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30)
23. 흰 꽃의 맹세
모호한 강함은 질시를 낳지만, 압도적인 격차는 경의를 만든다.
자신들보다 까마득하게 어린, 그것도 아직 임관조차 하지 않은 사관생도들이 보여 준 퍼포먼스는 병사들의 뇌리에 단단히 기억되었다.
저건 우리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다. 소위 영웅이라 칭하는 사람 중에서도 간간이 등장하는, 시대를 호령하고 역사를 뒤바꿀 정도의 폭력적인 재능.
지금까지의 말랑말랑한 전투에서는 볼 수 없었던 활약에 병사들은 그저 입을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전장에 얼음꽃이 가득 피어났다. 초목을 태우던 불길도, 마물들도, 마물들이 쏟아낸 핏방울도 모조리 꽁꽁 얼어붙어 그대로 정지했다.
가만히 서 있는데도 절로 몸서리쳐질 만한 한기도 느껴진다.
나는 내 옆의 분대원을 바라봤다.
도미니엘 닉시드.
닉시드가의 후계자라 불리는 빙결술사는 말도 안 되는 권능을 펼치고도 식은땀 하나 흘리지 않고 평온하게 서 있었다.
열탕지옥과 한빙지옥이 연달아 펼쳐진 대지는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딱 마수들만 모여 있던 그만큼의 땅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새삼 괴물들을 키워낸 크라우에게 감탄을 보내며 뒤돌아섰다.
“일교차가 크네… 다들 감기 조심해라.”
납치된 어린 엘프들이 있는 곳을 향하니 분대원들이 아이들의 눈을 가린 채, 주디와 아이아나가 회복 권능을 펼치는 중이었다.
마물의 피는 오로지 에뜨랑제의 검에만 묻어 있다.
아마도 다른 분대원이 아이들의 시선을 가리고 보호하는 사이 에뜨랑제가 주변 마물들을 정리한 모양이다.
그 와중에 잔인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분대원들의 세심함에 감탄했다.
솔직히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디아블로1의 도살자가 보여 주던 폭력성에 버무려진 나로서는 놓치기 쉬운 배려였다.
대충 목적을 달성한 뒤 다른 전황으로 시선을 돌렸다.
2분대는 10명이 한 몸처럼 날뛰며 화려하게 마물들을 해치우는 중이었고 전장의 최후미에서는 이세리아가 소환한 거대한 검의 환영이 마물들을 짓이겼다.
이쯤 되니 불굴의 의지로 전투를 이어 나가는 마신군들이 오히려 안쓰러울 지경이다.
뭐가 비벼지기라도 해야 전투라고 부를 만하지….
갑자기 하늘에서 토벌급 마신군에 비견되는 영웅이 한 무더기 떨어졌으니, 참으로 운수 나쁜 날이라 하겠다.
* * *
이세리아는 마신군의 흐름을 역행하며 돌파를 이어 갔다.
바닥에는 마물들의 사체와 휩쓸려온 엘프들의 시신이 혼란스레 뒤섞여 있었다.
엘프들의 시신이 밟힐 때마다, 이세리아는 몸을 움찔거리며 멈칫했다.
“끄아아악!”
그때 귓가로 비명이 들려왔다.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마신군에 유린당하던 엘프가 있었다.
이세리아가 곧바로 튀어 나가 엘프 전사를 끄집어냈다.
사냥을 훼방받은 마물이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곧바로 그녀 주변을 호위하던 흰색 검이 스스로 뻗어가 마물들을 도륙했다.
“으, 으으….”
“괜찮습니까? 정신이 들어요?”
“당신은… 누구….”
기껏 구해냈건만, 그는 송장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엘프는 한쪽 눈이 사라진 채였고, 허벅지 아래로 하반신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게다가 내장 곳곳에 독이 퍼져 상반신 전체가 검붉은 반점으로 물들었다. 스티그마 포션으로도 도저히 회복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부상.
이세리아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장로님은, 마을은 무사합니까….”
“…….”
죽어가는 와중에도 제 고향과 동료를 걱정하는 모습에 이세리아는 고개를 떨어트렸다.
그러다, 결연한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짓쳐든다.
“던 블라이아는 무사합니다. 그리고 이제라에서 성약의 계승자와 함께 지원을 보냈습니다.”
“아, 아아….”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반드시, 지켜낼 테니까. 당신의 마을도, 동료들도, 성소도 사도의 숲에 스러지도록 두지 않겠습니다.”
“다행….”
