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249)
23. 흰 꽃의 맹세
리지는 일단 시원하게 내지른 다음, 뒤늦게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자각했다.
차라리 홍시나 홍당무가 덜 빨간 것 같은 얼굴로 푹 고개를 수그린 채 들지 못했다.
마치 이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그걸 제게 왜…?”
하지만 뒤이은 이세리아의 당황 섞인 음성은 이게 현실이라는 듯,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는 듯 그녀를 끌어내렸다.
“굳이 지금… 남자를……?”
고고한 귀족 영애가 야심한 시각 상관의 거처까지 찾아와야만 했던 그 중차대하고 시급한 고민이 ‘남자를 자빠트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리 친하지도 않은 이에게 내뱉었다는 걸 인지한 순간 리지는 선 채로 죽었다.
그리고 하얗게 질려 버린 리지의 상태가 심상치 않다는 걸 감지했는지 이세리아는 잠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담요 하나를 가지고 나와 리지에게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부족의 미설 노파 중 심리상담에 능한 의술사가 있습니다. 일단 가셔서 진단부터 해 볼게요.”
리지를 정신과로 끌고 갔다.
“…….”
나는 사라져 버린 두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뭔가 일이 이상하게 꼬인 것 같긴 한데, 어쨌든 잘 해결된 거 맞겠지?”
나는 품속에 숨어든 하니앤에게 속삭였으나 녀석은 조그마한 주둥이로 하품이나 쩍쩍, 하고 있을 뿐이었다.
곧바로 숙소로 침입하려던 나는 잠깐 멈칫했다.
“이세리아가 함께라는 건, 안에 제온도 남아 있다는 뜻 아니야?”
– 그렇겠지.
이세리아가 장로의 거처를 텅 빈 채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아마 그런 연유였을 거다.
산 넘어 산이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하니앤에게 물었다.
“너, 앞에 애들이 했던 것처럼 제온 밖으로 빼낼 수 있겠냐…?”
–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니?
“그럴 필요가 없다니?”
– 제온을 밖으로 꺼내는 것보다, 설득하는 게 쉽다는 뜻이란다. 제온은 사르미아의 신수도 아닐뿐더러 그 지팡이가 엘프들에겐 상징적으로 중요한 거지만, 신수들에겐 그저 유물일 뿐이니. 마신군과의 전쟁보다 우선할 순 없지. 네가 가져간다 한들 신경도 쓰지 않을 거란다.
“그래?”
– 가서 가져오마. 내가 부탁한다면 아마 큰 고민 없이 비밀도 지켜 줄 것이야. 네겐 빚도 있으니깐.
“제온이 나한테 뭔 빚을 졌는데?”
– 이세리아를 자극해 그를 깨워 주지 않았니. 네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제온은 그대로 소멸해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란다.
“그럼 잘됐네. 가서 가져와. 단속 잘하고.”
– 걱정 붙들어 매렴.
하니앤은 하품을 하고는 작아진 몸 그대로 거처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입에 사르미아의 지팡이를 물고 나왔다.
그녀의 말대로 제온이 크게 신경 쓰지 않은 모양이다.
“아우 이쁜 것. 훌륭하다. 잘했어. 상을 줄게, 아 해.”
– 또 개 취급을….
하니앤은 구시렁거리면서도 내가 주는 애완용 간식을 잘만 받아먹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녀석이다.
아주 작은 소요가 발생하긴 했지만, 그날 저녁 삼신기… 아니 세 개의 목표 아티팩트는 제대로 집결지로 도착했다.
작은 소요라 함은 말 그대로 그다지 신경 쓸 일 없는 아주 가벼운 해프닝이다.
리지가 엘프 정신과 의사에게 끌려간 일이나.
어째선지 아카샤가 퉁퉁 부은 눈으로 돌아온 일.
씨씨가 묘지를 파헤치는 밤 짐승으로 몰려 경비병의 불화살에 털을 새카맣게 태운 일.
그리고 정령들의 안식처를 훼손했다는 죄책감에 온종일 우울한 얼굴로 돌아다니는 정령왕의 후계자의 일 등등.
별일 아니었다.
중요한 건 빠르고 안전하게 목표였던 아티팩트들을 확보했다는 것이었으니까.
아티팩트 운반을 맡은 아이아나가 장물들이 묻힌 땅을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물었다.
“있잖아. 정말 괜찮을까? 괜히 엘프들에게 밉보이게 될까 봐 걱정스럽네.”
“괜찮아. 그들은 아마… 이 일을 최대한 덮고 조용히 넘어가려 할 거야. 엘프들은 은혜를 갚는 종족이니까. 좀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문제없어.”
“…놀랍네.”
“내 전략이?”
“아니. 양심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재미없는 농담에 내가 인상을 와락 구겼으나, 아이아나는 진지한 표정이었다.
