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29)
23. 흰 꽃의 맹세
던 블라이아의 초목 위로 암청색 어둠과 샛노란 별빛들이 사뿐하게 가라앉은 밤하늘은 이세리아가 가장 좋아하는 풍경 중 하나였다.
하나 그 풍광조차도 지금은 그녀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요소일 뿐이다.
불가해한 노기였다. 어쩌면 제 속의 불의, 미련, 후회들이 뒤섞여 만든 시커먼 그을음일지도.
이세리아는 성급히 내뱉은 말이 후회되었으나,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군의 기강을 잡는 일이다.
목숨을 걸고 임하는 작전에서 너무 가벼운 언행을 일삼으면 사기에 악영향을 끼치리라.
조금 전의 충돌 상황만 봐도 그렇다. 어찌 같은 아군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계승자라는 자가.
“지금까지 어떤 환경과 분위기에서 작전을 수행해 왔는지는 물어 따지지 않겠습니다. 진지함이 부족한 건 아직 임관도 하지 못한 생도 신분이니 그러려니 넘어가겠습니다. 하나 앞으로는 진지하게 임하세요. 지금은 누군가에겐 고향이 불타고 친구들, 가족들이 죽어 사라질지도 모르는 상황 아닌가요.”
“…….”
이세리아의 일갈에 생도들은 당황한 얼굴로 침묵했다.
그녀는 주디, 휴고 그리고 신수 알카서스를 한 번씩 흘겨보고는 말을 덧붙였다.
“주디 아리스포델. 다른 이들은 몰라도 너는 함께 웃고 떠들면 안 되는 것 아니니?”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성약의 조각. 능력에 비해 과분한 사명을 얻었다면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세요.”
휴고를 비난하는 듯한 발언에 러셀이 몸을 움찔했다. 하지만 파가 빠르게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죄송합니다.”
휴고의 군더더기 없는 사과에 고개를 끄덕인 이세리아는 마지막으로 한시도 간식거리를 입에서 떼지 않는 신수를 향해 지적했다.
“신수에게 간식거리를 주는 행동도 삼가세요. 여긴 애견공원이 아닙니다.”
– ……므아?
“이 일은 당신의 주인 때문에 일어난 일이잖습니까. 당신의 주인이 마신전쟁 때 눈을 뜨기만 했어도, 하다못해 지금이라도 깨어난다면 이런 일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테니까.”
– 너무하다요…. 주인이 잠꾸러기인 건 알키 탓이 아닌 것임….
뭐라 중얼거리는 알카서스의 억울한 끼깅거림이 들려왔으나, 이세리아는 매몰차게 돌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이건 화풀이라는 걸 안다.
원망의 대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도.
그녀의 원망이 향하는 것은 깨어나지 않는 성약이다.
그가 모든 비극을 만들었다.
더 원초적인 문제로 나아가면, 여신 디체의 쇠약이 근본적인 원인일 거다.
여신에게는 더이상 이 땅을 유지할 힘이 없다.
그래서 그 분신인 성약의 계승자마저 깨어나지 못했고, 마신의 힘을 제어하지 못해 카오스게이트나 사멸의 땅이 확장되고, 마신군은 유사 이래 가장 왕성하고도 강력하게 활개 치고 있다.
이 세계에 희망은 있는 걸까?
이 싸움에 의미는 있는 걸까?
막사 안에 누워 모포를 뒤집어쓴 그녀는 얼굴을 위아래로 쓸었다.
이 모든 사념이 조금 전 저지른 위악을 덮기 위한 비겁한 변명임을 알기에.
부끄럽다.
저 스스로의 감정을 다루지 못해 까마득하게 어린 영웅에게 상처를 주었다.
감정을 배설하고 원망을 쏟아냈다.
소년 또한, 견디기 어려운 사명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음을 알면서도.
얼굴이 붉어지고 열감이 올라왔다.
짙은 후회였다.
* * *
한바탕 소란이 있었지만, 생도분대원들은 빠르게 잠들었다.
여전히 막사 바깥에서는 불침 근무를 서는 병사들의 사담 나누는 소리, 비아냥거림, 뒷담화가 들려왔지만, 동료 놈들은 잘만 잤다.
