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48)
17. 도망치치 않는 소녀
눈앞의 소년은 벌레보다 못한 미약한 존재가 맞다.
적어도 테네브리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신성도, 자신에게 대적할 만한 양의 소울도 느껴지지 않는 덜 자란 햇병아리.
수백 년 이상을 존재해 오며 여려 별의 흥망과 성쇠를 지켜봐 온 초월적 존재에게 저리도 상스러운 언사를 내뱉을 만한 자격이 없단 소리였다.
어떻게 제 오감을 피해 숨을 수 있었는지.
웬만한 존재의 격으로는 뚫고 들어올 수 없는 여신의 결계를 어찌 뚫을 수 있었는지.
결과적으로 어떻게 계승자조차 제대로 건드리지 못했던 제 몸에 이토록 흉물스러운 상처를 낼 수 있었는지조차 의문이다.
뚝뚝.
비스듬히 꽂힌 창을 타고 핏물이 흘러내린다. 오랜만에 마주한 탐스러운 색깔의, 그러나 동시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혈액이었다.
흘릴 일이 워낙 없다 보니 제 안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공교롭게도 망각하고 만다.
테네브리아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반추하고는 이내 음험하게 웃으며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였다.
잠깐의 소요가 있었지만, 애처로운 발악일 뿐이다.
그보다 지금 우선해야 할 것은 이 도시에 절망을 떨어트리는 것.
선혈을 흩뿌리며 야만스럽게 치고받는 우악스러운 싸움은 테네브리아가 혐오하는 영역이었다.
제게 상처를 입힌 죗값은 언젠가 소년과 그 주변 인물들의 목숨으로 받아낼 것이었다.
테네브리아는 복부를 관통한 창날과 시건방진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소년을 번갈아 바라보고는 위쪽으로 솟구쳤다.
창을 빼내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그저, 폭포수처럼 쏟아질 출혈이 싫었을 그뿐이다.
피를 보는 순간 전투 의지도 대부분 상실했다.
어차피 빼앗긴 힘을 되찾기 위해 잠깐 얼굴을 비쳤을 뿐이다. 겸사겸사 가볍게 놀아준 것뿐.
저 셋은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불쾌감을 자아냈다.
끊임없이 시곗바늘을 되감는 계승자, 원인 모를 신성을 사용하는 자, 그리고 외계인 같은 기운을 풍기는 무뢰한까지.
그녀의 예리한 감각이 계속해서 이곳에서 벗어나라고 외쳐 대는 중이었다.
그 대신. 이 도시가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재앙을 떨어트리고서는 교교히 돌아가 힘을 회복하고, 또 다른 절망을 찾아 나설 생각이었다.
“어딜.”
테네브리아가 결정을 마치고 순간이동으로 위로 솟구치려던 때였다.
그녀의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더니 지하로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자신을 기습했던 그 소년을 향해서.
그녀로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가해한 현상에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어떻게 감히.’
사도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니. 제 몸이 빨려드는 게 아니었다.
소년이 잡아당기는 건 그녀의 복부를 관통한 이 날붙이였다.
그 사실을 깨닫고 하강하는 복부를 꿰뚫고 있던 날붙이를 뽑아낸 순간, 분수처럼 터지는 핏물과 함께 어느새 뛰어오른 소년이 다른 한 자루의 창을 크게 휘둘러 그녀를 내리쳤다.
“유나―!”
러셀은 다시금 패기를 한계까지 끌어올리고 창을 휘둘렀다.
매치포인트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에이스에게 공을 띄우는 세터처럼, 과녁의 위치를 딱 공격하기 좋은 자리로 튕겨낸 것이었다.
러셀은 월광쌍익 1호기를 회수한 뒤 지면으로 추락했다.
그의 눈앞으로 시각이 멀어 버릴 것 같은 빛줄기가 뻗어 나갔다.
[확장 컴퍼넌트-플라즈마 광선]유나는 러셀의 설계에 호응하듯 전투 드론에서 막대한 에너지를 사출했다.
