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76)
11. 지하 미궁, 기묘한 모험
지하 미궁은 왕도의 아래에 자리한 곳이지만, 오랫동안 마기에 노출되며 격리되고 배제된 공간이다.
공간 전체가 하나의 결계처럼 단절된 세계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어지간한 소요가 발생해도 지상 위의 존재들은 미궁에서 발생한 일을 알아챌 수도, 감지할 수도 없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지금쯤 머라고라가 내지른 괴성을 들은 왕궁의 영웅과 병사들이 모조리 미궁을 찾아와 소란을 잠재웠을 것이다.
대륙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티렐 왕성에서 벌어진 일이라기엔 우습기 짝이 없는 희극이었지만, 러셀과 그 일행들에게는 천만다행인 일이었다.
사실 그렇게라도 위안을 얻지 않으면 맨정신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머라고라는 도망쳤다.
‘준비는 충분했는데….’
평범한 머라고라였으면 충분한 준비였을지 몰라도, 꽃 핀 머라고라의 생을 향한 강렬한 의지는 러셀의 예상을 까마득히 빗겨 난 것이었다.
머라고라에 꽃이 피었다는 건, 달리 말하면 새끼를 배태한 짐승과도 같은 상황이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평소보다 더 예민하며, 더 강력하기도 했다.
미궁 탐험대의 표적이었던 녀석은 러셀이 손을 뻗자마자 강렬한 음파를 발생시켜 그를 움찔거리게 한 뒤, 곧바로 박혀 있던 위치에서 튀어나와 미궁 깊숙한 곳으로 도주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고, 러셀의 조언대로 나머지 두 사람은 귀를 틀어막고 있었기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했다.
몇 초 후 정신을 차린 러셀이 안쪽으로 뛰쳐나가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한 리지가 아이테르를 안고 [비행] 마법을 펼쳤다.
“어쩌지?! 공격해?”
“절대 안 돼. 손상하지 않고 잡아가야 해.”
화염 원소 마법을 때려 넣으면 제압은 쉬울 거다.
하지만 꽃을 잃은 머라고라는 생식 능력을 영구히 상실한다.
머라고라는 일생에 딱 한 번 꽃을 피우는 영물이니까.
그럼 지금까지 미궁 흙바닥을 구르고 굴러 고생한 노력들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리지는 현실을 부정하듯 소리 높여 한탄했다.
머리통에 꽃 단 인삼이 벽과 천장을 오가며 기이한 묘기를 부리고 있고, 앞에서는 해골들이 가로막고 뒤에서는 유령들이 추격한다.
팔랑거리는 인삼 녀석의 궁둥짝은 흡사 도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대환장파티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어차피 멀리는 도망 못 가.”
이제는 이판사판이었다.
살고자 하는 욕망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나, 그래 봐야 식물이다.
저 얄따란 뿌리로는 지구력이 달려서 멀리 도망가진 못할 거다.
러셀은 앞을 가로막는 해골 병사들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창날에 닿은 마물들이 밀물을 맞은 모래처럼 휩쓸려 나갔다.
콰앙! 캉캉!
등 뒤에서 리지가 쏘아 보낸 마력 칼날이 채찍처럼 마물들을 후려쳤다.
사정없이 부서지는 해골들.
마력을 폭탄 형식으로 터트리는 게 아닌 휘두르는 형태로 사용하는 건 처음 봤다.
아마 슬슬 마력 소모를 절제해야 한다는 판단으로 기출 변형 답안을 도출해 낸 모양이다.
‘신기한데.’
마력을 빠르게 휘둘러 적을 으깨고 파괴하는 묘기는 눈으로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저 중간중간 번쩍, 하고 소울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밀릴 수는 없지.’
명색이 근접 딜러가 마도사보다 살상 효율이 떨어져서는 곤란하다.
[사냥의 시간] [먹잇감 등록] [그림자 걷기]세 개의 권능이 동시에 효과를 발휘하며 내 공격의 파괴력을 올렸다.
힘껏 내찌르는 창날이 앞을 가로막던 해골들을 연이어 찔렀다.
가가가가각―!
기괴한 소음이 미궁의 벽을 타고 반사되듯 차랑차랑하게 울렸다.
