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16)
22. 유령 해협
“농담이지?”
장난치지 말라는 듯, 슬그머니 물은 레오의 질문에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확실해진 사실을 머릿속으로 정리할 뿐이다.
첫째. 이 흡사가 사멸의 땅이 생겨난 원인이다.
둘째.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사멸의 땅은 점점 커진다.
셋째. 그렇다면 사브와라와 이제라 사이에 자리한 흡사도 방치한다면 사멸의 땅을 발생시킬 것이다.
결론. 사후 발생할 사브와라의 사멸의 땅 생성 저지를 위해, [개발자 노트]가 사전에 경험할 수 있는 무대를 준비했다는 추측은 합리적이다.
‘만약 사브와라와 이제라 사이에 사멸의 땅이 생겨나면….’
리타니아 대륙 한가운데에는 출입 불가 마신군의 영역, 영웅의 무덤이 거대한 땅을 차지하고 있다.
그곳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이제라 성왕국, 북쪽에는 타라노르 왕국, 서쪽에는 웨더릭무어. 그리고 남쪽에 사브와라가 빙 둘리어 있는 형태.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소설 정사에서 왕국 타라노르는 국가가 통째로 마신군에 넘어갈 예정이다.
그런 와중에 사브와라 한복판에마저 사멸의 땅이 발생한다면….
‘대륙은 동서로 갈려 고립된다.’
바닷길과 하늘길 외에 모든 육로가 차단되고, 여신군은 지역별로 고립되어 각개전투를 벌이게 되며, 사브와라의 마비로 물류 대란이 일어날 거다.
처참하게 패배했던 정사 속 전쟁보다도 더 힘겨운 전투가 치러지리라. 쉽사리 예상할 수 있었다.
‘어차피 한 번은 부딪혀야 할 상황이라면 차라리 지금이 안전해.’
단신의 무력으로는 경쟁자를 찾을 수 없는 ‘인류 최강의 기사’ 크라우가 일행으로 있는 지금.
변수에 정면으로 맞닥뜨리기에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다.
나는 확신을 더하며 생각을 갈무리했다.
크라우를 설득해서 반드시 흡사 안으로 진입한다.
“일단 우리끼리 들어가는 건 너무 위험할 테니, 여기에 자리를 잡고 주변을 수색해 보자.”
혹시라도 내가 찾는 고대도시의 흔적이 다른 위치로 변경되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둔다.
최초의 목적은 아티팩트의 확보였으니까.
나는 지도 시스템에 현재 위치를 체크한 뒤 반시계 방향, 나선 모양으로 주변 수색을 시작했다.
* * *
흡사 인근에 야영 깃발을 꽂은 뒤, 20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주변에 머무는 마신군들 무리 넷을 격퇴하고 꽤 넓은 범위까지 수색을 진행했지만, 내가 설정해 두었던 고대도시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나는 턱 아래 음식물 흡입구에 빨대를 꽂은 뒤 액체형 전투식량을 쭉 들이켰다.
찐득거리는 젤리 형태의 음식물이 그대로 입안으로 넘어와 식도로 흘러내린다.
“더럽게 맛없네.”
대체 왜 전투식량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하나같이 맛없어지는지 모를 일이다.
응고형 전투식량은 바퀴벌레 양갱 같고, 액체형 전투식량은 돼지죽 같다.
이러니 군인들의 사기가 떨어져 전쟁에서 못 이기는 거 아니냐고….
우리는 최초의 포인트였던 흡사 인근으로 되돌아왔다.
나는 고대도시가 이 안에 들어가 있으리라 확신했다.
주변 수색 때 발견한 회백색 석조 때문이다.
마치 이정표를 자처하듯, 흡사의 북쪽에는 도시 타그헬을 상징하는 문양이 박힌 석조가 반쯤 눈 속에 묻혀 있었다.
흡사가 도시를 통째로 집어삼킨 것이다.
“이건 타그헬의 문양이에요. 이게 왜 여기에…?”
마도사 도미니엘은 석조를 보자마자 그 정체를 알아보았다.
“맞아. 이 밑에 고대도시 타그헬이 삼켜져 있다는 게 내 결론이야.”
“하지만 타그헬의 위치는 유적지에 있었던 게 아니었나요?”
“타그헬은 과거 이제라나 타라노르만큼 번성했던 도시야. 북부 지역 전체가 그 도시였을 거고 실제로 수도가 위치했던 곳은 여기지. 유적지가 발견된 곳은 타그헬의 성전이고.”
“……전혀 몰랐어요.”
“고고학자들도 밝혀내지 못한 사실이니까.”
“그런데 러셀 님은 그걸 어떻게?”
