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62)
9. 인간의 편에 선다는 것.
비라는 놈이 가진 힘은 참으로 기이하다.
어두운 밤, 편안한 이불 안에서 바라보는 비.
장례식장 밖에서 내리는 비.
그리고 패배한 뒤 하염없이 몸을 때리는 비.
한낱 물일 뿐인데, 어느 상황이냐에 따라 감정을 달리 건드린다.
에뜨랑제가 쓰러진 채 비를 맞는다. 몸을 일으킬 기운도, 의지도 없다는 듯.
지금 내리는 비는 생애 맞았던 그 어떤 것보다도 찝찝하고 무겁게 느껴졌다.
“많은 걸 바라진 않았어요.”
달과 별이 모두 가려진 채, 눈동자를 때리는 빗줄기 속에서 그녀는 구슬프게도 읊조렸다.
“그저 여신께서 부모를 앗아간 저를 가엽게 여겨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고 믿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걸어가 그녀의 옆에 주저앉았다.
“그때는 아직 제게 누군가를 지킬 힘이 없었으니, 다시 지키고 싶은 사람을 주겠노라고. 지킬 힘을 기르게 해 주겠노라고.”
지금쯤 피 터지게 고생하고 있을 휴고가 눈에 아른아른 밟혔지만, 그만큼이나 이 순간은 중요했다.
“델 위오는 제게 가혹하리만치 과분한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마치 죄인이 성모 앞에서 고해성사하듯.
“과분한 사랑에 보답하리라. 옥죄는 부담감을 이겨내며, 성장하고 있다 확신하였습니다.”
한 문장, 한 문장씩.
“하지만 또다시 모든 걸 잃어버렸습니다.”
힘없이 내뱉는다.
“이제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요? 복수?”
대답 없는 물음을 던지던 그녀는, 마침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호수처럼 맑은 눈동자로 내게 말한다.
“복수하려 했어요. 감정도 자비도 없는 복수귀가 되어 그것만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더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진 자가. 그것도 나와 똑같은 상처가 있는 자가 내 복수를 부정합니다.”
“…….”
“한 가지만 묻고 싶어요.”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용서할 수 있죠?”
주어와 목적어가 모두 빠져 있는 물음이었지만, 나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너는 마인에게 부모를 잃었는데, 어떻게 마족을 용서할 수 있느냐.
어째서 호의를 가진 자를 배신하면서까지 로벨리아를 감싸는 거냐.
그 당연한 질문에 대답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용서랄 것까지 있겠어. 그냥, 복수의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 되는 거야.”
네가 향한 복수의 방향이 틀렸다고, 분명하게 바로잡아 주는 것.
“선배도 뭐가 옳고 뭐가 틀린지는 구분할 수 있잖아. 2주면 충분히 알 수 있었을 텐데. 로벨리아 녀석이 얼마나 착한지.”
“…….”
“선배 아버지를 죽인 게 로벨리아야? 아니면 걔가 죽이라고 시켰어? 로벨리아는 마신군과 싸우기 위해 사관학교에 들어왔어. 훈련소에서도 우리와 함께 싸웠고.”
알량한 자비심 같은 게 아니다.
같은 편이기에. 그렇기에 감싼다.
단순한 논리였다.
“인간인 주제에 마신군의 편을 드는 마인도 있듯이, 마족인 주제에 인간의 편을 드는 마족도 있는 거야. 마인들은 마신군에서 대접받으며 떵떵거리고 사는데, 인간들은 왜 그렇게 하질 못하지? 속 좁은 놈들 같으니.”
마신군이 인간의 편에 선다는 건 그런 일이다. 인간이 마신군 옆에 서는 것과는 궤가 다르다.
마신군에는 목적만 있고 감정이 없다. 그들은 그들의 동료가, 혈육이, 배우자가 죽은 일에 고통받지 않는다.
인류의 배신자는 그들에게 그저 새로운 전력일 뿐이다.
인간은 다르다.
그들은 역사를 잊지 않는다.
마신군에게 받은 상처를 곱씹고, 아픔을 기억하고, 복수를 꿈꾼다.
그렇기에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냐고? 당연히 복수지, 제대로 된 복수. 이 멍청한 선배야.”
