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47)
17. 도망치치 않는 소녀
“누가 자꾸 얕은 수작을 부리나 했더니.”
사뿐히 격납고 지면에 착지한 테네브리아의 긴 머리칼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일견 연약해 보이는 외형이었으나, 그녀가 풍기는 기세만큼은 시공간을 잡아먹을 만큼 흉흉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 오는 거악(巨嶽).
그녀가 지면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검보랏빛 그림자가 마치 피 웅덩이처럼 찐득하게 찰박거렸다.
현자의 탑 바깥에서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쟁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는데도 마치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양 평온한 표정.
테네브리아는 열려 있는 조종실 탑승구 안쪽으로 겁먹은 기니피그처럼 잔뜩 긴장한 유나와 눈을 마주쳤다.
“네가… 새로운 계승자구나? 친부모가 죽을 때 도망치고선 끝없이 도망치는 악몽을 꾸는 그 아이.”
테네브리아는 목소리마저 사람을 홀리는 듯했다.
-유나 님. 말 섞을 필요 없습니다. 폐문하겠습니다.
몽롱하게 귓가를 울리는 음색에 휘감겨 있던 유나가 카즈란의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철컥. 탑승구의 문이 닫히고 콕핏 안에서 바라보는 시야가 펼쳐진다.
“무례한 아이네. 차라리 평소처럼 도망치지나 그랬니. 지금부터는 아주 끔찍하고 고통스러울 텐데.”
안타깝게도 콕핏 안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려왔다.
테네브리아의 시선이 이번에는 신수 병기 앞에서 온몸을 검붉은 피로 물들인 채 꼿꼿하게 선 휴고를 향했다.
“너는… 특이하구나.”
거대한 병기 앞을 지키는 소년의 모습은 초라하게까지 보였다.
하나 그 기개만큼은 강성해서, 테네브리아의 눈에 흥미가 깃들었다.
“하찮은 인간의 몸에 신성이 깃들었어. 왜일까? 성약의 계승자는 어디 가고 귀엽기 그지없는 애송이가 내 눈앞에 나타난 거지?”
휴고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성약을 이었다는 것은 아직 마신군에 알려지면 안 되는 사실.
사도씩이나 되는 존재인 만큼 제 안의 신성을 곧바로 파악한 모양이지만, 그 이상은 예측하기 어려울 거다.
“말이 안 통하는 아이들이구나.”
테네브리아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래. 마음껏 발버둥 쳐 보렴. 기껏해야 같잖은 잔재주로 쥐꼬리만 한 시간을 벌었을 뿐이겠지만. 이래서 신수들은 한심하다니까. 어차피 인과를 바꾸지도 못하는 시시한 재주를 가지고….”
[맹독 폭발]그 순간 카즈란과 휴고의 발밑에 그림자가 지더니, 거품이 터지듯 충격파가 발산됐다.
휴고는 빠르게 투지를 개화하며 충격을 피해 몸을 굴렸고 카즈란은 다소 휘청거리긴 했으나, 충격을 받고도 버텨냈다.
문제는 권능이 품고 있는 독성이었다. 폭발이 일어난 지점에서부터 바닥을 녹일 정도로 강력한 독성이 퍼져 나갔다.
병기 내부는 플라즈마 보호막으로 독성을 차단할 수 있지만, 휴고는 아니었다.
“휴고! 떨어져!”
유나의 음성이 기체 외장 스피커를 통해 울려 퍼졌다.
휴고는 투지 개화 상태를 유지하며 멀찌감치 퇴각했다.
-유나 님. 조작을.
“으, 응.”
유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선 조종간 위에 손을 올렸다.
익숙한 컨트롤러다. 과거 지구에 있을 때 몇 번 다루어 보았던 물건.
비록 얼마 지나지 않아 ‘대부분 너무 쉽다.’라는 이유로 콘솔 게임에 흥미를 잃게 되었지만.
