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27)
23. 흰 꽃의 맹세
“그만 좀 해. 둘 다.”
무리 중에서 유일한 무뢰배 취급당하는 일은 익숙했다.
컨셉이라고 하긴 그렇지만… 애드립을 치고, 되지도 않는 개그를 날리고, 괜히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사뭇 불편해하는 건 별수 없는 직업병이었으니까.
하지만 매 맞는 게 익숙해진다 한들 아픈 건 매한가지. 이 서늘한 시선은 조금 마음 아프다….
그나마 함께 무뢰배 취급을 당해 줄 이가 있다는 건 참 기쁜 일이었다.
나와 레오의 이야기다.
녀석과 나는 실컷 주디를 놀리다가 녀석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질 때가 되어서야 각종 비난의 눈길에 못 이겨 멈추었다.
파 녀석은 평소엔 서글서글하니 마냥 사람 좋아 보이는데, 한번 핀트가 나가 웃으면서 정색하는 표정을 지을 때면 뭔가 오금이 저린단 말이지….
원래 친구 여친은 건드리지 말자는 주의였는데, 레오 녀석의 간악한 심계에 넘어가 버렸다.
아무튼 우리는 ‘다시는 주디를 이모라 놀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맹세했고 회의는 재개됐다.
“주디, 괜찮아?”
“응응. 미안. 괜히 신경 쓰이게 했네. 별일도 아니고 늘 하던 장난인데.”
나는 눈물을 훔치는 듯 고개를 푹 수그린 주디의 눈치를 보다, 녀석의 입고리가 보일 듯 말 듯 씰룩거리고 있는 걸 확인했다.
“…….”
설계했네.
저 요망한 엘프가….
과연 주인공의 최측근이라 할 만한 적응력이었다.
녀석은 성장하다 못해 정치질로 날 담가 버리는 능력까지 갖추게 됐다…!
위아래로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내린 주디는 애써 밝은 척하는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 준 뒤, 본론을 꺼냈다.
“사실 우리가 알아 두어야 할 게 있어.”
“……?”
주디의 말에 분대원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이번 전투의 지휘관이 될 이세리아 경에 관한 이야기야.”
성검기사단 부단장 이세리아.
주디와 같은, 던 블라이아 출신의 엘프였다.
“말하기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긴 한데… 공공연히 알려진 비밀이니까… 그래도 내가 얘기했다고 하면 안 돼.”
주디의 설명은 20년 전, 던 블라이아에서 펼쳐진 사도 니르갈과의 전쟁 때로 돌아갔다.
20년 전, 이제라의 우방이었던 던 블라이아의 엘프 도시에 사도 니르갈과 그의 군대가 나타났다.
번성했었던 수많은 부족이 몰살당하고, 엘프 정규군은 패퇴를 반복했으며, 오랫동안 세계수를 지켜 온 장로들도 대부분 전장에서 사망했다.
던 블라이아는 이제라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기각당했다. 여력이 없다는 이유였다.
빠르게 무너진 엘프 도시는 그 힘을 잃었고,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도 단둘만이 남은 채였다.
갓 계승자가 된 이세리아와, 마지막 남은 던 블라이아의 장로 사르미아.
소꿉친구였던 두 사람은 치열하게 니르갈군과 싸웠고 최후까지 최종 방어선을 지켜냈다.
그러나 엘프들의 영혼을 포식해 마기와 몸집을 어마어마하게 키운 니르갈과의 첫 번째 격돌 이후, 이세리아의 전의가 꺾이고 만다.
이세리아는 던 블라이아와 세계수를 포기하고 남은 생존자들을 모아 이제라에 합류하기로 주장하지만, 사르미아는 끝까지 이 땅을 수호하기로 결정.
엘프들은 두 집단으로 분열하고 만다.
결국 이세리아는 저를 따르는 엘프들만을 챙겨 이제라로 투신하고… 남은 엘프들은 99%에 달하는 막대한 희생을 내고서야 간신히 니르갈을 역소환하는 데 성공한다.
“그럼 너는.”
“…맞아. 나는 그때 이세리아 경을 따라 이제라로 도피했어.”
고향과 일족을 버린 배신자들.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칭했다.
아무도 그들을 치죄하지 않음에도.
그저 스스로 일족을 저버린 죄책감과 죄의식 속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날 이후… 신수 제온은 이세리아 경의 곁을 떠났어. 아무리 찾아 헤매고 불러도 한 번도 응답하지 않았다고 해.”
“일족을 저버렸단 이유로? 잘 이해되지 않는데. 난 이세리아 경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주디의 설명에 파가 말을 보탰다.
“그분의 선택이 살린 엘프들 때문에 던 블라이아가 지금도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던 걸 텐데. 오히려 사르미아 장로가 이세리아 경의 선택에 힘을 실어 줬다면, 피해는 더 적었겠지.”
