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05)
21. 요즘 애들은 싸가지가 없어
공식일정, 임무, 퇴학, 그리고 졸업.
사관생도가 학사 부지를 벗어나는 방법은 이 네 가지뿐이다.
그것은 20년 동안이나 지켜온 전통이며, 수많은 사관학교 규정집 중에서도 첫 페이지에 속하는 중요 사항이었다.
소속 교수들 또한 당연히 그 조항에서 벗어날 수 없다.
만약 특정 교수가 강의를 핑계로 학생들은 대륙 반대편까지 데려갔다 오겠다고 말한다면… 아마 오리건 총장이 집어던진 재떨이에 이마가 깨져 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크라우는 자신의 커리큘럼을 학사에 보고는커녕, 공유하지도 않았다.
꼬장꼬장한 원로들이 알게 된다면 학사가 뒤집힐 만한 파격.
하지만 그 계획을 실행하는 이가 크라우라면, 설사 대륙 끄트머리가 아닌 동방 무역선을 타고 다른 대륙을 다녀온다 해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노릇이다.
여왕쯤 되는 존재도 쉽사리 크라우의 부탁에 거절을 놓지 못하는 현실이니까.
그런데 사관학교 관계자들쯤이야.
뒤늦게 알게 된 관계자들은 그저 당황을 감추며 허허 웃고는, 그가 학생들을 가르쳐주는 자체로도 감사하다며 고개만 숙일 것이었다.
이런 미래가 펼쳐질 거라는 예측이 학계의 정설이자 정론이었다.
하지만 그런 크라우를 상대로도 꿋꿋하게 원칙을 말하는 교수가 있었으니….
“불가합니다.”
21기 담임교수에서 생도분대의 전담 부교수로 자리를 옮긴(본인은 좌천이라 언급했다.), 다이크 로필런.
그가 크라우의 계획을 듣자마자 곧바로 철벽을 치고 가로막은 것이다.
“안 돼? 왜?”
“규정상 외부 현장실습은 불가합니다.”
“거참 깐깐한 선생님이네….”
머리를 벅벅 긁으며 ‘그냥 모른 척 나가 버리자.’라고 다이크를 설득하는 크라우의 제안에, 다이크는 곧바로 오리건 총장에게 보고서를 올려 버렸다.
그 결과는….
학사 규정에 ‘영웅 육성 클래스, 통칭 생도분대 소속 전담교수는 학사 일정 및 규정에 제한받지 않고 분대원들을 데리고 외부 활동 및 훈련을 할 수 있다’라는 조항이 뚝딱 만들어졌다.
다이크는 그제서야 별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 *
“참 원칙과 규정을 편할 때로 넣었다 뺐다 하는 게 꼭 미마 도토리 주머니 같네.”
“으하하, 그러게나 말이야.”
내 신랄한 비판에 파가 동의한다는 듯 웃어젖혔다.
괜히 양 볼에 한가득 쿠키를 머금고 있던 미마만 뜨끔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나는 집결지에 모인 생도분대 스무 명의 면면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늘 나와 함께 싸우던 주연 멤버들과 조연급 동기들, 2학년 선배들, 그리고 이번에 새로이 합류한 지방 사관학교 출신 생도들까지.
각양각색의 인물들이 한데 모여 있다.
아마 한동안은 큰 인원 변동 없이 이 스무 명이 함께 부대끼며 생활할 것이었다.
내 머릿속에서 이맘때쯤의 에피소드가 가장 쓰기 어려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다른 이유보다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져서.
그러다 보니 몇몇 개성 강한 인물들을 빼면 대부분 병풍이 되었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겪을 일을 생각하면, 잘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새록새록 들었다.
전력은 다다익선이다.
“출발에 앞서서 간단하게 자기소개부터 할까? 지금까지는 치열하게 경쟁해 왔겠지만, 이제부터 너희는 전우야. 서로를 믿고 목숨을 맡겨야 할 동료들이지. 그러니 앞으로 최대한 친하게 지내라고.”
굳이 크라우가 당부하지 않아도 앞으로 이들 사이에선 끈끈한 전우애가 꽃필 거다.
왜냐, 원래 함께 개고생하다 보면 없던 정도 생기는 법이니까.
