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54)
18. 신수 하니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러셀은 이곳 에픽세븐 게임과 소설이 섞인 세계관에 빙의한 이후 제법 많은 정사의 흐름을 건드려 왔다.
큰 것부터 사소한 것까지. 헤아릴 수도 없어 일일이 나열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사항이라 한다면 주인공 휴고와 그의 조력자들인 몇몇 여자 동기들과의 관계성을 비틀어 버린 것이리라.
휴고는 진 히로인인 로벨리아를 제외한 다른 동기들과 순수한 친구 관계를 유지하게 됐고, 그로 확보된 시간만큼 빠른 성장 속도를 3막에서 증명했다.
‘좌충우돌 하렘 아카데미물’이 ‘순애 성장 소년만화’로 장르가 뒤바뀐 것이다.
러셀은 언젠가 그 나비효과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걸 늘 염두에 두고 대비했었다.
휴고에게서 멀어진 동기들이 참전의 동기를 잃지 않도록 부족한 친밀도를 직접 채워 넣기도 했고, 사소한 사건들엔 몸소 나서서 정사가 너무 틀어지지 않도록 안배했다.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뒤틀린 정사가 언젠간 제게 그 대가를 요구하리라 각오하기는 했다만….
대가가 이런 식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미마는 마침내 얻고자 했던 자유를 손에 쥐었다.
이제 그녀는 숨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폴리티아의 추적을 피해 숨어들 수 있고, 설령 그들에게 발각되더라도 온 힘을 다해 저항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그녀가 하프 안드로이드가 된 이후 처음으로 얻게 된 ‘자유의지’다.
모든 시술을 끝낸 뒤 교수동을 나온 그녀가 자유의지로 처음 내뱉은 말은…
“좋아해.”
였다.
러셀은 한참을 말없이 걷던 그녀가 멍하니 서서 내뱉은 그 한마디에 뒤를 돌아섰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마의 얼굴은 덤덤했다.
표정 없이 오늘 먹을 메뉴를 읊듯 내뱉은 말에 러셀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알아, 인마.”
하지만 그 반응은 미마가 원했던 것이 아니었다. 미마는 고개를 가로저은 뒤 다시 한번 말로써 그를 후려쳤다.
“그런 거 말고.”
“뭔 소리야. 그런 거가 뭔데?”
“애완 수인 대하듯이 대하는 거 말고. 짝짓기, 번식, 페어링. 그런 의미로.”
“……?”
“페어링은 폴리티아에서 안드로이드들이 쓰는 말이야. 인간 말로 표현하면 결혼.”
“……??”
“서로의 데이터 장치를 연결해서 내부 자료를 맞교환해. 과거, 현재, 미래 모든 걸 공유하겠다는 의미로.”
“……???”
이 녀석, 정신이 좀 이상해졌나?
러셀은 정말이지 둔기로 머리를 한 방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일단 미마의 표현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데 한몫했지만, 내뱉는 말의 진의와 자신을 바라보는 표정이 전혀 들어맞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러셀은 특단의 조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총장실로 다시 가자. 시술 잘못된 것 같네.”
하지만 미마의 표정은 완강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똑바로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막연하게 그를 바라본다.
“이미 알고 있었잖아.”
“뭘?”
“좋아한다는 거.”
미마는 러셀에 대해 잘 안다.
적어도 주변 동기 중 가장 잘 아는 축에 속한다고 자부할 수 있다. 그만큼 오래 지켜봐 왔고 곁을 지켰으니까.
그는 똑똑한 사람이다. 막무가내 망나니처럼 행동하고 있긴 하지만, 러셀이 하는 모든 행동엔 이유가 있다.(콩깍지다.)
그러니 여태까지 티를 낸 제 마음을 애써 모른 척 굴었던(진짜 몰랐다.) 행동마저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하여 이해한다.
무언가를 바라고 내뱉는 고해가 아니었다. 지금껏 모른 척해 왔던 행동의 이유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어차피 변하지 않을 거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부터 같이 해결해 주면 된다. 그러니 굳이 이유를 붙이자면, 새로이 태어나게 해 주고 평생의 숙원이었던 자유에 대한 갈망을 이루어준 이에 대한 감사 표시다.
조금 더 음험한 속내를 인정하자면… 일종의 선점 표현이다.
원시취득에 대한 권리주장이며, 침 바르기이고, 영역 표시에 가까웠다.