“사실 나는 용족의 후손이거든. 수천 년 전부터 살아온.”
“저, 정말요?”
“당연히 농담이지.”
“…….”
곧장 당황해 울상짓는 도미니엘의 반응에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사과했다.
“거,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통에 농담 한번 못 하겠네.”
“죄송해요. 이런 성격이라….”
나는 사과하는 도미니엘에게 도리어 미안해져 그녀를 달래느라 애를 써야 했다.
역시 나는 이런 타입엔 약하단 말이야….
우리는 적당히 단단한 지면을 찾아 간이 천막을 치고 군장을 풀었다.
“일단 오늘은 늦었으니까 한숨 자고 내일 오전에 바로 보고하자.”
굳이 곧바로 보고하지 않은 건, 다른 조들에 수색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크라우에게 보고한다면 아마 모든 조가 소집될 테니, 그 전에 최대한 넓은 범위를 수색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수색을 끝내긴 했지만, 조원들이 곧장 잠들지는 않았다.
“이렇게 환한 데 자러 들어가려니까 좀 이상하네.”
레오가 하하 웃으며 얘기나 좀 하자고 자리를 폈다.
현재 시각 오후 9시.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었기도 하고, 그의 말대로 사위는 전등을 켜 놓은 것처럼 환했다.
“백야 현상이겠지.”
“백야?”
“극지방에서 해가 지지 않아 밝은 밤을 뜻하는 거야.”
내 설명에 레오가 오호, 하고 감탄했다.
“가만 보면 너는 보기보다 되게 똑똑한 것 같다?”
“보기보다라니. 해보자는 거냐.”
“크흐. 아무리 봐도 너는 머리보다는 몸 쓰는 파잖아?”
“그렇기는 하지.”
틀린 말은 아니다.
단연코 나는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게임 머리는 좀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관학교에서 수학이나 과학 따위를 시험했다면 뒤에서 놀지 않았을까 싶다.
“그, 도미니엘?”
“네?”
내가 자료집에서 먹을 수 있는 북부 마수를 검색하는 사이, 레오가 도미니엘을 불렀다.
“네 얘기 좀 들려줘. 여기 씨씨랑 아카샤랑은 이야기를 좀 해 봤고, 러셀이야 워낙 소문 자자해서 대충은 아는데. 네 이야기는 하나도 모르네.”
“제 이야기요?”
“그래. 이왕 한 조가 된 것도 인연인데. 잠도 안 오고. 뭐 재밌는 얘기 없어?”
“재밌는 얘기… 없는데요….”
도미니엘이 난처한 듯 말꼬리를 흐렸다.
하지만 도와줄 이는 없다.
씨씨는 수북한 체모를 빗어 내리느라 바빴고, 아카샤는 궁금하다는 듯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으니까.
“저는 그냥… 도미니엘 닉시드. 닉시드 가문의 정식 후계자입니다.”
“그 닉시드 가문이라는 게 정확히 뭔데?”
“닉시드는 대대로 정령왕을 모시는 가문이에요. 그리고 정령왕의 자리가 부재하게 되면, 정식 후계자가 정령왕의 이름을 이어받게 되죠.”
그렇게 설정했던 기억이 난다.
원작의 설정을 살짝 비틀어 완성했던 내 세계관.
“우와… 잠깐만. 엄청난 거물이었네?”
“아니요!”
레오의 호들갑에 곧바로 도미니엘이 소리쳤다. 탐사 내내 들었던 것 중 가장 큰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그냥… 그렇게 띄워 주시면 부족한 실력 탓에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부족하다뇨. 그렇지 않아요. 제가 볼 때 도미니엘님의 능력은 엄청난걸요…?”
도미니엘을 격려하는 아카샤의 말에 내가 곧장 끼어들어 동조했다.
“맞아. 부족한 건 우리 반쪽짜리 정령사지.”
“진짜 뒤질래?”
“갑자기 반말을…?”
“요?”
나는 아카샤가 휘두르는 냥냥펀치를 샥샥 피해 준 뒤, 낄낄 웃었다.
역시 얘가 놀리는 맛은 최고란 말이지.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분위기만 망친 것 같네요.”
“아니야. 개인사가 다 그렇지, 뭐. 일가족 몰살당한 내 이야기보단 덜 무겁고 좋네.”
“…….”
“농담. 농담.”
“진짜 그러지 마세요….”
“알겠다니까.”
내가 손사래를 쳤다. 그러자 침묵 사이로 레오가 다시 끼어들어 질문을 이어 갔다.
“근데 너는 왜 자꾸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하는 건데? 지금 정도 성취면 제법 잘하고 있는 것 아닌가?”
나는 호기심 어린 얼굴로 레오를 바라봤다.
