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53)
18. 신수 하니앤
미마는 재빨리 무릎 위에 올려 두었던 베개를 집어 던졌으나, 그 괴상한 반응에 러셀의 인상은 더욱 일그러졌다.
“남의 베개 갖고 뭐 해? 왜 베개 냄새를 맡고 있냐. 냄새 안 나. 메이드들이 침구 세척 깨끗이 한다고.”
“…….”
미마는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얘져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네 냄새가 나서, 계속 맡고 있었어.
이런 대답은 그녀로서는 절대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일이었다.
수치스러움만으로도 충분히 죽어 버릴 수 있는 일이다.
“수인들의 특징이야.”
그녀는 고민 끝에 수치스럽게 죽기보다는 차라리 수인의 존엄성을 포기하기로 했다.
“수인들은 원래 그래.”
목소리 끝은 떨리고 있었으나, 태도는 사뭇 뻔뻔했다.
“물건 냄새 맡아 보는 건 아무 의미 없는 버릇 같은 거야….”
“그러냐? 내가 문화 차이에 좀 무지해서. 수인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둔하기 그지없는 러셀은 이런 조악한 변명에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주었다. 워낙 무던한 성격의 그였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빠져나갈 길 없는 외통수에 갇힐 뻔했다.
그녀는 러셀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비록 수인들의 명예를 땅바닥에 처박는 행동을 한 것 같아 죄책감에 사로잡혔으나, 실제로 그런 종족도 있긴 하니까… 어디까지나 불가항력이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앤의 안내에 따라 총장실로 향했다.
미마의 시선이 한발 앞서 걷는 앤과 러셀에게 향한다.
“위대하신 수석 러셀 님은 역시 마음도 넓으십니다. 친구를 위해 주말 아침부터 시간을 내어 주시고.”
“진짜 그만 좀 해라…. 메이드장 바꿔 달라고 학사에 건의해 버린다?”
“죄송합니다만 메이드장은 종신직이라서요. 반평생 쌓아 올린 평판도 낮지는 않은지라 아마 쉽지 않으실 겁니다.”
“열 받네….”
“유능한 건 사실이잖습니까.”
“그건 솔직히 부정하기 힘들긴 하지.”
“희대의 천재께 인정받으니 일하는 보람이 더 크게 생깁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해야겠군요.”
“진짜 개빡치네.”
두 사람은 언제 저렇게 친해진 걸까.
스스럼없이 농담을 건네고 넉살 좋게 웃으며 받아치는 모습이 뭔가 자연스럽다.
자신은 러셀과 단둘이 있어도 금방 침묵에 사로잡히기 일쑤인데.
기분이 나쁠 정도는 아니었지만, 뭔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짧은 아침 시간 동안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통에 기체가 처지는 느낌이었다.
“뭐 해. 같이 갈 땐 옆에서 걸어야지. 이 사회성 없는 수인아.”
몇 발자국 떨어져 걷는 미마가 신경 쓰였는지 러셀이 그녀를 휙 잡아끌어 제 옆에 가져다 놓는다.
“응.”
거칠다면 거친 언동이었지만, 그녀는 그게 또 기분 좋아 고개를 수그리고 대답했다.
앤의 시선이 그런 미마를 향했다. 그러고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조금 가로저었다.
* * *
사관학교 총장실 앞에는 총장의 비서와 폴리타아 추적자 중 한 명인, 지원형 브리누스가 서 있었다.
브리누스를 보자마자 미마가 슬그머니 러셀의 등 뒤로 숨어들었다.
비서는 러셀을 바라보더니 왜 부르지 않은 인원을 데려왔는지 따져 물었고, 앤은 차분히 설명했다.
비서는 러셀 등 뒤에 숨은 미마를 힐끔 바라보고선 총장님께 허락을 구하겠다며 총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러셀은 브리누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이제라에서 제법 고초를 겪었는지 기체 여기저기에 기스가 난 채였다. 전에 봤을 때는 번쩍번쩍한 새 로봇이었는데, 지금은 닳고 닳은 구형 기체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폴리티아로 돌아가나 봐?”
“러셀 애시그린.”
“오. 내 이름도 다 기억해 주고.”
“건강해 보이는군.”
“그렇지 뭐. 얼굴을 보니 괜히 살려 뒀다는 표정이네?”
“그런 후회를 할 때도 있었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더라도 같은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불필요한 살상을 하지 않는다는 게 우리 대장의 방침이라.”
