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68)
10. 왜들 이러세요?
현재 호메르는 그림로어 출신 훈련병들과 타 훈련소 출신 중 두각을 드러낸 몇몇 훈련병을 뺀, 그러니까 이름 한 번 등장할까 말까 한 엑스트라들과는 모두 서열 정리를 끝냈다.
즉, 수문장이자 전투력 측정기다.
이 전투력 측정기는 두고두고 유용하게 쓰인다.
호메르한테도 진 놈,
호메르나 이기고 와라.
넌 호메르 선에서 정리돼.
등등 응용 버전도 많다.
그야말로 조연과 엑스트라를 가르는 가늠자라고 보면 된다.
쓰러진 호메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누운 채 그대로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제 패배를 시인하듯, 몸을 일으키지도 못한 채 분통의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주먹으로 땅을 쿵쿵 두드렸다.
딱히 불쌍하지는 않았으나,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 느껴지긴 했다.
내가 만든 세상에선 그저 일회성 악역일 뿐이었는데, 어쨌든 그런 호메르에게도 나름의 삶과 배경, 그리고 동기가 존재한다는 게 느껴져서.
“약속 지켜라.”
데나스는 호메르를 제압한 뒤 다른 생도들에겐 강렬한 눈빛만 쏴 주고선 옷을 툭툭 털고 빠져나갔다.
“근데. 쟤 원래 이미지가 저랬나?”
뭔가 내 기억보다 한껏 무겁고 진중해진 느낌이다.
원래대로라면 전형적인 악역 스탠스로 사관학교 입학 초기에는 좀 날뛰면서 휴고에게 시비도 걸고 틱틱거렸어야 했는데, 얌전하다.
초반부 갈등의 주 구조도 ‘휴고 대 데나스’였을 텐데.
녀석이 워낙 얌전해진 탓에 측정기인 호메르가 더 날뛴 것 아닌가.
‘설마 이것도 나 때문인가.’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데나스의 입장에서 바뀐 건 훈련소 때 겪었던 나와의 대련뿐일 테니.
어쩌면 콘레드 소장이 잠잠해진 탓일 수도 있고.
“그나저나 참 탐나는 튼튼함이란 말이지.”
호메르의 동료들이 주변에서 뭔 짓을 해도 꿈쩍도 하지 않는 엄청난 재생 능력. 흡사 트롤의 후손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녀석이 딱히 빌런 짓을 할 생각이 없다면, 가능하면 미리 감아 놓고 싶다.
데나스가 주인공 팀에 합류하는 건 2학년 2학기 이후.
그러니까 거의 고학년 되기 직전에나 동료로 들어온단 소리다.
일찍 합류하면 여러모로 편하긴 할 텐데.
특히 2막에서 에뜨랑제의 빈자리를 녀석이 메울 수만 있다면….
나는 입맛을 다시며 휴고를 불렀다.
“휴고야.”
“응?”
“너 쟤 좀 감아볼 수 없냐?”
“감다니?”
“너 친화력 좋잖아. 쟤랑 좀 친해질 수 없겠냐고. 너희 동아리로 데려가면 어떨까 싶은데.”
“글쎄… 데나스랑은 훈련소 때도 친해지려고 해 봤지만, 워낙 낯을 가리는 친구라서 말이야. 일단 다시 시도는 해 볼까?”
“어. 그래도 같은 훈련소 출신인데 친하게 지내면 좋잖아? 할 수 있지?”
“그래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어. 딱 네 옆에 세워 두면 진짜 든든한 전위 라인이 완성될 것 같다.”
“그래. 해 볼게. 무자비하게 때렸던 러셀보다는 내가 다가가는 게 낫겠지.”
“내가 언제 그렇게 무자비하게 때렸다고 그래?”
어디까지나 정당한 대련이었어.
정당한 대련.
* * *
“세 개의 소울을 개화시켰다고 함부로 활용성을 넓히면 안 돼요, 러셀 생도. 그게 멀티 이상의 소울 유저가 가장 자주 저지르는 실책이거든요.”
「소울학 개론」 신임 교수 알렉사 러브레이스는 강의실 한쪽 구석에서 패기, 투지, 집중을 차례대로 펼치는 내게 조언했다.
