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65)
19. 그게 아니라요, 아버님
머리가 나쁘다며 속에 없는 농담을 던지긴 했지만, 리지는 내심 놀라는 중이었다.
놀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러셀이 권능의 종류와 효과, 부가 능력 등등에 대해 어마어마한 습득력을 보여서.
그는 수많은 권능을 이미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 한번 설명하면 그다음부터는 외우다시피 했다.
만약 스터디를 여기까지만 했다면 그가 도적이 아니라 마도사를 해야 했다고 오해했을 거다.
다른 이유 하나는 앞선 능력과 너무도 상반되게 권능의 스펙에 대한 암기에 완전히 쥐약이라는 거였다.
즉, 러셀은 숫자에 어마어마하게 약했다.
새벽이 절반가량 지난 시점, 학습 시간 대부분을 재원 외우는 데에 할애해야 했을 정도였다.
솔직히 머리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교재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러셀은 거의 비명을 지르며 기지개를 켰다.
“죽겠네, 진짜….”
“많이 힘들어?”
“힘들다기보단 너무 지겨워. 그래도 얼추 「권능의 이해」 쪽은 끝났네.”
“응응. 시험까지 시간 모자라기는 하지만 나머지는 반복 숙달하면 될 것 같아. 그럼 지금까지 외운 내용으로 한번 시험 볼까?”
“…갑자기?”
리지는 헤헤 웃으며 그가 뭐라 반발하기도 전에 질문을 던졌다.
“시작할게! 권능 [빛의 방패] 재사용 대기 시간은?”
“아니… 1성 기준으로 하루. 대성 기준으로 2시간 19분. 10분이면 10분이고 20분이면 20분이지 19분은 뭐야, 진짜 염병하네.”
“…제일 까다로운 걸로 물었는데도 척척 대답하네! 계속한다? 그럼 [참격]의 피격 가능한 거리는?”
“16m.”
“[풍렬선]의 범위는?”
“…지름 25m의 구체?”
“땡! 25.12m야!”
“소수점은 뭔….”
“하지만 소수점까지 쓰지 않으면 감점인걸?”
“그딴 걸 외워서 대체 어디다 쓴다고.”
리지는 짐짓 엄한 척을 하며 양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어허, 수업 태도가 불량하네요, 러셀 생도!”
나름대로 엄숙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러셀은 그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을 뿐이었다.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 귀엽게 굴지 마세요, 선생님.”
“또 어린아이 취급….”
리지는 그 어린아이 취급이 아쉬우면서도 왠지 싫지 않아 말꼬리를 흐렸다.
러셀이 자신을 귀여워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종종 의식하게 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이 상황이 나아질 수 없다는 걸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토록 치열한 동물의 왕국, 야생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더 적극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도.
리지는 흐물흐물해지려는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금 엄한 표정을 지었다.
“틀렸으니까 버, 벌을 줄 거야.”
“외울 시간도 안 주고? 그건 너무 스파르타 아니냐….”
“그래야 집중할 테니까. 응. 이건 다 러셀의 집중력을 위해서야.”
“뭔 벌인데.”
“글쎄. 뭘까아….”
순식간에 그녀가 활자로 접했었던 ‘벌’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러자 난데없이 느껴지는 배덕감과 당혹감이 올라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였다.
침대에서 곤히 잠들어 있던 신수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치켜들었다.
“……?”
“깜짝이야. 곱게 안 잘래?”
러셀이 신경질적으로 으르렁대자 신수가 억울한 듯 몸을 웅크린다.
“왜, 왜? 무슨 일이야?”
“신경 쓰지 마. 무슨 ‘사특한 기운이 느껴졌다’는데. 잠버릇 고약한 여우 같으니. 불길한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자라.”
“…….”
리지는 설마 나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다가 고개를 홱홱 저었다.
사특한 기운이라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리지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선 준비해 온 대사를 장전했다.
“벌 말인데, 좋은 생각이 났어.”
“뭔데.”
“혹시 방학 때 머물 곳은 정했어?”
“볼일 보러 나가는 거 빼면 기숙사에 있겠지. 어차피 가족도 없고 집도 절도 없는 천애 고아에 노숙자잖아?”
“그, 그런 뜻이 아닌데… 미안합니다….”
“농담이야. 왜?”
러셀은 장난스레 웃었다. 평소라면 한번 새침하게 굴었을 타이밍이지만, 지금 리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버벅거리지 말고…!
“그러면 러셀, 겨울방학 때 우리 집에 놀러 올래?”
말했다.
저질러 버렸다…!
리지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준비한 제안을 성공적으로 내밀었다.
“벌이라며?”