이 녀석, 왜 이렇게 도미니엘에게 관심이 많은 거지.
혹시…?
“저는… 정말 어마어마하게 노력했습니다. 후계자이면서도 닉시드의 힘을 펼칠 수 없었거든요. 가호를 받은 다른 가문들의 자제인 제라토 님이 더 어울린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로요. 천신만고 끝에 힘을 다룰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너무 미천합니다.”
“흐음.”
“…하지만 전 포기하지 않고 꼭 후계자의 이름에 걸맞은 빙결술사가 될 것입니다. 닉시드 가문에 영광과 승리를 바치기 위해서요.”
평소와 달리 말끝을 흐리지도 않고 또박또박 선언하듯 내뱉은 말에는 결연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풀어 보려 노력했던 분위기는 더 무거워졌지만,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다짐에 화답하듯 확신을 더해 주었다.
“그렇게 될 거야.”
* * *
생도분대 사멸의 땅 진입 사흘 차.
크라우와 다이크는 러셀의 조에서 날아온 통신에 당황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봤다.
“그러니까… 이상 징후를 발견했고, 그 안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 네. 말씀드린 대로요.
“사멸의 땅이 넓어지고 있는 원인을 파악했고, 그게 사브와라에도 발생한 현상이다… 그래서 이참에 이곳을 조사해 봐야 한다? 허 참.”
크라우는 가벼이 넘길 수 없는 보고에 지끈거리는 이마를 붙잡았다.
안 그래도 이상 현상에 위화감을 느껴 주변을 조사하고 다니던 참이었다.
생도분대원들에게 사멸의 땅 조사를 맡기긴 했지만, 까다로운 마신군과의 전투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함이지 뭔가 특별한 활약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러잖아도 미마를 조장으로 하는 4조는 벌써 목적과 방향을 잃고 헤매다 풍비박산 나서 되돌아오지 않았는가.
하지만 러셀 애시그린의 보고를 애송이의 치기로 치부하기에는 꺼림칙한 구석이 있다.
바로 그가 여왕 디에네와 나눴던 대화의 기억.
“휴고는 성약의 계시로 미래의 예지를 받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네. 들었습니다.”
“사실 이건 이 자리에서 처음 고백하는 건데, 저도 비슷한 재주가 있거든요.”
그리고 소년병이 걸어온 행적들.
그 길을 미루어 볼 때, 러셀이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하고 주장하는 것은 단순한 추측이나 억측이 아닐 거다.
“일단 너희 조는 다 거기서 대기해. 내가 가 볼 테니까.”
– 예썰.
그렇게 도착한 흡사 인근.
크라우는 신경을 계속해서 건드렸던 위화감의 정체가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수십 년 동안 전장을 구르면서도 생존하게 해 준 예리한 직감이다.
이 안에 분명 무엇인가 있다.
“지크프리드. 너도 느껴져?”
– 그래. 바다 냄새가 난다.
“바다 냄새?”
– 특유의 짠 내가 풍기는군.
신수 지크프리드가 푸르르, 투레질하며 모래에 대고 킁킁거렸다.
“이게 사브와라에도 있단 말이지… 사멸의 땅이 생긴 원인인 것 같다라… 사실이라면 대륙과 학자들이 전부 발칵 뒤집힐 대사건이네.”
“혹시 세계의 파편이라고 아세요?”
쭈그려 앉아 모래를 툭툭 건드려 보던 크라우에게 러셀이 다가와 물었다.
“세계의 파편? 처음 들어 보는데.”
“아… 그래요?”
“그것도 네가 본다는 미래와 관련된 건가?”
“비슷해요.”
“너는 늘 의뭉스럽게 대답하는 편이지. 사실 비밀이 많은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
러셀은 대답 대신 먼 산을 보며 시선을 피했다.
소년의 특징이다.
곤란한 질문에는 대답 대신 말을 돌리거나, 시선을 피하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건 조사해 볼 가치가 있겠어.”
“그렇죠?”
“내가 들어가 보지.”
“혼자서요?”
크라우는 대답 대신 지크프리드에게 시선을 보냈다.
곧바로 지크프리드가 아머드폼으로 변신해 위용을 드러냈다.
연푸른 콕핏이 열리고 크라우가 그 위로 폴짝 뛰어오른다.
“다이크 선생. 분대원들 전원 소집해서 여기에 대기해. 일단 내가 들어가서 확인해 볼 테니까.”
“예. 하나 괜찮으시겠습니까.”
“여차하면 출력 높여서 튀어 오르면 돼. 걱정하지 마.”
쿵쿵. 육중한 거체가 개미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신수병기의 모습은 얼음 모래 속으로 쏙 사라져 버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