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61)
9. 인간의 편에 선다는 것.
스산한 바람이 발밑을 쓸고 지나간다.
‘이교도 연구회’ 동아리 구역으로 가는 길에는 흔한 가로등 하나 없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오솔길 위를 비추는 건 오로지 달빛뿐.
달빛을 내려받은 에뜨랑제의 모습은 흡사 비운에 빠진 주인공, 그 자체와도 같았다.
기억도 나지 않을 어릴 적, 마신군의 잔당에게 친부모를 잃었다.
혼자가 되었다는 자각도 희미할 어린 기억 속 그녀에게 손을 뻗었던 양부 또한 사도의 손에 스러졌다.
그렇기에 제게는 자격이 있다고, 앞으로는 피도 눈물도 흐르지 않는 냉혈인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며 선 자리다.
소녀 에뜨랑제는 죽었고, 전사 에뜨랑제만 남기리라.
그러한 각오로 선 자리였다.
그렇기에 나와 눈 마주친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차마 비난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후배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어요.”
착 가라앉은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선배님. 제가 선배님의 슬픔을 모두 이해할 순 없지만… 이건 아니에요. 잘못된 행동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정사 속 대사가 오고 갔다. 일신의 안위를 알 수 없는 로벨리아를 구하러 가기 위한 휴고의 간절한 설득.
그리고 미래의 히로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에뜨랑제의 단호하고도 냉정한 대답이 돌아온다.
“저는 비키지 않을 겁니다.”
“선배!”
“이것이, 제 아버님을 위한 마지막 추모곡이니.”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나의 시신을 짓밟고서야 앞으로 향할 수 있을 거예요.”
그저 대지를 지키는 수호목처럼 그 자리에 올곧이 서서 검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휴고.”
그 순간 정사의 진행을 깨트린 건 나였다.
내 부름에 휴고가 울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로벨리아는 아직 안전해.”
그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번 에피소드에서 로벨리아의 목숨이 위협받는 일은 없다.
이건 모두 마족의 존재를 파악한 레몬 애시그린이 로벨리아가 마신을 소환할 그릇으로서 적합한지를 판단하기 위한 무대, 즉 쇼케이스다.
앞으로도 로벨리아가 위험에 노출되는 시발점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마신의 그릇에 적합하다고 판단된 그녀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일은 없다.
다만 그릇임이 밝혀진 이후 발생하는 무자비한 폭력.
내가 그들을 도우려는 건 로벨리아가 깨어난 후 겪을 모욕만큼은 당하지 않게 하고 싶어서다.
물론 위선이다.
“선배는 내가 맡을 테니까, 너는 이쪽 길로 쭉 달려가면 돼.”
내 말의 진의를 깨달은 휴고가 다시금 각오를 다진다.
또다시 친구들의 도움을 받는다.
고맙지만, 동시에 미안하다.
그런 표정이 시시각각으로 얼굴에 드러났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고무시켰다.
“앞쪽에 있는 인간들도 만만치는 않을 거야. 그래도 포기하지 마라. 너는 할 수 있다.”
“응. 절대, 포기 안 할게.”
휴고는 어린아이처럼 올곧게 대답했다.
안다.
그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그저 가식 어린 응원이었다.
네가 가려는 길을 지지한다.
네가 바보처럼 지키려는 신념을 지지한다.
네게 지워진 무거운 사명을 이뤄내려는 노력을 지지한다.
“가라. 가서 네 여자를 지켜. 그리고 딴 데 한눈팔지 마. 그게 네 숙명이라고 생각해. 하렘 같은 건 안 된다.”
“…어? 응, 알겠어…!”
물론 네게 주어진 하렘의 운명은 안 지지한다.
이 자리에서 내 손으로 빚어낸 고구마 히로인을 박살 내고, 주인공의 조력자로서 다시 태어나게 할 것이다.
나는 창을 붕붕 돌리며 에뜨랑제를 향해 말했다.
“휴고는 보내주고 나랑 승부 보자고.”
“후배님과는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나도 마찬가지긴 해. 하지만 빌트레드 대장군이나, 아슬란 전 대장군이 싫어할 만한 짓만 골라서 하는 선배님이 정신을 똑바로 차리게 해 줘야 할 것 같네.”
“친구를 돕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째서 그렇게 심하게 말하는 거죠?”
