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12)
22. 유령 해협
나는 격리됐다.
첫날부터 별문제 없이 항아리 속 소울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교수들의 보호가 필요 없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
실질적인 이유는 훈련에 방해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만 보면 돌이 되어 버리는 미마나, 슬그머니 내빼는 에뜨랑제, 비명을 한껏 내지르고는 딸꾹질을 해 대는 리지.
이 정신 나간 욕망의 화신들이 제대로 훈련 성과를 보이려면 일단 눈앞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다이크의 주장이 유효했다.
내가 가해자 취급을 받는 것은 통탄할 노릇이었으나… 어찌 됐든 간에 다 때문에 좀처럼 훈련이 진행될 수 없다 하니 별도리가 없을 따름이었다.
훈련이 재개된 뒤, 세 사람은 다시 항아리로 들어가길 완강히 거부했으나, 크라우에게 그대로 집어서 던져졌다.
그 뒤로는…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일들의 반복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한들 쉽사리 해결될 문제였다면, 애초에 벌어지지도 않았겠지….
나는 정신이 너덜너덜하게 피폐해진 채로 죽고 싶다는 마음을 얼굴에 그리는 세 사람을 향해 애도했다.
“쟤들도 참 고생이네….”
나와 빌레나에 이어 세 번째로 ‘감정 다스리기’에 성공한 파가 내 옆에 와 자리 잡았다.
홀로 떨어진 내가 불쌍해 보였던 모양이다.
“러셀. 오해하지 말고 들어.”
“보통 그런 말이 서두에 붙으면 딱 오해하기 좋던데.”
“이대로라면 저 셋이 재기 불가능한 상처를 입을 것 같거든. 네가 확실한 특효약을 처방해 주는 게 어때?”
“특효약? 내가 뭘 어떻게?”
“일단 저 친구들 눈에 씐 콩깍지라도 벗겨 주는 건 어때? 뭔가 이성으로서 느껴지지 않을 만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거야. 가령, 좀 더러운 모습이라든가.”
“일주일 동안 안 씻어도 별로 신경도 안 쓰던데. 가서 똥이라도 쌀까?”
“으하하, 가능하겠어?”
“가능하겠냐? 내 인간의 존엄성은 어쩔 건데…. 내가 수치스러운 것보다는 쟤들이 수치스러운 게 낫지.”
내 당당한 대답에 파는 ‘대체 얘의 어디가 좋다는 걸까.’라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나는 녀석의 역안을 두 손가락으로 찌르는 흉내를 내며 위협했다.
물론 내게 익숙해진 파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그건 어때? 차라리 한 명을 선택하는 거야.”
“……?”
“그럼 나머지 두 명은 어련히 마음이 정리되지 않겠어?”
“왜 한 명을 희생양으로 던진다는 듯이 말하는데… 이게 그럴 문제야?”
“하하.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잖아. 나나 휴고를 봐 봐. 단순히 누군가를 깊게 좋아한다고 해서 욕망이 솟구치는 건 아니야. 감정이 안정되어 있으면 갈무리할 수 있지. 하지만 쟤들은 뭐랄까… 심각한 경쟁 상태라고도 볼 수 있잖아? 그러니 더 갈증이나 갈망이 심한 것일 테지.”
파는 그답지 않게 현학적인 혓바닥으로 날 흔들었다.
이게 왜 그럴싸한 설득으로 들리는 거지…?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소설 정사에서 휴고는 셋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여자애들한테 페로몬을 잔뜩 뿌리고 다니는 옴므파탈 바람둥이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정사에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껏 꼬여 온 시나리오에서 저 셋의 성격이 뭔가 단단히 변해 버린 것일 터다.
결국 모든 것은 내 업보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되나 모르겠네. 다들 궁금해하지만, 혹여 뱃가죽에 창날 꽂힐까 봐 묻지 못하는 질문인데.”
“뭔데.”
“러셀. 네 마음은 어떤데?”
“…….”
“이성적으로, 누군가를 선택할 마음은 있어?”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이제는 부정할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외통수란 걸 잘 안다.
그 녀석들은, 나를 분명하게 남자로 보고 있다.
심지어 한 놈은 수컷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 솔직한 마음으로는, 셋 다 여자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마음이 특별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세 동기는 다른 동기 중에서도 애틋하게 느껴지는 건 확실했으니까.
하지만 그게 이성적인 감정이냐 하면, 글쎄.
동료애와 이성 감정 사이에 공간이 있다면 그 한가운데에 거대한 벽이 놓인 것 같은 기분이다.
그들은 살아 숨 쉬고 움직이는 생동감 넘치는 실존 인물이지만, 결국 만들어진 존재라는 이질감 때문일 거다.