슬그머니 내 침낭 안으로 들어오려는 애완 날다람쥐의 이마에 손날 당수를 내리쳤다.
“네 자리 가서 자라, 갈수록 요망해지는 날다람쥐.”
“춥단 말야.”
“남녀칠세부동석이라 하였다.”
“……?”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우는 날다람쥐에게 제자리를 찾아 준 뒤 곧바로 잠들었다.
애초에 근처에서 가마우지가 부리를 쪼아대든 누가 절벽에서 떨어지든 3분 안에 잠들 수 있을 정도로 신경줄이 굵어진 게 생도분대원들이다.
잠든 상태에서도 가벼운 상념 정도는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이한 신체 컨디션.
아무튼 그렇게 새근거리는 소리, 드릉거리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수면을 취하고 있던 와중.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주변의 분대원들도 동시다발적으로 상체를 일으키고 목을 좌우로 풀기 시작했다.
빠르게 잠든다고 해서 깊게 잠드는 건 아니다.
애초에 수마에 휩싸여 제 목 간당간당하는지도 모르는 놈은 크라우의 특훈을 통과할 수 없다.
코를 골며 곯아떨어졌더라도 저를 향해 살기가 날아오거나, 마기가 느껴진다면 곧바로 소울을 사출해 낼 수 있는 게 지금의 훈련생도들이었다.
“어떡할까?”
리지의 질문에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굳이 소란 일으키지 말고 조용히 나가서 제압하자.”
우리는 은밀한 움직여 막사 밖으로 나왔다. 막사는 몇몇 초병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잠들어 고요했다.
‘오른쪽.’
마신군이 출현한 건 야영지에서 몇백 미터쯤 떨어진 숲지였다.
놈들은 여신군의 출몰을 발견하고 간을 보듯 이쪽을 주시하는 중이었다.
찐득거리는 마기를 풀풀 풍기는 채로.
“러셀. 나왔구나.”
야영지 외곽에는 이미 마기를 느끼고 튀어나온 2분대 동료들이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시선을 교환한 후 동시에 달려 나갔다.
급습하려던 마신군들을 모두 쓸어 버리는 데에는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놓친 놈은?”
-없어.
“그래. 돌아가자.”
별일 아니라는 듯. 널브러진 마물들로부터 하늘석을 추출한 뒤 우리는 야영지 입구로 되돌아왔다.
초병의 시선을 피해 막사로 되돌아가려는데, 화톳불가 깃대에 비스듬히 서 있는 이세리아가 우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깨어 계셨네요.”
아마도 그녀 또한 마기를 느끼고 일어난 것일 터다.
그녀 정도 되는 실력자라면 감지하지 못하는 게 이상한 일일 테니까.
“상황은 종료됐습니다. 약 30마리쯤 되는 마물들이었고 척후로 보내진 놈들 같아요. 놓친 건 없습니다.”
“……수고했습니다.”
떨떠름하게 대답한 뒤 이세리아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병사들을 깨우지 그랬어요.”
“됐습니다. 어차피 잘 시간도 부족할 텐데 일반 병사들은 편히 쉬라죠. 이러라고 저흴 불러들인 건데.”
전력은 최대한 보전하는 게 좋다.
앞으로 얼마나 긴 전투를 치러야 할지 모르는 상황.
우리야 조금만 쉬어도 금방 소울과 체력을 회복하지만, 병사들은 아니니까.
“그럼.”
우리는 이세리아에게 묵례한 뒤 지나치려 했다.
불쑥 내밀어진 이세리아의 손이 휴고를 붙잡았다.
“이세리아 경?”
“…무례를 사과하고 싶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휴고 대신, 내가 씩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그렇게 구박하시더니, 좀 활약했다고 벌써 인정해 주시는 거예요?”
짐짓 심술궂게 느껴질 만한 언사였으나, 그녀는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는 본론을 꺼냈다.
“아뇨. 그냥… 내뱉자마자 후회했습니다. 여러분이 잘못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그저, 제가, 부족하고 모자란 탓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화풀이를 했어요.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매번 강조하지만, 이 녀석들은 너무나도 착해빠졌다.