“각각의 개화 방식을 저지, 절단, 관통이라는 목적에 맞게 사용하지 않으면 소울은 언젠가 러셀 생도의 의지에 반하며 날뛸 수 있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솔직히 알렉사의 말은 좀처럼 이해되지 않았지만, 일단 나는 그녀의 조언을 뼈에 새겼다.
‘패기로 공격을 막거나 투지로 적을 두드려 패지 말란 뜻이려나.’
사관학교에서 유일하게 트리플 소울 유저로 알려진 그녀다. 내 길을 앞서간 선배이니 오로지 그녀만이 내게 합당한 조언을 줄 수 있었다.
꼭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좋은 스승이었다.
아직 수강생 태반이 소울 개화는커녕 감각조차 못 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내가 낭비하는 시간이 안타까웠는지, 강의 끝부분에 20분씩 시간을 내 나를 봐줬다.
그 개인 교습은 내 빠른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고.
그만큼 감사한 마음이 컸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들 고생 많으셨고, 다음 시간에 봐요.”
“수고하셨습니다!”
생도들의 목소리가 우렁찼다.
본격적인 학기가 시작된 지 2달 하고도 2주.
알렉사의 수업은 다른 어느 수업보다 수강생 만족도가 높은 수업이었다.
수강생들의 소울 개화 비율도 총 수강생의 18%. 다른 강의에 두 배를 웃도는 비율이다.
교수는 성실하고 친절했으며, 심지어 그 결과마저 좋다.
‘내년부터 경쟁 치열하겠구만.’
나는 당연한 귀결을 떠올리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러셀 생도.”
수강생들이 쭉쭉 빠져나가는 강의실. 알렉사가 나를 불렀다.
“옙!”
그녀는 다른 생도들이 모두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용건을 꺼냈다.
“생도는 오늘 이후로 수업에 출석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만점으로 수료 처리하겠습니다.”
“네. …네?”
나는 갑작스러운 알렉사의 말에 반문했다.
“멍하니 명상하는 시간이 대부분인 걸 알고 있어요. 낭비하기엔 아쉬운 시간이죠. 그 시간에 개인 훈련을 더 이어나가도록 하세요.”
“그… 틀린 말씀은 아닌데요, 교수님. 마지막에 20분 정도 지도해 주시는 게 저한텐 나름 도움이 돼서요. 그거 들으려고 기다리는 건데요…?”
“러셀 생도는 진도가 지나치게 빨라요. 성실함과 의욕은 훌륭하지만, 과한 성장은 모래사장 위에 지은 탑이 될지도 모릅니다. 잠시 스스로를 돌아본다 생각하고 지금까지 배웠던 것을 반복적으로 숙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알렉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확실히 20분 동안 최대한 많은 걸 뽑아먹으려다 보니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흡수한 정보량도 만만찮았다.
확실히 장래 유망한 영웅은 다르구만. 납득했다.
“알겠습니다.”
“러셀 생도.”
“네?”
“생도는 우리 보물이에요. 좀처럼 만나기 힘든, 빛나는 재능을 가진 후보생이죠.”
“아하하… 과찬이십니다.”
“물론 이번 기수는 유난히 재능 있는 생도들이 많긴 하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러셀 생도가 돋보인다고 생각해요.”
내게 낯부끄러운 칭찬을 건네는 그녀를 바라봤다.
사감이 섞이긴 했지만, 그녀가 품은 이미지는 흡사 푸른 바다 같았다. 푸른 빛 도는 단발머리와 새하얀 피부. 그리고 왜소한 체격에 어울리지 않는 기사의 기질이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서로 어우러진다.
내가 만들어낸 캐릭터는 아니지만, 참 매력적인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속으로 덕질을 하는 사이, 알렉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다음 학기 때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당연히 교수님 강의 들으러 올 겁니다.”
“기대할게요. 강의 없다고 수련 게을리하면 안 돼요. 기억하세요. 가장 중요한 건?”
“기초다.”
“좋아요. 장래가 기대되는 우리 예비 성검기사단 후배님.”
“……네?”
자연스러운 영입 제안 템퍼링에 나는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와, 하마터면 깜빡 넘어갈 뻔.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강의실에서 빠져나왔다.
‘이로써 3과목짼가.’
사실 강의에 나오지 말라는 이야기는 지금 처음 들은 게 아니었다.
「체술」,「무기술」 입문 강의는 대략 2주 전쯤 수료 과정을 밟았다.