애정했던 게임 속 캐릭터가 눈앞에 튀어나왔다고, 곧바로 녀석과 사랑에 빠질 수 없는 것처럼.
왜 웹소설에 빙의한 아카데미 하렘물의 주인공들이 하나같이 고자 소리를 듣는지 여실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물론 나는, 분명하게 고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이질감과 별개로 호르몬의 장난질에 몸의 반응은 과하게 솔직했으니까.
나는 대답 없이 머리를 헤집었다.
뭔가… 이 상황을 이대로 방치했다간 큰일이 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어서.
* * *
불행인지 다행인지, 타그헬 유적지에서의 사건은 분대원들의 뇌리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애초에 남의 치부를 오래도록 놀려 댈 만큼 못돼먹은 녀석들도 아니었거니와, 뒤이어진 훈련들이 생도분대원들의 정신을 쏙 빼놓았기 때문이다.
생도분대원 훈련 3주차.
우여곡절 끝에 타그헬 유적지 훈련을 끝마친 분대원들은 더 북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이 선 곳은 까마득한 높이의 절벽.
가마우지 협곡이라 불리는, 웨더릭무어와 사멸의 땅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이 선을 넘어간 순간부터는 평범한 인간은 발조차 디디지 못하는 죽음의 땅으로 향하게 된다.
끼룩― 끼룩―
협곡의 파수꾼, 가마우지 떼 한 무리가 불청객을 경계하듯 협곡 위쪽을 선회하고 있다.
지구에서는 사다새목 가마우짓과 조류를 뜻하지만, 이곳에서는 그 비슷하게 생긴 마수를 지칭하는 단어다.
그리고 가마우지 협곡이라는 지형의 명칭에 걸맞게, 협곡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포식자였다.
5성급 마수. 파수의 가마우지.
이 세계관에 존재하는 조류 중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데다, 부리는 슈트가 아닌 일반 갑옷을 부술 만큼 단단하고 날카롭다.
저놈들을 활용해 시작될 훈련의 정체를 알고 있는 나로서는 좀처럼 곱게 보이지 않는 마수들이었다.
크라우는 5성급 마수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는 듯 편안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이번 훈련은 두 가지 상황을 대비한 거야. 첫 번째로 공습 훈련. 비공정에서 적진 한가운데로 공습해 마신군의 진형을 박살 내는 건 영웅의 가장 중요한 역할 중 하나지. 너희는 이 절벽을 뛰어내려 안전하게 착지한 다음, 밑에서 대기하는 다이크 선생의 공격을 받아내고 반격까지 하면 돼.”
크라우의 말에 분대원들의 시선이 협곡 아래쪽으로 향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깊이의 절벽이었다.
그랜드 캐니언이나 인더스 협곡은 우스운 수준의 낭떠러지.
영웅쯤 되면 웬만한 높이에선 죽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인간 유전자에는 고소공포증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다.
훈련을 둘째치고 이곳에서 뛰어내리는 것만 해도 몇몇 생도는 오줌을 지려 버릴지도 몰랐다.
“두 번째로 산악 침투 훈련이다. 험지를 돌아 마신군의 뒤를 잡아야 하는 상황을 상정한 훈련이지. 절벽 아래서 대기 중인 다이크 선생과 합을 겨룬 뒤, 다시 이 절벽을 기어 올라오면 돼. 물론, 중간부터 내가 화살을 쏠 거야. 그건 알아서 피해야겠지?”
“이게 어딜 봐서 ‘산’이에요…?”
몸을 한껏 움츠린 채 아래쪽을 힐끔거리던 주디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항변했다.
하지만 크라우는 설명 대신, 더 극악한 대답으로 대신했다.
“당연하지만, 권능, 마법, 정령술, 무기 사용은 금지야. 오로지 슈트기동 하나만으로 완수해야 한다. 만약 몰래 사용하다가 걸리면 너희들 잠들었을 때 이 밑으로 던져 버릴 테니, 명심하도록.”
“…….”
“표정들이 어둡네. 너무 걱정하지는 마. 내 활 솜씨는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니까.”
크라우는 그렇게 덧붙인 뒤 레인가르산 수송 로봇, 키키라트 T4에서 집채만 한 철궁을 꺼내 들었다.
“뭐해? 안 뛰어내리고. 다이크 선생 심심하겠다. 순서대로 할까? 숙달된 조교, 휴고 엘클레어 앞으로.”
휴고는 침을 꼴깍 삼킨 뒤 절벽 위에 섰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 * *
“꺄아아아아악―!”
빠르게 절벽을 타고 오르는 내 등 뒤로 아카샤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목청 한번 크기도 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속도를 높였다.
나보다 먼저 뛰어내렸던 휴고와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암벽등반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욕망의 항아리에서 담가졌던 3주는 확실한 효과가 있었다.