자그마한 손이 커다란 조이스틱 모양의 조종간에 닿자 연결된 심상으로 조작법이 유나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꼭 격투 게임 같네….’
전투기 슈팅 게임이라기보다는 격투 게임 같은 조종 방식이었다.
유나는 대략 알겠다는 듯 카즈란의 조종을 시작했다.
마침내 육중한 거체가 움직인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병기의 부품들은 기름을 잘 먹인 듯 매끄러이 작동했다. 격납고 관리자들이 얼마나 관리에 신경을 써 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딸각, 유나의 조작에 따라 카즈란의 팔이 휘둘러진다.
카즈란의 팔이 테네브리아에 닿는 동시에 쾅, 하는 충격음과 함께 지축이 왕왕 진동했다.
휴고는 전투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거리를 벌리고 그 웅장한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테네브리아와의 싸움에서 자신이 할 일은 만에 하나 생길 빈틈을 잡아내거나, 혹은 위험에 빠진 카즈란과 유나를 대신해 한두 번의 공격을 받아 주는 것.
하지만 두 존재의 전투를 목도한 휴고는 그저 허탈한 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테네브리아가 어둠에 물든 손바닥으로 거체의 팔을 가볍게 가로막은 것이었다.
바닥에 깔린 독성은 둘째치더라도, 두 존재가 풍겨 대는 위압감이 너무도 거대해 마치 다른 세계를 보는 듯했다.
자연법칙을 완전히 거스르는 듯한 그 괴이한 전투 현장이 공포마저 불러일으킨다.
대형 마신군들. 그러니까 군단장이나 군주급의 마신군을 상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인류 최후의 병기.
그리고 힘을 완전히 되찾지 못한 미완의 폭군, 테네브리아.
두 존재가 본격적으로 격돌한다.
유나의 조작에 따라 카즈란이 다시 힘껏 오른팔을 휘둘렀다.
이번엔 완전히 짓뭉개 버리겠다는 결연한 각오가 느껴질 만큼 거센 내지름.
그러나 그걸 가볍게 피해낸 뒤 테네브리아가 다시 손바닥을 펼치자 육중한 팔이 그의 손바닥에 착 달라붙었다.
부유감이 뒤를 잇고, 카즈란의 몸이 거꾸로 떠올랐다.
“으앗!”
그대로 허공을 회전한 기체가 거꾸로 격납고 지면에 처박혔다.
“아으으―”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탑승구 쪽에서 나타난 테네브리아가 승하강기 부분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 산뜻하게 중얼거렸다.
“죽어버리렴.”
[맹독 폭발]아예 기체의 철판을 꿰뚫고 콧픽을 직접 타격하려던 그때였다.
어느새 달려온 휴고가 테네브리아를 밀쳐내고, 그 틈을 타 카즈란의 날갯죽지에서 뻗어 나온 깃털 모양 철편들이 빠르게 기체 상단부를 보호하듯이 감쌌다.
뒤이어 카즈란의 손바닥이 서로 맞부딪혔다.
귀찮은 날벌레를 잡는 듯한 액션이었으나, 테네브리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유나 님. 몰아붙여야 합니다.
“응!”
점점 신수병기 조작에 익숙해진 유나의 손놀림이 자연스레 빨라졌다.
큰 공격보다는 간결하고 짧은 동작으로 테네브리아를 압박해 들어간다.
“귀찮게….”
드넓은 격납고였으나, 카즈란은 전고(높이) 15m에, 전장(너비) 19m짜리의 거대 병기다. 거기에 카즈란은 공중 비행이 가능한 기체.
제아무리 사도라 한들 신수병기와 단신으로 싸우기에 이곳은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육중한 거체를 휘두르며 사도를 잡으려는 카즈란의 움직임과 번쩍거리며 짧은 거리를 순간 이동해 병기를 흠집 내며 [맹독 폭발]을 때려 넣는 테네브리아.