“…뭔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러셀이 당황한 듯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그것 또한 곤란하면 나오는 그의 오랜 버릇이다.
웬만한 변수에도 능구렁이처럼 너스레를 떨며 넘어가 버리는 러셀도 이렇듯 직진으로 꽂아 버리는 직설에는 당황할 수밖에 없을 거다.
미마는 그조차도 계산에 넣었다.
“딱히 신경 쓰지 마. 뭘 바라는 건 아니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선 거기서 멈추었다. 결국 러셀은 늘 하던 말투로 돌아와 그녀를 힐책했다.
“요망한 날다람쥐 같으니라고.”
미마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대답했다.
“하늘다람쥐야.”
열심히 끌어올린 입꼬리가 어색해서 안면 근육이 조금 떨렸다.
* * *
“아오… 춥고 찐득거려.”
영약 제조실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작업복과 작업용 장갑을 동아리실 안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레인가르 교류전이 끝나고 3주가 지났다.
달력은 어느덧 12월을 가리켰고, 세계는 학사 안팎으로 바쁘게 돌아갔다.
낮에는 학사 커리큘럼을 따라가느라, 밤에는 영약 제조 공장장으로 일하느라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바쁜 건 나뿐만이 아니다.
2층 창가로 내다본 바깥에선 휴고와 파가 간이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땀을 뻘뻘 흘리며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중이었다.
영약 제조 전부터 저러고 있었으니, 횟수로 따지면 만 번은 훌쩍 넘었을 거다.
훌륭한 꼴통 헬창들 같으니라고.
이제는 휴고 일행의 아지트가 되어 버린 농장 내부는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오래전부터 불법 점거한 상태다.
나는 여기저기 자리 잡고 훈련에 매진하는 동기들로부터 시선을 거뒀다.
레인가르에서 벌어 온 하늘석 8,500개는 벌써 거의 다 소진했다.
전부 다 영약으로 바꾼 건 아니었다. 그중 절반이 넘는 5,000개를 이제라 왕실이 가져갔다.
나머지 3,500개 중 일부는 가루를 만들어 영초 재배에 쓰고, 머라고라 영약을 20개 만들어 분배했다.
2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동기들의 권능 대부분을 대성까지 끌어올리는 게 첫 번째 목표.
권능 성급을 쭉 올리면 전력은 확실히 쭉쭉 올라갈 거다.
문제는 소울 양을 올리기 위한 영약, 그리고 체능을 올리기 위한 영약을 따로 수급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머라고라 영약은 시간을 오래 들이거나 아카샤를 갈아 넣으면 어떻게든 해결된다.
한 번 재배를 시작하면 계속해서 가지치기를 할 수 있으니까.
다른 재료들이 문제다.
대부분 자연에서 채집해야 하는 것들이고, 심지어 비교적 구하기 쉬운 정령초마저도 부족할 지경이었다.
개인 정비 시간이 끝나면 동료들은 화톳불 주변에 모여앉아 가볍게 담소를 나눈다.
어느 새 자연스레 자리 잡은 루틴이다.
주로 서로 얻은 정보를 교환하거나 대련 내용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
이 시간에 가장 말이 많은 건 보통 코리였다.
“얘들아, 내가 뭘 갖고 왔게?”
코리는 들뜬 목소리로 잘 포장된 긴 목제 상자를 꺼내 놓았다. 그러고는 잔뜩 뜸을 들이더니 기다란 목제 상자 뚜껑을 천천히 열어젖힌다.
그 안에 든 것은 영롱한 오르비스의 숨결.
권능이 담긴 권능석이었다.
“통관과 품질검사를 끝낸 권능석이 드디어 도착했지 뭐야.”
“망할 통관 놈들. 진짜 굼뜨기도 하네.”
근 한 달이 다 지나서야 해외직구 상품이 도착했다.
물론, 그래도 좋긴 좋았다.
“권능 종류는 [백어택], [안티 포이즌], [석섬광(析閃光)]. 총 세 가지야. 혹시 어떻게 배분할지는 정해 뒀어?”
코리는 권능들의 정보를 간단히 설명하고는 물었다. 그의 질문에 동기들이 전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킨 뒤 어떻게 말을 꺼낼지 고민했다.
“하나는 주디가 가지면 되겠고… 나머지 두 개는….”
