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31)
23. 흰 꽃의 맹세
“이세리아, 아 해.”
“…그, 이건 좀.”
“빨리. 20년 만인데 이 정돈 받아 줄 수 있잖니.”
“…….”
20년 만이라는 사르미아의 입버릇은 이세리아에겐 거의 가불기 수준의 단어였다.
“주디도. 아.”
“장로니임….”
“20년 만인걸?”
“아잇….”
물론 이세리아를 따라가기로 선택했던 꼬꼬마 엘프에게도 마찬가지다.
사르미아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두 엘프를 수치사라는 이름으로 암살하려는 모양인지, 아예 갓난아이를 돌보는 유모의 자세로 두 사람에게 먹이를 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주디는 무릎에 앉혀 놓고 음식을 입에 떠 넣는 보기 힘든 광경까지 연출했다.
“요만할 땐 내가 이렇게 음식 먹여 주곤 했지. 그때가 그리워.”
“머, 먹는다구요….”
저명한 영웅인 이세리아마저도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 사르미아의 스푼을 받아먹고 있는 망정이니, 한낱 40년 먹은 엘프 꼬마가 그녀를 거부할 순 없었을 거다.
물론 그 상황이 괴로운 건 두 엘프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위시한 주디의 찐친들은 저 성질 더러운 엘프가 제 장로 앞에서 귀여운 척하며 아양 떠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단 한 명, 사랑에 눈먼 그림자 엘프 빼고 말이다.
“귀엽네. 저런 면도 있었어.”
“…….”
아침에 먹은 돼지죽 전투식량이 올라올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나는 그의 사랑을 지지해 주기로 했다.
사랑은 원래 위대한 거랬다….
나는 절대 고향 버리고 20년 만에 돌아가는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한나절쯤 이동했을까.
북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상서로운 신성의 기운이 점점 그 덩치를 키워 갔다.
세계수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아니나 다를까 금세 눈앞에 거대한 결계가 행로를 가로막더니, 사르미아의 지팡이가 흐트러트린 결계 안쪽으로 이름도 거창한 세계수가 그 위용을 드러냈다.
엘프들의 근원이자, 영원한 지식의 총체.
리타니아 대륙을 지탱하는 여신의 축복 중 하나인 고목은 고개를 치켜들어도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높게 솟아 있다.
아마 세계수의 위치를 가리는 사르미아의 결계가 아니었다면, 던 블라이아 어디서든 이 거목의 모습이 보일 법한 위용이다.
세계수는 그 줄기가 신수병기 하나쯤 들어가 있다고 해도 믿길 만큼 거대했는데, 심지어 땅에서 뻗어 나온 줄기는 하나가 아니었다.
거대한 줄기가 여러 개 솟아올라 어느 순간부터 엉켜 뻗어 있다. 흡사 영화 「아바타」의 홈트리를 떠올리게 하는 광경이다.
“굉장하죠?”
사르미아는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세계수를 응시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레인가르의 눈부신 과학기술보다도 더 압도적인 기백을 뿜어내는 자연 앞에서 생도들과 병사들은 그저 입을 벌릴 뿐이었다.
마른 입술을 침으로 삼키는 소리가 면면했다.
사르미아는 예상한 반응이 마뜩하다는 듯 설명했다.
“20년 전 마신전쟁 때 마지막 남은 엘프들의 일족이 이곳에 모여 마지막으로 농성했어요. 비록 수많은 마을과 터전이 짓밟혔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엘프들이 본연의 힘 그 이상을 발휘할 수 있었죠.”
과연 그럴 것 같았다.
굳이 엘프들이 아니더라도 신성을 사용하는 내게도 힘이 넘치는 느낌을 주었으니까.
던 블라이아 토착 엘프들은 전투슈트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그 격차를 세계수에서 얻은 신성으로 메우는 거다.
“안쪽에 보시면 ‘제온’의 신수병기가 잠들어 있어요.”
사르미아의 설명에 내 시선이 네 개의 줄기 안쪽에 가두어지듯 숨겨진 신수병기를 향했다.
줄기들이 얼마나 큰지, 네 개의 줄기가 엮기 전의 공간은 흡사 격납고라고 해도 믿어질 법했다.
아니. 실제로 이곳은 신수병기 제온의 자연 격납고였다.
– 제온은 지금 세계수 어딘가에 잠들어 있을 거란다. 그의 냄새가 나거든.
“그래?”
갑자기 혼잣말하는 날 향해 시선이 날아들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하니앤의 말을 전달해 주었다.
“신수 제온이 여 어딘가에 숨어 있다네요. 하니앤이 개 코라서.”
– 개 코라니. 모욕적이잖니.
“그렇군요. 어쩐지….”