번쩍, 하고 섬광이 빛을 발하더니 테네브리아의 몸을 불태운다. 뒤이어 솟구친 카즈란의 본체가 마침내 방어를 위해 몸을 웅크렸던 테네브리아의 몸을 손아귀에 쥐었다.
이제 그녀는 쥐새끼처럼 순간이동으로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었다.
“재미없어. 재미없다고.”
검게 피부가 불탄 테네브리아의 표정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고는 리지나 투덜댈 법한 말을 구시렁거리더니 이내 몸에서 빛을 뿜어냈다.
허공에서 하늘을 칠흑으로 물들이던 구체가 어둠을 다시 빨아들이고는 카즈란을 향해 하강했다.
유나와 카즈란이 자신들을 덮치는 미증유의 힘을 목도하곤 당황하는 틈을 타 테네브리아의 몸이 점점 흐릿해진다.
현현했던 육체를 버리고 다시 그녀의 세계로 돌아가는 술식을 발현한 것이었다.
“제길! 시간 돌려! 30초만!”
러셀의 다급한 외침에 유나는 곧바로 [시간 역행]을 발동했다.
카즈란의 본체에 부딪힌 구체가 기체를 산산 조각내기 직전, 시간이 되돌아간다.
지면으로 떨어진 몸이 다시 떠올라 탑 중층부로 돌아가고, 어두운 구체가 하늘에 나타났다.
카즈란의 몸도 비행하기 전의 위치로 되돌아갔다.
“앞으로도 기회는 많은데 굳이 여기서 고집 피울 필요는 없겠지.”
구속에서 벗어난 테네브리아가 다시 이동 술식을 펼쳤다. 흥은 식었고 무대는 막을 내렸다. 깜짝 파티는 여기서 끝이다.
“기대하렴. 다음에 만날 때는 더 잔혹한 악몽을 선사해 줄 테니.”
“테네브리아!”
휴고가 그녀를 향해 고함을 내지르자 러셀은 곧바로 그를 만류했다.
“됐어. 어차피 못 붙잡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테네브리아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뒤이어 구체가 다시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저걸 막아내야 했다.
“휴고!”
러셀의 외침에 응답한 휴고가 곧바로 카즈란의 몸체 위로 올라와 양손검으로 하늘을 겨냥했다.
이제 거의 다 왔다.
깨끗함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테네브리아에게 유의미한 상처를 입혔고, 오랜만에 현현한 육체까지 포기하게 만들었다.
이제 한동안 그녀는 이번 에피소드에서 소모한 힘을 회복하는 데 전념해야 할 거다.
휴고가 성약의 계승자로서의 힘을 온전히 갖출 때까지 시간을 번 것이었다.
문제는 저 높은 곳에서 떨어지고 있는 테네브리아의 마지막 발악, 마신의 힘 덩어리다.
저건 카즈란이 막을 수 없다.
고농도로 농축된 마신의 힘을 막는 건, 오로지 여신의 힘이 담긴 신성 권능뿐이었다.
러셀의 시선이 강견하게 구체를 바라보는 휴고에게 향했다.
‘과연, 이것도 정사대로 흘러갈 수 있을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격납고에서 시작된 재앙이 레인가르를 집어삼킬 것이었다.
이번엔 몇 번이나 유나의 생명력을 써 가며 시간을 되돌려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러셀의 우려에도 휴고의 표정은 평온했다.
재앙을 막고자 하는 의지가 녀석의 몸을 지배하고 기어코 권능으로 화해 발현됐다.
주인공은 위기 속에서 강해진다.
대미를 장식하는 역할은, 우리의 주인공 휴고의 것이었다.
휴고는 마침내 [성약의 계승자], [지휘의 일격]에 이어 잠들어 있던 세 번째 권능인 [성약의 축복]을 깨우는 데 성공했다.
[성약의 축복]휴고의 몸에서 뻗어져 나온 신성이 구체를 집어삼켰다.
* * *
레인가르를 가리었던 어둠이 사라져간다.
몇 번이나 되감겼던 시간 탓에 시계는 여전히 새벽녘을 가리키고 있었으나.
닭이 울지 않아도 새벽이 오는 것처럼, 시계가 고장 나도 시간은 흐른다.