적어도 기존의 2배, 많으면 2.5배 정도의 소울이 추가로 늘어났으니까.
비록 아직도 끈적끈적한 소울이 원래의 것과 잘 섞이지 않고 말썽부리고는 있었지만, 이건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었다.
“러셀, 화살이 와! 조심해!”
“그래. 고맙다.”
나는 나를 향해 쏘아지는 화살을 확인하곤 살짝 도약해 절벽에서 떨어졌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부스터를 켜 대기를 밟고 튕겨 나와 다시 절벽에 달라붙었다.
마치 무협지 속 ‘허공답보’ 기술을 보는 듯한 신기였다.
다른 건 몰라도 허공에서 발을 디딜 수 있는 이 기능은 정말이지 최고였다.
기동성과 변칙성을 상당 부분 끌어올려 주었으니까.
“으아아악!”
그런데 내 밑에서 화살에 맞은 씨씨가 괴성을 지르며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나는 심심한 애도를 표한 뒤 다시 눈을 절벽 위로 향했다.
“왜 이렇게 높냐….”
내려갈 때는 십몇 초지만, 올라갈 때는 근 세 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나마 전투슈트로 절벽에 손자국을 내며 속보로 걷는 속도로 올라가는데도 이 정도였다.
‘차라리 처음부터 뛰어 올라가는 게 빠르려나.’
시도해 보진 않았지만, 후에 이 짓거리가 익숙해진 휴고는 아예 두 발로 절벽을 평지 뛰듯이 뛰어 올라갔다는 서술을 했었다.
아직 슈트기동이 내 손발 움직이는 것만큼은 아니라서 시도하지는 않았으나… 아마도 가능할 것이다.
쐐액―!
다시 한번 살벌한 굵기의 철살(鐵虄)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이번에는 투지를 둘러 왼손으로 튕겨 냈다.
궁술 따윈 익히지 않았다면서, 집중도 실리지 않는 화살에 손이 얼얼하다.
그렇게 첫 번째로 절벽을 올라 크라우의 앞에 섰을 무렵. 크라우는 화톳불을 피워 놓고 그 위에 거대한 새를 꼬챙이에 꽂아 통닭을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돌로 만든 판 위에는 새의 알로 만든 듯한 달걀부침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중이었고.
“……뭐 하시는 거죠?”
먼저 도착해 있던 휴고가 더듬더듬 물었다.
아무리 봐도 저 새는 이 협곡의 지배자인 파수의 가마우지다. 그렇다면 저 알은….
“뭘 하긴. 저녁 준비하잖아.”
“…….”
“이건 간식이고.”
크라우는 달걀부침을 그대로 입 안에 털어놓고는 씩 웃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 미소였다.
“그걸 그렇게 드시면… 마수 놈들이 몰려들 텐데요…?”
“응. 알아. 안 그래도 저기 오잖아.”
크라우가 가리킨 곳에는 수많은 가마우지 떼가 마치 메뚜기 떼의 재앙, 황충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자, 다 쉬었으면 반복 숙달 시작할까? 너무 오래 걸린다고. 다음엔 좀 더 빠르게 올라와 봐.”
그 말을 끝으로, 크라우는 발바닥으로 휴고를 밀어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절벽 아래로 알껍데기를 후드득 털어냈다.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휴고의 모습이 절벽 아래로 사라진다.
새를 잡아서 통구이를 하고 있는 크라우. 새 알.
“러셀 너는 3분 있다 출발해.”
“예…….”
나는 강가의 벌레들처럼 상공을 가득 메운 가마우지를 보며 탄식했다.
뒤셀노크트의 변경 인근에 5성급 마수들이 이 정도로 많이 서식하는데도 방패기사단이 이것들을 토벌하지 않는 이유는 간단했다.
존나게 많기 때문이다.
한 쌍의 가마우지는 일 년에 백여 개의 알을 낳는다. 그리고 천적이 없는 협곡 특성상 95% 이상 성조로 자란다.
애써 토벌해 놈들의 수를 한자리로 줄여 놓아도, 살아남은 놈들은 금세 바퀴벌레처럼 어마어마하게 수를 불려 다시 나타나는 거다.
그리고 놈들은 복수심과 협동심이 어마어마하다.
누군가 제 둥지를 건드려 알을 훔쳐 달아난다면, 종족 전체가 달려들어 복수를 할 만큼.
그러니 더위를 싫어해 웬만해선 협곡 밖을 벗어나지 않는 까다로운 마수 떼를 굳이 건드리지 않는 거였다.
“잘못하면 새 밥이 되겠네요….”
“하하. 농담도 지나치네. 5분 지났다. 출발.”
곧장 크라우의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나는 허리를 밀어내는 묵직한 무게감, 그리고 간질거리는 부유감을 느끼며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