“그렇겠지. 괜한 수작 부리지 말고 미마 잘 부탁한다.”
“기술자는 내가 아니다. 레인가르의 로봇 기술자도 와 있다고 들었고, 아직 우리의 동료가 인질로 붙잡혀 있으니 그런 걱정은 하지 말도록.”
“그렇대. 들었지?”
러셀은 미마에게 안심하라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후 총장의 허락이 떨어지고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섰다.
총장실 안에는 오리건 샤론과 폴리티아에서 파견한 기술자, 그리고 레인가르에서 미마의 보호를 위해 방문한 기술자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총장은 두 사람을 보고선 반갑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허허. 늦었구먼.”
나이가 들면 잠이 없어진다더니… 꼭두새벽부터 사람을 불러 놓고는 늦었다는 게 말이 되나.
러셀은 그렇게 속으로만 구시렁거리며 총장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이제라의 최고 권력자 중 하나인 찰스 샤론과 비스무레하게 닮은 얼굴. 찰스의 먼 친척이라는 설정이라 이목구비에서 그 노인네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났다.
러셀과 미마는 비서의 안내에 따라 소파에 자리했다. 곧바로 오리건의 시선이 러셀을 향한다.
“자네는 어쩐 일인가?”
“보호자로 왔습니다. 미마 어린이가 혼자 가기 무섭다고 해서요.”
“허허. 동기들끼리 우애가 돈독한 게 보기 좋긴 하다만. 다음부터는 내가 먼저 부르지 않는 한 총장실에 방문하지는 않았으면 하네. 이래 봬도 예의범절과 절차를 중요시하는 자리에 있다 보니 말이야.”
“예.”
오리건은 무례를 지적하면서도 큰 질책 없이 넘어갔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양해해 준 모양이다. 애초에 크게 질책할 만한 일이었다면 비서진이 들여보내지도 않았겠지만.
뒤이어 자신을 폴리티아에서 파견한 기술자라고 소개한 남자가 미마에게 프로그램 제거 과정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알아듣지 못할 전문용어가 태반이었으므로, 러셀은 곧 흥미를 잃고 총장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자네는 나랑 차라도 한잔하고 있지. 그러잖아도 한 번은 이야기해 보고 싶었거든. 자네의 동아리에서 납품하는 차 맛이 아주 일품인데 알고 있는가?”
“아뇨. 고상한 건 별로 안 좋아해서.”
“그것참 비극적인 일이구먼. 학사 생활은 할 만하고?”
“네. 그건 더할 나위 없죠.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러셀의 태도는 사뭇 공손했다. 무릇 권력과 자본 앞에 예의범절이 주입되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그리고 그는 본능에 아주 충실한 인간이었다.
“1학년들의 재능이 워낙 출중한 덕에 내 모처럼 기쁘면서도 난처한 한 해를 보내고 있지 뭔가. 혹시 졸업 후 가고 싶은 조직이 있는가?”
“그건 왜요? 템퍼링이라도 들어옵니까?”
“엄청나게 들어오지. 조직 대부분이 미리미리 인재들을 찜해 놓고 싶어 한다네.”
“군부의 눈치는 안 보나 보죠?”
러셀은 명실공히 대장군 빌트레드의 후원을 받는 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를 탐내는 건, 어쩌면 대장군과 군부에 반기를 든다고 오해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모르는가?”
“네?”
“지난번 관료 정기 회의에서 대장군이 못 박았다네. 누군가 질문한 후원하는 생도를 군부로 데려올 계획이냐는 물음에 ‘본인이 선택할 일이지, 내 알 바 아니다. 그런 애송이한테 신경 쓸 여력은 없다.’라고 말이야.”
“한결같은 양반이네…. 뭐, 사실이긴 해요. 후원자라곤 해도 그냥 아빠 친구인 게 다라서. 추천장 말곤 딱히 받은 것도 없고.”
“덕분에 내게 난데없는 청탁이 많이 들어오는 중이지.”
오리건은 차를 호로록 마시고는 눈을 감고선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고작 사관생도 1학년 한 명 때문에요?”
“고작?”
총장은 별 우스운 농담을 들었다는 듯 허허 웃음을 터트린다.
“청탁이 들어오는 건 자네 한 명만은 아니네만, 자네뿐이라고 해도 고작이란 수식어는 어울리지 않지. 좀 더 객관적으로 자신이 걸어온 길을 보시게.”
