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34)
23. 흰 꽃의 맹세
최고전사 12명의 표정에는 영광스러운 책무를 맡았다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동시에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결의도 엿보였고.
최고전사들도 영웅급 전력인 건 맞지만, 솔직히 생도분대원들과 비교하면 떨어지는 수준이다.
아마도 그들 모두 두 원로들을 위해 길을 여는 고기방패 그 이상의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거다.
그럼에도 그들을 고집하는 이세리아의 마음은 무엇일까.
엘프들의 적은 엘프들이 맡겠다는 의미일까. 잘 모르겠다.
당장 혼자서 군단장을 마크해야 하는 내 앞길도 막막하긴 마찬가지니까.
원래대로라면 휴고와 로벨리아가 하나의 군단장을 맡고, 에뜨랑제-리지-미마로 이루어진 세 재능충들이 다른 군단장 하나를 맡는 게 기존의 전투 양상.
이세리아의 지시가 달라졌다.
[개발자 노트]의 변경사항은 없었다. 말 그대로 우리가 이뤄놓은 성장, 그리고 내 등장으로 이야기가 변한 것이다.군단장을 상대하는 전력을 최소화했으니 결론적으로 피해도 줄어들 거였다.
“전선 뒤로 물리세요.”
이세리아의 명령에 기수가 후진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치열하게 싸우던 병사들이 전선을 조금씩 뒤로 물렸다.
개개인의 전력 차이는 확연하다.
하지만 압도적인 수 앞에서는 점점 둘러싸일 수밖에 없다.
양군이 뒤섞이고 전선이란 게 사라지면, 그때는 후퇴하려 해도 피해가 발생한다.
이세리아는 엘프군이 둘러싸이려 할 때마다 역학진처럼 넓게 펼쳐진 전선을 조금씩 뒤로 물렀다.
이러려고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는 대신 능선을 조금 내려가더라도 부대를 전진시킨 거다.
혼잡스러운 전투 중 곳곳에서 새하얀 빛기둥이 피어올랐다.
정령사들의 회복 마법이다.
전투 초와 달리 슬슬 다치거나 지치는 병사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
‘아직 한참 더 싸워야 하는데.’
다음 웨이브로 넘어간다고 일반 병사들의 역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웨이브마다 잡몹들은 더 강해져서 나타나고, 그것들은 병사들의 몫이다.
즉, 가장 부하가 심해지는 게 병사들. 그들은 개전부터 종전까지 체력을 비축할 틈도 없이 죽도록 싸워야 한다는 거다.
“이세리아 경.”
“말씀하세요.”
“병사들의 체력 안배도 신경 써야 할 듯한데요. 생도분대 마도사들을 한번 쓰시죠. 광범위 공격으로 뒤쪽에 뭉친 놈들 싹 타격하면 다음 웨이브 전까지 저것들 처리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마도사들의 소울을 아끼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이쪽 마도사들은 회복이 엄청 빠른 편이에요. 소모 값이 전부 다 회복되진 않겠지만, 한 명당 한 번씩 시키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대기하는 동안 자연 회복되는 양도 있을 테니, 소울이 가득 찬 상태에서 놔두지 말고 조금이라도 소모하자는 의견이었다.
이세리아는 내 말이 합리적이라 판단했는지 흔쾌히 수락했다.
“좋습니다. 지휘하세요.”
부관의 말을 경청하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나는 빙긋 웃고는 휴고와 논의해 범위가 너무 좁은 루트비히와 마력 소모가 극심한 로벨리아를 제한 나머지 마도사들을 집합시켰다.
“마력 효율 적당히 좋은, 광역 마법 하나씩 캐스팅 준비해.”
마도사들은 잠시 고민한 뒤 하나씩 고개를 끄덕였다.
“리지야. 먼저.”
“응!”
리지가 살랑거리는 금발을 목 뒤쪽으로 넘기며 능선 끄트머리에 섰다. 그러고는 양손을 앞으로 쭉 편 채로 캐스팅을 시작한다.
“이거 재사용 대기 시간이 좀 긴 편이라 다음번에는 못 써.”
“대충 뭔지 알겠네. 괜찮아.”
캐스팅이 시작되고, 잠시 후 허공에서 거대한 운석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유성 낙하]내가 마인 위트머에게서 얻어 그녀에게 선물했던 그 권능이다. 캐스팅도 오래 걸리고 재사용 대기 시간도 길어 잘 쓰지 않는 권능이지만, 쫄작(잡몹학살)에는 더없이 탁월하다.
쿵! 우르르르….