지금 이 순간, 나는 어쩌면 진세진이 아닌 완전한 러셀로서 동기화됐는지도 모르겠다.
진지하게 감정 이입해서 아무렇지도 않게 떠드는 내 모습이 민망하지도 낯설지도 않았으니.
“선배는 그냥, 단 한 번도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 결정해 본 적 없는, 떼밖에 쓸 줄 모르는 어린애일 뿐이야. 진짜 복수해야 할 대상은 외면해 버리고, 선배보다 약한 후배를 복수의 표적으로 삼아 자위하는, 비겁자지.”
“왜, 왜 그렇게 심하게 말하는 거예요…….”
칼날 같은 혀끝으로, 이미 한번 쓰러진 이를 완전하게 무너뜨린다.
“심해?”
그리고 다시 강제로 일으켜 세운다.
“선배는 나한테 감사해야 해. 만약 선배가 휴고를 막아서서 혹시라도 로벨리아가 죽기라도 했으면, 선배는 평생을 죄책감과 후회 속에서 살아가야 했을 테니. 정말, 죄 없는 이를 죽여 놓고도 멀쩡히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나는….”
“선배가 죽이는 거잖아. 외면하지 마.”
나는 그녀의 얼굴을 그러쥐고 똑바로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결국, 에뜨랑제에게서 울음이 터져 나온다.
끅, 끄윽.
맑은 눈동자를 가득 채운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고, 이내 뚝뚝 떨어져 내린다.
쉴 새 없이.
분함과 창피함에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려 하지만, 도리어 튀어나온 히끅거리는 딸꾹질에 이내 목 놓아 울어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고작해야 17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에게 못 할 짓을 한다는 죄악감에 감정이 요동쳤다.
명백하게 감정 과잉이다.
나는 분명 제삼자이고, 무대 밖의 관조자였는데 왜. 왜 이렇게 휩쓸리는 걸까.
에뜨랑제의 양어깨에 손을 올렸다.
비를 맞은 체온이 차다.
“지금부터 선배는 삶의 목적을 복수로 잡아. 선배를 딸 삼은 게 검성 인생의 최대 자랑이자 기쁨이셨다며. 은혜를 갚고 원한을 되돌려 주어야지.”
“…그걸 어떻게….”
‘너를 내 딸로 삼은 것이, 내 인생 최대의 자랑이자 기쁨이다.’
“우리의 목표를 통일하는 거야. 나는 선배의 복수를 돕고, 선배는 내 복수를 돕고.”
“…….”
“무너지지 마, 에뜨랑제 델 위오.”
그녀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돈해 주고 숙어진 고개를 들어 올린다.
양 볼을 붙잡아 정면을 보게 한 뒤, 눈을 마주치고 또박또박 역설했다.
선언하듯.
세뇌하듯.
“너는 명예로운 델 위오 가문의 마지막 일원이자.”
‘랑즈,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자식이고, 검성의 제자이며, 델 위오가의 적법한 후계자다.’
“정당하고도 합당한 검성의 후계자이고.”
‘실로 하늘이 내린 검재구나.’
“사도 카일론의 목을 벨 자이니까.”
에뜨랑제 델 위오는 다시 일어설 것이었다.
그녀의 권능, [흔들리지 않는 절개]라는 이름처럼 꼿꼿하게 일어나 전장을 향해 걸어 나갈 거다.
상실자의 눈빛은 사라지고, 각성자의 눈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 * *
‘늦지 않았어……!’
휴고는 ‘이교도 연구회’ 동아리 제단 위 기둥에 묶인 로벨리아를 발견했다.
다친 곳은 없는지 반사적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발밑에는 마력을 억제하는 마법진이 그려져 있고 얼굴엔 쓸린 듯한 상처가 보였지만, 그 외에 다른 큰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늦지 않았다.
그녀가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다음 찾아온 것은 참을 수 없는 분노였다.
그녀는 짐승처럼 묶여 있었다.
그런 그녀의 주변에 사관생도들이 괴이쩍은 분위기를 풍기며 맴돌고 있다.
휴고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이교도 연구회’는 해괴한 소문이 가득한 집단이다.
극단적일 정도로 마신군을 증오하는 자들이 모인, 극렬 행동주의자들.