지휘관의 솔직하고도 진실된 사과에 반박할 사람은 없다는 이야기다.
휴고는 환하게 웃으며 다짐하듯 화답했다.
“아니에요. 저희도 경솔했습니다. 앞으로 이세리아 경의 명령에 따라 진지하게 임무에 임하겠습니다.”
“…고마워요. 든든하군요.”
이 정도면 그럭저럭 훌륭하게 신뢰를 다졌다고 생각한다.
비록 성약의 계승자에 대한 원망을 완전히 버리진 못했겠지만, 적어도 그 원망을 우리에게 풀어낼 일은 없을 거다.
원작과 달리, 조연들만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대전쟁.
한데 똘똘 뭉쳐 싸워도 그 피해가 막심할 터다.
“니르갈. 자신 있으십니까.”
그녀에게 각오를 물었고 그녀는 자신 없다는 듯 대답했다.
“솔직히 없어요. 그래서 여차하면 이번에야말로 던 블라이아 엘프들을 안전하게 데리고 오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생각 중입니다.”
“폐하의 명령과 다른데요.”
“……하지만 무고한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겠죠.”
빤한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지금의 이세리아는 니르갈과 싸울 생각이 없다.
정확히는, 맞서 이길 자신이 없는 거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못할 거다.
다가오는 싸움을 피할 수도, 남겨진 사람들을 외면할 수도 없을 거다.
네 가장 소중한 사람도 지키지 못하고 그 상실을 발판삼아 성장하여 오롯이 계승자로서 우화하게 될 것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것만큼은 원작을 뒤틀 수 없다.
너는 반드시 계승자로서 각성해야만 했으니까.
그것은 원작과 소설 정사를 통틀어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입맛이 썼다.
* * *
“이쪽으로 가면 레위 로아가 나옵니다. 엘프들의 성소인 세계수를 지키는 남쪽 마을이죠.”
이세리아는 성소 세계수를 중심으로 네 개의 마을이 성소를 사방위에서 지키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부연했다.
남쪽에 레위 로아, 서쪽의 페아타 로아, 동쪽의 던 페레노아 그리고 북쪽의 키리 엘리엔.
이번 에피소드의 주요 무대가 될 도시들이었다.
우리는 북상하는 동안 제법 많은 마신군과 조우했다.
엘프의 숲 주위의 마물들은 이세리아군을 마주할 때마다 이성을 잃고 흉포하게 날뛰었다.
그리고 그들은 공통적으로 ‘니르갈의 독’을 품고 있었다. 20년 전 마신전쟁에서 수많은 엘프를 희생시킨 니르갈군이 이미 이곳에 손을 뻗친 것이었다.
이세리아는 독성의 정체를 파악하자마자 흥분해서 진군 속도를 높였고, 중간중간 작은 전투를 벌였는데도 예정보다 이틀이나 일찍 레위 로아 인근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물론 병사들은 기진맥진해 탈진하기 직전이었지만.
그리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세계수의 남쪽 도시, 레위 로아에는 이미 한바탕 전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저건….”
도시를 지키는 장벽 아래쪽에는 엘프 전사들이 마신군을 뚫으려 고군분투하는 중이었고, 그 후퇴하는 마신군의 최선두에는 납치당한 어린 엘프들이 포박당한 채 끌려가는 중이었다.
마신군이 니르갈에게 상납하려고 마을에 습격해 어린 엘프들을 납치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던 블라이아 정규군이 그들을 추격해 뒤를 잡으려는 전황.
상황을 파악한 이세리아가 빠르게 명령을 내렸다.
“생도분대원 전원 전투 준비하세요.”
이세리아의 지시에 20명의 분대원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슈트를 착용했다.
“왕궁 호위대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경계 태세를 갖추고 제자리에서 응전을 준비하세요.”
“예? 하지만 경―”
“명령입니다. 지친 병사들로는 피해만 커질 뿐이에요.”
