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192)
20. 마인 학살자
의표를 찌르는 공격임엔 분명했다.
사관학교를 향한 기습 공격이 계획된 순간부터.
아주 오래전부터 저주 [핸들링]에 노출된 사관생도들. 그중에서도 등장 이후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 왔던 러셀 애시그린의 저주는 마인 기스 입장에선 마지막 남은 중요한 카드였다.
비록 알 수 없는 이유로 저주 대부분이 사라져 계획과 달리 평시에 그를 조종할 수 없었지만, 단 한 순간. 필요할 때 저주를 폭발시켜 그를 움직일 수 있었으니까.
더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도 있는 카드였다.
하나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작전은 완전히 어그러졌고 군단장 둘은 제압당했으며, 자신 또한 정체가 발각되고 신변이 구속된 지금.
지금이 그 카드를 사용할 마지막 타이밍이다.
마신군 최대의 악적 크라우를 처치할 수 있다면 좋고, 그렇지 못하더라도 차기 계승자로 낙점된 러셀 애시그린을 제거할 수 있다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아무리 하니앤의 계약자라 해도, 대륙의 영웅인 크라우를 상처 입힌다면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
하지만 기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러셀의 공격은 정확히 크라우를 타격했으나, 크라우의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았다.
그저 목과 머리만 살짝 휘청인 채 자신을 급습한 존재를 천천히 확인할 뿐.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하는 강렬한 눈빛이었다.
“오호.”
기스의 예상이 빗나간 가장 큰 요인은 그가 20년 전 전쟁을 겪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강적이다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크라우라이트 로이힐이라는 자를 겪어 보지 못한 데서 나온 패착.
백전노장인 그에게 기습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는 것.
“따끔한데.”
크라우는 그대로 러셀 애시그린의 목을 틀어쥔 채 반대편으로 집어 던졌다.
러셀의 암습은 한 마리의 늑대처럼 정확히 사냥감의 목덜미를 한입에 무는 데 성공했지만, 그 가죽을 뚫어내지 못했다.
크라우의 전용 슈트는 모든 기능과 능력을 오로지 내구성, 즉 방어력에 투자한 철벽 그 자체였으므로.
“마인이 숨어 있었어?”
크라우의 혼잣말에 다이크가 뭐라 반박하며 상황을 정리하려던 찰나, 러셀이 휘청휘청 일어나 월광쌍익을 투창했다.
“두 번째 공격이라. 확실한 인정이라고 봐도 되겠지?”
크라우의 몸에서 소울이 일렁였다.
이제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겠다는 듯 강렬한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 잠깐, 크라우!
하니앤이 황급히 외쳤으나, 그녀의 목소리는 크라우에게 닿지 않았고 지크프리드가 전달해 주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콰과과광!
크라우가 휘두른 거대한 양손검이 러셀을 덮쳤다.
크라우의 검에서 뿜어진 검풍이 휘몰아쳤다. 두 사람 주변으로 모래와 낙엽들이 휩쓸리듯 흩날렸다.
러셀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토해졌다. 그런 와중에도 소년의 눈은 먹잇감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천하의 크라우를 사냥감 보듯 보는 소년이라니. 그로서는 어처구니가 없어 웃음만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러셀은 마치 소울 탈진이라도 온 듯 그 자리에 쓰러졌다.
“…뭐야?”
격차를 고려하더라도, 단 한 번의 공격도 제대로 흘려내지 못할 만큼 소년이 극한까지 몰려 있는 상황이었던 건가?
하지만 조금 전까지의 움직임만 보면 탈진이 올 정도로 소울이 마른 느낌은 아니었는데?
크라우는 이 상황이 찝찝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 크라우. 하니앤이 잠깐 멈춰 달라고 부탁하는데.
“그래? 미안하지만, 그럴 순 없지. 내 몸에 손을 댄 대가는 크다고. 모처럼의 계약자가 마인인 건 유감이지만, 마신군에겐 문답무용. 잊은 건 아니겠지?”
– 그게 아니라 다른….
크라우는 지크프리드가 설명할 새도 없이 러셀을 향해 돌진했다.
늘 믿음직스럽고 듬직한 계약자이지만, 가끔 이렇게 한번 꽂힌 상황에는 막무가내로 들이받고 보는 게 그의 유일한 단점이었다.
지크프리드의 시선이 힐끔 하니앤을 향한다. 하니앤은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커진 몸집으로 크라우를 향해 달려드는 중이었다.
– 하니앤! 설마, 크라우를 공격할 셈은 아니겠지!
아무리 동료 신수라고 한들, 제 계약자를 공격하게 놔둘 수는 없었다. 심지어 선공은 하니앤의 계약자가 하지 않았나.
지크프리드가 말발굽을 들어 올리며 하니앤을 위협하려는 순간, 하니앤이 크라우를 그대로 지나쳤다.
“……?”
– ……?
크라우와 지크프리드 모두 당혹감에 멈칫했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다이크 로필런이 있는 곳. 그중에서도 마인 기스가 구속되어 있는 자리였다.
“만약 내가 저주에 휘말려 아군을 공격하면, 네가 소울을 다 빨아들여서 일단 나를 기절시켜.”
– 정말 그래도 괜찮을까? 저주가 발동한 순간이 일촉즉발의 상황일지도 모르잖니.
“그러니 더더욱 날 빠르게 무력화시켜야지. 그리고 만약 기스를 잡을 수 있는 상황이면 잡고, 어려운 상황이면 일단 날 입에 물고 농장으로 피신해라. 저주가 잠잠해지면 내 입에 포션 넣어 주고.”
– …노력해 보마. 부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으면 좋겠기만.
“믿는다. 네가 저주에 대비한 최후의 보험이야.”
계약자는 미욱한 힘으로도 최선을 다해 주었다.
지켜보는 입장에서 심장이 뜨거워지고 털이 흥분으로 빳빳해질 정도의 치열하고도 처절한 투쟁.
아직 성장기인 계약자가 이렇게 훌륭하게 싸워 주었는데, 신수인 자신이 이 정도 역할도 해내지 못해서야 면목이 없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하니앤이 곧바로 마인 기스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멈추시오!”
