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51)
18. 신수 하니앤
계획과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는 것. 그것은 다이크가 가장 혐오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한 도시의 수장이자 대륙을 구할 인재 중 하나인 계승자의 부탁을 무시할 순 없었다.
다이크는 미미하게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통솔자의 불편한 마음을 모르는 유나는 그저 해맑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한 뒤 새로이 사귄 친구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다시 말하지만, 이맘때의 소년 소녀들은 쉽게 친해지고 쉽게 마음을 나눈다. 그리고 빠른 이별은 그 애틋함을 더 키우는 법이다.
“언제 또 볼지 모르니까… 제대로 인사를 하고 싶었어.”
유나의 아쉬움 서린 목소리에 동료들의 표정이 사르르 풀어진다. 어쩐지 마음이 가는 소녀였다. 레인가르 사람들이 왜 그리 유나를 애지중지하는지 알 수 있을 만큼.
그녀는 한 명씩 눈을 맞추며 인사말을 건넸다.
“또 만나게 되겠지?”
“그럼. 금방 만나게 될 거야.”
“남자애들이 하나같이 멋있는데 하필 모두 짝이 있네… 아쉬운 일인걸?”
그녀는 휴고의 대답에 푸흐흐 웃고는 로벨리아를 향해 농담처럼 말을 건넸다.
“로벨리아, 숙취는 좀 괜찮아?”
“부끄러워서 사라지고 싶다고 전해 주십시오….”
로벨리아는 귀와 목까지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고개를 숙였다. 어딘가에 숨고 싶다는 듯 휴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으나, 오와 열을 지키라는 다이크의 말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아하하! 파는 절대 혼자 다니지 말고!”
“너까지 그러기냐.”
유나는 이어서 루트비히에게 손을 흔들었다.
“귀염둥이 루트비히, 많이 먹고 쑥쑥 자라야 해!”
“…….”
이어서 여자아이들과도 한바탕 인사를 나눈 뒤, 그녀는 마지막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러고는 무슨 말을 할지 고민이라는 듯 입을 삐쭉거리는 것이었다.
“왜. 나한테는 할 말 없냐?”
“그런 건 아닌데… 너는 음… 이계인답지 않게 입체적이라 조금 불편하달까…? 내가 살던 지구의 나이 많은 연구원 오빠들?이 떠올라서 뭔가 좀 어렵긴 해….”
나는 묘하게 날카로운 해석에 식은땀을 흘렸다. 예리한 녀석….
유나에게 내가 빙의자인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굳이 숨기려고 했다기보다는, 내 존재 자체가 하나의 이레귤러이니 주요 등장인물인 계승자에게 뭔가 나비효과가 될 만한 건수를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중간 튀어나오는 광대스러운 말투에 유나가 고개를 갸웃하긴 했지만, 딱히 이상하다고 느끼진 않은 모양이다.
워낙 시대 설정이 이것저것 뒤섞인 세계관이라 그럴지도.
나는 음, 음 하며 인사말을 고민하는 유나를 위해 먼저 선빵을 쳤다.
“훈련이나 좀 열심히 해라. 역대 계승자 중에 네가 제일 약해.”
“또 잔소리….”
유나의 어깨에 앉아 있던 갈까마귀가 깍깍― 울어댔다.
“뭔 까마귀가 인간들 대화하시는데 BGM을 깔고 있어. 치킨 돼 볼래?”
“야아! 카즈란이야!”
“아. 미안. 몰랐네. 신수 폼은 처음 봐서.”
나는 빠르게 사과했다.
자칫하면 신수로 치킨 튀겨 먹은 대역죄인이 될 뻔했다.
신수의 모습을 한 카즈란은 뺙뺙거리며 부리를 쪼는 듯한 시늉을 했다.
“뭐래?”
“나 괴롭히지 말래. 카즈란 너무 귀엽지 않아?”
유나는 ‘인간 폼과 아머드 폼은 소울을 많이 소모하니까 내가 회복될 때까진 저 상태로 있을 거래.’라며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내게서 시선을 거둔 유나는 마지막으로 동료들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다음에 만났을 땐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
짧았던 인사 시간이 지나가고, 그림로어 교류생들은 천천히 마력 열차 플랫폼으로 이동했다.
유나는 그 모습이 점이 되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동료들은 하나같이 뭔가 아쉬운 듯 섭섭한 표정을 지었지만, 머지않아 금방 만나게 될 거다.
그때는 아마도 지금보다 더 그럴듯한 계승자가 되어 늠름해져 있겠지.