순식간에 대여섯 마리를 꼬치로 만들어 놓은 뒤 다시 힘껏 좌에서 우로 창을 휘둘렀다.
제어 장치가 고장 난 열차처럼, 해골들이 부서져 파편이 튀고, 날아간 패기가 미궁의 벽에 흔적을 남겼다.
‘다시.’
파바바방―!
기분까지 끌어 올리는 경쾌한 소음이다.
패기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린 출력의 창격이 러셀의 주변에 공백을 만들어 냈다.
머라고라를 발견했고, 그 뒤를 추적하는 중이다.
이제 이 길디긴 기묘한 모험도 끝이 보인다는 생각에 고양감 비슷한 감각으로 몸이 화하게 달아올랐다.
[사냥의 시간] 2단계.왼쪽에서 녹슨 칼날을 휘두르는 해골의 움직임을 포착.
러셀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마물의 악골을 강타했다.
간결한 장격에 해골은 과자처럼 부스러졌다.
그게 시작이었다.
맨손으로도 충분하단 걸 깨달은 이상, 창을 휘두르는 기력마저 아까워졌다.
러셀은 창을 등 뒤에 꽂아 넣고 주먹으로 해골들을 부숴 나갔다.
[먹잇감 등록] 풀 스택에 [사냥의 시간] 2단계까지 발동되니, 보호용 가죽장갑을 낀 주먹으로도 일격에 해골들이 부서졌다.그렇게 가로막는 놈들을 화풀이하듯 격쇄한 러셀이 마침내 머라고라가 기어들어 간 공혈 안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결국 보스 룸을 털고 가야겠네.”
머라고라가 숨어든 방 같은 공간은 보스인 구울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음습한 공간에서 마치 검은 아지랑이가 풍겨 나오는 듯 보였다.
구획된 공간 안쪽으로도 해골 병사들이 도열되어 있었으나 이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는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주인인 보스를 지켜내는 것.
그렇기 때문에 침입자가 보스 룸 안에 들어서지 않는 한, 보스 룸의 마물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미궁 보스 룸에 설정된 특징이다.
“왕자님. 체력 회복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빠르지는 않았지만, 확실하게 체력이 회복됐다. 일정 수준 소울도 다시 들어차 있었다.
전투에 특화된 권능이다. 아이테르는 나쁘지 않은 힐러였다.
일국의 왕자만 아니었다면 동료로 영입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파티에 정령사가 부족하긴 하니까.’
아카샤는 힐러라기보단 버퍼에 가까웠으니, 제대로 된 힐러는 주디뿐이다.
앞으로 벌어질 수많은 에피소드의 각개전투에서 정령사의 부족은 늘 파티의 위험으로 다가오곤 한다.
아카샤에게 회복 권능을 익히게 하든, 추가로 정령사를 영입하든 대책은 필요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
러셀은 너저분하게 떠오른 상념들을 지우고선 보스 룸을 바라봤다.
가급적 마주치고 싶진 않았으나, 이왕 이렇게 됐으니 확실하고 안전하게 공략한다.
“리지.”
“응.”
“「마신군 분석 총론」에서 배운 구울의 특성 기억나?”
“응. 그럼. 나 기억력 좋아.”
“다행이네. 그럼 역할만 나누자. 내가 구울을 잡고 있을 테니, 네가 잡몹 담당해.”
“응. 알겠어.”
“이쪽으로 공격 안 튀게 조심하고. 빠르게 부탁한다.”
고개를 끄덕이는 리지를 뒤로하고 러셀은 아이테르에게 짧게 설명했다.
“왕자님께선 리지의 등 뒤에서 딱 붙어서 계세요. 이곳에서 대기하시면 좋겠지만, 부적이 하나뿐이라 떨어져 계실 수는 없습니다.”
“네네! 저는 뭘 조심하면 될까요?”
“구울은 그리 강한 마물은 아닙니다. 다만 소멸에 이르는 피해를 입었을 때 [정신 오염]이라는 권능을 터트리고 소멸하죠. 거기에 노출된 대상은 환상 감옥 안에 갇힙니다. 그때 다른 마물들의 공격에 취약해지고요. 그래서 다른 마물들을 먼저 싹 처리하고 마지막에 구울을 처리하는 게 중요한 공략법입니다.”