하니앤이 노리는 것이 기스의 목이라는 걸 깨달은 다이크가 황급히 그녀를 가로막았지만, 순식간에 유수(流水)처럼 다이크를 지나친 그녀는 기스의 목덜미를 콱, 하고 깨물었다.
하니앤의 자랑인 털만큼 새하얀 이빨이 붉게 물들고, 지니고 있는 소울을 모두 쏟아부어 고개를 쳐올린다.
선혈이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흩뿌려진다.
눈을 부릅뜬 기스는 하니앤을 노려보며 천천히 죽어갔다.
“아무리 신수라고 해도 허락도 없이 생포한 마인을 사살하다니….”
– 미안하구나…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는 일….
하니앤이 다급히 사과를 전했으나,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점점 쪼그라들고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로 정신이 흐려졌다.
동원 가능한 소울을 모두 일격에 쏟아부은 탓이었다.
다이크가 차마 신성한 존재를 다그치지도 못하고 곤란한 기색만 보이고 있을 때, 설상가상으로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정신을 잃었던 특별반 장학생들이 하나둘 일어나 크라우의 앞을 막아선 것이었다.
휴고가, 에뜨랑제가, 파가, 미마가, 리지가, 로벨리아가, 루트비히가, 주디가, 아카샤가.
차례차례 몸을 일으킨 생도들이 바리케이드를 치듯 나란히 서기 시작한다.
‘제길….’
다이크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욕지거리를 삼켰다.
일견 위험에 빠진 동료를 보호하기 위한 눈물겨운 동료애로 보이지만, 실상은 사관생도가 현직 계승자를 공격하고 다른 생도들이 그를 감싸며 계승자에게 맞서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들의 상태로는 크라우를 막아서기는커녕 바짓가랑이조차 붙잡을 수 없는 상황이다.
아무리 기개 높은 영웅이라 알려진 크라우라 해도, 이 정도로 선을 넘은 애송이들을 귀엽게 봐 넘길 수는 없을 터.
“다들 움직임을 멈추고 무기를 내려놓아라!”
다이크가 쩌렁쩌렁하게 목청을 올려 보지만,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생도들은 고집스레 서 있을 뿐이다.
더 이상의 접근은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가장 큰 문제는 정작 크라우를 막아선 그들조차 지금 정확히 어떤 상황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크라우가 러셀을 공격하는 이유?
모른다.
눈앞의 상대가 어떤 인물인지?
생각하지 않는다.
설령 자신들을 돌봐준 은인이자 후원자라 하더라도, 전 대륙이 비호하는 대영웅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눈앞에는 제 동료를 향해 검을 휘두른 사내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지금껏 함께 싸웠던 이가 칼끝을 향하면 함께 싸워낼 뿐이다.
모든 정황을 알고 있는 하니앤만이 한계에 다다른 몸을 가누지 못한 채,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을지 팽팽 머리를 굴릴 뿐이었다.
그나마 저주의 원흉인 마인 기스를 잡아내는 데 성공했으니, 어떻게든 상황은 수습될 거였다.
다만 아찔한 것은, 만약 러셀이 이 상황을 대비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2세대 계승자들이 모두 힘을 합쳐 1세대 계승자에게 대적하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졌을 것 아닌가.
심지어 마인의 놀음에 놀아나서.
머릿속에 펼쳐지는 그 뒤의 상상도는 너무나 끔찍해서, 절로 몸서리가 쳐지는 하니앤이었다.
“…….”
불편한 대치가 이어졌다.
크라우는 생각한다.
자신을 공격한 생도.
그리고 그런 생도를 지키기 위해 움직일 힘도 없어 보이는 육체를 몰아붙여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생도들.
자신이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대지를 쿰쿰하게 오염시켰던 저주의 존재.
날카로운 눈빛이 그 최선두에 선 소년을 향한다.
휴고 엘클레어.
여신이 안배한 마지막 성약이자 그가 직접 발견한 인류의 희망이다.
그런 소년과 그의 동료들이 마인일 리는 만무하고, 그들이 이렇게까지 지키고자 하는 소년의 행동도 지금 와서 생각하면 기이하기 짝이 없다.
신수 하니앤은 왜 갑자기 사로잡힌 마인을 공격했는가.
크라우는 단순하고 저돌적이지만, 우매한 자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머릿속을 왕왕 울려 대는 기이함을 떨치지 못해 마인 추정 분자가 치료받는 이 순간에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만히 서 있다고 해서, 그의 기세가 사그라드는 것은 아니다.
크라우의 몸에서 좌중을 내리누르는 듯한 기백이 풀풀 풍겨 나왔다.
그 미증유의 힘에 사관생도들의 몸이 휘청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마치 중력이 잡아당기듯, 압력이 내리누르듯 생도들을 점점 짓누르고 있던 와중.
크라우가 기세를 풀고 머리를 헤집었다.
“허억.”
생도들의 입에서 거친 숨이 토해진다.
“이것 참. 당황스러운 꼬맹이들 같으니….”
크라우는 결국 칼을 등 뒤 칼집에 꽂아 넣었다.
하지만 크라우가 먼저 공격 의사가 없음을 밝혔음에도 21기 생도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무기 내려, 이것들아.”
그때 긴장감을 확 푸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소울을 회복한 러셀 애시그린이 깨어난 것이었다.
“어디 까마득한 선배 영웅님한테 무기를 들이대고 있어,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나 때는 말이야… 선배 기분이 상하면 바로 대가리부터 박고 그랬어… 아오, 대가리야…….”
“러셀!”
그제야 팽팽하게 당겨지던 긴장감이 눈 녹듯 사라지고 생도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그에게 다가온다.
“허.”
크라우는 허탈하게 숨을 내뱉었다.
생도들은 언제 이를 드러내고 덤볐느냐는 듯 곧바로 긴장감을 풀고 동료에게 달려들었다.
호들갑스러운 그 모습이 딱 그 나이대의 청소년들 같아, 크라우는 그만 웃어 버리고야 말았다.
“말 안 듣는 학생들이라 선생이 좀 피곤하시겠어.”