“그것까진 모르겠어….”
사실 파의 항변은 이세리아보다는 주디의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한 옹호였을 거다.
녀석이 오랫동안 마음의 짐으로 얹고 있는 기억임을 누구보다 잘 알 테니까.
그 생각을 방증하듯, 파는 미세하게 떨리는 주디의 손을 잡아 주었다.
주디의 떨림이 조금씩 잦아들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설명을 이었다.
“그분은 20년 전 일족의 비극이 성약의 계승자가 깨어나지 않은 탓에 일어났다고 생각하셔.”
“뭐, 틀린 말도 아니지.”
성약이란, 여신의 약속이다.
내 분신을 통해 너희를 굽어살피겠다.
너희를 반드시 지켜 주겠노라 선언한 약속.
그래서 20년 전 여신군은 성약이 깨어날 거라는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수많은 목숨을 내던졌다.
던 블라이아 엘프들도 그중 하나였고.
비겁한 남 탓이면서, 동시에 정당한 원망이다.
“그래서 휴고에게 좀 차갑게 굴지도 몰라. 어쩌면 너희에게도. 본인이 잃어버린 계승자라는 위치에 대한 자격지심도 갖고 계실지 모르거든. 설령 그래서 조금 쌀쌀맞게 대하시더라도… 그래도 그분을 너무 미워하지는 않았으면 해. 선하고, 여리고, 안타까우신 분이야. 그 이야기가 하고 싶었어.”
주디의 걱정은 기우에 가까웠다.
애초에 이 착해 빠진 주인공과 주연 놈들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차갑게 대한들 그걸 원망할 성정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곳은 상명하복이 기본인 군대.
그저 이세리아가 명령하면, 따를 뿐이다.
물론 제 일족의 어른을 위하는 마음만은 진심인 걸 알기에, 나는 그저 말없이 그녀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 *
5막 준비는 해 질 녘까지 이어졌다.
던 블라이아의 지도를 파악하고 니르갈군의 규모와 주 적들의 데이터를 점검했다.
동시에 나는 던 블라이아에 가서 얻어야 할 전리품의 정보까지 허심탄회하게 동료들에게 전달해 주었다.
‘엘브리스의 보검.’ 그리고 ‘아마릴리스의 로드’와 ‘별의 노래’.
모두 이번 에피소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최종 스펙을 위한 아티팩트들이다.
내가 생각하는 공략 멤버 중 활을 쓰는 사수는 없어서 ‘암브로테’까지는 획득하지 않아도 좋지만, 이왕이면 다즐링 선배를 위해서라도 그것까지 구할 생각이었다.
등 뒤로 넘어가는 햇빛을 받으며 나는 오래간만에 농장으로 향했다.
잠깐 시간 내 달라는 코리의 요청 때문이었다.
“러셀, 왔어?”
코리는 일찍이 도착해 농장을 돌보는 중이었다.
“뭘 그렇게까지 신경 써? 이제 할 일도 거의 다 했고 외부 시선 신경 쓸 필요도 없는데 그냥 놔두지.”
지하의 머라고라들은 틈틈이 재배를 이어 가는 중이었고, 마당의 스티그마도 이번에 공수한 하늘석으로 충분한 비료를 확보했다.
하지만 채소라든가, 과일 같은 것들은 사실 이제는 딱히 필요가 없다.
굳이 바쁜 와중에도 고생해 가며 농장을 유지하는 코리가 잘 이해 되지 않았다.
“그게 말이지. 나, 여기 동아리 활동이 생각보다 즐거웠거든.”
“농사꾼이 체질이네.”
“푸흡. 그런가? 그래서 말인데.”
“응. 말해.”
“동아리 후배들을 뽑는 게 어때?”
“……이 상황에?”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다.
실전훈련을 제외한 모든 커리큘럼이 날아간 지금, 동아리 활동 같은 건 누구도 신경 쓰고 있지 않다.
물론 몇몇 유서 깊은 동아리들은 이 와중에도 후배들을 포섭해 동아리의 명맥이 끊기지 않게 하려고 애쓰곤 있다지만, 적어도 우린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목적을 다한 뒤 폐쇄하면 그만이다.
“영약은 몰라도 스티그마 포션은 계속 생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그거 저번에 협의 봤잖아. 레시피 유출해도 되니까 아피흐 상단에서 독점 생산하라니까?”
지금 대륙은 전쟁 중이다.
그리고 전쟁 중엔 회복 물약만큼 수요가 높은 물자가 없다.
당장 시중에는 회복 포션의 씨가 말랐다.
우리가 생산한 것도 어디 납품할 여력도 없이 제작하는 족족 우리가 사용하는 중이고.
그래서 통 크게 결정을 내린 거다.