그 전에 쌓이고 쌓인 업무 지옥에서 살아남는다면 말이지.
* * *
“올 때도 대단하다고 느꼈는데, 갈 때는 더 놀랍네….”
리지는 초호화 크루즈 마력선 위에서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아칸소르 호(號).
레인가르에서 운용하는 마력선 중에서도 최고급 여객선으로 알려진 배다.
기존 교류전에 사용되던 중급 마력선 대신 초호화 여객선이 등장한 것은 레인가르에서 조치한 일종의 보답이다.
마치 비즈니스를 위해 출국할 때는 이코노미를 타고, 귀국할 때는 거래처에서 끊어 준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오는 상황과 같다.
학원도시에서 이번 사태를 통해 얼마나 그림로어에 호의를 갖게 되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융숭한 대접이었다.
겉보기도 아주 화려해졌지만, 가장 크게 와닿는 차이는 바로 승차감이었다.
분명 해류는 올 때보다 더 거칠었는데도 선체가 거의 흔들리지 않는다. 신묘한 일이었다.
덕분에 뱃멀미로 고생했던 생도들도 이번엔 한껏 크루즈 시설을 즐길 수 있었다. 갑판 위에 수평선을 구경하러 나온 생도들이 많아진 것도 그 일환이었다.
러셀 역시 뱃머리 쪽 갑판에서 시원한 짠내를 한껏 들이마시는 중이었다.
흔히 지구에선 사람들이 머릿속에 연가시 하나쯤 품고 산다고 한다.
그만큼 지구인들은 물을 좋아한다.
계곡, 바다, 강, 호수. 피서철이 되면 어느 하나 붐비지 않는 곳이 없고, 아파트건 상가건 무슨 무슨 뷰라는 이름으로 물이 보이는 곳이면 그 가치가 천정부지로 뛰어오른다.
러셀도 속 알맹이는 지구인의 DNA가 흐르는지라, 물을 보고 멍하니 있는 기분을 즐겼다.
이 세계의 바다는, 태평양의 어느 맑은 바다를 갖다 놓아도 비견되지 못할 만큼 맑고 예뻤으니까.
말없이 물멍을 즐기고 있던 러셀의 뒤통수로 여자애들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오랜만에 보는 얼굴과 눈이 마주친다.
“아카샤네?”
“…….”
레인가르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얼굴이었기에, 러셀은 곧바로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아, 왜요.”
“뭘 그리 삐딱하게 굴어. 그냥 봤으니 인사나 하는 거지. 밥은 먹었냐?”
“남이야 밥을 챙겨 먹든 말든.”
“……?”
러셀은 이 자식이 갑자기 뭘 잘못 먹었나 싶어 옆에서 웅크려 있던 미마를 툭툭 치고 쳐다봤으나, 미마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다시 고개를 처박을 뿐이었다.
“딱히 뭘 잘못한 기억은 없는데.”
“네네. 그러시겠죠. 자기들끼리 치고받고 알아서 하시는 와중에 저처럼 약하고 도움도 안 되는 정령사야 살아 있든 죽어 있든 신경이나 쓰이겠어요? 그냥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면 그만인 것을요~”
그제야 러셀은 이 정령사가 자신을 내팽개쳤다는 사실로 삐쳐 있다는 걸 깨달았다.
딱히 내팽개치려고 한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안중에도 없었던 건 맞으니까.
“너 말고 코리랑 어셔스도 싸울 땐 안 불렀는데 뭘 삐지고 그러냐. 괜히 따라왔다가 골로 가면 어쩌려고.”
“그래서 술 파티 벌일 때도 저만 쏙 빼놓고 즐기셨겠죠. 나는 쓸모가 없지. 쓸모가 없어. 쓸모없으면 죽어야지.”
아카샤는 러셀의 변명에도 소용없다는 듯 와다다 중얼거렸다. 그 시답잖은 말투가 웃기기도 하고 하찮기도 해 러셀은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뭘 웃어요! 뭐가 웃기담.”
“약해 빠져가지고.”
“……진짜 쓰레긴가?”
“기껏 신경 써서 너 지키라고 애들도 붙여 줬더니 이제 와서 꼬라지 부리네. 콱 바닷물에 담가서 염장해 버릴까 보다.”
러셀의 말에 아카샤가 놀란 듯 되물었다.
호위를 붙여 줬다고?
…완전히 까먹은 게 아니었어?
“…진짜요?”