“20기 다즐링이다. 익숙한 얼굴들이 많아서 다행이네. 클래스는 사수고 주 무장은 활이다. 이렇게 된 마당에 선배 대접은 바라지 않아. 너무 막대하지만 말아 줘라.”
“20기. 엘에이. 기사 클래스야.”
“이스칸다예요. 대지 계열 마도사입니다.”
“엘슨 로이드입니다. 정령사이지만, 전위 역할도 겸할 수 있어요.”
“진짜 민망하게 무슨 자기소개람… 아이아나 몬차. 디버프 케어 계열 특화 정령사야. 겁쟁이 엘슨보다는 한 수 위의 정령사랄까?”
“빌레나 모드리안. 마도사. 주특기는 디버프 계열 마법.”
“나는 레오야. 사수고, 주 무장은 새총이지만 폭탄도 잘 다뤄.”
“씨씨라고 한다! 화염계 정령을 다루지만, 클래스는 기사지! 킁, 간혹 마도사라고 오해하는 친구들이 있던데, 나는 기사 클래스라고!”
“도미니엘… 닉시드예요. 빙결 계열 마도사입니다….”
도적 하나, 사수 셋, 마도사 다섯, 전사 둘, 기사 넷, 정령사 넷.
전위 여섯에 후위 아홉. 조커 하나에 지원 넷.
“모드리안부터 닉시드, 로즈 뎁, 델 위오까지. 역시 쟁쟁한 가문들이 많네.”
가벼운 자기소개 시간이 끝난 뒤, 주디가 손을 번쩍 들고 질문했다.
“전위가 너무 적지 않나요?”
역시나 원거리 딜러가 유난히 많은 이번 기수 특징 덕분에 이번에도 전위와 후위가 살짝 무너진 듯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크라우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답변했다.
“영웅들의 싸움은 진형을 갖추고 각자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반 병사들과 달라. 영웅은 그 자체로 전황을 뒤집을 수 있어야 하거든. 가령, 홀로 적진 한가운데를 공습해서 진형을 부숴 놓는다는가 말이야.”
“……전위 후위 구분이 필요 없다는 뜻인가요?”
“진형 전투에서 전위가 필요한 이유가 뭐야?”
“마도사나 사수들은 체질적으로 내구성이나 방어력이 부족하니까요.”
“그래. 영웅의 특징은 뭔데?”
“그야, 전투슈트… 아.”
그제야 자신이 멍청한 질문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주디가 입을 합, 다물었다.
“후위의 부족한 방어력은 슈트가 보완해 준다. 마찬가지로 전위의 부족한 공격력도 슈트가 채워 주지. 물론 너희가 분대 단위로 움직일 땐 각자 잘하는 걸 하면 되지만, 큰 구분은 정령사와 비정령사. 둘이면 충분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크라우 경.”
“하하. 좋아. 나, 생각보다 누굴 가르치는 데 소질이 있는데? 그럼 슬슬 출발해 볼까? 전원 전투슈트 착용해.”
우우웅―
찰칵찰칵.
생도분대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가동파츠에서 슈트를 착용했다.
가지각색의 다양한 슈트가 제법 장관을 연출했다.
– 주의사항은 이동하면서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송신기를 통해 크라우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하루 이동 시간은 총 20시간이야. 20시간 동안 이동한 뒤 4시간 동안 수면을 취할 거다. 뒤처지더라도 스크린에 띄운 지도를 보고 따라오면 돼. 중간에 위험 상황이 발생하면 긴급호출 버튼을 눌러. 지크프리드와 다이크 선생이 맨 뒤에서 따라오다가 너희를 구출할 거다.
크라우는 차분하게 설명을 이어 가면서 이동을 시작했다.
첫 출발은 가벼운 경보 수준의 빨리 걷기.
나는 시야 하단에 떠오른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크라우와 다이크까지 포함한 총 22명이 한 채널에 접속해 있고, 지도 위에 그들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점으로써 표시된다.
– 가장 중요한 것. 절대 슈트를 해제하지 마. 만약 슈트를 유지할 수 없다면 그 자리에서 멈추고 다시 슈트를 착용한 뒤 움직인다. 내 속도에 맞춰 따라올 수 있다면 좋겠지만, 힘들다면 각자의 페이스로 와도 좋아.
– 단, 몰래 포션 먹다가 걸리면 그땐 재미없을 줄 알아. 그리고 야영지에 늦게 도착하면 그만큼 너희의 잠잘 시간이 줄어드는 거니까 알아서들 바짝 쫓아오라고. 하하!
