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10)
22. 유령 해협
철학적으로까지 느껴지는 크라우의 질문에 생도분대원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차분히 제 생각을 정리하며 곱씹을 뿐.
잠시 후, 크라우가 확신하듯 되물었다.
“‘강함’이다. 그렇지 않아?”
몇몇 분대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강해지기 위해 이곳에 왔다.
애초에 향상심이 없는 이라면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을 터.
“좋은 목표지. 하지만 그 열망을 비워내라. 이 끈적끈적한 소울이 질려 나가떨어질 때까지. 잘 이해는 안 될 거야.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느껴지겠지. 하지만 어느 순간 번쩍, 하고 깨달음이 올 거야.”
크라우가 손뼉을 짝짝 친 뒤,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부딪혀 보자고. 다이크 선생, 준비됐지?”
“예.”
“좋아. 그럼 반반씩 나눠서 진행하자고. 거기서부터 거기까지. 나머지는 언덕 위로 올라가서 대기하도록.”
크라우는 내가 포함된 오른쪽 열 명을 지목했다.
“넓게 넓게 퍼져서 앉아. 최소 반경 10m 바깥으로.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크라우의 말에 분대원들이 각자 떨어져 자리에 앉았다.
첫 번째 시도.
여기서는 분대원 대부분이 이성을 잃고 폭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크라우와 다이크도 예상하고 있다.
들끓는 욕망을 억제한다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붙는 결투는 자칫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물론 크라우에겐 본능 상태에서의 전투를 막을 생각은 없을 거다. 그것 또한 훈련 일부니까.
다만 혹여라도 목숨을 잃는 불상사만큼은 없게 하는 게 그들의 목표이리라.
“슈트를 해제하고 편하게 앉아 눈을 감고 편하게 호흡하며 명상을 시작해. 주의사항은 별거 없어. 애초에 이 훈련은 누가 가르쳐 준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하나만 기억해. 욕망을 버려. 그리고 이성을 유지해.”
나는 크라우의 말에 따라 양반다리로 앉아 눈을 감았다.
슈트를 해제하자마자 온도 조절 장치가 막아 주었던 칼바람이 순식간에 몸을 식히기 시작한다.
그 상태로 잠깐의 시간이 지나니 주변에서 요동치고 있는 소울의 움직임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진짜 끈적끈적하네.’
호흡할 때마다 마치 기도로 꿀이 넘어오는 느낌이다. 딱히 불편하거나 고통스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울이 가득 차 몸에 힘이 샘솟는 느낌에 가까웠다. 소울의 특징 때문인지 피부는 차갑지만, 몸속은 점점 데워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기이한 상황은 그 뒤에 일어났다.
들숨을 통해 들어온 소울이 날숨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내 몸 구석구석을 훑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고는 점점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가슴 한구석을 콕콕 건드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다른 지역이나 내 몸속의 것과는 다른, 이질감을 가진 소울이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피부에 닿는 서늘한 바람과 소울이 몸속에 풍만하게 돌아다니는 통에 졸음은 오지 않았으나, 지루한 시간이 반복됐다.
그사이에 욕망의 항아리가 계속 정신 어딘가를 콕콕 찌르면서 감정이 증폭되긴 했지만, 하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스마트폰을 하고 싶다든가, 에픽세븐 실레나를 돌리고 싶다든가, 가족이 보고 싶다든가 하는 소소한 욕망이 고개를 빼꼼히 쳐들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그라들었다.
‘생각보다 버틸 만한데.’
명상을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난 것 같았다.
정사에서 생도들이 하나둘 버티기 어려워지는 시간대.
나는 실눈을 뜨고 주변을 힐끔 바라봤다.
내 동쪽에 자리한 미마, 북쪽에 자리한 리지는 나와 똑같은 자세로 몸을 부르르 떠는 중이었다.
좀 더 시선을 멀리로 향했다.
분대원 대부분이 고통스럽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단 한 명, 빌레나 모드리안만 빼고.
그녀는 나처럼 아무렇지 않다는 듯 평온한 표정으로 다소곳이 명상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흐음….’
소설 속에서 나는 이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었다.
빌레나가 홀로 멀쩡한 이유.
그녀 또한 강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있는 건 맞지만, 그 기저에 깔린 원천적인 것은 생존 욕구였다.
생존에 대한 욕망은 기실 욕망이라기보단 본능이다. 그렇기에 욕망이 아니라 ‘욕구’라 칭한다.
강해져서 무엇을 하고 싶다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강해져야 한다. 수단과 목적이 뒤바뀐 것.