대련 결과가 점수로 반영되는 실습 위주 수업에서 다른 수강생들과의 격차가 너무 많이 난다는 이유였다.
즉, 3대 전공필수 과목을 모두 수료한 것이었다.
다른 전공과목인 「권능의 이해」, 「마신군 총론」은 이론과 필기 위주의 수업이고 「기갑병기의 이해」 과목은 한 학기 동안 수업이 세 번 있을까 말까 하니 사실상 1학기 전체가 텅텅 빈 거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다음 학기 장학생 전망도 낙관적이다.
‘…1학기 개꿀이네.’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개인 시간에 여유가 생겼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텅 빈 오후 일정을 마치고 농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농장 입구에는 각종 채소가 벌써 다 자라 수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음흉한 아카샤’를 갈아 넣은 결과물이었다.
씨앗을 심고 아카샤를 갈아 넣으면 일주일 안에 작물이 수확된다. 원래라면 거의 3~4개월을 소모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조금 통제가 어려운 독특한 캐릭터긴 하지만, 그 효율을 보니 어쨌든 영입하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카샤를 코리, 어셔스와 한데 묶어 식량 공급의 화수분으로 삼는다면, 최후의 전쟁 때 식량 관리가 상당히 편해질 테니까. 일종의 걸어 다니는 둔전(屯田)이다.
나는 주렁주렁 과실을 맺은 농장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본 뒤, 시선을 학신목으로 향했다.
학신목 옹이구멍을 가린 가림막 바깥으로 꼬리만 툭 튀어나와 살랑거리고 있었다.
미마는 진작에 전공선택까지 4과목을 모두 조기 수료하고 널널한 학사 생활을 즐기는 중이었다.
‘앞으로 더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겠네.’
이왕 서로 시간이 빈 김에 대련 횟수나 늘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옹이구멍 근처로 다가갔다.
내가 다가갈수록 꼬리의 흔들림이 빨라졌다.
아마 내 기척을 느낀 모양이지.
나는 씩 웃으며 미마의 꼬리를 장난스레 잡아당겼다.
“……!”
곧바로 미마가 삑 소리를 내며 학신목 입구를 부술 듯이 튀어나왔다. 얼굴이 벌게진 채 털을 빳빳하게 세우고 날 노려보는 모습이, 이게 날다람쥐인지 고양이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넌 왜 볼 때마다 늘어져 있냐. 훈련하자, 훈련.”
어쩐지 격해진 미마의 공세에, 그녀와의 대련 전적에서 오랜만에 1패를 추가했다.
* * *
오후 강의가 끝날 시간이 되자 하나둘 농장 안쪽 동아리실로 부원들이 모여들었다.
딱히 활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정을 잡은 것도 아니었는데, 요즘에는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미마는 학신목 인근에서 잠을 자다가 러셀이 오면 대련을 몇 번 한 뒤 농장에 모닥불이 타오를 때까지 다시 학신목으로 쪼르르 기어들어 갔다. 그러다 모닥불이 오르면, 가장 따듯한 돌의자 위에 자리 잡고 웅크리곤 했다.
루트비히는 결계 마법이 잘 작동하는지 확인한 다음 주로 한쪽에서 책을 읽거나 미마와 러셀, 에뜨랑제의 대련을 구경했다. 가끔 함께하자는 러셀의 제안에 움찔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고개를 저었다.
에뜨랑제는 미마와의 대련을 끝낸 러셀에게 다시 한번 달라붙은 뒤, 남는 시간에는 주로 코리와 어셔스의 훈련을 도왔다. 2학년 선배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아카샤는 매일 작물들을 성장시키느라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남는 시간엔 틈틈이 필기시험을 대비했다.
어셔스와 코리는 동아리의 실무 관리자 역할을 끝낸 뒤, 에뜨랑제에게 대련 지도를 받았다.
몇 주 동안 이어진 자연스러운 루틴에 이제는 모두가 익숙한 듯 자기가 할 일을 스스로 찾아내 움직였다.
농사 동아리의 주 일정이 훈련이라는 사실, 실제로 농사 동아리 일을 하는 인원은 셋뿐이라는 사실만 제외하면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하고 활발한 동아리 활동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상스런 하루를 보내고 화톳불 앞에 다 같이 모여 이런저런 수다를 떨고 있던 찰나.
“근데 러셀은 무도회 파트너 누구랑 하기로 했어?”
코리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폭탄 같은 질문에 한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