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43)
23. 흰 꽃의 맹세
“흩어져요!”
당장 중요한 건 미친 물소처럼 돌진하는 저 니르갈로부터 벗어나는 것이었다.
구렁이, 아니 이무기처럼 생긴 하반신을 빠르게 흐느적거리며 다가온 니르갈이 권능 [숨결 강타]를 발동했다.
거대한 양 주먹이 우리가 있던 자리를 내리찍었다.
나는 인근 나무의 그림자를 타고 빠져나왔고, 이세리아는 날렵한 회피술로 놈의 사정거리에서 벗어났다.
기동력이 떨어지는 사르미아는 미리 언질해 둔 하니앤이 목덜미를 물어 빼냈다.
순식간에 바퀴벌레 흩어지듯 사라진 사냥감들에 니르갈이 다시 한번 콧김을 뿍뿍 뿜어댄다.
나는 도망치는 와중에도 놈의 꼬리 비늘과 독침 사이의 작은 공간에 소울탄을 욱여넣었다.
인간으로 따지면… 엄지발가락 발톱 틈새 정도 되시겠다.
니르갈의 꼬리가 나를 노리고 거칠게 지면을 내리찍는다.
쿵, 쿵! 하는 굉음이 귓가를 울리고, 단단한 지면이 풍비박산 난다.
내가 타고 빠져나왔던 고목은 꼬리에 닿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단단한 지면이 니르갈의 몸에 닿을 때마다 흡사 두부처럼 으깨지고 바스러지는 모습은 솜털이 바짝 솟는 기분을 들게 했다.
[그림자 걷기]나는 놈의 공격을 최대한 깔끔하게 피하면서 꼬리 침 틈새를 집요하게 노렸다.
원래 미묘한 고통이 가장 짜증 나는 법이고, 찌른 곳을 몇 번씩 또 찌르는 게 최고의 인성질이다.
니르갈이 괴성을 꽥꽥 질러 댔다.
고통스러움이 아닌, 답답함에서 나오는 폭주다.
분명 그렇겠지.
딱 한 번만 닿을 수 있다면 터트려 버릴 수 있는 적인데도, 좀처럼 공격이 닿질 않으니까.
그게 덩치와 공격력에 몰빵된 놈의 한계라는 거다.
[오염된 대지]니르갈은 도저히 내 속도는 못 따라잡겠는지, 이내 우두커니 서서 기를 모으듯 촉수를 위쪽으로 곧게 뻗었다.
곧바로 녀석이 모으는 게 뭔지 깨달았다.
체내에서 독을 잔뜩 모으고 있는 거다.
놈의 촉수가 물을 뿜으려는 펌프 호스처럼 꿀렁거리더니, 끈적끈적한 독액을 뿜기 시작한다.
기체 형태가 아닌 액체 형태의 독.
사르미아의 바람으로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을 선택한 것이었다.
솟대처럼 선 니르갈의 주변으로 진녹색의 독액이 넘쳐흐른다.
그러고는 완경사에서 마그마가 흐르듯 점점 범위를 넓혀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니르갈의 극독은 닿는 모든 것을 녹여 버렸다.
풀, 관목, 심지어는 자갈들마저 연기를 내뿜으며 녹아내린다.
아예 역장 안을 독액으로 가득 채워 담가 버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공격이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정말로 이 넓은 공간을 독액으로 가득 채울 수 있다고?’
이 공간은 다 채우려면 흡사 호수의 물을 다 퍼 와도 모자랄 부피다.
놈이 아무리 사도라 한들, 체내에서 제 몸뚱이보다 많은 독을 만들 수 있다고?
질량 보존의 법칙 같은 건 개나 주는 거냐고….
잠깐의 고민 끝에 마음을 바꿨다.
불가능했다면 처음부터 시작도 하지 않았을 거다.
놈은 정말로 독액으로 우리를 수장시킬 작정일 터.
만약 그만한 양이 안 되더라도, 지면이 독액으로 가득 차면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고 기동성은 그만큼 떨어진다.
이성을 잃고 날뛰는 와중에도 제법 날카로운 한 수를 두는 것이다.
“헤디!!”
나는 목청을 높여 최고전사 중 하나를 불렀다.
엘프 중 유일하게 대지 관련 권능을 가진 최고전사였다.
비록 이스칸다만큼의 위력은 아닐지라도, 당장 응급처치를 할 정도는 되리라.
곧바로 내 목소리를 들은 엘프 최고전사가 뛰어왔다.
그녀는 니르갈의 촉수에서 꿀렁거리며 흐르는 독액을 보고서는 인상을 찡그렸다.
“놈이 여길 수영장으로 만들려는 속셈인가 본데요. 혹시 원형으로 방벽을 높이 만들어 줄 수 있을까요?”