레피시 공유를 허락할 테니, 너희 상단에서 대량 생산해서 공급하고 돈 긁어모으라고.
마치 팬데믹에 인류를 위해 아량을 베푸는 거대 제약회사의 마음으로 허락한 것이었다.
“아피흐 상단 말고.”
“……?”
“‘내’가 생산하려고.”
그러니까 코리의 말은, 이 노다지인 아이템을 소속 상단과 나눠 먹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돈 버는 것도 좋지만 감당되겠냐. 내가 제시한 생산 목표량 기억하잖아?”
“맞출게.”
“이 농장에서?”
“응. 그래서 후배들을 좀 뽑아도 될까?”
“너 혹시…….”
나는 불현듯 치미는 의구심에 코리의 맑은 눈빛을 직시했다.
녀석은 언뜻 순해 보이지만, 속에는 음험한 구렁이가 똬리를 틀고 있는 놈이다.
여기서 내게 허락을 구한다는 건, 오케이를 하는 즉시 상황을 실현할 준비가 모두 끝마쳐져 있다는 뜻일 거다.
“미리 네 사람들을 22기에 넣어 놨구만?”
“헤헤. 역시 러셀은 못 속인다니까.”
“그 녀석들을 동아리로 뽑아서, 여기서 농장을 크게 돌리시겠다?”
“사관학교는 상인연합의 눈을 피하기 최적의 장소니깐.”
“넣어 둔 세력이 몇 명이나 되는데.”
내 질문에 코리가 손가락을 하나씩 꼽으며 세어 보더니 헤헤 웃었다.
“서른 하고도 네 명.”
“아니, 존나 많이 넣어놨네!?”
“대부분 생산직군이야. 연금술사, 대장장이, 아티팩트 연구원, 심지어 라룬다 가문에서 일하던 식물학자까지 확보했구. 최소한의 인력으로 최대한의 생산 효율을 만들어낼 거야.”
“보안엔 자신이 있단 소리겠지?”
“그럼. 목숨과 가족의 안위를 쥐고 있거든.”
“무섭고 유능한 새끼….”
“헤헤. 칭찬이지?”
“솔직히 마인들보다 유능해…. 네가 마신군이었으면 좀 빡셌을 듯.”
내 말을 허락으로 알아들은 코리는 믿어 줘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양의 물자 공급을 상단 규모도 아닌 혼자서 냠냠하겠다는 코리의 욕망은 조금 미심쩍었지만, 그냥 믿기로 했다.
녀석은 못 할 일을 벌이지는 않으니까.
이미 계산기 다 두드려 보고 할 만하다고, 혼자 먹으면 아주 맛있겠다고 판단이 선 건일 터다.
“사브와라엔 언제 갈 거야?”
“글쎄. 다음 명령까지 대기 중이라 그 전에 가고 싶긴 한데.”
“이세리아 경과 함께 출전하는 건 말이지? 아마 9일쯤 후에 이곳에 도착하실 거야.”
“넌 왜 모르는 게 없냐? 점점 소름 돋네.”
나는 웃고 있는 코리의 얼굴을 보고 와락 표정을 구겼다.
점점 눈앞의 이 상인 놈이 무서워지려 한다….
“9일이면 다녀오긴 좀 빠듯하네. 일정 끝나고 바로 가든가 해야겠다. 전달해 줘.”
“응.”
“아 그리고 흡사 쪽 정보는 계속 업데이트해 주고.”
“알겠어.”
9일이라.
코리가 정확한 정보를 전달해 준 덕분에 일정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9일이면 딱, 적당한 스케줄이 있었다.
나는 곧바로 슈트를 켜 분대 채널로 아카샤에게 통신을 날렸다.
“아카샤.”
대답이 없다. 아마도 슈트를 해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이 훌륭한 무장에는 이런 기능도 있다.
나는 아카샤를 가리키는 아이콘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호출 버튼을 연타했다.
– 아잇, 뭐예요!! 시끄럽게!
3분쯤 연타하자 곧바로 반응이 온다.
나는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농장으로 와. 데이트다.”
– …우븝, 뭉 네?
“뭐라는 거야.”
– 혀, 를 깨물어서….
“즐겁고 짜릿하고 행복한 머라고라 재배 시간이야. 신입 분대원들 영약 좀 해 먹이자. 30분 줄게, 뛰어와.”
– …….
나는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선 슈트를 해제했다.
그러고는 아카샤가 안쓰러운지 불쌍하다는 표정을 짓는 코리를 향해 말했다.
“안타까워할 필요 없어. 너도 함께할 거니까. 넌 설거지랑 솥 젓는 담당이야.”
나는 그대로 도망치려는 코리의 목덜미를 잡아당겨 즉석에서 생산 레일을 완성했다.
자― 일하자, 얘들아.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