“알아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자 그럼, 날 공격한 일에 대한 자초지종은 들어야겠지? 어이 꼬마야, 이리 와 봐라.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칼을 들이밀면 그땐 재미없을 거야.”
러셀은 으름장을 놓는 크라우의 말에 적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히죽 웃어 주었다.
“웃긴 뭘 잘했다고 웃어?”
“아유, 힘들어서 웃는 거예요, 힘들어서. 힘들 때 웃는 자가 일류다. 몰라요? 좀 긴 이야기인데, 다 설명해 드릴게요. 그보다 일단 저거 먼저.”
러셀이 기스의 시신을 가리켰다.
그의 시신 위로 오르비스의 숨결 두 개가 떠올라 있다.
[핸들링], [환상 대지].저주술사 기스의 대표적인 저주 권능 두 가지였다.
“저주술사군.”
“네. 맞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저놈이 저한테 개수작을 부렸던 겁니다. 부끄럽지만 제가 저주 저항이 좀 약해서요.”
권능석을 확인한 크라우는 대충 파악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 긴긴 설명이 이어졌다.
처음 저주를 발견하게 된 시기, 그 사이에 있었던 일들, 대비하기 위해 했던 일들과 지금의 사태에 이르기까지.
어차피 계승자란 사실도 다 알려진 마당이다. 더 이상 숨길 것도 거리낄 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러셀이 휴고와 자신의 정체를 숨겼던 가장 큰 이유는 사관학교 내, 바로 지척에서 누런 이를 드러내고 있었던 마인들의 존재.
즉, 두려웠던 건 법보다 빠른 주먹이다.
어차피 4막이 끝난 뒤부터는 대부분 원작 속 인물들과 뒤엉켜 에피소드가 진행된다.
4막이 휴고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과 후를 가르는 기준선이었던 셈이다.
크라우는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차분하게 모든 자초지종을 들어 주었다.
설명이 끝나자 그제야 모든 상황이 이해됐다는 듯 시원스레 웃어젖혔다.
“꼬마들이 고생이 많았네. 도박 수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최고의 선택이긴 했어. 확실히 꼬마 성약의 계승자가 선택한 동료들다운 기지야.”
크라우는 짧게 감탄하며 담백하게 칭찬했다.
그제야 모든 긴장이 풀린 생도들이 하나둘씩 자리에 널브러지기 시작한다.
고작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마냥 길게만 느껴졌던 하루가 드디어 끝나는 것이었다―
“일단 전부 다 머리부터 박을까?”
“예?”
라고 생각했던 21기 생도들은 제 귀를 의심했다.
크라우가 농담기라곤 없는 진지한 얼굴로 턱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건방지게 대선배에게 덤빈 벌은 받아야 하지 않겠어? 뭐 해. 안 박고. 가장 늦게 머리 박는 녀석 등에 지크프리드 올라간다?”
생도들은 이래도 되는 거냐는 표정으로 다이크를 바라봤으나, 다이크는 크라우를 향해 ‘상황을 수습하러 가 보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두 마족을 챙겨 쌩하니 사라져 버렸다.
“교수님…?”
떠나는 다이크를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동기들 사이.
가장 먼저 반응한 러셀이 빛의 속도로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Side Episode. 지켜지지 못한 약속.
이제라.
전장 ‘도망자의 폐허’ 인근 야영지.
빌트레드군 간부 막사.
“조용하네요.”
빌트레드군 간부 중 가장 최근에 지휘관으로 임관된 시리안이 막사 밖을 내다보며 읊조렸다.
“저놈들, 아예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말입니다.”
“저쪽도 아는 거지. 이 지형에서는 섣불리 움직였다간 전부 죽은 목숨이라는 걸.”
“놈들이 못 넘어오는 건 좋은데… 우리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니 영 거시기합니다.”
빌트레드군의 임무는 도망자의 폐허에서 넘어오는 마신군들을 저지하는 것.
이곳의 등 뒤는 임시 군사훈련소와 이제라 최대의 농경 지역이 있어, 이제라군에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제라군 군량의 40%가 이곳에서 흘러나온다.
방어하기에도 좋은 천혜의 요새다.
평야로 나가기 위해서는 한번 떨어지면 마수들도 살아나오기 힘든 깊숙한 골짜기를 지나야 했고, 골짜기를 통하지 않으려면 ‘쇠종다리’라 불리는 폭이 좁은 석재 다리를 지나야만 했으니까.
하지만 쇠종다리 건너편에는 항상 이제라의 수비군이 상시 대비하고 있다.
주요 요충지인 만큼 이제라군 내에서도 떠오르는 강자가 이곳을 막아 주는 게 통상적인 관례였다.
“떠들 시간 있으면 전술서라도 한 번 더 보지. 갓 임관한 초보 지휘관이 부대원들을 제일 많이 죽게 한다는 걸 모르는가?”
“아이참… 콘레드 부관께서는 어찌 그리 말을 심하게 하신대요.”
시리안은 막사 안쪽에서 묵묵히 서류 정리를 하는 빌트레드를 힐끔 바라본 뒤 에잇, 하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후우. 잠이 쏟아져서 더 못 보겠네.”
때마침 한창 전술서를 들여다보던 입단 동기 바스크가 책을 툭 던져놓고는 일어나 몸을 풀기 시작했다.
시리안이 곧바로 바스크를 향해 씩 웃으며 제안했다.
“순찰이나 한 바퀴 돌까?”
“좋지.”
하지만 답답함을 풀려던 그 행동은 칼슨의 말에 가로막혔다.
“방금 전에 돌고 왔어. 힘 빼지 말고 차라리 쉬어. 전장에서는 휴식도 실무니까.”
“선배. 이 꿉꿉한 막사에서 상사들이랑 모여 있으면 쉬어도 쉬는 게 아닌데요.”
“장군께서 네가 나가 있으면 병사들이 눈치 보느라 못 쉰다잖아.”
“…알겠다고요. 한창 전장에서 구르다가 너무 편안한 지역에 배치되니 좀이 쑤셔서 그럽니다.”
