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4)
2. 눈떠 보니 종말 엔딩
나는 이리저리 짱구를 굴리다가 결국 단순히 정리했다.
내 소설 설정 중 일부가 변했고, 그 변화를 마주한 순간 정보가 업데이트 되는 빙의자를 위한 혜택 정도로.
아무튼 결론.
러셀 애시그린은 대기만성의 성장형, 왕귀형 캐릭터다.
이러니 소설 속에 등장시킬 수가 있나.
전투씬을 치열하게 묘사하려면 싸움이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 버티기만 해도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지는 캐릭터가 있다?
애초에 초보 작가로서 페널티를 먹이지 않고서는 활용할 수가 없는 캐릭터였다.
그래도 구르고 굴러 성장하는 주인공이나 삼류 엑스트라, 악역에 빙의하느니 차라리 백 번 다행인 일이었다.
전지적 작가 시점처럼 등장인물들의 상태를 볼 수 있었던 캐릭터.
망해 버린 세계관에 반전을 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스터에그. 혹은 데우스 엑스 마키나.
하지만 철저한 나태 설정 때문에 무대 밖으로 밀려난 인물.
만약 독자들의 원혼이 날 이곳에 보낸 거라면, 러셀 애시그린에 빙의한 것은 우연이라기보단 필연이다.
하지만….
그럼 뭐 하는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신체 나이 18살에도 오십견이 오기에 충분한 감옥 바닥에서 냉기를 느끼며 자는 것뿐.
그렇게 찬 바닥이 도가니에 얼마나 안 좋은지 절절히 느끼고 있을 무렵.
꼬박 하루 정도가 지난 다음에야 나는 철창 밖으로 꺼내졌다.
“간수장님. 심문실로 죄인의 신병을 인도하라는 전언입니다.”
날 이곳에 가둔 자가 공문을 들고 와 간수장에게 내민 뒤, 양옆에 병사들이 밀착했다.
나는 손을 내저어 차례대로 떠오른 엑스트라들의 상태창을 없앤 뒤, 양옆에 시커먼 남자에게 팔짱을 당한 채로 질질 끌려갔다.
중간중간 과거 엄마 아빠 손을 잡던 추억을 되새기며 양발을 들고 점프해 보았으나 자괴감만 들어 이내 그만두었다.
“들어가라.”
두 손은 여전히 구속구로 결박된 상태.
의자 두 개와 탁자 한 개뿐인 밀실에서 나는 다시 기다렸다.
무슨 예비군 훈련 온 것도 아닌데 대기의 연속이다.
지겨워 죽겠네, 라는 생각이 들 즈음.
끼이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심문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나는 감탄과 함께 기이한 감정을 느꼈다.
반가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복도의 불빛을 등진 사내가 점점 가까워진다.
포니테일처럼 질끈 묶은 칠흑 같은 검은 머리, 꿰뚫는 듯한 금빛 눈동자, 그리고 제 몸의 절반은 넘을 듯한 기다란 검을 들고 들어선 이.
단번에 그의 정체를 파악했다.
‘빌트레드 다이에른.’
원작 스토리에서는 주인공 라스를 돕다가 반복되는 세계에 환멸을 느껴 주인공을 배반하는 영웅.
게임에서는 무지막지한 광역 스킬 구성으로 흔히 쫄작이라 불리는 노가다에 특화된 캐릭터였다.
워낙 오래 써 온 만큼 제법 아꼈던 캐릭터이기도 했다.
화면 속에서만 봐 왔던 캐릭터가 눈앞에 실사판으로 등장한 것은 꽤나 생경한 경험이었다.
‘팬픽 속에서 이놈은 유능한 대장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 특별히 배신하거나 활약하는 에피소드도 없고.’
러셀 애시그린의 후견인 정도로 설정집에 적어 놓았던 기억이 난다.
만약 실제로도 그렇게 된다면, 공개된 내용뿐만 아니라 설정집의 내용들도 이 세계에 구현되어 있다고 봐야겠지.
“반갑다.”
짧은 인사였지만,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순간 움찔하고 말았다.