“좀 친해졌다고 막말하는 건 어디서 체계적으로 배우기라도 하냐?”
“아마도 자연스럽게 익히는 거지?”
그녀는 푸흐흐 웃고는 다시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아이아나의 걱정과 달리, 일은 아주 순탄하게 진행된 거다.
이제 남은 건 완전범죄를 완성하는 일.
즉, 오리발 내밀기이다.
* * *
간밤의 소란은 해가 중천에 떴을 때 즈음 되어서야 수면 위로 떠 올랐다.
부지런한 양반들이 일찍부터 합동 장례를 치른 뒤, 페아타 로아의 경비병들이 어젯밤의 흔적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당연히 발각될 일이었다.
흔적을 지우고 수습까지 하기엔 너무 시간이 촉박했으니까.
“어찌 이런 불경한 일이….”
엘프 족장의 상징인 ‘아마릴리스의 로드’가 도둑맞았다.
세계수 인근 토지가 파손되고, 무덤이 도굴당했다.
그 사실에 직면한 엘프들은 발칵 뒤집혀 곧장 외부인들을 의심했다.
“어젯밤 발생한 이상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외부자들의 소행이 분명합니다.”
“이제라의 병사들을 조사하도록 협조를 요청해야 합니다.”
“소지품과 어젯밤 행적을 확인하도록 허해 주십시오.”
엘프는 도리를 아는 종족이다.
자신들을 위해 먼 길 달려와 목숨을 걸고 싸워 준 우방을 의심해야 한다는 것.
그게 얼마나 불합리하고 무례한 일이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래서 ‘취조’나 ‘추궁’이 아닌, ‘조사’와 ‘협조’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그만큼 어젯밤 발생한 세 사건이 중차대하다는 방증이다.
염치 불고하고 은인들을 의심하고 소지품을 검사해야 할 만큼.
“…….”
사르미아는 최고전사들과 마을 지도자들을 한군데 모아 두고 고심에 빠졌다.
이세리아가 이 자리에 없는 게 어쩌면 다행인 일이다.
만약 그녀가 들었다면… 제법 속상해했을 테니까.
“저희를 구하겠다고 한걸음에 달려와 목숨 걸고 싸운 은인들입니다. 그들을 치죄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장로님.”
“어찌 은인들을 도굴꾼, 절도범으로 만들겠어요? 저희의 관리 소홀과 경계 부족 탓이라 생각하세요.”
“…….”
“잘되었습니다. 이번 기회로 저 자신의 성장을 돌아보는 계기로 만들어야겠어요. 장로인 저부터가 그런 유물에 의존하고 있으니, 저희가 점점 약해진 일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이것 또한 여신의 뜻일 테니까요.”
사르미아가 이렇게까지 말하자 원로들도 더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 * *
내 예상대로 엘프들은 범인 색출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저 귀환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이제라군이 한데 모여 있을 때, 간부급 중 하나가 ‘간밤에 장로님이 갖고 계시던 상징물이 사라졌으니, 혹 수상한 자를 발견하였거나 소재의 행방을 알게 되면 공유해 달라’고 언질하고 돌아갔을 뿐이다.
그 말을 들은 이세리아는 어깨에 올라탄 제온에게 뭐라고 물어보았으나, 제온은 고개를 저었다.
하니앤이 입단속을 제대로 시킨 모양이다.
그리고 나는 경악을 한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보는 주디의 시선을 애써 외면했다.
녀석의 표정에 ‘설마? 에이 아니겠지? 진짜 아닌가? 러셀인데?’ 이런 의식의 흐름이 엿보였다.
결국 참다못한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솔직히 말해 봐. 설마 네가 그랬니?”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내 시치미에 주디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는 싫다니깐.
“나 아니라니까.”
“근데 왜 시선을 피해?”
“눈이 부어서 너무 못생겼잖아. 장례식 가서 얼마나 운 거야? 대체 누가 엘프들이 예쁘다고 거짓말했는지.”
“야아!!”
“…귀 안 먹었다고.”
내 너스레에도 주디는 반드시 진실을 파헤치고 말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어제 네가 그 이야기를 한 다음에 바로 장로님의 아티팩트가 도난당했어. 그런데 아니라고?”
“아니라니까 자꾸 생사람을 잡네. 증거 있냐? 어제부터 진짜 신경 건드리네.”
이대로라면 끝까지 캐물을 기세에 내가 일명 ‘방귀 뀌고 성내기’ 작전에 돌입했다.
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주디가 움찔했고 곧바로 휴고와 파가 끼어들었다.
“그만해. 주디.”
“하지만-”
“러셀이 아니라잖아. 쟤가 조금 과격하긴 해도 거짓말은 한 번도 한 적 없어.”
…내가?
아니, 많은데…?
나는 다소 양심에 찔렸지만, 부러 눈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하기로 했으면 완벽하게 해내야 일류다…!
