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59)
18. 신수 하니앤
[그림자 걷기]는 어둠 속에서 더 빠르고, 은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권능이다.대성에 오른 순간 짧은 거리의 순간이동이 가능하고, 어둠 속에서는 거의 은신에 가까운 효과를 보인다.
검은 로브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쓰고 [그림자 걷기]를 발동한 순간, 웬만한 강자가 아니고서야 내 기척을 감지할 수 없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지금 이교도들의 지하 거점에 그 정도의 강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기실 당연한 일이다.
이들은 상단 연합의 내전을 일으킨다는 거대한 음모를 꾸미는 중이고, 중요 전력들은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파견 나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지하 깊숙이 꼭꼭 숨겨져 있는 거점을, 더럽고 음습한데다 심지어 출입구조차 봉쇄된 작은 공간과 움직이지도 못하는 신수를 지키기 위해 고급 인력을 허비할 정도로 한가한 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았다.
적지 한복판에서 방심했다간 그대로 황천길에 오를 테니.
‘넷.’
나는 천천히 움직여 거점을 지키고 있는 이교도들의 숫자를 파악했다.
이교도들의 거점은 넓지 않았다.
애초에 신수를 가둬 두고 그 힘을 빨아먹기 위한 장소였으니 넓을 필요가 없다.
이동 마법으로 신수를 감쪽같이 빼돌리려면 도시의 지하로 파고드는 게 가장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거고.
이교도들은 회색빛 로브를 둘러쓰고 팔목에는 노끈을 묶어 교리를 상징하는 표식을 장착한 상태였다.
한 명은 두 줄짜리, 세 명은 한 줄짜리.
[간파의 눈]으로 전투력과 보유 권능을 확인한 나는 두 줄짜리 표식을 단 교도가 책임자라 판단, 곧바로 놈의 뒤로 이동했다. [그림자 걷기]어둠 속에서 손이 불쑥 이교도의 머리 옆으로 튀어나온다.
한 손으로 놈의 입을 틀어막은 뒤, 들고 있던 단검에 패기를 두르고 빠르게 목젖을 그었다.
[백 어택]이 터지며 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한 방에 절명했다.분수처럼 피를 흩뿌리는 책임자 교도를 본 이교도들이 숙덕거리며 깜짝 놀란 표정으로 다가왔지만, 나는 이미 다시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긴 뒤였다.
셋의 시선이 모두 책임자 교도에게 향했을 때, 교도 한 명이 다시금 목에서 피를 내뿜으며 쓰러졌다.
그제야 남은 두 사람은 습격당했다는 사실을 자각했지만, 이미 목숨을 위협하는 칼날은 목젖을 가로 긋는 중이었다.
털썩.
마지막 남은 교도까지 깔끔하게 처리한 나는 시신들을 대충 한쪽으로 치워놓고 혹 남은 잔당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너무 쉽다.
[간파의 눈]이 알려 주는 책임 교도와 나의 전력 차이는 고작해야 400 언저리.단칼에 처리할 수 있는 차이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거다.
실제로 나는 이보다 더 차이 나는 상대와의 싸움을 극복해 본 경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두운 환경, 그리고 암습에 최적화된 권능 세팅. 이 두 가지가 아귀에 딱 들어맞은 것이었다.
이렇게 완벽한 암살 조건이 갖춰진다면, 나는 비슷한 전력을 가진 상대라도 단칼에 목을 벨 자신이 있었다.
단검에 묻은 피를 쓰러진 교도의 로브에 대충 문질러 닦은 뒤 나는 조금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진하게 풍겨 오는 역겨운 마기 속, 한 줄기 상서로운 기운을 향해 걸어가자 단단한 철창 안에 가둬진, 사람보다 더 큰 은빛 여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신수 하니앤.
원작에서는 배신자 빌트레드에 의해, 소설에서는 이교도들에 의해 살해되어 제대로 된 등장조차 해 보지 못했던 비운의 신수.
녀석은 목에 합금 철제 목줄이 걸린 채, 쌕쌕거리는 호흡을 내뱉으며 죽어가는 중이었다.
“어이, 괜찮냐…?”
하니앤의 상태는 심각했다.
피부는 오물과 핏물이 덕지덕지 묻어 푸석푸석했고, 등에는 피부를 태운 뒤 이교도의 문장을 뜻하는 낙인을 찍어 놓았다.
그 낙인이 찍힌 상처에서는 신수의 생명력인 신성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마치 매체 속 뱀파이어가 인간을 묶어 두고 천천히 피를 빨아먹는 것처럼, 녀석은 조금씩 힘을 빨리며 죽어가는 중이었다.
“…….”
나는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녀석의 주변에 흘러나온 신성이 마기에 오염되어 변질된 흑마석이 흙더미처럼 쌓여 있다.