이 세계의 명백한 최강자 중 하나.
아마 훈련받지도, 제대로 몸에 적응하지도 못한 나와는 하늘과 땅 같은 격차가 있을 거다.
빌트레드는 내 맞은편에 앉아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름.”
잠시 고민하던 나는 마찬가지로 차분하지만, 예의 바른 어투로 답변했다.
내 혁명에, 아니 내 빙의 라이프에 단두대는 필요 없다.
물론 빌트레드가 러셀의 목을 베어 버리는 사건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러셀. 러셀 애시그린입니다.”
내 대답에 빌트레드가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문서들을 뒤적거렸다.
그는 아마도, 기억을 더듬고 있을 것.
잠시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가 천천히 다시 시선을 던졌다.
“마인 활동은 언제부터 했지?”
“잠깐만요. 마인이라니.”
나는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짐짓 놀란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 세계관에서 마인이라는 단어는 의심의 여지 없는 사망 버저였다.
누구든 간에 마신의 끄나풀, 졸개, 추종자 등등 마신과 관련된 꼬리표가 붙으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한다.
이 거대한 왕성 지하 감옥에 갇혀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가격리 겸 사회적 거리두기를 평생 진행하게 될 터였다.
“저는 마인 따위가 아닙니다.”
“증명할 수 있나?”
나는 입을 다물고선 곰곰이 생각하다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렸다.
“마신 개새끼. 마신 쓰레기. 마신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놈. 사지를 찢은 다음 몸을 조각조각 내 개 먹이로 던져 줘도 모자랄 새끼.”
“…….”
잠시의 침묵.
나는 명색이 대장군 앞에서 너무 말을 험하게 했나 잠시 고민했다.
“장난이 지나치군.”
“진심입니다. 마땅한 증명 방법이 없어서요.”
“고작 그런 말장난으로 넘어갈 만큼 가벼운 사안은 아니지만, 솔직히 속은 시원하네.”
“그렇죠?”
빌트레드가 피식 웃자 러셀도 마주 웃어 주었다.
“성역엔 왜, 어떻게 들어갔지?”
“그냥, 개 같은 마신 놈의 상판대기를 한번 보고 싶었습니다.”
이것은 캐릭터의 정사(正史)다.
실제로 러셀은 모종의 사건을 계기로 봉인된 마신상에 침을 뱉기 위해 성역에 침범했다.
“신원 증명을 할 수 있나? 출신 마을을 말해 봐.”
“이제라. 들숲마을입니다.”
“부모의 직업은?”
“아버지는 사냥꾼이었습니다. 어머니는 필부(匹婦)였고요.”
내 대답에 빌트레드가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냈다.
“단순 사냥꾼의 자제라기엔 체능이 제법 훌륭한데. 무기도 없이 앙카라를 단 일격에 척살했다지. 마수 사냥꾼이었나?”
“짱돌로 뚝배기를 찍었습니다. 아, 머리요. 그러니 무기가 없었다고 할 순 없고요.”
이 방송용 말투 좀 고쳐야겠는데.
나는 최대한 할 수 없는 대답은 피하고 에둘러 답변했다.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가 환한 웃음을 내보였다.
“신기하단 말이지.”
“네?”
“분명 처음 보는데. 이름도 낯설고. 그런데 너는 왜 나를 반가워할까?”
“…….”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분명 무표정하게 잘 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반가움이 표정으로 드러난 모양이다.
“나를 어떻게 아는지에 대해 먼저 묻고 싶지만… 그보단 먼저 확인할 게 있어서 말이야.”
빌트레드는 어느새 돌아온 병사에게 귀엣말로 무언가 보고를 듣더니 다시 한번 빤한 시선을 보냈다.
“러셀 애시그린. 이제라 남부 들숲마을 출생. 부친은 칼슨 애시그린. 마신 전쟁 이후 발발한 후속 전투에서 전사했군. 모친은 세니아 애시그린. 6개월 전 출몰한 마인에게 당한 저주로 고생하다 마을에서 병사했고.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 뒤 방황하다 훈련소 입대를 앞두고 행방불명.”
“…….”
