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32)
23. 흰 꽃의 맹세
페아타 로아의 목책을 지키던 생도분대원들의 복장은 남자애들이건 여자애들이건 한마디로 문란 그 자체였다.
뼛속까지 유교보이인 내게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특한 패션.
곧바로 ‘요즘 것들이란, 에잉, 쯧’하고 꼰대 모드가 발동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남자애들은 상체를 홀라당 까 버린 채로 하의에 나뭇가지 몇 개를 꽂은 괴상한 복장이었고, 여자애들은 던 블라이아산 명주실로 엮은 천으로 대흉근, 그러니까 쇄골 아래부터 허벅지 위쪽까지 감싸 뒤쪽으로 묶는 형태의 복장이었다.
한국 학교였으면 머리가 반쯤 까진 학생주임이 입에 게거품을 물로 달려오다가 그대로 고혈압으로 뒤로 넘어갈 만한 상황.
연신 말세냐를 외치는 내게 주디가 억울하다는 듯 항변했다.
“왜, 왜 그런 표정이야?! 이건 우리 전통 복장이라구!”
“그건 알겠는데, 놀러 왔냐… 왜 갑자기 전통 복장 체험이야?”
“그게, 장로님께서 의식을 여실 거라고 하셨어…. 의식 기간에는 내부인이든 외부인이든 무조건 전통 복장을 하고 의식에 함께해야 해. …네가 아무리 그렇게 쳐다봐도 어쩔 수 없어.”
내가 설명이 이어지는 중간에 흰 눈을 뜨자 주디는 파의 등 뒤로 쪼르르 숨고선 말을 끝마쳤다.
“의식?”
나는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정사에선 다루지 않았던 내용이다. [개발자 노트]를 켜서 혹시 변동된 설정값이 있나 점검해 보았지만, 이쪽도 무반응이었다.
게임 원작에서도 특별히 다루어졌던 내용은 아니니, 아마도 설정 밖의 영역일 거다.
기억을 잘 더듬어 보니, ‘재회한 사르미아와 이세리아는 신수 제온을 부르기 위해 여러 시도를 해 보았다.’라고 서술했던 문장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건 그 문장의 세부내용이 아닐까.
“무슨 의식인데.”
“신수 제온 님을 부르는 의식이야. 예로부터 세계수에 소울을 공급하는 제사를 지내면 수호 신수 제온 님이 나타나서 엘프들에게 덕담을 해 주시곤 했거든.”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나는 형형색색의 천으로 몸을 감싼 동료들을 슥 훑어보다가 이스칸다와 눈이 마주쳤다.
“뭘 음흉하게 빤히 쳐다보고 있어? 눈알 간수 잘해.”
“거, 성질 더러운 흙마도사 같으니… 오랜만에 죽창 맛 좀 볼래?”
쳐다보면 조금 부끄럽다는 말을 험하게도 돌려 말하는 이스칸다에게 으르렁거리고 있는 사이, 주디가 나와 리지의 등을 떠밀었다.
“너희도 빨리 가서 갈아입구 와. 안쪽에 붉은 꽃 장식된 오두막에 준비되어 있어. 다들 기다리고 계신다구.”
“아, 알겠어. 밀지 마.”
우리는 반쯤 떠밀려 도착한 오두막에서 미리 준비된 전통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웃통을 까고 돌아다니는 건 오랜만이라 뭔가 어색한 느낌이었다.
오두막 반대쪽에서 나온 리지는 다른 애들과 똑같은 천 쪼가리를 두르고선 머뭇머뭇 걸어 나오는 중이었다.
평소였다면 능글거리며 내 상체 여기저기를 찔러 보았을 녀석이지만, 그러기엔 지금은 그녀도 항마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이거 좀 부끄럽네….”
위아래로 아슬아슬한 복장을 올리기도 내리기도 하며 쭈뼛거리며 얼굴을 붉히는 리지.
늘 생글거리며 술 취한 연상마냥 날 희롱하던 때와는 색다른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너, 너무 쳐다보지 마….”
시간이 지나면 적응될 테니 이건 제법 귀한 타이밍이다. 그간 당했던 내 수치심에 복수를 시원하게 해 줄.
나는 씩 웃으며 천천히 그녀에게 걸어갔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그, 그래?”
“어어. 갈까?”
그러고는 슥 팔을 올려 어깨동무했다. 리지는 종종 팔짱을 끼거나 옷자락을 잡는다거나 하는 가벼운 스킨십을 하곤 했다.
그러니 내 쪽에서 어깨동무하는 것쯤은 그리 무례라고 할 수도 없다.
문제는 나는 반라였고 녀석은 오프숄더 상태였다는 점뿐.
그냥 놀리려는 의도였지만, 나는 사춘기 소녀의 민감함을 너무 간과했다.