“그래야 하니까. 내게도 일부 책임이란 게 있거든.”
에뜨랑제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절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앞으로 그녀를 지속적으로 괴롭힐, 후피집이란 액자 밖으로 꺼내 줄 작정이었다.
“선배, 난 죽어도 막을 거야. 날 죽일 각오로 덤벼.”
“후배님은 날 막을 수 없어요.”
“과연 그럴까. 전력을 다해야 할 거야. 난 선배가 기억하는 그때의 좆밥이 아니거든.”
에뜨랑제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가.”
내 말에 휴고가 엉거주춤 내 옆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에뜨랑제가 들어 올린 검 끝에서 소울 에너지가 넘실거렸다.
“보내지 않는다고 했어요.”
“선배.”
나는 한 발자국 내디디며 으르렁거렸다.
“선배, 그러다 진짜 뒤져. 그쪽으로 한눈팔면, 바로 심장을 찌를 거야.”
나는 경고가 허세가 아니라고 방증하듯 전의를 끝까지 끌어올렸다.
[사냥의 시간]이 시작되고 그녀의 몸 곳곳에 [포획의 눈]이 알려 주는 약점이 흰빛으로 점등한다.데이터상 전투력 차이는 고작해야 50 남짓.
그녀도 훌륭하게 성장했지만, 그보다 내 성장세가 월등히 빨랐다.
‘역대급 괴물’인 미마에게도 승리해 본 나다.
적어도 지금 1, 2학년 중에는 날 단독으로 제압할 사람은 없었다.
내 기세와 각오를 제대로 읽었는지 에뜨랑제는 휴고를 향한 견제를 멈췄다. 휴고를 막으면서 내 공격까지 받아낼 수는 없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머리 검은 짐승은 돕는 게 아니라고 하더니….”
“여기서 그 속담이 나오는 건 설정 오류고, 나는 갈색 머리야.”
나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며 동시에 도약했다.
[그림자 걷기]어둠 속에서 싸우는 건 내 전문이었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내 기척이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질 터.
당황한 곧바로 에뜨랑제도 뛰어온다.
그녀의 발목에서 ‘아머드 부츠’가 점등했다.
학기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대로 다루지 못해 버튼을 눌러 썼을 텐데, 이제는 능숙하게 소울 에너지를 개화한다.
역시나 주인공의 조력자답게 성장이 빨랐다.
파바박!
에뜨랑제가 휘두른 각격이 내 방패 위를 때렸다.
빠르긴 해도 미마의 총탄만큼은 아니다.
충분히 반응할 수 있었다.
나는 공중에서 회전하며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이번엔 빠른 속도로 찌르기를 해 오는 에뜨랑제.
검의 궤도를 따라 맞찌르기로 대응했다.
패기와 패기가 부딪히고 거대한 충격이 우리를 휘감았다.
충격파가 일으킨 모래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먼지구름이 걷히고 나니 경악으로 물든 에뜨랑제의 표정이 보인다.
“벌써 패기를 개화했어…?”
사관학교에 입학한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이다.
그녀의 기준에서는 훈련소 입소 전까지 냉병기도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인간이니, 분명 말도 안 되는 성장세라 느끼겠지.
“그때도 느꼈지만, 정말 대장군께서는… 이런 괴물을 어디서 데려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도 느꼈지만, 참 실례한다니까.”
“객기로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니… 진심으로 응하겠습니다.”
“바라던 바야.”
나는 오싹거리는 느낌에 입꼬리를 씩 올리며 웃었다.
변태처럼 느껴지지만, 대련이 아닌 진검승부를 펼칠 때 즐거웠다.
처음 이세계에 빙의했을 땐 전투 한 번 한 번이 두렵고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점점 강해지는 내 모습과 강한 상대를 버티고 이겨냈을 때 느껴지는 승부사의 감각은, 짜릿했다.
훈련용 보호구를 걸치고 손속에 사정을 둔 채 강함을 겨루는 훈련 때는 느낄 수 없는 쾌감이다.
팽, 소리가 날 정도로 강렬한 찌르기에 에뜨랑제의 몸이 두어 발 물러섰다.
그녀의 얼굴이 점점 더 경악으로 가득 찼다.
허울뿐인 공격이 아니다. 맞으면 최소 중상이다.