[백어택]은 상대방의 시야 밖에서 공격했을 때 피해량이 커지는 패시브 효과를 가진 권능이다. [석섬광(析閃光)]은 레인가르의 시니어 창술사 리코리스가 제 기술을 권능석에 담은 창술이고.즉, 3개 중 2개가 내 거라는 이야기다. [그림자 걷기]-[백어택]-[석섬광]으로 이어지는, 내가 앞으로 주력 공격 패턴으로 짜 놓은 그림.
하지만 다 같이 싸워 얻은 전리품을 내가 꿀꺽하겠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쉽게 나오지 않는다.
“두 개는 러셀에게 필요할 것 같은 권능이네.”
“눈빛 뭐야… 탐욕에 찌들어 있어.”
“침 그만 흘리고 그냥 가지시든가 하세요.”
파의 말에 주디, 루트비히가 한마디씩 거들었다. 나는 거절하지 않고 냉큼 권능석을 집어 들었다.
“아아, 너희가 그렇게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고맙다.”
그러고는 누가 채갈세라 황급히 품에 넣었다.
“처음부터 양보할 생각도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이네….”
“휴고야. 맞는 말도 가끔은 자제할 필요도 있는 거야.”
나는 씩 웃고는 착하디착한 동기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오후에 만들어 두었던 영약을 와르르 쏟아냈다.
“그래도 이 형님이 대표로 막노동하고 계시잖냐. 그리고 대신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이거.”
나는 한동안 잘 꿍쳐 두었던 권능석 [유성 낙하]를 꺼내 놓았다. 혹시라도 반대 의견이 나오면 교환하려고 가져온 것이었다. 슬슬 누구에게 줄지 정할 때도 됐고.
서펜섬 습격 참사 때 마인 위트머를 제거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권능석이다.
“맞다. 이게 있었지.”
“마도사 클래스 전용 권능석이라 못 먹었다. 마인이 쓰던 거라 찝찝할 수도 있는데, 배우고 싶은 사람 있으면 가져. 마도사 둘이서 협의 보든가.”
나는 루트비히와 리지를 번갈아 바라보고는 옆에 놓아두었다.
루트비히나 리지나 딱히 탐내는 듯한 표정은 아니었다. 애초에 마도사란 족속들은 재능이 넘칠수록 권능석으로 마법을 배우기보다는 연구와 학구적 성취를 통한 체득을 더 선호하니까.
나는 권능석에 관심을 거두고 코리에게 물었다.
“토벌 재료들은 어떻게 한대?”
“아머드 파츠로 제작해서 20%를 제작비로 선공제하고 나머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준대. 전투슈트는 한 벌 제작 가능한데, 우선 제작해서 우리 중 가장 먼저 영웅 자격을 갖춘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어.”
“이야, 우리끼리 치열하게 경쟁 붙여 버리네.”
왕실에서도 21기 장학생들에게 적잖은 기대를 하긴 하는 모양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런 전시 상황에 우리에게 주겠다고 귀중한 전투슈트 한 벌을 창고에 처박아 둔다는 결정을 하긴 어려웠을 테니까.
그 대신 우리의 성장에 좀 더 박차를 가하는 당근으로 쓰겠단 뜻이지만.
어지간히 관심 받고 있다는 건 알겠다.
“아, 그리고 내가 사브와라로 출발하는 일정은 다음 주 금요일로 정해졌어. 최대한 빨리 당겨 달라고 해서 무리해서 앞당겼는데….”
“다음 주? 적당하네.”
“근데 정말 괜찮겠어?”
코리는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이번 사브와라 일정은 오로지 상단 소속인 코리에게만 허락된 것이었다.
즉, 내가 그를 따라가는 건 잠행이다. 학사를 몰래 빠져나가는 외출이며, 일탈이다.
“실기 쪽 강의는 대부분 이수했으니까 괜찮아. 소울 연공법만 빨리 이수해야지. 염병할 소울 번이 아직도 안 돼.”
“그렇구나. 그런데 혼자 따라올 거야? 위험할 텐데. 누군가 한 명이라도 데려가는 게 좋지 않을까? 짐칸에 딱 한 명 정도는 더 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코리의 말에 사고뭉치 리지가 곧바로 눈을 반짝였고, ‘고백으로 혼내주기’를 시전한 뒤 한동안 잠잠해졌던 미마의 꼬리가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너 이 새끼. 일부러 이러는 거지?”
“……어?”
“일로 와, 이 사문난적 같은 놈아.”
나는 이제 더는 이놈의 가면에 속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며, 흉악한 분탕 분자를 매질로 엄하게 다스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