팔꿈치가 리지의 어깨에 닿은 순간, 꺄아악 하고 고막을 때리는 돌고래 비명과 함께 내 몸이 마을 목책 바깥으로 날아갔다.
나는 0.1초 만에 바람 마법을 캐스팅하는 녀석의 천재성에 한탄하며 바람을 만끽했고.
* * *
세계수 앞.
소식을 들은 엘프들은 최소한의 경비 병력만 남긴 채 모두 세계수 앞 제단으로 모여들었다.
족히 수만은 될 법한 엘프 인파.
“던 블라이아 엘프들은 20년 전에 대부분 사라졌다고 들었는데… 아직 세가 건재하네.”
“많이 사라진 게 이 정도야. 괜히 이제라의 가장 강력한 우방이라 부르는 게 아니지.”
엘프들은 걸음마를 배울 때부터 정령과 교감하고 10살이 되기 전에 마법이나 무기술을 익힌다.
인간과 비교해 압도적으로 월등한 신체 능력(시력, 속도, 근력 등등)을 지녔기에 이들은 어린아이라 할지라도 한 사람 몫의 전사였다.
세계수 앞 제단에는 어마어마한 양의 하늘석이 쌓여 있고, 그 뒤로 엘프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앉은 채였다.
그리고 외부인인 왕궁경비대와 생도분대원들의 자리는 가장 뒤쪽이었다.
“하늘석이 엄청나게 많네요. 저렇게 많은 건 처음 봐요.”
“전장이니까.”
아카샤의 말에 러셀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하늘석은 평시에는 귀한 재료이자 절약해야 할 에너지원이지만, 전쟁이 시작되고 길어질수록 점점 흔해지기 마련이다.
수많은 마신군은 그만큼 많은 인명 피해를 일으킨다. 동시에 많은 하늘석을 토해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인류를 위기에 빠트리는 마신군들의 마기는 전쟁이 끝난 뒤 인류가 다시 피해를 복구하고 도시를 재건하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 된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 만한 이야기지만, 마치 공기가 순환하는 자연법칙이나 마찬가지였다.
장로 사르미아의 주도로 의식이 치러진다.
축언, 배례, 제가(祭歌)가 순서대로 진행되고 절차들이 끝나자 하늘석들이 에너지로 화해서 세계수로 빨려 들어간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도깨비불처럼 푸른 불꽃이 사르미아의 지팡이 위에서 빙글빙글 선회하다가 이내 세계수로 들어가는 장면은.
‘아깝네.’
러셀은 입맛을 다셨다.
당장 쓸 데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레인가르에 가져가면 비공정 한 대는 띄울 수 있는 막대한 에너지였으니까.
물론 하늘석에 담긴 소울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세계수에서 광합성하듯 신성으로 변환되어 던 블라이아 엘프들을 지키는 힘으로 사용될 거다.
“제온!”
세계수에 제물을 바치는 제사가 끝나고 사르미아가 목소리를 높여 제온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 뒤로 엘프들이 한목소리로 복명복창했지만,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제온은 응답하지 않았다.
“제온….”
이세리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응답하지 않는 건, 그가 완전히 자신을 버렸다는 방증이었다.
마지막으로 희망을 품었건만, 돌아온 것은 서늘한 외면이다.
“…포기하자. 제온은… 더이상 응답하지 않아. 신수병기 없이 사도와 싸울 수는 없어. 지금이라도 전 부족원들을 데리고 이제라로 가자. 이제라군과 힘을 합쳐 싸우는 거야, 사르미아.”
신수병기 없이 사도와 맞설 순 없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주장이었다. 백만에 이르던 엘프 전사들이 있을 때도 패배했다.
전성기의 던 블라이아에 비하면, 지금의 엘프들은 너무나도 미약하다.
하지만 사르미아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이세리아.”
단호한 목소리는 흡사 20년 전으로 돌아가기라도 한 듯, 굳건했다.
“던 블라이아 엘프는 세계수를 지키는. 여신으로부터 이 땅의 성역을 보호하도록 명 받은 고귀한 일족이야.”
“…….”
또다시 20년 전 논쟁이 반복된다.
“사명마저 버리고 도망친 곳에서 우리가 무슨 희망을 품을 수 있겠니? 그곳에서 어떤 미래를 바라며 살 수 있겠어. 겨울의 숲조차 아름다운 이유는―”
“언젠가 싹이 트리란 희망이 있기 때문이니까.”
사르미아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들어온 이세리아의 목소리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과거 그녀가 해 주었던 말을 이세리아가 그대로 읊은 것이었다.
“기억하고 있었구나.”
“응. 그다음 말도 기억하지. 지금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이더라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다시 일어서서 싸우자고.”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그녀의 말에 사르미아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사르미아. 너는 어쩜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그녀는 말로 설득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다.
똑같은 상황에서 자신에게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그녀의 말에, 뭐라 답했더라.
“아니, 사르미아. 이 세상에 희망 같은 건 없어.”
