙의 등장이었다.
대기가 찢어진 허공 위.
일반적인 골렘들보다 십 수 배는 거대한 몸집의 마물의 여덟 개의 포신이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포격 지점은….
이곳이다.
포신이 일제히 이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은 파는 반사적으로 유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 위로 무자비한 폭격이 쏟아졌다.
* * *
‘안일했어.’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나를 찾기 위해, 정확히는 유나와 길을 잃은 파를 찾기 위해 수색하던 중 시작된 마신군의 침공.
그리고 거의 동시에 올라온 신호탄 두 발.
파를 제외한 동료들은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으니, 이건 파가 쏘아 올린 신호탄이었다.
녀석이 결국 학생회장 유나를 찾아낸 것이었다.
정사 때와 마찬가지로 파는 길을 잃자마자 유나를 찾아냈다.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것처럼 벌어진 일이다.
뒤이어 정사와 마찬가지로 그 순간 마신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개발자 노트]에는 변경된 설정값이 없다.임의로 시작된 침공이 아닌, 순리에 따른 결괏값.
‘…날짜가 아니었어.’
지금까지 마신군의 침공은 특정 날짜에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날짜가 되기 전까지 유나를 찾아내 신수와 계약을 시키면 훨씬 좋은 환경에서 에피소드를 클리어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트리거는 날짜가 아니었다.
유나와 파의 만남 그 자체.
두 사람이 만난 순간이 침공이 시작되는 시나리오의 시작점이었다.
‘유나는 파를 만나고 신수와 계약하고자 마음을 먹어.’
그렇다면 결론.
마신군은 가장 위협이 되는 시간을 지배하는 신수 카즈란을 경계하고 있었고, 사전에 계승자로 낙점된 유나에게 무언가 심리적 금제를 걸어 두었다.
그녀가 신수와 계약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마신군이 그녀를 저지하기 위해 움직인다.
심리적 금제는 테네브리아라면 충분히 심을 수 있다. 괜히 사도라는 호칭이 붙은 자가 아니다.
모습을 바꾸고 유나와 접촉해 금제를 거는 것쯤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더 나아가서, 그녀가 신수를 계속해서 거부해 왔던 것부터가 사도의 안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레인가르의 성소-현자의 탑에는 마신의 힘이 봉인되어 있다.
테네브리아는 오랫동안 그 힘을 되찾기 위해 레인가르를 노려 왔었고.
제힘을 완전히 되찾기 전까지 유나는 적당히 견제만 해 둔 채로 물밑에서 계략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다 유나 금제를 깨고 마음을 바꾸면, 계략이 드러나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가장 먼저 그녀를 타격해 위험 요소를 제거해 버릴 생각이었던 거다.
내가 써 내려간 것은 그저 사건과 활자의 나열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구현된 세계는 더 치밀하고, 촘촘한 짜임새로 사건이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전력으로 내달렸다.
어째서 발견하지 못했나 싶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유나의 비밀공방이 있었다.
이미 반파되어 버린 작은 작업실 뒤쪽에서 겁에 잔뜩 질린 유나가 벌벌 떨고 있다.
그런 유나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파.
파는 한쪽 팔과 상반신의 1/3이 날아가 있었다.
“파!!”
찢어지는 비명이 그를 향했다.
그러나 파는 여전히 단단한 눈빛을 잃지 않은 채 유나를 향해 달려오는 마신군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선 씩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늦지 않게 왔네. 이제 걱정하지 마라. 예비 계승자.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 도착했으니까.”
이제 안심이라는 듯.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운 상태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