전투가 이어질수록 격납고는 점점 사지로 변해 갔다. 지면이 녹아내려 날것의 흙바닥이 드러나고 대기는 매캐한 독성으로 가득했다.
물체들이 녹아내리고 벽이 부식된다. 일반인이 들어온다면 몇 초 안에 녹아 없어질 것 같은 강력한 독성이었다.
무리해서 싸움에 끼어들었던 휴고가 다시금 독성 가득한 토사물을 게워냈다.
쾅! 쾅쾅!
카즈란의 수격(手格)이 연신 바닥과 벽을 강타했다.
병기의 공격은 내내 허공을 갈랐고 사도의 공격은 연신 명중했지만, 오히려 짜증이 나는 쪽은 테네브리아였다.
유의미한 피해를 줄 때마다 신수 카즈란이 시간을 초 단위로 잘게 쪼개 돌려 가며 대응했기 때문이다.
‘역시 거슬려….’
온전한 상태였다면 모를까, 불완전한 상태에서는 쉽사리 제압하기 어려운 표적.
애초에 그녀는 카일론과 다르게 단신으로 펼치는 전투보다는 지역 전체에 저주를 내려 악몽을 선사하고 맹독을 뿌려 대지가 녹아내리는 걸 즐기는 사도였으므로.
계승자가 단명하고 그 힘을 감당할 계승자를 찾기 힘들다는 단점을 차치하면 역대 신수 병기 중에서도 가장 까다로운 상대에 속하는 카즈란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갓 신수 병기에 탄 초보 계승자 주제에 놀라울 만치 빠르게 조작에 능숙해졌다는 사실이다.
마치 닳고 닳은 베테랑 같다.
‘이게 다 그 버러지 때문에….’
마인이 되고 싶다며 마신군에 투신하려 했던 공안부의 플럼 중위.
힘이 봉인된 봉인구를 빼돌려 가지고 온다면 받아 준다고 약조까지 해 주었건만, 그 반편이는 그 단순하고도 쉬운 임무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머시너리들을 오염시켜 인간들을 사냥하려던 [결계 오염]도, 계승자를 결계 밖으로 끄집어내 사냥하려던 기간테스와 제트 콜로서스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계획은 완벽했으나, 모든 것이 저지당했다. 그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짧은 회한 때문이었을까.
테네브리아의 연쇄 폭격이 사그라진 사이, 카즈란의 반격이 시작됐다.
마침내 카즈란의 왼쪽 날개가 깜빡 사라졌다가 나타난 테네브리아를 타격하는 데 성공했다.
유나가 그녀의 순간 이동 패턴을 분석해내 다음 이동 위치를 예측하고 타격한 덕분이었다.
테네브리아는 충격에 휩쓸려 그대로 허공으로 밀려났다.
뚫고 들어온 공혈을 따라 쭉 날아가던 테네브리아가 허공에서 몸을 멈췄다.
이대로라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것이었다.
“재미없어.”
애초에 이토록 무식하게 치고받는 건 그녀의 성향과는 맞지 않았다.
좀 더 우아하고, 관능적인 전쟁.
그러니까 비명과 절규와 고통과 신음이 가득한 지옥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야말로 그녀가 바라는 전쟁이다.
“너희는 그래. 맹독도 환상도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어. 조금 특별한 버러지일지 모르지.”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
무언가가 벌어지려 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모두 광기에 빠져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걸?”
짧은 말을 남기고선 테네브리아는 연속 순간 이동으로 빠르게 탑 상부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녀가 표적을 카즈란에서 도시 전체의 일반 시민들로 바꾼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그 사실을 인지한 유나가 카즈란의 날개를 전개하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지만 상승하는 속도의 차이가 극심했다.
“이제야 조금 즐거워지네.”
[파멸의 술식]그녀가 타고 내려왔던 구체를 하늘로 쏘아 보냈다. 그러자 먹구름이 도시 전체를 뒤덮기 시작한다.