마침내 동이 트고 지난했던 하루가 끝나가고 있었다.
유난히 긴 하루였다.
필사의 의지로 제트 콜로서스를 막아섰던 파와 동료들에게도.
몇 번이고 임무를 무사히 성공시키고 민간인들 보호 임무에 투입된 루트비히와 미마에게도.
반복된 마인과의 술래잡기 끝에 확보한 봉인구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는 리지에게도.
몇 번이고 목숨을 던지며 싸운 레인가르의 영웅들과 그림로어의 교수들, 사관생도들에게도.
그리고 모든 힘을 소진해 버리고 선 채로 기절해 버린 휴고와 그를 대견한 듯 바라보는 러셀에게도.
모두에게 너무나 긴 하루였다.
사건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새로운 계승자가 된 유나.
그녀는 현자의 탑 바깥으로 나와 남아 있는 거대 마신군을 모두 토벌하고는, 지친 얼굴로 열린 콕핏의 탑승구에 기대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본다.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으나, 표정만큼은 밝았다.
“안경이 깨져 버렸네….”
-유나 님은 안경을 벗은 모습이 더 잘 어울리십니다.
“그게 뭐야….”
그녀는 피식 웃고는 허공에서 붕붕 떠다니는 튜나를 붙잡고선 애착 인형처럼 끌어안았다.
“도움을 많이 받았지만… 이 정도면, 나름대로 잘해 낸 거겠지?”
그러고는 누군가를 향해 속삭이듯,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린다.
* * *
메인 에피소드 3막, 레인가르 교류전.
섬 전체가 하나의 전장이 되어 치러진 대규모 전투가 막을 내렸다.
사도 하나, 군단장급 마물 하나, 토벌급 마물 하나.
전투가 매일 현재 진행형으로 발발하고 있는 ‘영웅의 무덤’ 전선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규모의 전투였다.
이제라의 사령부에서는 이를 마신군 특유의 게릴라전이라고 보고 후방 경계에 더욱더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균열을 일으키고 전선을 대륙 전체로 확장시키는 건 사도들의 가장 큰 특징이었으니까.
한편 레인가르에서는 전후처리를 위한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새롭게 계승자로 추대된 유나를 필두로 한 학생회와 공안부, 이제라에서 파견된 외교관, 그리고 그림로어 사관학교 교수진 대표인 다이크 로필런이 주축인 조직이었다.
가장 큰 안건은 당연히 피해 복구를 위한 대책과 지원이었지만, 세부 안건 중에는 전투에 휘말린 사관생도들에 대한 보상과 배상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천여 명의 사망자 중 사관생도 출신이 사십여 명.
이제라에서 애지중지 육성하는 영웅 후보생들의 죽음은 안타까움을 자아냈고, 또한 그토록 용맹하게 싸운 예비 영웅들에 대한 찬탄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1학년 장학생 생도들이 있었다.
불과 8개월 전 서펜 섬에서 인류의 대반격을 예고했던 이들을 중심으로, 또다시 ‘최강의 세대’는 위명에 걸맞은 재능을 증명했다.
이번 사건은 고작해야 자기들끼리 생존에 성공했던 서펜 섬 참사와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아내 마을 몇 개와 민가를 구해낸 달베르크 산맥 카오스게이트 사건과도 다르다.
이것은 이제라의 주요 우방 중 하나인 레인가르를 통째로 구해낸 대사건이자 최소한 수만 명의 목숨을 지켜낸 영웅적인 행보였다.
장학생들은 타이밍 좋게(이 시점에서 대체 어떻게 가능했느냐 하는 위원들의 의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학생회장을 설득해 사망자를 최소한으로 줄였고.
영웅들도 맞상대하기 버거워하는 토벌급 마물을 1학년들 단독으로 저지했으며.
마신의 힘이 봉인된 봉인구를 탈취하여 마신군에 투신하려던 마인 플럼을 제압, 봉인구를 확보했고.
머시너리의 오작동을 일으켜 호위 대상을 살해하고 공격하게 만든 마신군의 결계를 풀어냈다.