“응! 벌이야! 여름방학 때 토벌전 미마랑 에뜨랑제 선배만 데려갔잖아… 그러니 이번엔 방학 때 우리 집 일을 이것저것 도와주는 거지!”
“……?”
“왜, 왜? 혹시 겨울방학 때도 이미 일정이 있어…?”
“그렇긴 한데. 며칠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리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됐다.
해냈다.
“바다도 못 가고 혼자 집에 박혀 있던 걸 마음에 담아 뒀나 보네. 이번엔 너 빼놓지 말자고 애들한테 물어볼게.”
“애들한테…?”
“어. 다 같이 오라는 거 아니었어?”
“응, 그래! 다 같이! 놀자는 의미였어!”
러셀은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1학년 겨울방학 때는 별다른 에피소드가 없다. 주인공이 여러 등장인물과 서사를 쌓는 자잘한 사건이 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단순한 일상 파트일 뿐 크게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그래서 이번 방학 때는 그냥 돌아다니면서 미궁을 탐사하거나 마물을 잡아 하늘석과 영약 재료들을 수급하려 했었으나….
어쨌든 가문에 도울 일이 있다 하니, 며칠 정도는 리지의 집에 머물러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지한텐 도움받은 게 많으니까.’
은혜는 그대로 갚아 주고 원한은 3배로 갚아 주는 게 그의 철칙이었다.
러셀은 어쩐지 기운이 빠진 듯한 리지를 향해 물었다.
“여기까지만 할까? 시간이 꽤 늦었는데.”
“힘들어?”
“난 상관없는데. 어차피 내일 오전 수업은 수료한 과목이라 공강이거든. 너야말로 괜찮냐? 피곤해 보이는데.”
“아냐! 나는 괜찮아. 말했지만, 마도사들은 원래 사흘에 한 번 자는 데 익숙해.”
“극한직업이네… 이것은 사람인가 기계인가….”
“그럼 「마신군 분석 총론」부터 할까? 이게 「권능의 이해」랑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편할 거야. 「기갑병기의 이해」는 외울 재원이 엄청 많으니까… 최대한 시험 직전에 몰아서 암기하는 게 좋을 거구.”
“그러자. 잠깐 책 좀 꺼낸다.”
러셀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리지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쭉 뻗어 책장에 꽂힌 교재를 집어 들었다.
순간 소년의 체향이 훅, 하고 끼쳐온다.
그녀의 눈앞에 딱 달라붙는 훈련복 너머 굴곡 선명한 옆구리와 복부가 다가왔다.
분명 불투명한 옷을 걸치고 있는데도 리지는 그 너머의 살결이 보이는 것만 같다.
훈련소에서 봤던 생생한 그의 살결―
“악!”
“깜짝이야. 야이….”
리지는 숨을 들이켰다. 참으로 유해한 풍경이다.
‘너무 가까워…!’
열기가 오르고 침이 바짝 말랐다.
애초에 제게는 굳이 필요하지도 않은 요약 노트를 만들어 그의 방문을 두드릴 때부터 경쟁자들과의 간격도 벌릴 겸 이런저런 사심을 채우는 광경이 연출될 거라고 계산하긴 했지만…!
역시 이론과 실전은 다른 법이다.
“덥네! 목마르고!”
리지는 결국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열심히 손부채질하며 러셀의 개인실 냉장 시설을 열어젖혔다.
“마실 거 없는데.”
냉장 시설 안쪽에는 흔한 물 한 통도 없었다. 심지어 아예 사용하지 않는지 연료가 되는 마력 변환 장치도 꺼져 있다.
“그, 내 방에서 챙겨 올까?”
“너 마실 것만 가져와.”
“응.”
“아이고 죽겠다… 염병할 공부….”
러셀은 책상에 얼굴을 처박고는 들릴 듯 말 듯 험한 말을 쏟아냈다.
리지는 곧바로 제 방으로 들어와 심호흡했다.
유해하다 유해해….
잠시 호흡을 고르고, 전장에 나가기 전 무장을 점검하는 영웅처럼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러셀의 방에 되돌아왔을 땐, 러셀이 책상에 코를 박고 잠들어 있었다.
“…….”
긴장이 풀려 전신의 힘이 쏙 빠져나간다. 리지는 허탈해진 마음에 숨을 내뱉었다.
“진짜….”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잠든 모습이었다.
러셀이 한창 저주에 걸려 있을 땐 늘 보던 무방비한 모습인데, 언제부터인가 저주로부터 해방돼 잠든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왜냐하면 러셀은, 입 다물고 자고 있을 때가 제일….
리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당사자가 들으면 기함하고 펄쩍 뛸 만한 소리다.
리지가 살짝 손을 뻗어 그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머리도 쓰다듬어보고, 말랑말랑한 볼도 찔러 본다.