“군사훈련 기피성 도주인가? 그건 죄질이 상당히 나쁜데.”
“…순수한 사고였습니다. 입소장을 받지 못했거든요.”
거, 내가 설정한 거지만 다시 들어도 겁나게 슬픈 가정사네.
나는 빌트레드의 놀라운 수준의 정보력에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시그린이라, 귀에 익다 싶더니 칼슨의 자식이었어.”
“부친을 아십니까?”
“잘 알지. 용감한 전사였으니까.”
나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러셀의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건, 정사대로 빌트레드가 내 후견인이 될 거란 뜻이었으니까.
그 순간이었다.
찰나의 순간, 온몸을 휘감는 강렬한 기세에 반사적으로 몸을 뒤쪽으로 날렸다.
뒤이어 밀실에서 바람이 불어오고, 잘린 앞섶이 팔랑거렸다.
빌트레드는 언제 빼 들었는지 모를 검을 다시 회수하며 흥미롭다는 듯 웃었다.
“와, 죽을 뻔했다.”
바지에 오줌을 지릴 뻔했다.
방금 공격을 피한 건 100% 이 몸뚱어리 덕분이다.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사냥꾼의 일족 만세다.
더불어 내 3렙 방광도.
“전투 슈트도 없이 감각만으로 피해 내다니. 확실히 칼슨의 아들이 맞는 것 같네.”
“설마 진위를 파악하려고 공격을 갈기신 겁니까?”
빌트레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친구 아들내미를 죽였으면 어쩌려고요?”
“자식 농사에 실패한 전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도했겠지.”
이 성격 파탄자 새끼가…….
아무래도 빨리 벗어나야겠다.
나는 신원 증명이 끝났으면 허튼수작 말고 빨리 보내 달라는 눈빛을 강렬하게 쏘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차분하게 가라앉은 얼굴로 담담히 읊조릴 뿐이었다.
“지난 20년 전에 일어난 전쟁 이후, 우리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마신의 끄나풀들과 저열하고 질척거리는 전쟁을 이어 왔다. 어떤 놈은 의심을 피하려 위장 결혼에 애까지 낳아 그 애를 성도에 집어넣었고, 어떤 놈은 입대해서 지휘부까지 올라 끝끝내 배신했지.”
이어진 빌트레드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친구? 부모? 자식? 놈들이 의심을 피하고 인류를 배신하는 데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핏줄은 네가 마인이 아니라는 증거로는 부족해.”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마인 따위가 아닙니다.”
“단지 칼슨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완전히 용의선상에서 벗어날 순 없다는 뜻이야.”
답답해 뒤지겠네.
그 말은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설마 뭔가 잘못된 건가. 나비효과가 일어날 만한 행동을 한 게 뭐가 있지?
“하지만….”
빌트레드는 감상에 젖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일별했다.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이 스치듯 떠올랐다가 침잠한다.
“과거 전우의 아들에게 한 번의 자비는 베풀어 주마. 이것은 여신을 위해 용감하게 싸워 이기고 수많은 동료의 목숨을 구했으나 끝내 영광 대신 희생을 택한 영웅, 네 아비를 위한 헌정이니. 혹 네가 마신의 끄나풀이라면 절대 발각되지 마라.”
“그 말씀은….”
“석방이다. 러셀 애시그린. 단, 한동안 네게 감시가 붙을 테니 몸가짐을 조심하도록.”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그 철저하기로 정평 난 대장군이 마인 의심 분자를 석방한다는 건, 완벽하게 내 뒤를 봐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친우의 아들 존재를 자각한 이상, 그는 계속해서 러셀을 주시하다 영웅 사관학교에 입학할 수 있도록 후견하게 될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삼촌.”
아빠 친구면 삼촌이다.
무릇 삼촌에게 덕담을 이만큼 들었으면 용돈을 받아내는 게 한민족의 정이자 역사다.
“그나저나 처음 만난 친구 아들, 용돈 좀 주실 생각 없으세요?”
내 마지막 말에 빌트레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자, 일해라.
네 역할을 다해, 후견인 녀석아.
《대장군 빌트레드》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