바스크의 말에 시리안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슨은 두 어린 기사의 투덜거림에도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기사 서약 이후 장수로 임관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빨리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한다.
그 또한 전쟁 초기에는 공을 세우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인내의 공간이다.
그들의 주군인 좌장군 빌트레드가 차기 대장군으로 유력시되는 현재.
쉽지만 중요한 임무에 배치함으로써 최종적인 실적을 채워 주는 일종의 배려이자, 상부의 명령을 얼마나 잘 듣는지 시험하는 시험대인 셈이다.
그걸 알기에 빌트레드의 휘하 장수들은 몸을 사렸다.
혹여라도 주군의 앞길에 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그들의 주군은 반드시 대장군의 직위에 올라야 했으니까.
바스크는 깔끔하게 포기하고선 다시 막사 한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칼슨을 향해 다가갔다.
“선배. 형수님이 임신 몇 달이랬죠?”
“6개월쯤 됐지.”
“이제 슬슬 휴가계 준비하셔야겠네요. 태명이 뭐랬더라, 시큼이? 새콤이?”
“…상큼이라니까.”
“아, 상큼이. 형수님이 신 걸 좋아하시나 보네.”
“임신하고 유난히 신 게 당긴다고 하더라고.”
“애 이름은 정했어요?”
“그럼. 임신 사실 알자마자 이름부터 지었지. 딸이면 레몬, 아들이면 러셀이라고 짓기로 세니아랑 합의했어.”
“외람되지만, 말 안 듣고 속 좀 썩일 것 같은 이름이네요.”
딱!
칼슨이 휘두른 전술서의 모서리가 바스크의 이마를 찧었다.
“어디서 악담을 하고 있어?”
한낱 책이었지만, 영웅의 손에 쥐어지면 그것 또한 훌륭한 흉기가 된다.
그것을 방증하듯 바스크의 이마에는 대왕 모기에 물린 것처럼 혹이 튀어나와 있었다.
“근데 카터 선배는 어디 간 거예요?”
한참을 칼슨과 투덕거리며 장난치던 바스크가 문득 보이지 않는 간부 한 명의 소재를 물었다.
그의 질문에 대답한 건 다름 아닌 빌트레드였다.
“영지로 내려갔어. 긴급한 전서가 몇 건 와 있다고 해서 내가 보냈지.”
“아…… 또 어디서 줘 터지고 있다는 소식이라도 보냈나 보네요.”
마신전쟁 발발 이후. 수개월 동안 여신군은 처참한 패전을 이어 왔다.
그나마 빌트레드가 이끄는 좌장군 부대, 계승자 크라우가 이끄는 기갑부대 정도를 제외하면 하루가 멀다고 패전 소식이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게 솔직한 전황이다.
이제 어디서 누가 죽었다는 소식은 새삼스럽지도 않다.
오히려 작은 승리라도 했다손 치면 그게 더 놀라울 지경.
“빨리 장군께서 대장군이 되어야 상황이 반전될 여지라도 있을 텐데.”
“하하, 고작 1년 차 장수가 검성을 무시하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요. 아슬란 대장군이야 뭐 출중하신 분이지만… 솔직히 충성심이 너무 넘쳐서 폐하의 잘못된 판단에도 이리저리 흔들리시잖아요. 무릇 충신이라면 틀린 명령에 반기도 들고, 어? 직언도 서슴지 않을 줄 알아야 한다고요. 우리 주군처럼.”
“이러니 미친개와 그 사냥개들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빌트레드의 말에 장수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슬란이 이끄는 대장군 부대는 강했지만, 라 마레 왕실과 현 국왕은 썩어빠졌다.
국왕은 무능하고, 탐욕스러우며, 옹졸하다.
그런 주제에 유능한 대장군이 전권을 쥐고 있는 게 탐탁지 않은 듯 군 전체의 지휘를 두고 왈가왈부하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다.
충성스러운 아슬란은 그 모든 요구에도 한마디의 반박도 없이 그저 국왕의 명령을 따를 뿐이었고.
적어도 이제라의 수뇌만이라도 바꿀 수 있다면… 이 정도로 패색이 짙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 그건 여신군 전체에 알음알음 퍼진 생각이다.
한참 동안 소소한 담소를 나누고 있는 평화로운 간부 막사에 폭풍이 몰아닥친 건, 늦은 오후. 전서를 받으러 갔던 카터가 돌아오고 난 뒤였다.
“제발 보내 주십시오, 주군…!”
카터는 간부 막사 한중간에서 머리를 찧으며 간청했다.
카터가 들고 온 전서는 평상시와 다를 것 없는 내용이었다.
마신군의 움직임이 어디를 향한다더라.
하루에도 수 건씩 발생하는 마신군의 준동. 그리고 무너지는 영지들.
이상할 것도, 새삼스러운 것도 없는 소식이다.
다만 공교롭게도 이번 마신군의 행로 중 하나가 카터의 고향이었다는 점이 특이점일 뿐.
토벌급 마수 옵시디언 와이번이 출몰해 카터의 고향 나란마루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 그 소식을 들은 카터는 곧바로 파병을 간청했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니다.
그리고 빌트레드군이라면 토벌급 마수 정도는 격살할 수 있는 전력이었다.
물론 카터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이 순간에도 무너지고 있는 마을이 한둘이 아니었다. 군 간부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부대를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혼자라도 보내 달라 간청하는 것이었다.
“처자식이 있습니다. 부디 보내 주십시오.”
빌트레드의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하는 카터의 모습에 반응한 건 콘레드였다.
그는 역정을 내며 카터를 나무랐다.
“지금 임무가 대장군께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르는가! 그런데 장수 중 하나가 군을 이탈하겠다고 간청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지금 전쟁을 치르는 게 너 하나뿐이야!”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어디 전쟁통에 가족을 잃은 게 한두 명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것이 가족이라는 이름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터에 나왔습니다… 나라를 지킨들 가족을 지키지 못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놈이 불경한 소리를―!”
원로원에서 했다면 대경을 칠 언행이었다.