크라우는 시원하게 웃어젖히고는 점점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20명의 슈트 입은 생도분대원들이 바짝 따라붙는다.
맨몸으로 달리는 거였다면 금방 체력이 떨어질 정도로 빠른 속도였지만, 슈트가 이동을 보조해 준 덕분에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문제는 소울 소모다.
말이 20시간이지,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계속 슈트를 가동하고 달려 나가야 한다는 뜻.
현재 생도들의 소울 양은 거의 고만고만한 수준이다.
분명 절반도 가지 못하고 태반이 탈진하고 말 거였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움직여야 해.’
슈트기동에 조금이라도 소울을 허투루 낭비하면 곧장 낙오하고 말 거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선 슈트에 들어가는 소울 양을 조금씩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움직임을 보완해 주던 슈트의 활동성이 떨어지고, 그만큼 체력이 실시간으로 떨어졌다.
소울과 체력 소모의 적절한 분배.
첫 번째 훈련의 목적은 그것이었으니까.
* * *
– 슈트에는 ‘에코 모드’라는 게 존재해. 정속으로 장거리 운행할 때 소울 소모를 효율적으로 줄여 주는 기능이지. 모두 적용해 봐.
행군 시작 30분 정도가 지나고 나서, 말없이 앞서 걷던 크라우로부터 음성 메시지가 들려왔다.
그의 설명에 불규칙한 속도로 움직이던 생도들의 슈트기동이 보다 차분해졌다.
물론 나는 이미 시작할 때부터 적용하고 있었기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혼자 꿀 빨고 있었는데 조금 아쉽게 됐다….
분대원들이 한숨 돌린 듯 호흡을 고르기 시작했다.
행군은 이제 시작일 뿐인데, 벌써부터 지쳐 뒤떨어지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한 덩어리처럼 바짝 붙어 있던 분대원들의 위치는 조금씩, 조금씩 일렬종대로 바뀌기 시작했다.
– 좀 천천히 갈 순 없는 건가….
– 주디, 무리하지 말고 네 페이스대로 움직여.
– 다 듣고 있다. 꼬꼬마들아. 시작부터 엄살 부릴래? 너희 스승을 봐. 저렇게 군장을 싸매고도 멀쩡하잖아?
크라우의 말에 주디와 파가 입을 다물었다. 행렬의 최후미에는 거대한 짐을 짊어진 다이크가 무표정으로 그들을 따라붙는 중이었다.
‘괜히 잘못 엮여서 개고생하시네요, 교수님….’
그 와중에도 철저하게 표정 관리를 하는 걸 보면, 그는 역시 프로였다.
벌써부터 죽는소리를 하곤 있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버틸 만하다는 증거다.
막바지에 다다르면 너무 힘들어서 말조차 나오지 않으니까.
분대원들은 가능하다면 함께 결승선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서로를 격려하기도 하고, 한 번씩 등을 밀어 주기도 했다.
– 심심하면 행군 간에 군가라도 할까? 요즘도 그거 부르나? 멋진 기사님인가?
크라우의 농담 섞인 말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행군은 계속된다.
2시간.
3시간.
4시간.
10시간.
15시간.
하나둘 슈트의 시동을 꺼트린 분대원들이 생겨나고, 이제는 지도에 점들을 셀 수 있을 정도로 각각의 거리가 벌어졌다.
봄날의 햇볕이 내리쬐는 포근하고 따듯한 날씨인데도, 슈트 안의 몸뚱어리에선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나는 최선두에서 미동 없이 달리는 휴고를 힐끔 바라봤다. 이제 크라우의 등 뒤를 보고 달리는 건 우리 둘뿐이었다.
확실히 주인공은 주인공이다.
녀석은 무슨 위기를 겪을 때마다 강해지는 전투 민족 사이어인마냥, 에피소드를 지날 때마다 괄목할 정도로 성큼성큼 성장하고 있었다.
‘뒤지겠네….’
소울은 진작에 바닥을 보이는 상태다.
나는 슈트 작동을 위한 최소한의 소울만을 남겨 둔 채, 말 그대로 두 다리와 체력으로만 크라우를 따라붙고 있었다.
아마 휴고 녀석도 마찬가지일 터.