“그럼 가짜겠냐. 건페이랑 A클래스 애들 안 갔어?”
“왔죠….”
“걔네 내가 보낸 건데. 우리 애들 안 죽게 잘 지키라고.”
“…우리 애들?”
아카샤는 한 방 맞은 듯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당연히 신경 쓰고 있었지. 너는 나한테 아주아주 중요한 사람이거든.”
“……?”
눈앞의 남자에게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뭔가 다정하고 몽글몽글한, 그런 단어가 튀어나온 탓이었다.
비록 러셀의 머릿속에는 당장 그림로어로 돌아가자마자 얻은 하늘석을 영약으로 바꾸기 위해 ‘제조 머신에 기름칠해 둬야지.’라는 생각뿐이었지만.
“??????”
껍데기가 헌앙하면 주둥이가 카니발이어도 개연성이 생긴다 했다.
게다가 아카샤는 한때나마 러셀과의 핑크빛 미래를 머릿속에 그리며 손주 손녀까지 떠올렸던 소녀다.
그런 그녀에게 폭격처럼 심장을 두드리는 미청년의 탈을 쓴 능글맞은 아저씨의 화법은 좀처럼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청소년들 사이에 낀 닳고 닳은 아저씨가 이렇게 위험하다.
아카샤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눈동자로 한껏 시선을 피하다가 이내 고개를 수그려 버렸다.
“그, 그렇게 말씀하셔도―”
“마치 뭐랄까, 발바닥 같은 존재랄까?”
“……?”
하지만 뒤이은 비유에, 뭔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고생하는 신체 부위와도 같지.”
“최악이야…. 개새끼….”
좀처럼 듣기 힘든 신랄한 악담에 러셀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한결같이 때리는 타격감이 좋은 녀석이라고 생각하면서.
러셀이 한참이나 웃고 있자, 고개를 든 미마가 빤한 시선을 보낸다.
다음에 이어질 대사를 예감한 그가 빠르게 선공을 날렸다.
“난봉꾼 아니다. 그냥 놀리는 거야.”
“바람둥이.”
“억울하네.”
“욕 들으면서 좋아하는 마조히스트.”
“말 심하게 하지 마라. 꼬리털 다 뽑히고 싶냐.”
미마는 대답 없이 제 꼬리를 슬그머니 안쪽으로 수납한 채 꼭 껴안았다.
* * *
“오셨습니까, 1학년 장학생 여러분들. 그리고 1학년 수석에 빛나는 러셀 애시그린 천재 생도님.”
그림로어 사관학교에 도착하자, 프리마관 앞에서 메이드장 앤 메이와 메이드들이 모두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앤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오는 내 추악한 과거를 놀리며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제야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기분과 함께 그림로어에 되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처음 몇 번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제발 그만해.’라고 사정해 봤지만, 앤이 날 놀리는 걸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은 이후부터는 그냥 포기했다.
“메이드들이 교류전 일정 동안 생도분들을 불편함이 잘 모셨는지요?”
어느덧 장학생들의 대표처럼 되어 버린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어. 전혀 안 불편했어. 오히려 그 친구들이 수고 많았지. 소식은 들었지?”
“네. 고생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무탈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앤 메이의 눈짓에 따라 메이드들이 일사불란하게 튀어나와 장학생들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1학년들이 교류전을 나가고 2학년들도 실습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대대적인 청소를 한 모양인지 프리마관은 내외로 번쩍번쩍 빛이 났다.
안 그래도 깨끗하기 그지없는 기숙사인데… 잘못하면 미끄러져 코를 박을 것만 같았다.
“타지에서 식사도 제대로 못 챙겨 드셨겠지요. 그래서 요리장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특식을 준비하였습니다. 식사부터 먼저 하시지요.”
딱히 굶고 다닌 건 아니었는데….
따지고 보면 레인가르의 시설과 식사는 훌륭한 편이었다.
프리마관에서처럼 개개인의 취향까지 고려한 맞춤 음식을 제공하진 못했어도 음식의 맛과 퀄리티는 깔끔했으니까.
하지만 밥은 역시 프리마관 밥이 전 세계, 아니 전 우주 통틀어서 원톱이다.
어마어마하게 차려진 식당 음식들을 본 순간 장학생들은 눈이 돌아가 버렸다.
허겁지겁 밥을 향해 달려드는 장학생들을 본 앤 메이가 안쓰러운 듯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식사를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모양입니다….”
레인가르 아카데미에는 조금 미안한 오해였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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