“칼슨 형님, 형님!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주세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형님은 임신한 형수님이 있으시잖습니까. 들숲마을이 공격받는다고 해도 이렇게 가만히 계실 거예요?!”
짝―!
결국 콘레드의 손길이 카터의 뺨을 후려쳤다.
“빌트레드 경은 차기 대장군으로 낙점되고 있는 상황이야. 그런 장군의 앞길을 막을 셈이냐!”
순식간에 볼이 불긋하게 부어오른다.
하지만 카터는 반드시 빌트레드에게 허락을 받겠다는 듯 강경한 눈빛을 보냈다.
마침내 잠잠하던 빌트레드의 입이 열리고.
“주군….”
“네가 도착해도 이미 늦을 소식이다.”
“그렇다면 복수라도 하게 해 주십시오.”
“자살행위야.”
“설령 자살행위라고 할지라도! 제가 선택하게 해 주십시오!”
“불허한다.”
완강한 기각 명령이 떨어졌다.
제 일신의 양명은 둘째치더라도 이곳은 왕국이 수호를 명한 지역이다.
그 중요성은 말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그렇다면 탈영이라도 하겠습니다.”
“군법에 회부할 것이다.”
“주군―!”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빌트레드의 단호한 명령에 카터는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빌트레드는 보일 듯 말 듯 한숨을 내쉬고는 장수들을 물렸다.
“오늘 군간부 회의는 여기까지 하지. 다들 돌아가. 명령하는데, 오늘은 절대 막사 밖으로 나오지 마.”
“예.”
콘레드를 시작으로 간부들이 경례를 붙이고 하나둘씩 막사를 빠져나갔다.
간부들이 돌아가고 나서도 빌트레드의 미간에는 한참 동안이나 주름이 잡혀 있었다.
* * *
그날 밤.
카터는 몰래 야영지를 빠져나왔다.
혹여라도 전우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는다면, 무력 돌파라도 강행할 마음가짐이었다.
그러나 이상하다.
분명 자신이 탈영을 시도하리라는 사실을 알 텐데도, 그렇게 공언했는데도 단 한 명의 장수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
오히려 야영지의 경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
평소보다도 더 경계가 느슨해진 모습.
이것은 분명, 무언의 허락이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카터는 그리 중얼거리며 야영지의 경계를 넘었다.
* * *
부서진 건물의 잔해.
불타는 가옥들.
널브러진 시체들.
피비린내.
카터는 그 사이를 하염없이 걸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전투를 치렀는지 모르겠다.
슈트는 너덜너덜했고 소울은 바닥을 보였다.
이곳을 침략했다는 적의 수괴는 발톱조차 마주하지 못했는데도, 이미 한계에 한계까지 몰린 그였다.
하지만 그는 끝내 도달했다.
설령 아내와 딸을 살리지 못하더라도, 그 시신이라도 수습한 뒤 두 사람을 따라가리라.
그리 다짐하며 한 발, 한 발 힘겹게 내디딘다.
그리하여 마침내 도착한 그의 신혼집.
“…….”
신혼집은 마치 썰린 고기처럼 반으로 갈려 나간 채였다.
그리고 그 파편 속, 익숙한 반지를 낀 손등이 눈에 들어온다.
무거운 잔해에 깔린 충격 때문인지, 기괴하게 꺾어져 튀어나온 손 하나.
카터는 비척비척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잔해를 파헤치고 돌무더기를 들어 올리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러나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 없는 이의 시신의 뒷모습이 나타났다.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차마 오열조차 나오지 않는 입은 그대로 꺽꺽거렸다.
반전은 없었다.
이미 늦었을 거라는 대장군의 말까지 무시하고 도착한 고향이었건만, 그곳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았다.
꿈틀.
아니.
아니었다.
카터가 떨리는 손으로 아내의 시신을 들어 올렸을 때.
그 아래로 아내의 품에 안긴 채 간신히 호흡하고 있는 딸이 있었다.
열 살도 안 되는, 그 작디작은 생명이 어떻게든 모진 시간을 견뎌내고 자신을 기다려 준 것이었다.
여신이시여,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카터는 자신에게 수여된 몇 안 되는 생명줄인 포션을 그대로 딸의 입에 들이부었다.
딸의 입에서 소중한 숨이 토해지고, 기침 소리가 명징하게 울리고 나서야 카터는 마침내 시원하게 오열했다.
한참을 오열한 뒤에야 딸아이는 고사리같이 같은 손을 뻗어 짐짓 나무라듯 그의 눈물을 닦아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엄마가….”
“미안하다. 미안해…….”
“아빠가 올 거라고 했어… 달려와서 구해 주고 지켜 줄 거라고….”
“다시는, 혼자 두지 않으마. 앞으로는… 아빠가, 반드시 널 지켜 줄 거야.”
간헐적으로 들려오던 마수들의 울음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하늘이 점점 검게 물들었다.
두 사람을 향해 드리우는 거대한 그림자 아래서, 카터는 선언하듯 약속했다.
Side Episode. 지켜지지 못한 약속.
구르르릉…!
하늘 위에 와이번과 그를 따르는 하피 떼가 모여든다.
이미 파괴가 끝난 영지에 마신군이 되돌아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더 머물 이유가 없는 군대를 되돌린 것은 단 한 명의 영웅이었다.
생존자를 수색하여 참수하기 위해 남겨 둔 일부의 군대. 그 군대를 타격하고선 영지의 중심부로 향하는 영웅의 존재가 감지된 것이었다.
그런 연유로, 카터와 마리하는 다시 한번 생을 위협받는 상황에 부닥치게 됐다.
딸아이를 구하기 위해 마신군 한가운데로 파고든 그의 행동이 다시금 딸아이를 위협하는 상황을 만든 것이었다.
카터는 부서진 슈트, 망가진 몸을 들어 올려 딸의 앞에 섰다.
하늘을 까맣게 메운 마수들.
이 상황에서 숨거나 도망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키기로 약속한 이상, 어떻게든 지켜내야만 했다.
내 몸이 부서지고, 망가지고, 바스러져 무너질지라도.
반드시 너만은 지킬 것이리라.
그런 기개로 해머를 들어 올렸다.