“뭐, 지금은 반응하지 않아도 이곳에 위험이 닥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까요?”
안색이 파리해지는 이세리아에게 위로차 말을 던졌다.
실제로 신수 제온은 전투 중에 모습을 드러내긴 한다. 그 등장이 다소 늦긴 했지만.
제온의 신수병기는 다른 병기들과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더 큰 전고를 가지고 있었다.
높이 30m의 까마득한 전고와 머리, 양 무릎에 박힌 푸른색 크리스털 그리고 몸통을 감싼 황금빛 갑주와 펄럭이는 망토가 인상적인 병기였다.
제온의 신수 권능인 [오메가 블라스터]는 갑주 중앙의 개폐문이 열리면서 거대한 에너지를 사출하는 방식인데, 제대로 맞으면 니르갈의 몸뚱이에도 바람구멍을 낼 수 있는 강력한 일격이다.
나는 병기를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위압감에 감탄하며 그 주인인 이세리아를 일별했다.
그녀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한때는 저 병기를 타고 숲지를 호령하던 인물이다.
하나 지금은 신수에게서 버려지고 계승자라는 호칭마저 박탈당한 상황.
‘정사보다 빨리 녀석이 마음을 돌릴 리는 없겠지.’
제온의 또 다른 권능인 [문웰]과 [진지 구축] 그리고 [에이션트 프로텍터]까지 사용할 수 있다면 엘프들은 거의 타격 없이 전투를 치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원해 보이는 희망이다.
제온의 등장 조건은 장로 사르미아의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한 이세리아의 각성이니까.
* * *
우리의 주둔지는 세계수의 서쪽에 위치한 ‘페아타 로아’로 정해졌다.
마신군이 영웅의 무덤에서부터 동진하고 있다는 첩보 때문이었다.
이세리아군이 페아타 로아에 주둔지를 설치하는 사이, 나는 리지와 함께 주변 정찰을 나가기로 했다.
동료들은 위험하다는 이유로 단둘이 나가는 걸 만류했으나, 정찰은 최소한의 인원으로 나가는 게 오히려 안전했다.
리지의 마법 지팡이는 비행 속도가 빨랐고, 단신의 전투력과 기동력은 내가 제일이라 자부했으니까.
어차피 적의 전력과 정사의 진행 상황을 전부 알고 있는데도 굳이 정찰을 나가려 한 건, 혹시나 달라질 [개발자 노트]의 내용 변화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몇 번 뒤통수를 맞다 보니 두 번 세 번씩 점검하는 게 버릇이 됐다고나 할까.
“단둘이 드라이브는 오랜만이네?”
“…그러게.”
“요샌 좀 괜찮아 보인다. 욕망의 항아리 사건 이후 나랑 말도 잘 안 하려고 하더니.”
내 무심한 말에 리지의 몸이 움찔하더니 지팡이가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 속내가 너무 빤히 들여다보여서 나는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그그그그 이야기를 왜 해!”
“뭐랬더라, ‘널 꺾고 싶어어~’였나?”
“으아악! 으아아아악!”
리지는 마수나 지를 법한 괴성을 내지르며 지팡이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순간적으로 확 올라오는 멀미에 내가 반사적으로 리지의 슈트 뒷부분을 꽉 붙잡았다.
“야이, 멀미 나잖아!”
“하지마하지마하지마!”
“알았어. 안 할게, 아 미안하다고! 그만 좀 흔들어!”
“…….”
“요새 좀 분위기가 딱딱하길래 장난친 거 아니냐. 나 별로 신경 안 쓰는 거 알잖아.”
눈에 뭐가 들어갔는지, 리지는 눈을 연신 문지르고는 ‘나쁜 놈’이라고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원래 흑역사는 정면으로 마주해야 이겨낼 수 있는 법이었다.
“그래서, 방 화병은 아직 비어 있고?”
1절 2절을 넘어 뇌절까지 해 버린 내 장난에, 리지는 결국 날 바닥에 떨어트렸다.
“야. 그렇다고 진짜 떨어트리냐….”
“우으….”
“진짜 안 할게. 진짜. 약속.”
나는 자칫하면 마신군 한복판에 떨어질 수도 있다는 위험을 직감하며 리지에게 사과했다.
그래도 내 뇌절이 효과는 있었는지, 리지는 처음 나랑 척후를 떠난다고 했을 때보다는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런데 있잖아, 그냥 이렇게 날아다니기만 하면 돼?”
“응. 나선형으로 쭉 돌아서 던 블라이아 한 바퀴 돌고 들어갈 거야.”
“저 앞쪽에 마신군이 있는 것 같은데.”
“그래? 가 보자.”
리지가 가리킨 곳은 안식의 폐원이라 불리는 던 블라이아의 고대 유적지였다.