이곳은 욕망을 억제해야 하는 곳이지 본능을 죽이는 시련이 아니었다.
마치 배설 활동과도 같다.
배설욕은 배설 욕구라고 하지 욕망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욕망의 항아리 속에 들어와 있다고 한들, 화장실이 간절히 가고 싶다고 그 자리에서 똥을 싸지르지 않는 이유다.
내가 별 타격이 없는 것도 같은 이치였다.
내 기저에 깔린 최우선적인 목표는 생존 그 자체였으니까.
이런저런 잡념으로 몸속에서 날뛰는 소울이 포기하고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사이, 또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두 시간째.
이제 슬슬 미쳐 날뛰는 분대원들이 나올 때였다.
아니나 다를까 인근에서 충격음이 들려왔다.
결국 이지를 빼앗긴 동료들이 가장 인근에 있던 분대원을 기습 공격한 것이었다.
문답 무용.
왜 공격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대뜸 칼부림부터 하는 정신 나간 지옥도가 펼쳐졌다. ‘강함’을 욕망으로 가진 이들에게 발현되는 공통적인 특징이다.
깔끔하게 1:1 대련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 싸우고 있는 상황에 난입해서 이상한 3각 대결 구도가 벌어지기도 하고, 아예 뭉텅이로 뭉쳐서 눈에 보이는 대로 공격하는 대난투가 펼쳐지기도 했다.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모아 놓고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를 명령한 거나 다름없는 아비규환.
곧 내 인근에서도 벌어질 일이기도 했다.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인근에 자리한 미마, 리지, 에뜨랑제를 바라봤다.
하필 날 제일 꺾고 싶어 하는 세 사람이 근처에 자리 잡고 있으니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하나 정도는 가볍고, 둘까지도 어찌어찌 상대해 볼 만하겠지만. 설마 셋 다 덤비진 않겠지?
에뜨랑제 전위, 미마 중위, 리지 후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옹졸해지고 오금이 저리며 등골이 서늘해지는 라인업이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일단 작전상 후퇴를 해서 크라우의 등 뒤로 숨어들어 갈 작정이었다.
비록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분대원들의 웃음거리가 되긴 하겠지만… 내 몸이 머리, 가슴, 배로 나눠지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
“…러셀.”
가장 먼저 욕망의 희생양이 된 것은 다름 아닌 리지였다.
그녀는 뭔가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내 옆으로 쭐레쭐레 다가왔다.
바짝 긴장해서 공격한 순간 반격으로 정신과 치료(물리)를 해 주려던 나는, 느껴지는 위화감에 흠칫, 움직임을 멈췄다.
‘말을 한다고?’
뭔가 이상하다.
정사에서 뒤틀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소설 속에서 빌레나를 제외, 모든 분대원은 말없이 그저 주변 동료들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었으니까.
“왜 내 마음을 안 알아줘…?”
잠깐만, 뭔가 잘못됐는데?
리지의 입에서 헛소리가 튀어나온 순간,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대뜸 공격하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게 맞나? 이래도 되는 건가?
“널 꺾고 싶어어….”
“그래? 그거지? 덤벼 이 자식아. 도전을 받아 주지.”
나는 한순간 오해했던 마음을 내려놓은 뒤 리지에게 손짓했다.
“예쁜 꽃은 꺾으면 금방 시들어 버려…. 하지만 꺾어서 내 방 화병에 꽂아 놓고 싶다구….”
“……?”
리지는 내게 정신 공격을 시전했다.
효과는 굉장했다…!
나는 혼미해지려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은 채 팽팽 돌아가는 머리를 굴렸다.
잠깐만… 여기서 상황 전개가 이렇게 된다고?
이건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저맘때의 여자애들이란 종종 봄바람에 마음이 살랑살랑하기도 하고 주변 남정네들한테 한 번씩 눈길이 가는 금사빠 기질도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영웅 육성 클래스에 들어와 훈련받는 지금, 가장 큰 욕망이 ‘향상심’이 아니라 ‘애정’이라면?
아니 이렇게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교수들과 동기들이 내려다보고 있는 와중이다.
이건 리지에게 절대 되돌릴 수 없는 흑역사가 될 거였다.
사회적인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아마도 깨어나면… 죽고 싶어질지도 모를.
“그냥 맞고 기절하자. 그게 너한테도 좋은 일일 거야.”
하지만 차마 주인한테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지으며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는 무방비한 리지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가하기는 어려웠다.
애초에 잘못하지 않은 놈을 패는 건 양심에 찔린단 말이다….