“와라―!! 이 개 같은 마신군 새끼들―!!”
상공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함은 사자의 우짖음처럼 크게 터졌다.
곧바로 하피 한 부대가 낙하한다.
마리하의 눈이 질끈 감기고, 카터가 해머를 크게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파바바박―!
어디선가 날아온 다섯 발의 화살이 가장 낮게 하강하는 하피의 몸체를 꿰뚫었다.
하피가 기습당한 사실을 자각하기도 전에 다음 다섯 발의 화살이 연이어 쏘아졌다.
다섯 발, 다시 다섯 발. 또다시 다섯 발.
한 번에 다섯 발씩 각각의 화살이 마신군을 정확히 관통하는 신기는 카터에게 너무도 익숙한 광경이다.
‘사냥꾼’ 칼슨의 [오연시(五聯矢)].
카터가 고개를 들어 폐허의 가장 높은 곳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전투가 일어나면 늘 고지를 잡고 아군을 옹호하는 최강의 사수가 다섯 개의 화살을 시위에 걸고 있었다.
“혀, 형님…!”
카터의 얼굴에 반가움과 당혹감이 동시에 깃들었다.
죽어 유령이 되어서도 딸아이를 지키리라 다짐했으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너무나 든든한 전우의 등장은 그야말로 천군만마였다.
하지만… 칼슨이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어째서 자신을 따라왔는가. 대체 어째서….
카터의 의문은 제 앞에 사뿐히 착지한 사내의 모습을 본 순간 완전히 해소됐다.
틀어 올린 검은 장발, 꿰뚫는 듯한 금빛 눈동자.
매사에 아무것도 관심 없다는 듯 무심하고 심드렁한 표정의 영웅.
빌트레드 다이에른.
그의 주군이 자신을 위해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주, 주군. 어째서 이곳에…. 도망자의 폐허는 어쩌시고….”
“콘레드에게 맡겼어.”
“……주군.”
카터는 완전히 엉망진창 망가진 얼굴로 눈물 콧물을 흘리며 그의 주군을 불렀으나, 빌트레드는 인상을 찡그리곤 그를 향해 손수건을 던질 뿐이었다.
그런 다음 고지를 잡은 칼슨을 불렀다.
“칼슨.”
“네.”
“하피들이 내려오지 못하게 막아.”
“네. 주군.”
칼슨의 손이 더 분주해졌다.
동시에 다섯 개의 화살을 장전, 발사하고 화살들이 하피를 꿰뚫기도 전에 다음 화살을 시위에 겨눈다.
몇 번을 봐도 눈이 번쩍 뜨이는 신기였다.
“시리안.”
“옙!”
“칼슨을 엄호해.”
“알겠슴돠!”
하피들이 속절없이 죽어 나가자 부대의 수괴인 와이번이 쩌렁쩌렁 포효했다.
그러고는 빌트레드가 서 있는 자리에 화염구를 쏘아 보냈다.
“바스크.”
짧은 호명과 동시에 바스크의 권능 [수호의 의지]가 발동됐다.
날아오던 화염구는 그 자리에서 파스스 식어 사라졌다. 씩 웃은 바스크가 뒤늦게 대답했다.
“예.”
“공을 세우고 싶다 했었지.”
“흐, 물론이죠. 준비되었습니다.”
“토벌급 마수다. 목을 가져오도록.”
“저 혼자서 말입니까?”
“칼슨이 길을 열어 줄 거야. 두렵나?”
“그럴 리가 있습니까. 오늘 저녁은 도마뱀 구이로 모시겠습니다.”
바스크는 씩 웃으며 목을 좌우로 풀었다.
빌트레드는 그제야 카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콧물이 뚝뚝 떨어지는 카터를 보고선 다시 한번 인상을 찡그렸다.
“그, 얼굴을 좀 닦지 그래.”
“대체 어쩌자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주군….”
“구해 줘도 난리네. 그보다 움직일 수 있겠어?”
“주군….”
카터는 빌트레드의 말에는 대답하지도 못한 채 그저 빌트레드의 얼굴이 뚫릴 듯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빌트레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검집 하단으로 카터의 이마를 내리찍었다.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였다.
“으아앗!”
카터가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자, 그의 몸에 가려져 있던 작은 소녀 마리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하의 얼굴엔 두려움, 그리고 호기심이 깃들어 있었다.
빌트레드는 살짝 몸을 낮춰 마리하와 눈높이를 맞췄다.
“누추한 네 아빠를 책임지고 있는 귀한 사람이다.”
“들었어요…! 아빠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남자라고….”
빌트레드는 질색하며 말을 이었다.
“네 아빠, 정신 차리게 하고 등에 업혀서 움직여. 업힌 다음엔 눈을 꼭 감고 아빠의 목을 움켜쥐고 있어. 잠시 잠들었다가 깨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테니까.”
“…네!”
마리하는 대답하자마자 곧바로 이마를 짚고 있는 카터의 등에 올라탔다.
그러고는 여봐란듯이 카터의 목을 꽉 끌어안고선 눈을 질끈 감았다.
“무서워도 조금만 참아.”
“무섭지 않아요. 아빠도 있고, 장군께서도 계시니까요!”
“씩씩해서 좋네. 커서 훌륭한 영웅이 되겠어.”
“제 딸은 평범한 학자로 키울 겁니다만…….”
“시끄럽고. 잘 따라붙어. 놓치면 버리고 갈 거니까.”
빌트레드는 마리하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준 뒤 그의 애병 ‘여름의 검 하야섬도’의 자루에 손을 가져다 댔다.
후우―
차분한 호흡과 함께 하얀 입김이 뭉근하게 뱉어진다.
발도와 동시에 하야섬도가 한 바퀴 회전하고, 바닥을 내리찍었다.
[어검비연]쩌저저적―!
땅이 갈라지고 파편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대지의 소울을 빨아들여 머금은 하야섬도가 그대로 뒤로 뻗어졌다가 크게 휘둘러진다.
[어검승천]소울을 담은 검풍이 대지를 부수며 날아간다.
빌트레드의 소울이 스멀스멀 거리를 좁혀 오던 나가 떼를 덮쳤다.