거대한 유성이 지면에 내리찍히고, 지축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낙하지점에 있던 마신군들이 유성 밑에 파묻혔다.
그 순간, 다시금 고요가 찾아온다.
괴물들이 내지르던 괴성이나 엘프들의 함성마저 일견 멎게 만드는 예술이었다.
“위트머가 쓸 때보다 좀 더 커진 것 같다…?”
“헤헤. 마력 차이 아닐까?”
나는 잘했다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다음 2번 타자를 호명했다.
“이스칸다.”
“미리 말하지만, 내 머리에는 손대지 마.”
“김칫국 마시긴. 한잔했냐? 만져 달라고 애원해도 해 줄 생각 없거든?”
이스칸다는 침을 퉤 뱉고는 마법을 캐스팅했다. 리지보다 조금 더 오래 걸리고, 시전하는 내내 땀을 흘려 대는 통에 뭔가 짠한 마음까지 들었다.
저 녀석도 고향에서는 내로라하는 인재로 비행기 많이 태웠을 텐데….
장학생 중 만년 중위권인 그녀가 선택한 건 [지반 붕괴].
1학년 때보다 한결 위력적으로 변모한 권능은 유성이 떨어진 바로 옆 지면에 거대한 싱크홀을 만들어냈다.
“제법이네. 잡몹들 처리하고 경로에 장애물까지 만들어졌어.”
“당연한 계산이니까 칭찬하지 마.”
“까칠하긴.”
이어서 도미니엘이 [우박]을 떨어트려 눈먼 얼음덩어리에 맞은 마신군들이 곳곳에서 비명횡사했다.
적중률이 좀 떨어지는 권능인데, 어디에 떨어져도 마신군이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백발백중이었다.
마지막으로 빌레나 모드리안의 차례. 녀석에겐 별다른 살상마법이 없는데, 자신 있게 걸어 나와 좀 기대가 됐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건, 광범위 디버프 마법.
[부패]시전과 동시에 범위 내에 있는 언데드 종류 마물들이 순식간에 썩어들어 갔다. 니르갈군의 병력 중 언데드형 마물이 많다는 걸 파악하고 내린 판단이었다.
“역시 마도사들은 다르네.”
굳이 자세히 지시하지 않아도 각자가 저마다의 상황에서 고민하고, 최선의 선택을 한다.
전체 적의 병력 중 그들이 요격한 건 일부였지만,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병사들이 잠깐 호흡을 고를 정도의 시간을 번 것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거의 끝날 때쯤 바로 다음 웨이브가 닥쳐야 하는데.’
두 번째 웨이브는 이제 막 모래 먼지를 일으키는 중이다. 적어도 10~20분 정도의 시간을 번 셈.
마물의 피와 살점으로 뒤범벅된 대지 위에 지친 병사들이 하나둘 주저앉는다.
누가 지시할 새도 없이 곧바로 무장을 점검하고, 체내 소울을 돌려 체력을 회복시킨다.
그사이 엘프 지휘관 중 하나가 이세리아에게 보고해 왔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고생했어요. 시체는 곧바로 불태워 주세요. 다음 부대에 네크로맨서나 시체 포식자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뒤쪽으로 예비 무장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파손되었거나 날이 나간 무장이 있는 사람들은 빠르게 교체하도록 하세요.”
“예.”
나는 그녀의 지휘를 보며 연신 감탄했다. 빈틈없고, 능숙하다. 거기에 중간중간 부관들의 직언도 유연하게 받아들여 전황을 이끌어 간다.
과연 여왕이 총애하고 이제라가 자랑할 만한 지휘관이었다.
짧은 전초전과 달콤한 휴식이 끝나고, 곧바로 두 번째 파도가 밀려들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공중부대였다. 그리핀과 그리핀 라이더들.
그들은 빠르게 능선까지 날아와 우리를 향해 다가오더니, 인근 상공에서 전진을 멈춘 채 선회했다.
아무래도 단독으로 공격하기엔 우리의 수가 많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마인이 한 명 껴 있네요.”
나는 그리핀 중 가장 덩치 큰 녀석 위에 올라탄 인간을 가리켰다. 흑색 로브를 걸치고 있는 장신의 남자.
거리가 멀어 간파안이 작동하진 않지만, 저 부대의 지휘관일 거다. 토벌급 마인 ‘칼리스토’.
“비행 부대 지휘관인 듯합니다.”
“까다롭겠네요.”