“높이라면 얼마나 높게…?”
“최대한 두껍고, 높게요.”
“…해 보겠습니다.”
헤디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니르갈의 주변을 돌며 곧바로 지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헤스티아! 말리아! 리넨!”
그러고는 남은 최고전사 중 셋을 불러 니르갈의 촉수를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일시적으로라도 촉수를 건드려 방벽을 세울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제 노림수를 내가 받아치자 니르갈은 그대로 독액 분출을 멈추고 헤디가 세우는 방벽으로 흐물거리며 다가왔다.
벽을 부숴 버릴 속셈이다.
“산개해요!”
나는 곧바로 최고전사들을 각자의 자리로 되돌려보내고선 니르갈과 거리를 벌렸다.
놈이 신경질적으로 방벽을 내리찍어 부숴댔다.
그러고는 또다시 그 자리에서 독액을 분출하려 들자, 나는 곧바로 최고전사들을 소집해 똑같이 대응했다.
“이, 이……!”
“몇 번이든 반복해 줄 테니까 계속해 봐. 어디.”
“네놈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갈가리 찢어 살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부하들의 먹이로 줄 테다.”
“그렇게 느려터져서는 턱도 없다니깐?”
“카아아악!”
니르갈이 하악질하듯 소리를 지르며 땅을 내리쳤다.
그 충격에 날아온 파편이 무작위로 주변을 부숴댄다.
나는 내 쪽을 향해 날아오는 파편을 막으러 투지를 일으켰다가 혀를 찼다.
파편에 담긴 마기가 투지를 한 번에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뒤지게 살벌하네….’
진짜 스치기만 해도 사망이라는 게 이런 상황일 거다.
애초에 체급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여유를 부리고는 있다지만, 잘 피하다 눈먼 손짓에 맞기라도 하면… 끔찍한 상상이 펼쳐진다.
“이세리아 경.”
나는 이세리아를 불러 다음 작전을 짧고 명료하게 지시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중요한 순간이다.
“…진심인가요?”
“네. 가능하시겠어요?”
내 지시에 이세리아의 표정이 어둑해진다.
위험해 보이는 수준이 아니라, 진짜 위험한 작전이다.
이건 말 그대로 그녀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으로 위험한 순간에 직면하게 만드는 거니까.
실수하면 이세리아는 죽는다.
그리고 그녀가 죽으면 이 에피소드도 끝장이다.
이세리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발작하는 니르갈을 응시한다.
그러고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게요.”
그녀는 고민 없이 몸을 날렸다.
우리를 향해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돌진하는 니르갈.
그리고 정면으로 그를 향해 달려드는 이세리아.
나는 눈에 힘을 빡 주고선 그녀의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녀에게 설명하진 않았지만, 여차하면 그녀를 구출할 수 있는 위치에서 대기할 생각이었다.
[그림자 걷기]로 이동해 [소울 족쇄]로 잠깐이나마 니르갈의 움직임을 묶는다면, 이세리아가 몸을 빼낼 시간을 벌 수 있을 터.하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방법이다.
이 순간, 이세리아는 절체절명의 위기까지 내몰려야 했으니까.
그녀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니르갈의 뱃가죽 아래쪽까지 접근한다.
그런 다음 뱃가죽 쪽에 붙은 작은 마디 다리들을 지그재그로 밟고선 니르갈의 몸을 타고 올라갔다.
나와 사르미아는 니르갈의 모든 정신이 이세리아에게만 집중되지 않도록 원거리 공격으로 놈을 끊임없이 괴롭혀 댔다.
내가 이세리아에게 요청한 건 놈의 목 비늘 사이사이에 있는 숨구멍을 타격하는 것.
말이 목 비늘이지 가장 위험한 곳으로 파고드는 행위다.
그리고 이세리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올라 검술을 전개했다.
오랫동안 담금질 되어 온 그녀의 검술이 펼쳐지고.
날카로운 소울이 니르갈의 숨구멍을 가격했다.
유의미한 타격이다.
거대한 몸통에서 대부분의 겉면이 가죽과 근육인 놈.
아무리 베고 가르고 잘라내도 조금의 타격도 느끼지 못하는 니르갈이 유일하게 위험을 느끼게 할 일격이 들어간 것이었다.
놈은 본능적으로 모든 공격을 멈추고 두 개의 촉수와 양팔을 이세리아에게 향했다.
‘제가 외치기 전까지 검을 놓지 마세요. 끝까지 물어뜯으세요. 거머리처럼.’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
이세리아는 여전히 숨구멍에 칼을 쑤셔 넣은 채 소울을 흘려보내고 있다.