어떤 놈들은 소울에 휩쓸리고 어떤 놈들은 날아간 거대 암석 파편에 터져 나갔다.
순식간에 빌트레드의 앞쪽으로 부채꼴 모양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때마침 고슴도치가 되어 지상으로 추락하는 와이번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빌트레드는 곧바로 몸을 튕겼다.
* * *
카터의 탈영은 없던 일이 되었다.
상부에는 전투 이후 잠깐의 외출 허가를 받아 집으로 복귀했고, 그때 우연히 고향이 습격을 받아 전투에 휘말린 것으로 보고되었다.
모든 책임은 빌트레드가 떠맡았다.
보고서의 내용은 부하 장수의 위기를 외면하지 못하고 장수 넷과 함께 별동대를 운영해 휘하 장수를 구출해낸 것으로 변모했다.
그 일로 좌장군은 군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으나, 이제라 최고 중요 전력인 그에게 가혹한 처벌이 이뤄질 거라 예상하는 이는 없었다.
좌장군의 일탈에도 꿋꿋하게 왕실의 명령을 지킨 장수 콘레드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쇠종다리를 지키는 경비군의 장군으로 승진했고, 좌장군 부대는 쪼개져 험지로 발령받았다.
그렇게 잠깐의 소요는 흐지부지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아빠!”
마신군과 한바탕 전투를 끝낸 뒤, 카터는 예비대 막사를 찾았다.
좌장군의 허락으로 마리하는 빌트레드군 야영지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여군 막사에 거처를 배정받고, 어린 몸이지만 간단한 허드렛일을 자처한 것이었다.
마리하는 워낙 싹싹하고 애교 넘치는 성격 덕분에 여군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군인들 사이에선 카터의 아내가 되지 않고 마리하의 엄마가 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그녀에게 심심찮게 농담을 던질 정도로.
“턱수염!!”
“…….”
물론 마리하의 애교가 늘 상대를 향하는 건 아니었다.
마리하는 아내를 잃은 아빠에게 빈자리를 채워 주기라도 하려는 듯, 카터만 보면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한 것이었다.
“딸…?”
“말했지! 전장에서도 항상 깔끔하게 하고 다녀야 한다고! 좌장군을 보필하는 부관의 행색이 거지같이 더러우면, 주군을 욕보이는 거라니까?”
“으하하! 거지라니, 말이 너무 심하잖아. 이리 와, 좀 안아 보게.”
“아빠아! 내 말 듣고 있어?”
철없는 장수와 조숙한 소녀는 그렇게 빌트레드군의 마스코트가 되었다.
* * *
야영지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좌장군 부대의 연이은 승전에도 여신군의 분위기와 사기는 점점 더 떨어져 내렸다.
‘성약의 계승자가 깨어나질 않는다.’
그 짧은 한 문장은, 전쟁이 길어질수록 대륙민들의 마음을 갉아먹었다.
빌트레드군도 그 여파를 피해갈 순 없었다.
패전 속 단비 같은 승전을 이어 갔지만, 물자와 후속 병력 지원은 계속해서 줄어들었고 부대의 규모도 점점 줄어들어 갔다.
비 내리는 야영지는 여느 때보다 무거운 침묵이 어깨를 내리눌렀다.
“…….”
“어째서.”
카터는 제 부대에 벼락처럼 떨어진 명령서를 두 번, 세 번 확인하고는 눈을 비비고 현실을 의심했다.
「좌장군 빌트레드는 휘하 군부대를 이끌고 아즈마칼리스에서 튀어나온 ‘여왕 아지만샤록스’를 토벌하라.」
안 그래도 지옥 같은 전장에서 하루하루 말라 죽어가는 나날이다.
그런데 아지만샤록스라니.
현재 사도를 제외하고 가장 강한 군주급 마물 아닌가.
심지어 아지만샤록스가 이끄는 고대 종족 군대는 그 규모도 이제라 전체 군대에 비견될 정도로 큰 규모였다.
그걸 일군 단독으로 해결하라는 건….
“가서 뒤져라, 라는 뜻이네.”
시리안이 냉소적으로 내뱉었다.
이건 명백한 오판이다.
“혹시 노망이라도 난 건가?”
바스크는 주어 없이 의문했으나, 그 질문이 가리키는 대상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었다.
“판단력이 흐려진 거지. 고대 종족들이 남하하면 목적지는 왕도 티렐이야. 그 대군이 왕궁을 공격하러 온다니 일단 되는 대로 보내서 막든, 시간을 지체하든 하라는 의미 아니겠어?”
“정석대로 대처하려면 전군을 끌어모아 검성께 지휘를 맡기고 전면전으로 상대해야 하는데, 그러면 아슬란 대장군이 거느린 병력이 너무 많아지니까 무섭고. 단독 부대로서는 가장 활약이 뛰어난 우리를 방패막이로 쓰려는 거지.”
“그 늙은 영감이… 기어코 사고를 치는군…….”
정말이지 있던 충성심마저 휘발될 것 같은 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반역이라고 일으키자고 외치고 싶지만, 그건 여신군이 자멸하는 길이나 다름없다는 걸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휘부 사이에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런 침묵을 깨트린 건 카터였다.
카터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주군!”
“귀 안 먹었어.”
“…….”
“왜. 말해.”
“…저는 죽을 수 없습니다. 제가 죽으면 제 딸은 혼자예요.”
빌트레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불복하시죠.”
“그럴 순 없지. 군인이 명령을 무시해서야 되나. 두렵다면 빠져도 좋아.”
“두려운 게 아니라…!”
카터는 말끝을 흐렸다.
아니, 두려운 거다.
제가 죽으면 혼자 남을 마리하가 마주할 세상이 두려운 거다.
혼자 두지 않겠다고, 반드시 지키겠다고 했던 약속이 깨지는 것이 두려운 거다.
“카터. 마리하를 데리고 티렐 왕성 경비군으로 가라.”
“예?”
“칼슨은 티렐 외곽수비군으로 가. 들숲마을 인근 부대에 장수 자리가 남을 거다.”