크라우도 지금쯤 생도들의 소울이 바닥난다는 건 예상했을 거다.
우리가 체력과 정신력으로만 슈트를 움직이기 시작했을 즈음부터 속도를 조금 늦추었으니까.
– 아카샤. 슈트를 켜라.
그때, 다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뒤쪽에서 누군가 슈트를 해제한 모양이다.
– 슈트를 켜라. 소울 탈진으로 기절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슈트를 입고 달려라.
무미건조한 음성이 오늘따라 서늘하게 느껴졌다.
– 다시 말한다. 슈트를 켜. 아카샤. 중얼거릴 거면 슈트를 켜고 말해라.
– 내가 죽으면… 처녀 귀신이 돼서… 복수할 거야….
아카샤의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가 송신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 뒤, 다이크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 아카샤, 낙오입니다. 기절한 듯합니다.
– 응. 챙겨와 줘.
행군 15시간 째부터 본격적으로 낙오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체력적으로 약함을 보이던 정령사들부터 시작해서, 마도사들, 사수들까지.
그나마 평소 체력단련이 꾸준히 된 근접 전투원들은 간신히 버텨내는 듯했지만, 그중에서도 낙오자는 나왔다.
– 여기가 금일 목표한 야영지야. 도착하면 바로 누워서 자면 돼.
“후아아악!”
나보다 열 걸음 정도 앞서 걷던 휴고가 곧바로 슈트를 해제하고 바닥에 굴러 넘어졌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게 거의 한계의 한계까지 정신력으로 버텨낸 것처럼 보였다. 진짜 독한 녀석이다.
나도 크라우에게 닿자마자 그대로 슈트를 벗고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진짜로 뒤질 것 같다….
* * *
나는 잠시 후 웅성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잠깐 누워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새 잠이 든 모양이다.
이렇게 기절하듯 잠든 건 저주가 사라진 이후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기절한 생도들은 그대로 지크프리드에 짐짝처럼 실려서 들려왔다.
행군 첫날부터 자그마치 절반 이상이 낙오됐다.
뒤늦게 도착한 미마는 내 옆에 똬리 트듯 자리 잡았다가, 자기 몸을 향해 코를 킁킁거리더니 화들짝 놀라 멀찌감치 떨어졌다.
군장을 한 아름 싣고도 멀쩡해 보이는 다이크가 기절한 생도들에게 딱 포션 한 방울씩만 떨어트렸다.
말 그대로 정신을 차릴 정도의 회복만 시켜 둔 것이다.
“잘자, 아가들. 불침번은 나랑 다이크 선생이 볼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하게 쉬어. 4시간, 아니지. 앞으로 2시간 39분 후에 출발할 거니까.”
“…….”
“이걸 야영이라고 할 수 있나? 이건 그냥 길거리 거지잖아….”
뒤늦게 도착한 생도들은 바닥에서 대충 건초 속에 몸을 파묻고 자는 우리를 보고 경악했으나, ‘나는 시끄럽게 굴지 말고 빨리 자빠져 자.’라는 말로 일축했다.
텐트? 없다.
이불? 당연히 없다.
씻는 것? 사치다.
이 힘든 와중에 잠 대신 씻는 걸 택하는 녀석이 있다면 진심으로 손뼉을 쳐 줄 거다.
그냥 그대로 바닥에 대가리 붙이고 어떻게든 자는 거다.
분대원들이 불평을 터트린다고 해서 이 훈련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저 일 분이라도 더 많이 자는 게 내일 살아남는 방법이다.
“저….”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의 깔끔이 귀족 영애, 리지 로즈 뎁이다.
늘 맑은 하이톤을 유지하던 리지의 목소리는 어디 가고, 그녀는 쉬어 터진 목소리로 더듬더듬 물었다.
“혹시 씻기라도 하면 안 될까요…?”
귀족 영애는 언제 어디서든 청결함을 유지해야 한다던 그녀는, 몸을 씻어낼 한 방울의 마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낄낄 웃으며 팔베개를 하고 눈을 감았다.
“자야 소울을 회복할 거 아냐. 씻는 건 웨더릭무어에 도착해서 한 번에 씻으면 되지. 웨더릭무어는 자연온천으로 유명하거든. 하하, 또래 친구들과 온천 여행이라니. 얼마나 낭만적이야?”
“우으, 으이익….”
리지는 울상을 지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