자신들을 배제하자 곧바로 경비대장 삭호가 반발했으나, 이세리아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여러분만으로도 할 수 있겠죠?”
“물론이죠.”
이세리아의 물음에 내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1분대. 어린아이들을 구하세요.”
“옙!”
“2분대. 놈들의 허리를 타격해 퇴각 흐름을 끊으세요.”
“네!”
“저는 엘프 전사들을 지원하겠습니다.”
이세리아는 짧고 간결하게 명령을 내린 뒤 곧바로 뛰쳐나갔다. 햇살이 비쳐 반짝거리는 흰색 슈트가 곧바로 불을 뿜기 시작한다.
나는 가볍게 목을 좌우로 풀고선 보리굴비마냥 어린 엘프들을 묶고 달려가는 마신군 선두를 바라봤다.
“아카샤, 아이아나. 애들 치료해. 도미니엘, 씨씨만 날 따라오고 나머진 정령사들 엄호.”
내 시선이 곧바로 마신군의 수괴인 괴생명체에 고정됐다.
‘극독의 카이데스.’
상위 악마종 마신군으로 종류에 따라 6성급에서 토벌급까지 다양하게 분포하는 악마였다.
‘극독의 카이데스’는 카이데스 종족 중에서는 다소 약한 편으로, 토벌급 바로 아래 단계의 6성급 상단에 분류되는 놈이다.
나는 씨씨, 도미니엘과 함께 극독의 카이데스가 위치한 적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씨씨. 주변 청소.”
“하하하핫! 불태워 주마!”
[격멸의 불꽃]내 말과 동시에 힘껏 숨을 들이켠 뒤 뻗은 그의 양 주먹에서 불기둥이 솟구쳤다.
초목들을 깡그리 불태우며 뻗어나간 불기둥들은 곧바로 수십 갈래로 갈라지더니 달려오던 악마종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새삼 느끼지만, 사멸의 땅에서 봤던 것보다도 훨씬 강력해진 화력이다.
그는 그야말로 혼자서, 단 한 방에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과하잖아, 이 방화범아.”
“하하핫, 그런가!”
또다시 제 털마저 새카맣게 태워 버린 씨씨를 구박한 뒤 도미니엘에게 눈짓했다.
대부분 독과 풀 속성의 악마종이라 효과는 좋았지만, 이러다가 귀한 숲을 홀라당 태워 버리게 생겼다.
[겨울의 교감]곧바로 도미니엘의 손끝에서 쏘아진 냉기가 씨씨의 불길을 잠재웠다.
빠르게 뻗어나간 얼음의 길이 언제 타올랐냐는 듯 열기를 순식간에 잠재운다.
그리고 그사이 카이데스의 등 뒤를 잡은 내 창이 녀석의 등가죽을 꿰뚫었다.
뒤이어진 괴성.
놈은 몸을 비틀고 날개로 [베어 가르기]를 시전하며 날 떨어트리려 했지만, 투지를 개화해 날갯짓을 가볍게 쳐낸 뒤 손아귀에 더 힘을 꽉 주었다.
힘 싸움.
녀석이 발버둥 칠 때마다 지면이 파편화될 정도로 대지가 울렸다. 놈이 휘두른 팔꿈치가 내 이마를 가격했다.
파직, 파지직. 슈트의 헬멧이 충격에 순간적으로 시야가 어두워지고 노이즈가 일었다.
여전히 움켜쥔 창대를 놓지 않고선 소울을 불태웠다.
그대로 몸을 회전하며 녀석의 질긴 가죽을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슈트를 해제한 뒤 울리는 머리를 두어 번 흔들었다. 그러고는 축 늘어진 악마의 사체를 뒤적여 하늘석을 회수했다.
권능석은 떨어트리지 않은 걸 보니 덜 성장한 개체인 모양이다.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돌리자 경악스러운 시선들이 날아든다.
놀랄 만도 하지.
단 셋이서 마신군 한 부대를 쓸어 버렸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서. 게다가 일부러 좀 과격한 퍼포먼스를 보여 주기도 했고.
나는 지금껏 열심히 우리의 뒤에서 떠들던 병사들을 향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씩 웃어 주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