“…….”
“바스크랑 시리안은 전부터 성검기사단에 가고 싶어 했지. 이참에 소속을 옮겨 주지.”
“주군!”
휘하 장수들의 호들갑스러운 외침에도 빌트레드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을 덧붙였다.
“그 거미인지 벌인지 모를 자칭 여왕만 잡아 주면 되는 일이니까 전면전보다는 침투전으로 하는 게 성공률이 높겠지. 죽을 자리를 찾고 있는 놈들로 별동대를 꾸릴 거다. 삶에 미련이 많은 녀석은 빠져도 좋아.”
빌트레드는 가볍게 설명한 뒤 축객령을 내렸다.
카터는 씩씩거리며 지휘관 막사 앞 돌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왕실이다. 휘하 신하들을 소모품 정도로 생각하는 국왕.
그들이 충성하는 건 장군 빌트레드지 라 마레 왕실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빌트레드 장군이, 자신들이, 부하들이 사지로 내몰려야 하는가.
“그만해라, 카터. 마리하가 정 걸리면 빠져도 된다고 하시잖아.”
“안 빠져요, 안 빠져! 저도 양심이 있는 놈입니다. 예?!”
칼슨의 만류에도 카터는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형님은 화도 안 나십니까!?”
“화가 나지.”
“대체 이해할 수가 없단 말이요! 이딴 명령도 명령이라고!”
“빌미를 제공한 건 우리가 먼저니까.”
“빌미요? 뭔 빌미요?”
“고대 종족은 티렐로 곧바로 진격하지 못해. 전면전을 벌이면 여왕도 만만찮은 피해를 볼 테니까. 그럼에도 선공 명령을 내린 건 마리하를 구하기 위해 했던 무단이탈, 지시 불이행의 보복이야. 왕실의 명을 거역한 지휘관이 어떻게 되는지 일벌백계로 보여 주어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싶은 거지.”
상상도 못했던 사건의 진실에 카터는 잠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한참이나 멍청히 서 있다가 그는 도리어 역정을 냈다.
“뭐요? 지금 대륙이 망하게 생겼어요. 그런데 주군 정도의 인물을 단순한 보복으로 사지로 내몬다고요. 그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 어딨습니까?!”
“그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다. 이 나라의 국왕이란 작자는.”
“이런 개 같은…….”
결국 카터는 참지 못하고 욕설을 터트렸다.
그 말대로라면, 빌트레드를 죽음으로 내몬 빌미를 제공한 것은 바로 자신이었다.
“나는 갈 거다. 장군을 홀로 보낼 순 없어. 그게 수하 된 도리니까.”
칼슨의 단호하고도 선명한 의지에, 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가족뿐만이 아니야, 카터.”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저도 주군을 혼자 보낼 생각은 없었다고요. 내가 없으면 무기 수리는 누가 하고, 슈트 정비는 누가 합니까? 하지만 분명히 말하건대, 전 안 죽습니다. 못 죽어요. 알겠어요?”
카터의 으르렁거림에 칼슨은 그저 피식 웃을 뿐이었다.
* * *
아즈마칼리스 전투.
고작해야 3백여 명의 인원으로 수만 명의 대군이 포진한 고대 종족의 거점에 파고들어 여왕을 타격하는 작전.
‘미친개와 그 사냥개들의 자살 작전’이라 불리는 침투 작전은 기어코 여왕에게 소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히고 봉인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처치한 고대 종족의 수는 이루 셀 수도 없었다.
아즈마칼리스전은 성녀 디에네의 등장 전 최대 규모의 승전이었다.
작전에서 살아남은 영웅들은 ‘아즈마칼리스전 108 용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활약을 두려워한 라 마레 국왕의 수작으로 그들의 활약상은 조명받지 못했다.
그저, 진실을 아는 이들의 입으로만 회자되다가 새로이 이제라의 국왕으로 추대된 성녀 디에네에 의해 역사에 기록되었다.
뒤늦게 공적을 인정받은 빌트레드는 차기 대장군으로 낙점되었고 생존 영웅 전원이 2계급 특진을 약속받았다.
* * *
꽃이 놓인다.
음악이 울려 퍼진다.
역사에 기록될 법한 거대한 사건이 마무리되고, 그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영결식이 진행되었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안젤리카 성십자회장까지 사관학교에 방문하여 축도를 읊고, 그들의 영혼이 영원히 편안한 안식에 들길 기도한다.
넓은 부지 한쪽에 묘지가 만들어지고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비가 세워졌다.
쉬쉬하고 은폐되었던 사관생도 마리하의 죽음은 마인에 의한 살인으로 정정되었고, 그녀 묘비 또한 카터와 함께 세워질 수 있었다.
내게도 전투 이후 종적이 묘연해진 마인 레몬을 추적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었으나, 그보다는 망자의 명복을 기리는 것이 먼저였다.
나는 카터의 묘 앞에서 그가 남긴 유품들을 들고 서 있었다.
카터의 유품을 수습하기 위해 마리하 대장간에 들렀을 때, 그는 이미 재산 대부분을 깔끔히 정리해 둔 뒤였다.
모든 소유품의 권한을 러셀 애시그린에게 넘긴다는 유언과 함께, 무기 제작을 의뢰했던 의뢰자들의 무구까지 모두 완성해 둔 채로.
어쩌면 그는 처음부터 이 전장에서 죽을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서서 내가 직조했던 세상을 떠올린다.
마인 데이몬 에피소드가 끝난 뒤, 카터가 어떻게 되었더라.
그 뒤로 한 번도 등장시키지 않았던 그 영웅은, 아마도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그가 모진 생을 끌어안고 있었던 것은, 오로지 딸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겠다는 미련 때문이었을 테니까.
음악은 계속해서 흐른다.
그 음률은 마치 생의 절반을 전쟁으로 보냈던 영웅을 위한 찬가처럼 느껴졌다.
나는 누군가에겐 평화의 시기였던 20년 중 많은 시간을 또 다른 전쟁으로 보냈을 영웅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했어요. 카터.’
정사의 이야기가 반환점을 돈 시점의, 어느 흐린 날이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