거짓말이다.
성약의 계승자는 깨어나지 않았고, 이곳에 온 건 완성되지 못한 어린 영웅들뿐이며, 자신은 전투보다는 퇴각을 염두에 둔 겁쟁이다.
하지만….
하지만.
이세리아는 죽어가는 동족에게 차마 진실을 고할 용기조차 없었다.
엘프 전사의 숨은 금세 끊어졌다.
기실 저 몇 마디를 전하고, 제 대답을 들은 것만도 기적적인 일이다.
이세리아의 눈에 번쩍거리는 불티가 튀어 올랐다.
엘프군과 마신군의 접전지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지금은 힘을 아낄 때가 아니다.
[맹세의 검]검 모양의 소울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대지 곳곳에 내리찍힌다. 한 발 한 발 정확하게 마물들을 타격하며 마물들을 한 점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다음, 모여 있는 마물들의 지점을 향해 양손을 모으고, ‘집중’을 개화해 소울을 사출한다.
[상급 왕실 비전 검술] [검총(劍銃)]거대한 크기로 뭉쳐진 검 모양의 소울이 그대로 마물 떼를 휩쓸고 지나갔다.
옵시디언 와이번의 질긴 가죽마저 한 번에 벗겨내는 강력한 권능이다. 일개 마물 잔당들 따위 흔적조차 남지 않는다.
이세리아는 한순간 휩쓸려간 마물 떼를 바라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러고는 전투가 멈춘 현장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사체 밭을 헤치며 나아가는 자신을 바라보는 엘프들의 맑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낯선 이들도, 낯익은 이들도 보이는 엘프 무리들 가운데.
유독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엘프가 있었다.
“너는….”
엘프족의 마지막 장로.
그녀의 오랜 친구이자, 그녀가 배신하여 떠났던 이.
그토록 눈에 그리고 보고 싶었으나, 차마 볼 면목이 없었던 이.
마주하고도 사과할 염치조차 없어 말문조차 떨어지지 않는 이.
“사르미아….”
피를 잔뜩 묻히고 손에는 그녀의 상징인 아티팩트 ‘아마릴리스의 로드’를 든 채, 20년 전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는 사르미아였다.
하지만 이세리아는 사르미아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정확히는 그녀가 품고 있을 원망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사르미아는 금세 환한 미소와 은빛 눈물을 머금고는 이세리아에게 달려와 안기는 것이었다.
“이세리아!”
“……!”
“어서 와, 다시 돌아와 줘서 기뻐.”
“사르미아, 나는―”
“보고 싶었어. 정말로….”
일족을 버리고 20년 만에 돌아온 그녀를 마주한 것은, 부드러운 품과 따듯한 온기였다.
* * *
대지가 검은빛 피로 물들었다.
수백에 달했던 마물들이 모두 쓰러지고 왕궁 호위대와 생도분대가 이세리아에게 다가왔다.
엘프 전사들의 피해도 다소 있었지만, 마신군에 비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
하지만 대승의 기쁨보다도 납치되었던 어린아이들이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이 엘프들을 더 기쁘게 했다.
엘프들이 아이들을 붙잡고 기쁨의 눈물을 터트리는 사이, 장로 사르미아는 우리에게 다가와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엘프족의 장로 사르미아입니다. 이제라의 호의와 여신의 가호가 던 블라이아에 내림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얼떨결에 마주 고개 숙였다.
사르미아의 시선이 이번엔 알카서스를 향했다.
“알카서스 님도 오랜만입니다. 라스 님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하셨다고 들었어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 너무 걱정하지 말라는 것임. 주인은 곧 깨어날 테니까!
알카서스의 대답을 휴고로부터 전해 들은 사르미아는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신수님과 만난 적이 있으세요?”
“네. 저는 몇백 년 전에 있었던 마신전쟁에서 성약의 계승자님을 잠시 도울 수 있었지요. 그때 뵈었습니다.”
“며, 몇백 년 전이요…?”
사르미아의 대답에 휴고가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이세리아나 사르미아나 아무리 봐도 기껏해야 20대나 30대로밖에 보이지 않는 외견이다.
그런데 몇백 년 전이라니…?
확실히 인간보다 훨씬 긴 삶을 산다는 게 체감됐다.
사르미아는 이어서 주디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주디. 오랜만이구나.”
“장로님…….”
“이리 온.”
머뭇머뭇 몸을 움찔거리던 주디는 사르미아가 팔을 벌리자 으앙,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이세리아도. 이리 와. 한 번만 다시 안아 볼래.”
