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38)
23. 흰 꽃의 맹세
허공의 틈을 찢고 나타난 모로이가 맹렬하게 회전하며 내리찍는다.
껍데기밖에 없는 주제에 전동드릴처럼 들어오는 개 같은 공격은 닿는 순간 지면에 싱크홀이 생길 정도로 강력했다.
흡사 94년도에 나온 고전 격투 게임의 삐죽 머리 캐릭터가 떠오르는 일격이다.
나는 언노운 사체 아래의 그림자를 타고 모로이의 발길질을 피해냈다.
그림자는 산 자의 전유물이 아니다.
죽어 나자빠진 사체라고 할지라도, 그 아래에는 그림자가 남는다.
‘고립’과 ‘봉인’에 걸리지만 않는다면, 기동력은 틈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 놈보다 내 쪽이 위다.
나는 빠르게 거리를 벌리며 눈에 보이는 언노운을 향해 투창했다.
우리의 싸움에 끼어들지도, 그렇다고 무시하고 지나가지도 못한 언노운들이 꼬치가 되어 비명을 질러 댄다.
곧바로 나는 [무기각인]의 회수 능력으로 창에 꽂힌 언노운들을 끌어당겨 목을 벴다.
언노운들이 하나둘 비명횡사할 때마다 소모됐던 소울이 조금씩 차오른다.
너무 근접한 탓에 피해를 크게 입었지만, 역시 이 방법뿐이다.
확실하게 녀석의 실을 끊어낼 방법.
나는 다시 한번 손가락 끝에 소울을 집약시키기 시작했다.
언노운들로 소울을 충전하고, 한 번의 공격에 실 하나씩.
소울탄을 쏜 뒤 무사히 빠져나올 수만 있다면… 승기는 이쪽에 있다.
나는 차분하게 소울을 모은 뒤 다시 한번 [그림자 걷기]로 녀석의 그림자를 타고 들어갔다.
그리고 이어진 사출.
손끝에 모여 있던 소울이 집중으로서 개화하고 철판 긁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모로이의 실과 맹렬한 줄다리기를 시작한다.
나는 그 결과를 보지 않은 채로 곧바로 모로이에게서 벗어났다.
한발 뒤늦게 모로이의 권능이 내가 있던 자리를 덮쳤다.
바로 다음 순간 실이 끊어지고, 모로이의 괴성이 기분 좋게 고막을 울린다.
나는 낄낄 웃으며 녀석을 도발했다.
“속도에서 밀렸으면 지지 치고 나가야지. 안 그래?”
그건 몇 시즌 동안 이어진 만고불변의 진리다.
내가 도적이 된 이유, 이렇게 권능을 세팅한 이유.
모든 건 바로 이 순간을 위함이다.
발작하듯 여섯 개의 가면을 찰칵찰칵 돌리던 모로이가 손끝을 들어 올렸다.
모로이가 가진 권능 중, 세 번째 권능이 봉인 해제된 거다.
끼끼끼끼끼―!
[차원 에너지]모로이의 손끝에서 번쩍거리는 광선이 뿜어졌다.
워낙 빠른 속도로 날아온 탓에, 피하거나 그림자를 타는 대신 왼손 건틀릿 부분으로 공격을 쳐냈다.
상대가 가진 보호막 효과를 날리고, 상태이상 ‘속박’을 거는 공격.
다행히 슈트의 기능이 완파되지는 않아 ‘속박’까지는 걸리지 않았다. 애초에 보호막 관련 권능은 갖고 있지도 않고.
다만 안 그래도 까다로운 놈에게 원거리 공격까지 탑재되니 죽을 맛이었다.
놈이 쏘아대는 레이저는 피아를 구별하지 않았다.
마치 클럽 한복판에 온 것처럼 모로이에게서 쏘아진 광선이 번쩍거리며 대지와 상공을 노란빛으로 물들인다.
모로이는 깔짝거리며 피하는 내 움직임에 신경질이 났는지, 표적을 하니앤으로 바꾸었다.
– 꺄아아악!
하니앤은 황급히 몸집을 주먹만 하게 바꾸고는 홱 숨어들었다.
나는 녀석의 그림자를 타고 들어가 하니앤을 품속에 넣었다.
“잘 숨어 있어. 넌 내 여벌 목숨이라고.”
– 으응… 저 무식한 녀석 같으니. 털이 조금 타 버렸구나….
[그림자 걷기]를 연속으로 사용해 멀찌감치 하니앤을 내려놓은 뒤, 다시 놈의 사거리 안으로 진입했다.하니앤은 발이 묶였을 때 날 살려 줄 보험이다.
바람을 타고 날아다니는 그녀의 기동력은 제법 쓸만하니까.
파직, 파지직.
그때였다.
슈트에서 파열음이 들리더니, 전방의 스크린이 꺼지고 유리창 모드로 뒤바뀌었다.
아무래도 모로이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았을 때의 손상과 무리한 슈트기동이 겹치면서 뒤늦게 기능장애가 온 듯했다.