마인이 지휘하는 부대는 까다롭다. 지능 낮은 마신군들 사이사이에서 변수를 창출하고 빈틈을 노려 예상치 못한 피해를 주곤 하니까. 그게 머리 위에 떠 있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세리아는 전열을 가다듬은 엘프군에게 지시했다.
“원거리 병사들은 가능한 그리핀 부대를 최우선으로 요격하세요.”
마침내 2번째 웨이브의 본대가 도착하고, 엘프군과 본격적으로 격돌했다.
2웨이브는 시작하자마자 느껴지는 무게감이 달랐다.
대부분 일격에 처리되는 하급 마물들과 달리, 저놈들은 병사 한 명이 제법 고전하고서야 마신군 하나를 쓰러트릴 수 있는 놈들.
1웨이브 때와 달리 순식간에 포위되기 시작하고, 부상자가 속출하자 삭호 중령이 이세리아를 다급하게 불렀다.
“경. 명령을.”
“잠시 기다리세요.”
이세리아는 참고 기다렸다. 같은 웨이브에 나타난 적이라 해도 체급은 다르다.
가장 먼저 타격해야 할 핵심 부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들이 가진 날카로운 칼이 무의미하게 전장에 고립되지 않도록 한 번에 깊숙하게 찌를 작정이었다.
“전선 뒤로 물리세요.”
이세리아의 명령에 기수가 후진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처절하게 싸우던 병사들이 전선을 조금씩 뒤로 물렸다. 다만 이전과 다르게 돌아오지 못한 병사들이 조금씩 생겨났다.
다급한 정령사들의 권능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오고, 마찬가지로 마신군 쪽에서도 회복 권능이 있는 마물들이 마신군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이세리아….”
“조금 더. 조금 더 끌어들여야 해.”
사르미아의 불안한 호소에도 이세리아는 적군의 모양에 집중했다.
거대한 직사각형을 이루던 적군의 전면이 두꺼워지면서 점점 물병 모양으로 변하는 그때.
“파. 에뜨랑제.”
이세리아가 부분대장으로 낙점된 파와 에뜨랑제를 호명했다.
“저 거체가 보이시나요?”
“네. 보입니다.”
“저 부분이 카이데스들과 그들의 부대가 모인 본대입니다. 토벌급 마물을 최우선적으로 요격하세요.”
“예!”
두 사람은 동시에 대답했다.
“삭호 중령.”
“예, 경.”
“생도분대원들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적의 심장부로 찔러넣으세요. 그대가 길을 열어 주셔야 합니다.”
“임무 완수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삭호는 홱 뒤를 돌은 뒤, 왕궁호위대를 향해 선창했다.
“이제라를 위하여!”
“이제라를 위하여!”
그러자 오백 명의 병사들이 동시에 소리를 내지른다.
“여신을 위하여!”
“여신을 위하여!”
그러고는 번쩍 무기를 들어 올린 뒤 내던지듯 정면을 가리켰다.
“제3 왕궁 호위대! 출격!”
그들의 아머드 부츠에서 불이 뿜어지고, 흡사 기병대처럼 빠른 속도로 능선을 돌아 내려갔다.
파와 에뜨랑제는 슈트를 착용한 채 나와 휴고에게 눈인사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들에게 들으라는 듯 다시 한번 강조했다.
“서두르지 말고 차분하게 싸워. 대군 속에 있는 토벌급들은 지금까지와 다를 거야.”
– 으하하.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파의 호탕한 목소리가 음성채널로 들려왔다.
그사이 삭호 중령이 이끄는 왕궁호위대가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적 부대의 옆구리를 타격하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일부러 크게 거리를 벌린 뒤, 단숨에 측면을 파고드는 돌격. 먼 거리에서 보는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칼로 살을 꿰뚫고 파고드는 것처럼 보였다.
사소한 감정의 골이 있긴 했어도 역시 그들 역시 숙련된 병사들이었다.
단숨에 마물들의 흐름이 끊어지고 송곳에 모래가 갈라지듯 검은 물결 속 반짝거리는 아머드 무장의 흐름이 깊숙이 파고든다.
적진 한복판에 파고들었으니, 아마 녀석들의 앞길엔 고생길만 남았을 거다.
‘마음껏 날뛰라고.’
영웅급 전력은 부대 단위로 지휘하느니, 차라리 저렇게 던져 놓는 게 합리적이다. 알아서 변수를 만들고, 스스로 판단해 실력을 발휘하도록.
나는 기동대의 움직임에서 눈을 뗀 뒤 이세리아를 일별했다.
그녀는 정신없이 기수에게 목소리를 높이며 전황을 진두지휘하는 중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