“지금은 보는 눈이….”
“어서. 20년이나 기다렸잖니.”
체면을 따지려던 이세리아는 결국 마지못해 주디와 함께 사르미아의 품에 안겼다.
다 큰 엘프 셋이 한데 부둥켜안고 있는 모습은 내 기준에서는 조금 오그라드는 광경이었지만, 다른 애들 눈에는 그렇지 않았나 보다.
여기저기서 감동적인 표정을 짓고 눈물을 찍어내는 애들이 보였으니까.
“웃으니까 너무 보기 좋아, 이세리아. 이렇게 웃을 줄도 알고… 어느새 이렇게 든든한 어른이 됐담… 주디는 이제 숙녀가 다 됐구. 시집 보내도 되겠는걸….”
“아잇, 장로님…!”
엉덩이를 톡톡 치며 어르는 사르미아의 행동에 주디가 볼을 붉힌다.
귀여운 척하며 앙탈 부리는 주디의 모습이 보기 싫었던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옆에 서서 아빠 미소를 짓고 있는 파의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 사위 놈 있답니다!”
순식간에 사르미아의 호기심, 이세라이아의 경악, 주디의 살기가 날아들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는 파를 힘껏 밀어 제물로 바친 뒤 그림자 걷기로 도망쳤다.
* * *
“아오, 손 매운 가시내….”
나는 명치 부근에 남은 손바닥 자국을 쓸어내리며 구시렁거렸다.
우리는 전장 뒷수습을 마치고 레위 로아의 안쪽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일행의 선두에는 이세리아와 사르미아가, 그 바로 뒤에는 생도분대가, 가장 뒤쪽에 엘프 전사들과 왕궁 호위대가 뒤따랐다.
자연스럽게 정리된 서열의 결과였다.
두 엘프는 앞서 걸으며 그간의 해후를 나눴다.
하지만 20년간의 공백보다 눈앞에 놓인 적의 존재감이 더 컸던 탓인지, 곧바로 사도 니르갈에 대한 주제로 넘어갔다.
“세계수와 신수병기는 무사해?”
“응. 필사적으로 지켜냈지.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 이세리아, 혹시 신수 제온을 부를 수 있을까?”
“…….”
이세리아는 잠시 대답을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오래전부터 그는 내 부름에 답해 주지 않았어. 여기까지 오면서 계속 시도해 봤는데도 여전히….”
흰 꽃핀을 어루만지며 대답하는 이세리아의 작아진 목소리에 사르미아는 ‘그렇구나.’하고 중얼거렸다.
“세계수로 가 보자. 어쩌면 그곳에서는… 제온이 다시 나타날지도 모르잖니.”
“그래. 혹시 니르갈의 위치는 확인됐을까?”
“아니…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어. 서쪽에서 동진한다는 소문도 있고… 선발대들만 계속 영역에 나타나서 마을을 불태우고 엘프들을 납치하는 중이야.”
“그렇구나. …아직 늦지 않았어.”
이세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로도 사르미아는 그간 있었던 일들, 출몰한 적들의 전력. 던 블라이아 전사들의 상태 등등, 전쟁에 필요한 정보들을 이세리아에게 전달해 주었다.
20년 전 전쟁 때도 두 사람의 역할은 명확했다.
엘프들을 결집시키고 다독이며 후방에서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었던 사르미아.
최전방에서 전사들을 이끌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던 이세리아.
아마 앞으로 일어날 전투도 같은 양상으로 진행될 것이었다.
행군은 한참이나 이어졌다.
사르미아가 마을을 하나둘 지날 때마다 마중 나온 엘프들이 그녀에게 예의를 갖추고 이세리아를 보고 반가워했다.
몇몇 엘프들은 힐난 섞인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극히 소수였다.
던 블라이아는 제법 아름다운 지역이었다.
자연환경도 균형 있게 펼쳐져 있고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순도 높은 정령들과 뛰어노는 엘프들, 그리고 동물들까지.
대기는 세계수에서부터 뻗어 나오는 신성 덕분에 마음까지 다 정화되는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그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분대원은 미마였다.
미마는 세계수에 가까워질수록 입을 방긋거리고 꼬리를 살랑거리며 걸었다.
“기분 좋아 보인다?”
“응.”
단답이었지만 목소리가 쾌활하다. 그녀는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고향과 비슷해.”
그 모습이 마치 신성 뽕 맞은 한 마리의 신수 같아서, 나는 피식 웃어 버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