하지만 앞서 구술한 모든 보고가 무색할 만큼 충격적인 활약은, 단 두 명의 영웅 후보생이 새 계승자를 도와 사도를 패퇴시키고 도시를 파괴하려는 지역 공격을 막아냈단 사실이다.
아무리 힘이 봉인되었다곤 해도 사도다. 마신군의 피라미드 꼭대기에 있는 4명의 대적(大敵).
상황을 전해 들은 외교관이 보고서로 작성하기도 민망하고 어처구니없는 활약이었다.
현직 영웅 중에서도 이만한 공을 세운 이들을 찾으라면 손에 꼽으리라.
“이상이에요. 혹시 제가 빠트린 게 있다면 여기, 서기관 헤이즐에게 물어보시면 돼요.”
“…….”
소문으로 들었다면 허풍 치지 말라고 볼기짝을 때려 주었을 이야기지만, 상황을 전파한 게 다름 아닌 새 계승자이자 레인가르의 총책 유나 학생회장이다.
계승자라는 이름이 주는 위압감 앞에서는 외교관조차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모쪼록 피해가 잘 복구되시길 바랍니다. 이제라에서도 우방인 레인가르가 빠르게 일어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겠습니다.”
“네네. 고맙습니다! 으음, 비록 제가 이 자리에 선 지는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레인가르의 총책으로서 도시민들을 대표해 이제라와 그림로어 관계자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너무 큰 신세를 졌고, 도움을 받았어요. 저희 레인가르는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이제라의 우방으로서 최선을 다해 지원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또한, 사망자에게 적절한 배상을, 함께 싸워 주신 이들께는 합당한 보답을 약속드릴게요.”
유나는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는 의젓함으로 회의를 주관해 나갔다.
현명하고 똑똑하기로 정평이 나 있던 인물이기는 했지만, 워낙 경험이 적고 나이가 어려 염려했었는데… 아무래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신임 회장의 늠름한 모습에 감명받은 건 외부인뿐만이 아니었다.
레인가르 수뇌부들은 하나같이 울컥한 얼굴로 유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심지어 서기관 헤이즐은 손수건으로 눈물까지 찍어내는 중이었다.
“흐윽… 유나 님께서 어려운 결정을 해 주신 걸로도 모자라서, 이렇게 의젓하게 전후처리를 주도해 나가실 줄은… 이제 전후처리를 끝낸 뒤 밀려 있던 각종 결재 서류와 예산 처리, 각종 결계 점검과 머시너리 지휘체계 확립, 신수병기를 필두로 한 기갑부대 지휘체계 개편, 신무기 개발산업 정리, 외교 업무 재개만 정상적으로 처리해 주시면 되겠군요…! 저 헤이즐 스트레사, 이제야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온 밀린 업무에 유나는 얼굴이 새하얗게 창백해졌다.
그냥 도망칠까?
그런 마음이 불쑥 고개를 디밀었지만, 어느새 독심술까지 익힌 건지 진저와 헤이즐이 유나의 양팔을 꼭 껴안듯이 붙잡는다.
“일단 피해 복구 작업부터 마무리하고 다음에 외부 공헌자들의 보상 여부를 논의해 볼까요…?”
그때였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생도 한 명이 꾸벅 허리를 숙이고 들어온 것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피흐 상단 소속, 1학년 코리 하이만입니다.”
주요 수뇌부 회의에 사관생도가 등장하다니. 의아한 듯 바라보는 시선 속에서 입을 연 건 다이크 로필런이었다.
“저희 1학년 중 유일하게 상단 관계자인 생도입니다. 이번 전투 때도 혁혁한 활약을 보였고, 피해 복구 관련해서 상단 차원에서 지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여 참석을 허락했습니다.”
“아! 그랬군요.”
코리는 다시 한번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유나에게 물었다.
“참석해도 괜찮을까요?”
“네! 물론이죠!”
코리는 고개를 숙인 채로 보일 듯 말 듯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고는 천천히 걸어갔다.
평소라면 쉽게 독대할 수 없는 거물들이 즐비했으나,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전투엔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자신이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뒤의 사후처리만큼은 그의 무대였다.
‘팬티까지 싹 벗겨서 와라.’
이제 친구의 특명을 완수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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