“그러고 보니까… 버, 벌을 아직 안 정했네에…?”
친구들과 함께 놀러 오는 것은 벌로서는 무효다. 그건 그냥 노는 거지 벌이 아니니까.
리지는 다시금 호흡이 가빠져 왔다. 입이 마르고, 머리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다.
그 순간 침대 위의 신수가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리지를 한번 일별하고는 다시 코를 박고 도롱도롱 잠드는 것이었다.
“…….”
참으로 신통방통한 신수였다.
리지는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 * *
“요즘 왜 이렇게 밥이 부실하지?”
프리마관 학생 식당.
거의 1/10 토막이 나 버린 음식 개수에 한 생도가 불만 어린 음성을 토해냈다.
힐끔 시선을 보내자 식당을 관리하는 메이드 중 한 명이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현재 사브와라의 물류 공급 상태가 정상적이지 않아 식자재 공급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식단표를 올려 두는 게시판에 사정을 적어 두었지만, 미처 보지 못한 생도들의 항의가 계속됐다.
나는 불만을 내비친 생도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다시 식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확실히 전에 비하면 턱없이 빈약하다. 심지어 뷔페식으로 자율급식하던 방식 대신 메이드들이 직접 배식을 시작했다.
사브와라의 내전 때문이다.
나와 함께 출발한 상행을 끝으로, 이후부터는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상단이 없을 테니까.
앞마당이 전쟁터가 되었으니 당연한 수순이다.
당장 생도들이 배를 곯지는 않겠지만, 들어오는 물품이 부족하면 배급을 줄일 수밖에 없다.
지금쯤 최전방에서도 끊겨 버린 보급을 여실히 느끼고 있을 것이었다.
마신군이 노린 것도 이런 상황이다.
물자 보급. 대륙의 혈액이자 에너지원인 사브와라 상단 연합을 타격하는 것.
타격은 조금 있었겠으나, 결과적으로 놈들이 원하는 효과가 나타나진 않을 터였다.
* * *
며칠 뒤, 필기시험 기간 시작을 하루 앞두고 사브와라에서 끊겼던 물류 보급이 도착했다.
나는 그 상행의 총책으로 온 코리의 수족, 로하스와 몰래 접촉해 사브와라 내전의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상단 연합에서 입은 피해 수치입니다. 과거 카오스게이트 브레이킹이 기 루브란에 터졌던 때 이후 최대의 재앙이라 불릴 만한 수치입니다.”
“꽤 많이 죽었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전력의 구멍이 있었습니다. 사브와라의 핵심 전력 상당수가 ‘영웅의 무덤’에 파견되어 전쟁을 치르는 중이었습니다.”
“그렇겠지.”
“그래도 인근에서 주둔 중이던 이제라의 1개 병단이 발 빠르게 지원하여 수습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대가를 치러야 하는 지원이었지만요.”
전력 약화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이제라의 대륙 지배력을 강화하는 덴 도움이 됐다.
“여러모로 세크레트를 놓친 게 아쉽겠구만.”
이번 내전은 근 천여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다.
핵심 전력인 영웅들은 대부분 무사했지만, 그것도 군단장급 마족인 세크레트를 마크한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브와라에서 가장 강한 전력인 아피흐나 바사르 같은 상단주들이 나서지 않았단 뜻.
그 와중에도 서로 상단의 핵심 전력을 보전하려는 욕심을 부린 거다.
결과적으로 영웅들을 위험에 내보내는 대신 민간인들과 용병들이 희생됐고, 적의 수괴와 이교도들의 핵심 전력은 모두 놓쳐 버렸다.
배신자인 네헨쿠이 상단을 전부 잡아들인 게 그나마 유일한 수확이었다.
“그리고 주인님께서 본격적으로 수습을 시작하셨습니다.”
로하스가 지칭하는 주인은 코리다.
그나마 녀석은 인근의 지원군을 빠르게 동원하는 등 내전에서 맹활약했다.
레인가르에서의 활약까지 더해져 코리의 일은 순탄하게 잘 풀리고 있었다.
다만 평소대로라면 마신군을 격파했으니 칭송받아야 했을 사브와라는, 도리어 대륙의 질책 어린 시선을 받게 됐다.
내부의 배신자. 그리고 사브와라의 심장부에서 활개 친 마족에 대한 지지부진한 대처가 문제가 된 것이다.
“이참에 정신도 좀 차리고 썩은 내부도 싹 잘라내면 좋겠네.”
“만약 상황이 좀 길어진다면… 어쩌면 주인께서는 사관학교에 복귀하기 어려워질지도 모릅니다.”
흠, 그건 생각 못 했던 부분인데.
나는 손등에 턱을 괴고서 고민에 빠졌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