“한창 전쟁 중인데, 다들 한가하네요.”
“전쟁 중이니 더더욱 전력 증강에 관심을 두는 거지. 전력 확보는 곧 성과와 전공으로 이어질 테니.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둔 조직이 있다면 귀띔해 주게. 나도 더는 시간 낭비하기 싫거든.”
몸담을 조직이라.
러셀은 그 말을 혀끝으로 굴려 보며 고민했다.
크게 생각해 본 적 없는 사실이다.
애초에 졸업 전에 마신과의 본격적인 전면전이 벌어질 거고, 그는 사관생도로서 전투에 참여할 테니까.
당장 시나리오를 클리어할 수 있단 보장도 없는데, 그 이후의 이야기를 고민해 봐야 뭣하겠는가.
“글쎄요. 가능하면 왕실 내부의 조직을 희망하긴 합니다. 성검기사단이나 군부나 특무대 팬텀이요.”
“우선순위는?”
“그것까지는 아직.”
“그런가. 다행히 세 곳 다 내게 청탁하지 않는 조직이긴 하군. 그만하면 충분하네.”
오리건 총장은 러셀에게 몇 가지 더 묻고 싶어 하는 모양새였으나, 미마의 시술이 시작되자 입을 다물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기술자의 말과 동시에 휴대용 프로그래밍 드론이 미마의 몸에 달라붙는다.
미마는 몸을 움찔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러셀이 그녀에게 다가와 양손으로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쫄면 키 안 큰다.”
너무도 그다운 말에 미마는 결국 웃어 버렸다. 단 한 문장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걸 보면 참으로 그에게 많은 의지를 하나 싶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언제부터 편하게 느끼고 있었던 걸까.
훈련소에서 도토리 쿠키를 가져와 자신에게 한 방 먹여 달라고 떼를 쓰던 때부터?
서펜섬에서 에너지를 다 써서 탈진하고 그에게 업혀 도주하던 때?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학신목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던 때?
짝짓기 시기 구애하는 수컷이나 할 법한 행동인 꼬리 만지기에 몇 번이나 몇 번이나 당하면서도 차마 거부하지 못했던 때?
여장하고서도 당당한 모습이 재밌어 영상구에 담긴 그의 모습을 히죽히죽 웃으며 남몰래 지켜보던 때?
아니면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자신을 지키고 구하겠다 선언하던 때였나.
“이해 못 했어? 폴리티아고 뭐고 쳐들어가서 끄집어낼 거라니까? 다른 사람들 아무도 안 간다고 해도, 나 혼자라도 가서 다 때려 부수고 찾아올 거니까 그게 싫으면 발악해.”
잘 모르겠다.
정신 차리고 보니 빠져들어 허우적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다.
시나브로 물들었다는 표현이 옳다.
이 감정이 대체 뭔지, 무엇을 바라고 그에게 집착적인 감정을 품은 건지 미마 스스로도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만큼은 확실했다.
목적도 이유도 없이 그저 살아내던 삶에서… 단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것은 러셀이다.
너를 가지고 싶다.
“키 작으면 싫어?”
“……?”
“기체 개조하면 키 키울 수 있어. 몸맵시도 바꿀 수 있고.”
“뭔 소리야. 아저씨, 얘 시술 잘못된 거 같은데요.”
“아직 시술 시작 안 했습니다.”
러셀은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그를 본체만체하며 미마는 ‘시작해요.’라고 중얼거렸고. 프로그래밍 드론이 작동됐다.
연결된 포트를 통해 프로그램 삭제 명령어가 기체 속을 흐른다.
백신이 기능을 멈추고 소프트웨어 가장 깊숙한 곳에 숨어들어 있던 독성 프로그램이 민낯을 드러낸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옥죄고 구속하고 있던 일평생의 족쇄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미마는 실시간으로 그 과정을 느꼈다.
시술은 무사히 끝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는 러셀이 서 있다.
일부 조류에게는 특정한 시점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대상에게 애정을 쏟아붓게 되는 각인 현상(imprinting)이 벌어진다고 했다.
인식이 부모이냐 이성이냐의 차이는 있었지만, 미마는 마치 자신이 조류 수인이 된 것만 같았다.
긍지 높은 하늘다람쥐 수인이 하기엔 다소 불경한 상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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