나는 슈트를 해제하고 가동파츠인 건틀릿 상태로 변환했다.
서늘하게 피부에 맞닿는 기온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슈트를 벗은 순간, 이제 너는 맨몸이라고. 가벼운 상태이상 한 번에도 목숨이 경각에 달릴 수 있다고 자각시키는 듯하다.
걱정과 두려움이 머리를 지배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날아오는 광선을 피하고, 근처의 언노운을 이쑤시개로 찍어 소울을 뺏고, 소울탄으로 모로이의 실을 끊어낸 뒤 빠르게 퇴각한다.
찰나의 순간 이어진 부드러운 연결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신들린 듯한 움직임.
마치 뭔가 약에라도 취한 듯한. 머릿속에서 엔도르핀이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다.
‘더 빠르게.’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면 사물이 느리게 보인다고 했던가.
나는 이 느려 터진 모로이의 움직임이 내 호르몬 때문인지, 아니면 죽기 직전의 주마등 때문인지 모를 감각으로 움직였다.
그만큼 아슬아슬하게 곡예를 넘는 전투였으니까.
파스스….
미처 피하지 못한 광선이 아래쪽 턱선을 태웠다. 여러 곳에서 통증이 느껴지는 걸 보아, 이번이 처음도 아닌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6번째 실을 끊어냈다.
카아아아악!
모로이의 비명은 점점 더 거대해졌다.
단 하나 남은 실을 지키기 위해 네 번째 권능인 [디멘션 루프]를 사용해 광범위 공격을 때려 댔지만, 내 투지는 간당간당하게 놈의 폭격을 막아냈다.
목구멍에서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고 입에서 주르륵 핏물이 흘러내린다.
퉤, 하고 입안 가득 들어찬 침을 뱉자 시커멓게 탄 듯한 핏물이 땅에 떨어진다.
빠르게 스티그마 포션을 욱여넣어 비틀어 터진 내장들을 달래고, 다시금 몸을 움직인다.
전투가 얼마나 지속됐을까.
슬슬 몸뚱이가 한계라는 듯 울부짖기 시작한다.
* * *
마지막 웨이브가 오고 있다.
가능하면 패색이 짙길 바랐다.
니르갈이 오기도 전에 패퇴해서 물러난다면, 차라리 피해가 적을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이세리아의 뒤틀린 바람이 무색하게도 여신군은 용맹하고도 무쌍했다.
엘프군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전선을 뒤로 물리지 않았고, 왕궁 호위대와 생도분대는 오백이 조금 넘는 군세로 토벌급 마족이 이끄는 마신군을 막아섰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었던 두 소년 분대장은… 군단장을 상대로 놀라운 무공(武功)을 보여 주는 중이었다.
어쩌면, 승리할지도 모른다.
남은 이들이 니르갈을 잡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본대의 피해는 최소화할 수 있다. 지금의 전세로 보면 충분하다.
그것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대승.
극단적으로 이 전투에 부정적이었던 이세리아마저도 그렇게 생각할 정도였으니, 사르마아와 엘프 최고전사들도 희망에 젖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그 존재감만큼은 또렷한. 사도 중에서도 가장 거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사도 니르갈이 천천히 접근해 온다.
“가자. 사르미아.”
“응.”
우우웅―.
이세리아의 신호에 사르미아와 계약한 바람 정령들이 엘프들을 감싸 올렸다.
비행 부대는 이미 생도분대원 리지 로즈 뎁이 모조리 요격한 뒤다.
천천히 부유하는 그들의 움직임을 막는 적은 없었다.
전장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날아온 그들의 망막에 일족의 원수가 맺힌다.
이무기라 불려도 될 정도로 거대한 몸집의 괴물.
피막에 감싸인 얼굴에는 상어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몸통은 거대한 뱀의 형태를 띠었으나, 지네처럼 수많은 다리가 달렸다.
양어깨에는 독성을 뿜어내는 두 개의 촉수가, 그리고 팔과 발톱은 몸통만큼이나 거대했다. 마지막으로 슈트마저도 관통해 버리는 날카로운 꼬리까지.
그야말로 뱀과 지네, 전갈과 상어가 합쳐진 듯한 거대 괴물 그 자체였다.
“니르갈―!!”
이세리아의 포효가 대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지금까지 그녀를 감싸고 있던 두려움, 걱정보다도 원수를 만난 순간 가장 큰 감정은 분노였다.
“니―르―갈―!!”
갈무리되지 않은 소울이 고함과 함께 새었다.
뒤쪽에서 몰려들던 3웨이브의 낙오 마물들이 이세리아의 소울에 터져 나갔다.
여유롭게 걸어오던 니르갈의 찐득거리는 녹색 눈동자가 가장 선두에서 그를 가로막은 두 엘프를 마주했다.
동시에 느껴진 감정은 반가움 그리고 환호였다.
“으흐흐.”
인간체라고는 볼 수 없는 기이한 괴물의 입에서는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낮은 저음이 흘러나왔다.
“으하하하!”
뒤이어 터진 것은 광소였다.