이제 술식을 개방하기만 하면 레인가르 전역에서 환상에 빠진 이들이 서로를 죽이고, 퍼진 독성이 모든 생명체를 녹여 버릴 것이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해야 했다.
봉인된 힘도, 소모될 힘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회복하면 그만이었다.
괜히 힘을 되찾아 보겠다고, 계승자의 신수 계약을 막겠다고 계략을 부릴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힘의 격차로 대지를 절망으로 물들여 버렸으면 이토록 귀찮아질 일도 없었으리라.
“이만 행복했던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란다. 버러지들아.”
네 눈으로 직접 이 도시가 파멸하는 모습을 지켜보렴.
그 예쁜 눈동자로 절망하는 모습을 보여 줘.
자신의 무능함에 고통스러워하며 한껏 좌절하면서.
유나는 다급해졌다.
이 공간의 시간을 되돌린다 한들, 상공에서 펼쳐진 술식을 막을 순 없다. 그렇다고 저 술식이 퍼진 위치전부를 되돌리기엔 힘이 남아 있질 않았다.
5번의 [시간 역행]. 이제는 한계였다.
“튜나!!”
결국 유나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전투 드론을 작동시켰다.
[확장 컴퍼넌트-플라즈마 광선]짧은 생 전부를 바쳐 만들어낸 그녀의 전용 병기가 빛을 뿜어낸다.
웬만한 마신군은 일격에 박살 낼 수 있는 위력이었으나, 상대는 웬만한 적이 아니었다.
테네브리아는 양손을 바닥으로 뻗고선 날아드는 광선을 막아냈다.
지지지지직!
플라즈마 광선과 테네브리아의 마력이 맞부딪히고 줄다리기하듯 밀어냈다가 당겼다가를 반복했다.
침투하는 독성으로부터 힘겹게 버티고 있는 휴고.
적발하게 테네브리아를 향해 솟아오르는 카즈란과 유나.
그리고 비소를 머금으로 플라즈마 광선을 거의 소멸시킨 테네브리아.
각자의 표정이 차례대로 교차하며 멈춘 듯한 시간이 다시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이변이 벌어졌다.
테네브리아의 머리 위, 달빛을 가리는 작은 그늘이 졌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늘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곳엔 달빛을 머금은 창을 양손으로 전력을 다해 내리 찌르는 러셀이 있었다.
[소울 족쇄]찰나의 시간, 테네브리아가 광선을 막기 위해 뿜어내던 마력이 흩어지고 광선이 그녀의 몸에 닿음과 동시에 소울은 잔뜩 머금은 창날이 그녀의 등을 꿰뚫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숨죽이고 있었던 러셀의.
테네브리아도, 유나도, 휴고조차도 예상하지 못했던 단 한 번의 일격이었다.
러셀은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찢어지게 웃으며 테네브리아와 함께 추락했다.
비겁한 정면승부보다는 정정당당한 기습으로 적의 심장에 ‘단 한 방’을 욱여넣는 것.
아아. 이것이 ‘도적’이라는 것이다.
짜릿한 손맛에 몸을 부르르 떨던 러셀은 그대로 추락하다가 부서진 탑 중간 즈음의 건물 파편을 붙잡고 착지했다.
“거, 눈빛 보소. 존나게 살벌하네.”
눈을 부릅뜨고 복부를 관통한 창날과 러셀을 번갈아 바라보는 테네브리아를 향해 러셀이 걸쭉한 욕설을 내뱉었다.
테네브리아가 손짓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라면, 러셀은 혓바닥으로 사람을 죽이는 자다.
“네가 그렇게 노려보면 뭘 할 수 있는데. 눈깔에도 창 박히기 싫으면 얌전히 집으로 돌아가지?”
수백 년 존재의 역사에서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모욕적인 언사에 테네브리아는 복부에 박힌 창을 뽑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손가락만 까딱하면 터져 죽을 것 같은 벌레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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