그녀의 말대로 폐원 인근에 들어가자 제법 많은 마신군들이 부대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가 날아와. 공격할까?”
“아냐. 넌 운전에 집중해. 내가 잡을게.”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월광쌍익 1호기를 날아오는 비행형 마수에게 투척했다.
그리고 1호기를 회수하며, 1호기가 돌아오기 직전에 연달아 2호기를 투척해 두 번째 마수까지 격추했다.
그리고 다시 2호기를 회수하면서 동시에 1호기를 투척한다.
투척, 회수, 투척, 회수.
공중에서 저글링에 가까운 사냥 실력을 선보이자 리지가 ‘우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는다.
내가 봐도 창 두 자루의 동시 컨트롤은 숙련도가 놀랍긴 했다.
순식간에 비행형 마수들을 처리한 뒤 지면에서 우리를 올려다보며 으르렁대는 마신군의 면면을 [간파안]으로 쓱 훑었다.
“위험해 보이는 놈은 없네.”
특별히 위협이 될 만큼 강한 개체는 없었다.
“정리하고 가자.”
“응. 내가 할게?”
“그래.”
이참에 폐원 아래쪽에 모여든 마물을 정리하고 가려고 지팡이가 비행 고도를 낮췄다.
“한번 휩쓸어 주면 짬 처리는 내가 할게.”
“응응. 해 보고 싶었던 게 있어.”
곧바로 리지의 주변으로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바로 뒤에서 그녀를 붙잡고 있는 내가 움찔할 만큼 빠르게 모여든 마력은 이내 수식으로서 마법으로 승화했다.
[파이어 월]사출된 마력이 화염 속성을 머금고 불길을 일으켰다.
제법 화력 좋은 불 마법에 내가 감탄했다.
“원소 마법은 특기가 아닌 줄 알았는데.”
“그렇긴 해! 다음 것도 보여 줄게.”
이번엔 더 복잡한 마법 수식인지, 리지의 캐스팅이 제법 길었다.
녀석이 이 정도로 오래 캐스팅을 하는 건 처음 본다.
그렇게 발밑의 마물들이 난데없는 한증막 찜질방에 좋아 온몸을 비트는 사이, 리지의 두 번째 캐스팅이 끝났다.
[아이스 사이트]뒤이어 날아간 건 얼음 계열 마법이었다.
불길에 발버둥 치던 마신군이 반쯤 탄 모습 그대로 꽁꽁 얼어붙었다.
짬 처리는커녕, 개미 새끼 하나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은 현장이다.
“으으.”
리지는 두 개의 큰 원소 마법을 연달아 시전하고는 어지러운지 지팡이 앞쪽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등줄기에 땀이 가득했다.
“이건 씨씨랑 도미니엘의 합공이잖아?”
“응. 헤헤. 나도 해 보고 싶었거든.”
“걔네들 앞에서는 이거 하지 마라….”
그만한 출력을 내기 위해 정령들과 계약까지 한 녀석들이다.
그런데 원소 마법이 주특기도 아닌 마법사가 권능도 아니고 단지 캐스팅만으로 이만한 화력을 보여 준다고 하면… 아마 사기가 곤두박질칠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종종 네가 말도 안 되는 재능충이라는 사실을 잊곤 해.”
“응? 그럼 곤란해. 잊지 말아 줬으면 좋겠어! 러셀은 나한테 유난히 활약할 기회를 안 주더라구.”
“그랬나?”
“응응. 미마두 그렇고, 에뜨랑제 선배님두. 유난히 새로 온 애들한테만 위험한 일 많이 맡기던데, 그러면 안 된다구 생각해.”
“흐음. 몰랐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저 적재적소에 분대원들을 활용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주연’들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녀석들이 불의의 사고로 당하지는 않을까 염려돼서일까.
“알겠다. 앞으로는 성실하게 굴려 줄게.”
“응?”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라.”
“…으응.”
“안 그래도 이번엔 활약할 기회가 많을 거니까.”
씩 웃으며 덧붙이는 말에 리지는 순간 제 말을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꼭 그녀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번에는 굴렁쇠 일정 확정이다.
주변 조력자들이 항상 넘쳤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번 전투는 말 그대로 주인공 휴고와 그 동료들이 활약할 무대였으니까.
우리는 그대로 던 블라이아를 한 바퀴 돌았지만, 큰 이변은 없었다.
니르갈군의 간부급이 등장하려면 며칠 더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개발자 노트]를 켜 다시 한번 변경된 시나리오가 없는지 점검한 뒤 우리는 페아타 로아로 되돌아왔다.
마을 어귀에 도착해 목책 위에 올라선 나는 우릴 마중 나온 분대원들에게 곧바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뭔 발랑 까진 패션이야 그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