니르갈은 미친 듯이 웃어젖히더니 기쁜 것처럼 촉수를 머리 위로 올려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가장 반가운 얼굴들이 마중 나와 있군. 하나는 날 끈질기게 괴롭히다 비겁하게 내뺀 년. 다른 하나는 날 함정에 빠트려 잠들게 한 년.”
“…….”
“너희들을 보기 위해 20년을 기다렸다. 너희 엘프들의 살맛은 꿈에서도 잊기 어렵거든.”
“멈춰, 말리아!”
니르갈의 도발에 분노를 참지 못하고 튀어 나가려던 최고전사를 이세리아가 만류했다.
말려들면 개죽음이다. 놈의 언행은 한없이 상스럽고 가볍지만, 그건 전부 상대의 평정심을 무너트리기 위한 가면일 뿐이다.
“으흐흐. 그리 진지한 얼굴 하지 말라고. 괜히 무게 잡는 것 같아 웃기잖아? 세상 어느 가축이 도축 당할 때 진지한 표정을 짓겠어. 으응?”
“사도 니르갈. 반드시 네 사지를 찢어 세계수의 거름으로 줄 것이다.”
“그것참 듣기 좋은 축복이로군. 나 같은 사도 나부랭이가 신성한 곳에 묻히다니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나도 공약을 하나 할까? 나는 특별히 너희 둘의 시체는 하나로 묻어 주지.”
니르갈의 녹색 눈동자가 훑듯이 두 엘프 원로의 몸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기다란 혓바닥을 뱀처럼 날름거렸다.
“그러려면 너희의 상 하체를 반씩 뜯어먹어야 할 텐데… 자신 있는 부위를 고르라고.”
“이세리아 님, 저 더러운 놈의 말을 더 듣고 계실 겁니까?”
“잠시 기다려요.”
최고전사 한 명이 그녀를 독촉했지만, 이세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도리어 니르갈에게 더 도발을 던지며 놈의 시선을 끌었다.
니르갈은 사도인 주제에 인간들과 농담 따먹기를 즐기는 괴인이다.
놈에게 이건 그저 즐거운 사냥, 유희, 놀잇거리 그뿐이었기에.
“그나저나 네 신수는 언제 부를 거지? 원래 상대가 변신하기를 기다려 주는 게 악역의 미덕이 아니겠어. 푸흐흐. 시간 끌지 말고 부르라고. 그 거대한 나무 로봇 말이야. 엘프 네놈들은 너무 작아서 짓밟는 맛도 없거든.”
‘이세리아. 됐어.’
사르미아의 속삭임과 동시에 이세리아의 권능이 발현했다.
[맹세의 검]검 모양의 소울이 하늘에서 떨어진다.
“귀엽게.”
니르갈이 촉수를 꿀렁거리며 떨어지는 소울을 향해 마기를 발산했다.
하지만 저건 미끼였다.
그와 동시에 놈의 발밑에서 사르미아가 부른 최상급 바람의 정령, 헤레이스가 현현해 니르갈이 있는 자리를 집어삼켰다.
20년 전 놈을 봉인했던 사르미아의 계약 정령이자, 신수병기가 없는 지금 니르갈을 제압할 수 있는 유일한 전력.
‘됐어.’
사르미아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소환도 오래 걸리고 제대로 적중시키기도 어려운 게 최상급 정령의 권능이다.
하지만 니르갈 특유의 엘프를 얕잡아보는 성격에, 그때의 권능이 다시금 직격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재기불능의 타격쯤은―
사르미아의 생각은 거기서 끊겼다.
니르갈의 발밑에서 어마어마한 폭음이 연달아 들려왔기 때문이다.
“아무튼 재밌는 종족이라니까.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눈앞에서 그런 재롱을 부리겠어? 안 그래? 크흐흐.”
“…헤레이스!”
최상급 정령 헤레이스가 여기저기에 화상을 입은 상태로 니르갈에게 붙잡혀 있었다.
방금 전의 폭발에 휘말린 모양이었다.
그의 몸에 난 상처로 니르갈의 독성이 끈적끈적하게 침투해 들어갔다.
사르미아는 그가 완전히 소멸하기 전에 황급히 소환을 해제했다.
“날 즐겁게 해 줬으니, 나도 보답해야겠지. 내가 아주 새로운 걸 준비했거든. 기대하라고.”
니르갈이 말을 끝맺자마자 놈의 발밑, 땅속에서 빈대처럼 생긴, 그러나 그 크기는 들개와 유사한 벌레들이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아니 수천 마리는 될 법한 벌레의 떼가 순식간에 대지를 메웠다.
“두 년은 남겨 둬라.”
그 말과 함께, 폭발귀들이 엘프 최고전사들에게 달라붙어 자폭했다.
아무리 백전노장의 엘프들이라 해도 전부 반응하기에는 너무도 갑작스럽고, 너무도 많은 수의 마물들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수십 마리의 폭발귀들이 폭발하고.
12명의 최고전사의 몸이 하나둘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러고도 남은 어마어마한 수가, 두 엘프를 지나쳐 본대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