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23)
23. 흰 꽃의 맹세
스승들이 떠난 뒤. 남겨진 우리에게
는 두 가지 숙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분대 개편이고, 두 번째는 사관학교 복귀다.
사실 첫 번째 숙제는 일단 두 번째 숙제를 해결한 뒤 천천히 생각해 보아도 되는 문제지만… 나는 여기서 강력하게 주장했다.
“지금 정하고, 흩어져서 복귀하자.”
“하지만, 러셀. 성급하게 할 필요가 있을까? 유령 해협 한복판이야. 복귀하는 데도 제법 많은 위험과 맞닥뜨릴지도 모르고.”
휴고의 말은 일단 내가 생도분대원들을 이끌어 사관학교에 복귀한 뒤, 천천히 의견을 규합해 분대를 나누자는 거였다.
그것도 일리 있는 주장이다.
일단 한번 분대를 설정하면, 그 이후부터는 쉽사리 변경하기 어렵다.
한두 명이 아니라 열 명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한다.
분대원들의 성향, 재량, 권능 등등 모든 것을 파악하고 수없이 호흡을 맞춰야만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는 완벽한 팀이 완성되는 것이다.
“아니.”
하지만 나는 단호히 일축했다.
“여기서 정하고, 따로 움직인다.”
그 원론적인 이유는 휴고에게 있었다.
미궁 타그헬에서의 전투로 깨달았다.
주인공에게는 주인공의 역할이 있다.
설령 창조주에 빙의 버프를 둘둘 두른 빙의자라고 해도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의 영역을 상당 부분 내가 갉아먹었다.
그 결과로, 녀석은 지나치게 내게 의존적이다.
실력은 원작보다 더 성장했고 인성과 인망은 더욱 두터워졌지만, 스스로 판단해 위기를 극복해 낸 경험이 없다.
단 한 번도 홀로 결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상황에 내몰린 적이 없는 거다.
그가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아도 나라는 책사가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이번 복귀 행렬은 어쩌면 휴고에게 리더십과 책임감, 그리고 위기를 스스로 극복해내는 좋은 경험치가 되어 줄 것이었다.
“…….”
그런 내 판단을 아는지 모르는지 휴고는 고민에 빠진 얼굴을 지어 보였다.
“좋아.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런 이유가 있겠지.”
여차하면 속내를 설명해 줄 생각이었으나, 휴고는 더 캐묻지 않고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굳건한 신뢰는 묘한 만족감을 준다.
나는 뭔가 간질거리는 기분을 애써 내리누르며 마주 웃어 주었다.
“분대 편성 시작하자.”
앞으로의 운명을 결정 지을 아주 중요한 순간, 편 가르기가 시작되었다.
* * *
처음 분대 편성을 시작할 때만 해도, 녀석과 이렇게 의견이 부딪힐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러셀, 그건 좀 아니지.”
“조금 전까지 날 믿겠다고 하던 놈 어디 갔냐…?”
“물론 널 믿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해.”
편 가르기는 누군가에겐 희열을, 누군가에겐 분노와 실망을 일으키는 지고한 전통 놀이다.
모름지기 초등학생 때부터 대댄찌와 앉았다 일어나기로 편을 뽑는 게 아니라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가위바위보로 한 명씩 팀원을 뽑는 것.
하지만 명색이 여왕 직속 부대의 인원을 편성하는데, 그런 사사로운 방법을 쓸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우리는 ‘대화’와 ‘합의’라는 원만하고도 민주적인 절차를 밟으려고 노력했었다.
“일단 기존에 호흡을 많이 맞췄던 애들은 붙여 놓는 게 좋겠지? 너랑 로벨리아, 파랑 주디. 넷은 한 분대로 가야 한다고 봐.”
“동의해. 그럼 미마랑 리지는 1분대로 가야겠네. 셋이서 호흡 많이 맞췄으니까.”
“그러지 뭐. 아, 주디가 그쪽으로 가면 내가 아이아나 데려간다.”
나는 곧바로 주디 다음으로 유능한 정령사를 데려왔다.
엘슨은 정령사라기보단 힐 가능한 탱커에 가깝고, 아카샤는…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다.
등 뒤에서 논의를 구경하던 아카샤가 입술을 삐쭉거리며 구시렁거렸지만, 깨끗하게 무시했다.
눈치 빠른 휴고가 푸흐흐 웃으며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정령사부터 결정하자. 엘슨, 아카샤 중에 원하는 사람은?”
“엘슨.”
“진짜로?”
“그럼 진짜지.”
“아카샤가 서운해하잖아. 우리가 엘슨을 선택할게.”
“그럴 거면 왜 물어봤냐. 망할 성약 놈아.”