“희망은 그저 고통스러운 순간을 견디게 하려고 지어낸 말일 뿐이야.”
“힘없는 사람들이 지어내는 자기 위안일 뿐이라고!”
“살아남은 엘프들을 데리고 피신하겠어.”
“더 이상… 더 이상 일족이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희망을 믿기엔 나는 너무 지쳤어, 사르미아.”
날카로운 말로 그녀의 폐부를 찔렀던 과거가 새록새록 떠오른다.
지금도 변한 것은 없다.
이 싸움은 여전히 무의미하고, 개죽음일 뿐이다.
그녀는 여전히 이 전장에서 엘프들을 빼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이번에는 절대로 너만 남겨 두고 도망치지 않을 거다.
이세리아는 마치 치하하듯 그녀를 껴안는 사르미아의 온기를 느끼며 다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너를 데리고 나갈 테니까.
* * *
의식이 끝난 뒤. 이세리아는 군 간부 회의를 소집했다.
인원은 넷. 왕궁호위대 지휘관 삭호와 휴고 그리고 나까지였다.
퇴각해야 한다는 이세리아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사르미아의 의견은 팽팽하게 대립했다.
“니르갈군 본대의 위치가 확인되었어요. 이대로라면 마신군이 세계수에 닿기까지 나흘. 전투를 준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투를 준비하란 말에 두 사람이 마른침을 삼켰다.
겉보기에는 이세리아가 한발 물러선 것처럼 보인다.
“전선을 앞당기겠습니다. 세계수 앞에서 배수진을 치기보다는 던 블라이아의 변경 지역에서부터 게릴라전으로 전투를 끌고 갈 생각이에요.”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퇴각을 염두에 두고 있다.
니르갈군의 위세와 열약한 전력을 사르미아에게 직접 겪게 한 뒤, 그녀를 설득해 퇴각을 종용할 계획인 거다.
20년 전에 사르미아가 최종적으로 맞닥뜨린 니르갈군은 반쪽짜리다.
사도 니르갈도 이미 신수병기와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였고, 그의 군세 또한 과거 용맹한 전사들이 상당히 약화시켰던.
그러니 사르미아가 생각하는 항전이 얼마나 개죽음인지, 몸소 보여 줄 생각이리라.
“신수와 신수병기도 없이 사도와의 전투는 불가능합니다. 전투의 목적은 서로의 전력을 확인하는 것. 후퇴 신호가 오르면, 여러분은 던 블라이아 엘프들이 퇴각할 수 있도록 전선을 유지해 주세요. 여러분의 퇴각 신호는 별도로 쏘아 올리겠습니다.”
괴이한 작전이다. 패배를 염두에 두고, 적이 얼마나 강한지 아군에게 보여 주기 위한 전투라니.
그 어떤 지휘관도 아군 병력을 그런 식으로 소모시키지는 않는다.
이에 군인 삭호는 곧바로 반발했다.
“참 기이한 작전이군요. 어차피 질 싸움이라면 그냥 지금 퇴각하면 될 것을… 그들의 고집 때문에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총알받이로 쓰여야 한다니. 이게 맞는 명령입니까. 이세리아 경?”
“…….”
반박 불가능한 정론이다. 이세리아는 침음을 삼킨 뒤 그에게 호소하듯 내뱉었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저들은 세계수를 지키는 데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있어요. 어떤 설득도 듣지 않으니 다른 방법이… 없네요.”
“승산이 없겠습니까?”
삭호의 질문에 이세리아는 침묵했다.
그는 승전, 전공, 영광을 원하여 이곳에 왔다.
실력이 뛰어나 여왕을 지키는 왕궁 호위대가 되었지만, 최후방은 그만큼 공적을 쌓기는 어려운 보직.
후방 군인에게 진급의 기회는 귀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여왕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영예였다.
“저희는 왕궁을 지키는 호위대입니다. 차라리 명예롭게 싸우다 죽으라는 명령을 원합니다.”
“…….”
하지만 이세리아는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순 없었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니르갈과 대적해 본 이였기에, 선뜻 목숨을 달라 이야기할 수 없을 따름이다.
“두 사람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세리아는 나와 휴고를 향해 물었고, 휴고는 내게 시선을 던졌다.
의사 결정권을 내게 일임한다는 의미일 거다.
“차라리 장로님을 기절시켜서 이제라 왕궁으로 납치하는 건요?”
나름대로 합리적인 대안이었으나, 나는 살기등등한 이세리아의 눈빛에 그대로 꼬리를 말았다.
“농입니다, 농. 저희야 명령하시면 따를 뿐이죠. 그게 군인이니까.”
내가 뭐라 대답하든 시류는 변하지 않는다.
이세리아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앞으로 사흘 하고도 한나절 뒤, 우리는 역사에 남을 만큼 치열하고도 처절한 전투를 벌일 것이었다.
메인 에피소드 5장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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