이교도들이 하니앤의 생명력을 착취해 환각성 물체인 흑마석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단순했다.
자세한 정보는 몰라도 일단 신수니까, 살려두면 장래 큰 전력이 되어 주리라 판단했을 뿐이다.
구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당장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로 참혹한 꼴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신수는 계약자의 소울을 바탕으로 활동을 이어 나가는 생명체다.
그렇기에 계약자가 없는 신수는 신성이 가득한 공간인 성소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그런데 계약자도 없는 신수를 성소 바깥에, 그것도 저런 상처까지 입힌 뒤 내버려 두면 천천히 죽어가는 게 필연적 귀결이다.
“어이, 살아 있냐고.”
내 부름에 죽어가던 신수가 천천히 눈을 뜬다.
이런 긴급한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곧 죽을 것처럼 피폐한 몰골에 온몸이 피, 흙, 오물투성이인데도 하니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왜 인간들이 여우를 가리켜 ‘사람을 홀리는 짐승’이라 표현했는지 이해가 될 정도로.
“어이. 괜찮냐고.”
나는 철창을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 녀석이 실긋이 눈을 뜨고선 나를 바라본다.
뭐라 입을 벙긋대는 것 같지만, 계약자가 아닌 나로서는 신수의 말을 들을 수 없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다행히 내 목소리가 신수에겐 전달되는지, 녀석은 고개를 미미하게 가로저었다.
나는 아머드 건틀릿을 낀 손으로 힘껏 철창을 잡아 뜯었다. 그런 다음 하니앤의 상태를 좀 더 자세히 살폈다.
상처라고는 등 뒤의 낙인뿐이지만, 육체를 유지하는 신성을 너무 많이 빨렸다.
혹시나 싶어 스티그마 회복약을 뿌려도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그때 신수 하니앤이 앞발을 들어 올려 내 무릎을 건드렸다.
녀석의 말을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그 의도는 접촉을 통해 흘러 들어왔다.
‘나와 계약해 줘.’
그 선연한 메시지에,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신수를 구출하러 오면서 혹시, 만에 하나라도 신수가 내게 계약하자고 얘기하진 않을까 기대한 적은 당연히 있었다.
문제는 신수들은 기본적으로 완성된 계약자를 원한다는 거다.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이미 성장을 마친 영웅을.
일말의 기대를 품으면서도, 아직 슈트조차 다룰 자격이 없는 내게 기회가 올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 죽어가는 신수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먼저 손을 뻗는 상황도 상정해 본 적 없었고.
계약을 제안하는 신수나,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나나 피차 불가항력이란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가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내 의사가 계약의 증거로써 발현됐다.
부지불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 자식….
뭐 얼마나 급했으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덥석 계약부터 맺는 거냐….
순간적으로 빠져나가는 어마어마한 소울 양을 자각함과 동시에 나는 ‘계승자’가 되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몸을 휘청거리자, 곧바로 하니앤의 모습이 은색으로 빛나며 점점 줄어들었다.
이내 갓 태어난 여우 수준의 크기까지 작아졌다. 몸체가 작아지자 목을 감싸고 있던 철제 구속구가 자연스레 벗겨져 땅바닥에 떨어진다.
어지럼증에 고개를 여러 번 흔들고는 스티그마 포션 한 병을 입 안에 털어 넣었다. 그때 귓가로 작고 가녀린 목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덕분에 살았네.
마치 머릿속에 제삼의 고막이 있어 그쪽에서 목소리가 울리는 느낌이다. 이게 신수와 계약자 간 의사소통 방식인 듯했다.
“하니앤.”
– 날 아는구나.
하니앤은 작디작은 몸을 일으키더니 이내 몸을 부르르 털었다.
– 혹시 소울을 조금만 써도 되겠니?
“어지럽지 않을 정도만.”
하니앤은 고개를 끄덕인 뒤 내 소울을 소모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녀석의 등 뒤에 있던 낙인과 상처가 점점 사라진다.
– 이대로 소멸할 수는 없어 계약하긴 했다만… 이렇게 미약한 힘의 주인이라니… 조금 곤란한 기분인걸….
“이게 기껏 살려줬더니 약하다고 꼽 주고 있네. 다시 갇히고 싶냐?”
– …그런 의미가 아니란다. 그보다 이렇게 무례한 태도의 계약자는 처음이네….
“그나저나 왜 이렇게 작아졌어?”
-이게 그나마 네게 부담을 덜 주는 모습이니까.
“신수 폼에서도 모습을 막 바꿀 수 있는지는 몰랐네.”
– 보통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뿐이지. 본연의 모습이 가장 편하고 익숙하니까. 혹시 내게 물을 뿌려 줄 수 있겠니?
“물을?”
나는 되물으면서도 순순히 하니앤의 몸뚱이에 물을 뿌려 주었다.