“…너희는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니까 쉽게 말할 수 있는 거야.”
두 사람의 만류에도 주디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자 우리의 주인공 휴고가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나무라기 시작한다.
“주디. 나 좀 부끄러워지려고 해. 이러니 오죽하면 러셀이 내게 어제 그랬을까 싶네. 같은 동료를 의심하고 분대원은 분대장의 말도 들어주지 않으니까.”
“그래, 주디. 이건 휴고 말이 맞아. 아무리 러셀이라도 지키는 선이 있다.”
이놈들은 나를 한바탕 의심하더니, 갑자기 자기들끼리 열띤 토론 끝에 자기반성을 하고 자빠졌다.
아무쪼록 동기 놈들의 의심은 무사히 넘어간 것 같―
나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이한 위화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1분대원들의 표정이 전부 죽을죄라도 지은 것처럼 죄책감 가득한 표정이다.
이것들은 진짜 한번 말하면 들어먹지를 않는다니까.
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아머드 헬멧을 착용한 뒤, 분대 전용 채팅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야야, 표정들 관리해라.」
곧바로 아카샤의 댓글이 달린다.
「저 너무 양심이 아파요….」
「네가 선택한 분대장이잖아. 악으로 깡으로 버텨.」
「내가 선택한 적 없어…!」
「다시 말하지만, 표정 관리해 공범들.」
「……엄마.」
우리가 떠드는 사이 귀환 준비가 끝났다.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어도 엘프들은 최선을 다해 배웅 행렬을 꾸렸다.
사르미아는 이세리아와 생도분대원들, 그리고 왕궁호위대 한 명 한 명에게 짧게라도 눈을 맞추고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 때문에 출발이 다소 늦어졌지만, 불만을 표하는 인사는 없었다.
생도분대원들 차례가 되었을 땐 한 명 한 명 이름을 부르며 여신의 축복을 바란다는 덕담까지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여자의 마음을 가벼이 여기는 건 나빠요.”
“제가요?”
나한테만 빤한 시선을 보내며 이런 영문 모를 소리를 던지는지는 모를 일이다.
“제가 언제―”
“하지만 던 블라이아는 일처다부든 일부다처든 인간의 문화에 구애받지 않으니, 필요하다면 국적을 옮기는 것도 방법일 수 있겠네요.”
“사르미아.”
“후후, 농담이야.”
이세리아의 지적에 사르미아는 가볍게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나는 머리를 굴리다 홱 고개를 돌려 아카샤를 바라봤다.
뭔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면 그녀가 유력한 용의자다.
그녀는 어젯밤 라면을 잔뜩 먹고 잔 사람처럼 얼굴과 눈이 퉁퉁 부은 채로 내 시선을 자연스레 회피했다.
모든 분대원에게 인사를 마치고 그녀는 이세리아 앞에 섰다.
“와 줘서 고마워. 이세리아.”
“…사르미아.”
“돌아가면 많이 바쁘겠지? 그래도 가끔 와서 얼굴이라도 비춰 줘.”
“그럴게.”
“그리고 꼭 기억해 줘. 우리는 네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너를 사랑해.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다들 듣고 있는데.”
사르미아의 낯간지러운 말에, 이세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그녀를 배려해 못 들은 척 딴청을 피워 주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나, 이제는 도망치지 않아. 네가 그랬듯, 물러서지 않고 모두를 위해 끝까지 싸울 거야. 이 전쟁이 끝나든, 내 목숨이 다하든. 마지막까지.”
맹세와도 같은 말에, 사르미아는 해사하게 웃으며 그녀의 볼에 손을 올린다.
“기억해 이세리아. 지금은 황폐해도 겨울의 숲이 아름다운 이유는.”
“언젠가 다시 꽃이 피리라는 희망이 있으니까.”
두 사람은 문답하듯 대화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껴안았다.
나는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저 대사는 원래 원작에서 사르미아가 죽어가며 이세리아에게 남겼던 대사였다.
이야기는 바뀌었지만, 그럼에도 메시지가 전해졌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했다.
두 사람이 포옹하는 동안, 주변에선 조용한 손뼉 소리가 이어졌다.
마치 그 모습은 막이 내린 뒤, 커튼콜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세 존재의 고구마 잔치로 이루어진 에피소드지만, 나름대로 얻은 게 있는 최선의 결과라 생각됐다.
작품의 후반부는 많은 이들의 죽음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지만 원작에서든 소설에서든 죽음으로 맺음된 이야기라 할지라도, 반드시 누군가 죽어야만 그 서사가 완성되는 건 아니었다.
그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출발들 하시죠. 평생 못 보는 것도 아닌데. 이러다 해지고 도착하겠어요.”
“…진짜 분위기 깨는 건 소질 있다니까.”
내 독촉에 동기 중 누군가가 구시렁거렸다.
사관학교의
슈트 입는 영웅님 26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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