내 구박에도 휴고는 악의 없이 웃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솔직히 보조 디퍼브 힐러보다는 탱커형 힐러가 더 쓸만해서 뽑은 건데.
“러셀이 전위 한 명을 골라. 나도 후위 한 명을 고를게.”
“그럼 에뜨랑제 선배.”
“좋아. 나는 루트비히를 선택할게.”
루트비히라. 좋은 선택이다.
로벨리아는 화력 좋은 마도사이긴 하지만, 다양한 전술에 활용하기엔 사용 가능한 마법이 너무 제한적이니까.
후에 계승자로서 신수 병기를 운용할 수도 있는 루트비히는 꼭 가져가야 할 선택지였을 거다.
나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휴고가 씩 웃으며 재편을 계속했다.
“남은 건 기사 셋에 사수 둘, 마도사 셋이네. 일단 사수부터 나눌까?”
“난 레오.”
“잠깐, 레오는 우리가 데려가고 싶은데.”
“먼저 말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
“러셀, 그건 좀 아니지.”
“조금 전까지 날 믿겠다고 하던 놈 어디 갔냐…?”
“물론 널 믿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해.”
“너 지금 우리의 설사링 선배를 무시하는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선배를 그렇게 부르면 어떻게 해….”
나와 휴고의 논쟁에 다즐링의 얼굴이 시시각각 썩어들어 갔다.
사실 다른 분대원들은 어느 정도 포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생도분대 전체를 통틀어 유일하게 ‘기갑 도공술’이 가능한 전투 대장장이는 레오뿐이다.
단순히 사수 한 명을 데려가는 문제가 아니라는 뜻.
크라우의 특훈을 지나면서 전투 대장장이의 중요성을 톡톡히 깨달은 이상, 둘 중 누구도 포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젠장… 대장장이 수업을 안 들은 걸 후회하게 될 줄은….”
다즐링의 불평에도 우리는 논쟁을 멈추지 않았다.
“레오 나 주면 나머지는 네가 다 선택하게 해 줄게.”
“동기를 무슨 물건 얘기하듯이 하면 어떡해, 러셀. 그건 잘못된 행동이야.”
“이 예의 바른 고집불통이….”
결국 우리는 당사자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했다.
“이 몸을 그렇게 간절히 원해 주니 기분 좋긴 한데. 그냥 둘이 가위바위보를 하든가. 대충 빨리 정하면 안 되냐? 딱히 어디든 상관없는데.”
“레오야, 나한테 [해머링], [중급 기갑 도공술], [최상급 냉병기 도공술] 권능 있다.”
“뭐?”
“내 소중한 삼촌이 남기고 간 유품이지. 이쪽으로 오면 너 줌.”
“진작 말하지 그랬어. 난 1분대로 갈래.”
“……비겁해.”
난 정정당당한 뇌물 수수로 유일의 전투 대장장이 영입에 성공했다.
내가 조원들을 향해 뒤돌아서서 주먹을 쥐어 보이자, 녀석들이 마지못해 호응한다.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는 우매한 녀석들이다….
나는 약속대로 남은 인원들의 선택권을 휴고에게 맡겼다.
결과적으로 데나스, 이스칸다, 엘에이는 휴고의 분대로 빌레나, 씨씨, 도미니엘은 내 분대로 편성됐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너무 밸런스가 무너지진 않았는지, 전력에 공백이나 구멍은 없는지 꼼꼼하게 체크했다.
그 와중에 다시 레오를 두고 한바탕 설전이 벌어지긴 했지만, 나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다.
그렇게 재편이 최종 확정되고, 우리는 복귀 경로를 두 개로 나눈 뒤 마침내 출발선 앞에 섰다.
“조심히 복귀해. 그림로어에서 만나자.”
“그래.”
가벼운 인사와 함께 분대는 흩어졌다.
크라우를 따라온 지 3개월 하고도 보름이 지난 초여름날이었다.
* * *
이제라.
티렐 왕성.
성검기사단 숙직실.
성검기사단 부단장 이세리아는 식은땀에 흠뻑 젖은 채로 깨어났다.
간밤에 견디기 어려운 악몽을 꾼 탓이었다.
‘또 이 꿈을….’
20년 전 그날 이후부터 지금까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 그녀를 괴롭히는 지난한 악몽이다.
이세리아는 침구를 가지런히 정돈하고 몸을 씻은 뒤 마리를 앞머리를 땋고 빗어 내렸다.
뾰족한 귀 끝부분까지 뽀득뽀득하게 닦은 뒤 던 블라이아 엘프의 상징인 흰 꽃핀을 머리에 꽂으니 간밤의 악몽이 깨끗하게 지워지고 평소의 그녀로 되돌아온 듯했다.
이세리아는 뺨을 두어 번 두들겨 정신을 맑게 했다.