그러자 녀석은 몸을 부르르 털고는 물기를 털어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했다.
– 잠깐 소울을 써도 될까?
“그만 써, 이 도둑놈아.”
– …….
“농담이야. 써라.”
나는 피식 웃으며 다시 한번 스티그마 포션을 깠다.
뭔 짓거리를 하나 싶었더니 털을 씻어낸 거였다.
녀석은 물을 뿌리고 부르르 털어내고, 물을 뿌리고 부르르 털어내고를 몇 번 반복하더니 갑자기 몸 주변으로 작은 바람이 뿜어내 털을 말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반짝거리는 은발이 뽀송뽀송함을 되찾았다.
비단결 같은 털의 윤기가 신기해 손을 뻗어 쓱쓱 만져 보았다. 촉감도 거의 비단옷이다.
하니앤이 슬그머니 몸을 뒤쪽으로 빼며 구시렁거렸다.
– 물어보고 만지렴.
“혹시 염치가 없단 소리는 안 듣고 사냐?”
– 응. 그런 적 없단다.
생각보다 신수의 성격이 괴상하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원작 속 신수 알카서스의 대사인 ‘항상 자랑하던 하니앤의 부드러운 털이 다 망가졌다.’라는 표현을 떠올렸다.
과연 그 표현이 딱 맞을 만큼 부드러운 털이었다.
녀석이 지구에 사는 생명체였다면 아마 인간의 탐욕에 멸종되고 모피만 남았… 아니, 이건 너무 심했다.
– 몸이 너무 작아서 불편하구나. 우응. 손발도 자그마하고 답답하다. 그래도 덕분에 목숨을 구했구나.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잘 부탁한다.
“근데 말투는 좀 어떻게 안 되냐? 무슨 200년은 산 노인네 같네.”
– …신수의 말투를 지적한 계승자는 네가 처음이구나… 그보다 200년 정도밖에 안 산 것 같아? 어려 보인다는 이야기는 많이 듣는단다.
어려 보이는 걸 좋아하는 건, 종족을 넘어 신수에게까지 통용되는 건가 보다.
“일단 여긴 위험하니까 상단 본부 성소로 돌아가자. 그다음에 계약을 해지하든가 어쩌든가.”
– 왜? 내가 마음에 안 드니?
“그런 건 아니고. 나야 존나게 영광이긴 한데, 나랑 계약해서 뭐 해. 네 힘을 제대로 쓸 수도 없고, 피차 위험해진다고.”
신수과 계약해 계승자가 되면 당연히 좋은 점이 많다.
전력 상승은 물론이고, 대륙에서는 아예 영웅 취급을 받는다.
이대로 사관학교로 돌아가면 내게 구시렁거렸던 선배들은 모두 내 발밑에 대가리를 박고 굽실거려야 한단 말이다.
하지만 내가 신수와 계약했다는 게 알려지면, 그때부턴 뭘 하든 발생할 사망 플래그를 조심해야 한다.
마신군의 제거 대상 0순위가 되어 버릴 테니까.
나는 레인가르 도시 전체의 비호를 받는 유나도 아니고, 단신으로 사도 한 명과 맞서 싸울 수 있는 최강의 전력인 크라우도 아니다.
길 가다가 군단장급 마인이나 마족 하나만 마주쳐도 그대로 이승에서 하직하는 연약한 사관생도일 뿐이다.
휴고 녀석과 루트비히 녀석도 그래서 신수와의 계약을 보류하고 정체를 숨기고 힘을 기르는 것 아니던가.
즉, 이 녀석은 시한폭탄인 셈이다.
– 뭔가 무례한 생각을 품은 듯한 표정이구나.
“나는 아직 성장 중이고 이렇다 할 보호 세력도 없어. 지금 이 상태는 너무 위험하단 소리야. 너한테나, 나한테나.”
– 이해한단다. 하지만 아쉽게도, 성립된 계약을 무를 수는 없단다. 계승자가 죽지 않는 한은. 혹시 죽을 예정이 있니?
“있겠냐, 이 여우 같은 자식아. 심한 말 할 뻔했네.”
하니앤은 쿡쿡 웃는 소리를 내더니, 내 어깨 위로 올라탔다.
– 일단 나가서 생각하자꾸나, 여긴 너무 더럽고 습하니. 털이 다시 더러워질 것 같아.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 뒤 녀석의 뒷덜미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디 주인 몸에 함부로 올라타고 있어? 버르장머리 없는 애완 여우 같으니.”
– …….
아무래도 이놈의 신수에겐 위아래라는 것부터 가르쳐 주어야 하는 모양이다.
– 예로부터 신수는 신성하게 여겨져 존중받아 마땅한…….
“그건 옛날이야기고, 지금 주인이 누구야? 적응 똑바로 안 할래?”
– 여신이시여…….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