“손잡아도 돼?”
“미치겠네.”
리지의 팔이 내 몸에 감겨 온다.
말은 손잡아도 되냐면서, 왜 덥석 껴안는 건데?
그 순간 얘를 패서 기절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더 환장할 노릇인 건, 갑자기 얘가 예뻐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원인은 명확했다.
내가 폭주하는 리지를 걱정하는 마음을 악용해, 더러운 항아리가 내 안의 ‘애정’이라는 욕망을 증폭시키고 있는 거다.
이대로라면 더러운 우결충의 함정에 빠지고야 만다…!
나는 황급히 다른 에뜨랑제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에뜨랑제의 최우선 욕망은 복수다.
그녀야말로 이 에피소드에서 많은 분대원을 박살 내고 에피소드 최고의 난봉꾼으로 등극하는 인간.
그녀에게 이 욕망덩어리를 던져 줄 생각이었다.
성스러운 훈련 중 사리사욕에 빠진 이 사악한 사문난적을 처리해라 에뜨랑제…!
허공에서 에뜨랑제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나를 뚫어져라 노려보는 중이었다.
마치 원수를 보는 눈빛으로.
그래. 폭주해! 와서 공격을 갈겨!
내가 눈빛으로 간절히 외쳤지만, 에뜨랑제는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역시 나 같은 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겠지요.”
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땅굴을 파는 것이 아닌가.
비유적인 의미의 땅굴이 아니다.
말 그대로 그녀의 검으로 땅을 푹푹 찍으며 파내고 있다.
그거 검성의 유품이잖아, 미친 불효녀야….
그사이 리지의 손길이 더 대답하게 내 몸을 더듬기 시작한다. 마치 소중한 장난감을 다루듯, 간지러워 미칠 것 같은 손길이다.
나는 황급히 미마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제는, 희망이 보이기보다는 도리어 불안감만 더 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미마의 눈빛은 리지를 뛰어넘는 광기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내게 슬라임마냥 달라붙은 리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다가와 빤하게 시선을 보낸다.
다만 눈에 초점이 없다.
“할래?”
“뭐, 뭘?”
“번식. 짝짓기.”
“미쳤냐고 진짜로―”
미마의 욕망은… 좀 더… 짐승답고, 원초적인 느낌의 욕망….
그러니까….
‘애정’이 아니라 ‘욕정’이었다.
[모듈 변경 완료.] [Serial Number:?-Private Mode] [소울 에너지 출력 : 100%]들려오는 기계음에 내 눈앞이 아찔해졌다.
“아니, 시발 멈춰!”
프라이빗 모드가 뭔데, 무서워….
* * *
점점 폭주하기 시작하는 분대원들을 바라보며 크라우는 가만히 턱을 쓸어내렸다.
“한 번에 성공한 애들도 보이네?”
“그런 것 같습니다.”
“러셀 저 녀석, 싸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정신력도 좋은 녀석인 모양이야.”
“평범한 정신력이라면 그런 대형 사고를 연달아 치진 못했겠지요.”
“하하핫. 선생은 평가가 너무 매정하다니까.”
“그렇습니까.”
다이크는 고저 없는 톤으로 대답했다.
딱히 그의 말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다이크는 정 넘치는 스승은 아니었지만, 스스로 생도 한 명 한 명 꼼꼼하고 세부적으로 관리한다고 자부한다.
개인사부터 감정사까지. 티는 내지 않아도 선을 넘지 않도록 항상 주시하고 조율해 왔었다.
그런 의미에서, 러셀 애시그린은 딱히 걱정하지 않는다.
삐뚤어지긴 했어도, 정신력 자체는 일품인 생도였으니까.
다만… 염려가 되는 건 다른 쪽이었다.
그렇게 상황을 관조하던 중, 2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 상황이 벌어졌다.
문제아 러셀 애시그린과 그의 인근에 있던 분대원들 사이에서… 다이크의 기준에서 차마 눈 뜨고 못 봐줄.
사회적인 통념에 넉넉히 어긋난, 선정적이고 문란하고 되바라진 행동이 시작된 것이다.
처음 이곳에서 소울 양을 늘린다고 할 때부터 우려하던 참상이 기어코 벌어져 버렸다.
“떼어놓는 게 좋겠― 크라우 경?”
“……?”
고개를 돌리자, 크라우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쩍 벌리고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광경이 펼쳐질 거라고는 일말의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는 듯, 명백히 당황한 표정.
다이크는 뭔가 죄스러운 기분에 고개를 떨궜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