중갑으로 몸을 보호하고는 있었지만, 아머드 메일과 비교하면 방어력이 형편없었다.
찌르고 휘두르는 창끝에서 쐐액거리는 파공음이 연이어 들렸다.
전력을 다해도 쉽게 닿지 않는 상대. 나는 마음껏 창을 휘둘렀다.
그녀도 나와 마찬가지로 속도 위주의 전투 운영을 하는 검사였다.
하지만 그녀와 나의 차이점은 에뜨랑제는 부족한 속도를 아머드 부츠로 보완한다는 거고, 나는 신체 자체가 속도전에 특화되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움직일 때마다 소울을 소모할 수밖에 없다.
빠른 속도를 얼마나 오래 유지할 수 있는가에서 차이가 난다.
[사냥의 시간] 2단계.내 공격이 한층 더 날카롭게 변모했다.
벌어져 있던 전투력 50의 차이가 좁혀지는 건 한순간.
나는 가볍게 창을 휘둘렀고 그녀는 가까스로 피해냈다.
월광쌍익 1호기의 창날이 허공을 가르자, 나는 곧바로 지면을 디딘 발바닥에 힘을 꽉 주고 창을 돌렸다.
순식간에 뒤쪽에 있던 창날이 회전하며 에뜨랑제를 가격했다.
“크흑.”
그녀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공격 패턴일 거다.
양날 창을 한 손으로 다루는 전사는 2학년이 아니라 사관학교를 통틀어도 찾아보기 힘드니까.
수세에 몰린 에뜨랑제가 한 번에 멀찌감치 거리를 벌린 뒤 권능을 전개했다.
눈빛이 변했다.
조금 전까지는 한 수 아래의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더 강한 상대를 죽이기 위한 결사의 항쟁 같다.
[중급 왕궁 비전 검술]그녀의 검 끝에서 아슬란 가문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검성식이 펼쳐졌다.
[난개(爛開)]미끄러지듯 접근하여 검의 궤적을 비튼다.
화려하지 않은 보법 위에 펼쳐지는 화려한 검술이 꽃처럼 피어났다.
수십 갈래로 이어지는 검의 꽃밭을 뚫고 한 점 찌르기가 패기를 담고 날아왔다.
화려한 검술에 현혹된다면 결코 잡아내지 못할 공격.
창과 방패 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공격에 나는 본능적으로 투지를 발현했다.
쩡!
검날과 몸이 부딪혔는데도 냉병기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에뜨랑제가 찌른 곳은 맨몸이다.
검 끝이 내 몸에 닿은 순간 분명하게 승리를 예상했을 거다.
하지만 에뜨랑제의 공격은 내 투지를 뚫어내지 못했고, 나는 곧바로 방패로 그녀의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뒤이어 내 창이 에뜨랑제의 어깨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저게 있었네.’
순간적으로 대미지를 반사하는 권능이 발현되자 나는 최대한 위력을 줄였다. 그리고 반사된 대미지에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피를 토했다.
에뜨랑제는 바닥까지 드러냈다.
이제부터는 내 시간이었다.
“멀티 소울 유저….”
내가 패기와 투지를 모두 다룬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에뜨랑제가 몸을 움츠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이대로 끝내기 위해 월광쌍익 1호기에 소울을 끌어모아 집중을 담은 채 집어던졌다.
근거리 투창.
자세가 무너진 에뜨랑제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그녀는 검을 쥔 채로 양팔을 들어 올렸으나, 내 창은 그녀의 검을 산산 조각낸 뒤 두르고 있던 갑주마저 박살 냈다.
변명의 여지없는 완벽한 패배에 그녀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검을 놓았다.
무기와 갑옷은 다 부서졌고, 소울은 바닥났으며, 옷도 갈가리 찢어졌다.
몸은 만신창이다.
“집중까지….”
나는 아직도 숨겨둔 카드들이 많았다. 그것이 숨겨지지 않고 기세로 훤히 드러났다.
내 몸을 휘감던 [사냥의 시간] 열기가 사그라들 때쯤, 코끝에서 달콤한 단내가 풍겨왔다.
상대의 전의가 꺾였다는 증거다.
“…세상은 참, 불공평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힘없이 떨어졌다.
때마침 밤비가 내렸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