그 순간, 네 개의 방향에서 니르갈이 이세리아를 짓이길 듯한 기세로 노리고 날아든다.
절체절명의 순간.
내 입에서 고함이 터진다.
“제온―!!”
그리고 외침과 동시에 [그림자 걷기]를 발동했다.
1초를 수백 개로 쪼갠 시간 속에서 내가 던진 도박 수의 주사위가 데구루루 굴러간다.
이세리아가 죽느냐.
신수 제온이 깨어나느냐.
아니면 내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구출해 내느냐.
너무 이르면 제온이 깨어나지 못할 거다.
너무 늦으면 이세리아가 죽는다.
본능적으로 죽음을 감지한 이세리아의 소울들이 검 모양으로 화해 고슴도치처럼 솟아나고.
내 몸이 그림자 속으로 파고들었을 그때였다.
니르갈의 양손이 한발 먼저 손뼉 치듯 이세리아를 집어삼켰다.
* * *
‘죽는 건가.’
마지막까지 숨구멍을 찌르고 놓지 말라던 소년 생도의 말.
그녀는 끝내 그 말을 지켜냈다.
죽음의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우고.
피하지 않으면 이대로 죽는다는 걸 직감하면서도 끝끝내 소울을 불어넣어 니르갈의 숨통을 죄었다.
죽는 걸 각오하고 들어온 사지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 늦었음을 한탄할 뿐이다.
처음부터.
20년 전 그날부터 이랬었더라면….
이렇게 후회와 미련으로 점철된 나날을 보내지는 않았을 텐데….
그때였다.
진득거리는 마기를 가득 담은 채 이세리아를 짓이기던 니르갈의 양손에 몸이 터져 나가기 직전.
그녀의 흰색 머리핀이 하얗게 발광했다.
파바바박―!
그곳을 중심으로 솟아난 덩굴들이 순식간에 니르갈의 촉수와 양손을 밀어내며 그녀를 보호하듯 뻗어나갔다.
다음 순간 그림자를 타고 나타난 러셀 애시그린이 이세리아를 건져낸다.
찰나의 순간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
마기의 범위에서 벗어난 이세리아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확장된다.
그녀의 눈앞에 그토록 부르짖었던, 그토록 찾았던 신수가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제, 제온….”
흡사 어떤 영화의 나무 인간을 연상케 하는 신수는 말없이 등만을 그녀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싱그러움이 많이 사라진 모습이다.
당장에라도 시들어 사라질 것만 같은 모습.
계승자에게 버림받고, 동시에 계승자를 버린 이후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듯하다.
– 도망쳤으면… 돌아오지라도 말지 그랬나.
“미안, 미안해…….”
– 너무 늦어 버린 게 아닌가.
나무 정령이었던 신수는 쇠약해져 있었다.
오랜 기간 신성을 포기하고 잠들었던 만큼, 신수 자체의 능력은 터무니없이 보잘것없었다.
니르갈의 공격을 한 번 막아냈을 뿐인데도 형체가 흐릿해질 정도로.
하지만 다 죽어가는 신수일지라도 병기를 소환하는 것은 가능했다.
– 일단 아머드폼을 소환하겠다. 이야기는 나중에 마무리 짓도록 하지.
“응… 사르미아! 세계수 격납고의 봉인을!”
이세리아의 외침에 사르미아가 곧바로 세계수에 걸려 있던 봉인을 해제했다.
그리고 제온의 몸이 빛나더니, 그의 아머드폼, 신수병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전고 30m, 전장 16m, 전폭 12m의 거체가 솟아오르고 니르갈의 진녹색 눈동자가 높이를 맞춰 마주 본다.
고동색 몸체 위로 덮인 황금색 갑주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머리와 무릎 관절을 보호하는 푸른색 크리스털들이 단단하게 자리 잡는다.
그리고 신수병기 제온의 트레이드마크인 거대한 망토까지.
오랫동안 가동되지 않아 기체에선 삐걱거리는 쇳소리가 들렸지만, 관리 상태는 훌륭했다.
– 사르미아가 고생이 많았군. 매일매일 관리한 티가 나.
“…….”
– 죄책감은 내려둬라. 눈앞의 적이 우선이니.
“응. 알겠어.”
– 싱크로 시스템 가동하겠다.
신수병기의 운용권이 이세리아에게 넘어갔다.
그녀는 곧바로 니르갈을 향해 기체의 방향을 틀었다.
다음 순간. 제온의 다리 부분에서 뻗어 나온 가지들이 바닥으로 뿌리내려 거체를 고정한다.
그런 다음 명치 부분의 개폐구가 열리고, 엄청난 양의 소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신수 제온의 권능이 대포처럼 쏘아져 니르갈의 몸체에 직격했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