동아리 고학년들이 임무에서 마신군 사냥에 성공하면 사체의 사지를 자른 뒤 학사 부지 안으로 밀반입, 동아리 구역 내 제단에 전리품처럼 전시한다는 건 모두가 쉬쉬하는 정설이다.
제단 위에 로벨리아가 묶여 있다. 그 주변에는 짙은 색 후드를 쓴 생도들이 가득했다.
“로벨리아―!”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른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공기를 울렸다. 그러자 샛노란 안광이 동시에 우수수 날아와 꽂힌다.
자신을 발견하고 흐느적흐느적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서야 휴고는 위화감을 느꼈다.
정상적인 사람의 움직임이 아니다.
그것은 흡사 광인들의 모습이다.
‘뭐에 홀린 건가? 뭔가 저주받은 사람들 같아….’
‘이교도 연구회’ 소속 생도들이 어딘가 뒤틀려 있다는 건 유명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이성을 잃은 광인이란 뜻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모습은 분명히 이상했다.
상황을 직시하자 정신이 또렷하게 맑아진다. 그러고 나자 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기분 나쁜 마기가 선연하게 느껴졌다.
확실하다.
이들은 조종당하는 중이었다.
“이단자… 심판을…!”
후드를 쓴 생도 하나가 휴고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는 곧바로 왼발을 들어 발바닥으로 괴인의 복부를 걷어찼다.
뒤이어 그의 머리 위로 공격형 마법 하나가 쏟아졌다.
휴고는 검을 눕혀 공격을 막았으나, 살갗이 벗겨지고 선혈이 튀었다.
쐐액―!
투사체가 날아온다.
그를 향해 날아온 탄환과 화살들은 깊은 상흔을 만들어 나갔다.
휴고는 핏물을 토하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30분도 지나지 않아 머리가 아찔할 정도로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가득 입었는데도, 괴인들의 공격은 멈출 줄을 몰랐다.
다행히도 까마득하게 어릴 적부터 내구성 하나는 튼튼했던 몸뚱이다.
어지간한 공격에는 상처도 잘 나지 않는 축복받은 튼튼한 몸이 이번에도 빛을 발했다.
몇 차례 공격이 쏟아진 뒤에도 휴고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다시 한번 로벨리아에게 향한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괴한들은 이성을 잃고 폭주 중이다.
덕분에 무방비한 로벨리아를 노리거나, 그녀를 인질로 잡는 사람이 없다는 건 그로서는 천운이었다.
‘내가 버티고 서 있으면 이들이 로벨리아에게 해코지하는 일은 없어.’
모두는 아니었지만, 개중에는 공격 한 번 한 번에 몸이 후들거릴 정도로 강한 선배도 있었다.
이들 모두와 싸워 이길 수는 없겠지만, 버틸 수는 있다.
견디고 버티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쓰러지지 않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이 유일한 장점이었으니까.
날이 밝으면, 누군가는 와 줄 거다.
나만 쓰러지지 않는다면.
“죽어― 이단!”
기다란 장검을 든 생도 하나가 권능을 발현하며 검을 휘둘렀다.
빠르게 휘둘러진 검격이 세 줄기, 네 줄기로 뻗으며 그를 덮쳤다.
[지휘의 일격]일시적으로 출혈이 멈췄다. 여기저기서 물 새듯 피가 흐르던 상처들이 아물고 뚝 떨어졌던 체력이 조금은 차올랐다.
비록 마수들에게 디버프를 거는 효과는 무용했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도 가뭄의 단비 같은 효력이다.
그러고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어 다시 한번 권능을 발현했다.
[바위 가르기]휴고의 양손검이 지면을 내리쳤다. 그러자 바닥이 갈라지며 튀어나온 파편들이 괴한들을 튕겨 냈다.
“으아아아!”
휴고는 더욱더 크게 고함을 질렀다. 마치 누군가 제발 이 소리를 들어 달라는 듯, 누구라도 좋으니 이 현장을 발견해 달라는 듯 발작적인 외침이다.
하지만 그의 외침은 등을 뚫고 나온 날붙이에 끊겼다.
또 한 번 피가 왈칵 쏟아진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