‘지나간 일일 뿐이야.’
20년 전에 악몽 같은 나날을 겪은 게 비단 자신뿐이던가.
아직도 떠오르는 그 잔상은 그저 망령일 뿐이다. 휘말려서는 안 될.
커튼을 열자 초여름의 쨍한 햇살이 내리쬔다.
눈앞에는 성검기사단의 기사단 연무장이 보이고 훈련이 한창인 몇몇 후배 기사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간 전장을 누비고 치열한 전투를 치러 왔음에도, 안전한 왕궁에 복귀해서도 스스로를 담금질하길 멈추지 않는 이들이다.
고결하고, 충성스러운 이들.
지이잉―!
“으읏….”
이세리아는 불현듯 치미는 이명과 두통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들.
“나는 꽃과 풀이 우거진 이 숲이 정말 좋아.”
나는 그 말에 뭐라고 답했었던가.
아마도, 꽃과 풀이 진 겨울은 싫어하냐고 물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 좋아해.”
“지금은 황폐해도 다시 꽃이 필 것을 아니까.”
“언젠가 다시 꽃이 피리라는 생명의 진리를 믿으니까.”
또다시 기억과 함께 두통이 찾아온다.
두 번째 기억은 그녀에게는 잊을 수 없는 치욕, 그리고 상처로 남은 말이었다.
– 이세리아.
– 너에게는 내 주인이 될 자격이 없다.
그것은… 계승자‘였’던 그녀가 신수에게서 버림받은 그 기억이다.
* * *
여왕의 알현실에서는 국무회의가 한창이었다.
대대적인 침공 이후, 몇몇 유능한 지휘관을 중심으로 여신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결론적으로 마신군이 고급 전력인 라비, 세크레트를 포함해 다수의 군단장급, 토벌급 전력을 무리하게 소모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 결과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대다수 전선이 힘을 받아 영역을 수복했고 기울어졌던 무게추가 원점을 되찾았다는 긍정적인 전보가 여럿 날아들 무렵.
여왕의 알현실에 원로원의 중역들이 모이게 된 것은 어떠한 소식 때문이다.
“카텐카 경. 보고를 시작하세요.”
“예, 폐하.”
소식은 이단심문관들의 수장 카텐카로부터 시작되었다.
요람의 침공 때 포획한 이교도들을 붙잡고 심문하며 타고타고 흘러간 결과, 그들의 근거지라 볼 수 있는 소굴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된 것은.
“그치들이 사도 카일론, 테네브리아에 이어… 니르갈마저 소환에 성공한 듯합니다.”
아아.
여기저기서 탄식과 침음이 뒤섞여 나왔다. 그리고 그중 가장 안색이 새하얗게 변한 것은 이세리아였다.
타대륙에서 주로 활동하는 사도들을 제외한, 사도 셋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그렇다는 건… 마신의 재림이 머지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놈들은 파괴와 혼돈을 위해 마신을 숭배하는 자들. 세 사도가 모두 소환되었으니 마신을 부활시키기 위해, 이제부터라도 각지의 성소들을 노릴 공산이 큽니다.”
“예상되는 경로는요?”
모두가 혼돈에 빠져 있는 가운데, 디에네만이 평정심을 유지하고 카텐카에게 되물었다.
“사도 니르갈은 던 블라이아의 세계수를 노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놈은 예전부터….”
카텐카는 힐끔, 이세리아의 눈치를 본 뒤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엘프들을 사냥하는 데 미쳐 있었으니까요.”
“합리적인 판단이에요.”
“현재 신수병기가 보관된 성소는 티렐 왕성, 레인가르 현자의 탑, 사브와라 상인연합 본부, 던 블라이아 세계수 그리고 뒤셀노크트 만월의 묘지입니다. 그곳 중 방비가 약해진 곳이 있다면 다시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차분히 카텐카의 보고를 들은 디에네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크로제 경.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미안해요. 바로 돌아가셔서 영웅들을 뒤셀노크트 인근으로 배치해서 경계를 강화해 주세요.”
“명 받들겠습니다.”
“레인가르는 현재 새로운 계승자께서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쪽은 믿고 맡겨도 될 것 같네요. 사브와라 본부는… 크라우 경께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왕성이야 최고의 전력이 모인 곳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곳은 하나.
“이세리아 경.”
“예. 폐하.”
“던 블라이아로 가 주셔야겠어요.”
“…….”
“그림로어 사관학교에 제 직속 부대인 생도분대가 있습니다. 그들과 왕궁 호위병 5백을 차출해 드릴게요. 그들을 데리고 사도 니르갈을 격퇴해 주시길 요청합니다.”
“알…겠습니다.”
이세리아는 여전히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가까스로 대답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