아이테르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동자를 빙글빙글 돌렸으나, 그거면 충분하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혹시라도 아이테르가 구울을 공격해 소멸시키는 일만은 없어야 했다.
[정신 오염].말 그대로 정신계 공격의 클래식과도 같은 권능이다.
대상에게 환청과 환각을 일으키고 정신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폭주하게 만드는 권능.
이름에서 예상할 수 있듯, 멘탈이 약할수록 공격에 취약하다.
큰 상처, 거대한 트라우마, 유리 멘탈의 동료를 데리고 왔다면 전투 불능 상태가 되거나 심하면 피아 구분을 못하고 아군을 공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귀족 영애는 걱정 없다. 그녀는 상처란 걸 모르고 자란 귀하디귀한 온실 속 화초시니까.
아이테르도 긍정적이고 건강한 정신으로 유명한 왕자이니 별달리 걱정이 안 된다. 애초에 [정신 오염]에 당해도 그리 위협적이지도 않지만.
리지가 아닌 다른 누굴 데리고 왔어도 리스크가 있었을 거다.
동료 대부분이 저마다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고, 그걸 극복해 나가는 게 이 소설의 큰 흐름이었으니까.
여기까지도 계획된 시나리오.
“갑시다. 소풍을 끝낼 시간이에요.”
러셀은 한 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무형의 장막 같은 것을 지나는 감각과 동시에 구울이 내뿜는 마기(魔氣)가 공간을 장악했다.
3성급, 언데드형 마물 구울.
좀비와 인간 그 어딘가에 있을 법한 체형에 털 한 올 없는 주름진 피부, 그리고 백색 눈동자와 누렇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붉은 손발톱.
꼴에 인간과 비슷한 외형이라고 누더기로 하체 중심을 가리고 있는 꼴은 의외였다.
구울은 침입자를 향해 포효를 내질렀다. 담배를 한 60년 정도 피운 원숭이가 내지르는 것 같은, 귀를 긁는 소음이었다.
“폼 잡지 마라, 3성 따리.”
덜 자란 영웅 후보를 위한 성장 무대다 보니 하급 마물의 연출이 과했다. 누가 보면 무슨 미궁의 왕이라도 존재할 것만 같은 흉흉함이잖은가.
러셀은 코웃음을 치며 월광쌍익 1호기를 집어던졌다. 그러자 구울의 앞에 도열해 있던 해골 병사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창이 목표물까지 도달했다.
장애물 몇 겹을 뚫고 간 탓인지 창은 구울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러셀은 빠르게 무기를 회수한 뒤 트인 길을 내달려 놈의 다리를 향해 창을 내찔렀다.
혹시라도 죽으면 곤란하니 일단 기동력을 묶어 둘 요량이었다.
어려운 사냥감은 아니다.
오히려 힘든 건 녀석을 저지하면서 살려 두는 쪽이다.
혹시라도 힘 조절을 잘못해서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그땐 대참사가 벌어질 테니까.
‘일단 팔다리부터.’
다행이라고 하기엔 우습지만, 구울은 제법 체능이 훌륭한 마물이었다.
[정신 오염] 권능이 워낙 까다롭기에 구울 자체의 전투력은 하잘것없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움직임이나 손톱 휘두르는 속도를 보면 확실히 3성 중에서는 상위권이다.같은 3성인 ‘드라고나 워커’나 ‘하피 메이지’보다는 위협적인 수준.
물론 다른 3성에 비해서란 이야기다.
러셀은 빠르게 휘두르는 손톱을 피해 안다리로 구울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휘청이지 않는다.
한쪽 발로도 균형을 잡을 만큼 감각이 좋은 마물이란 뜻이다.
곧바로 거리를 살짝 벌리며 창을 반대쪽 허벅지로 찔러 들어갔다.
푹, 창날 박히는 소리와 함께 밀폐된 공혈에서 구울이 울부짖었다.
붕, 붕.
구울이 휘두르는 손톱이 힘없이 허공을 갈랐다.
안 그대로 속도의 차이가 확연한데, 한쪽 다리를 잃은 마물이 러셀의 움직임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사이 러셀에게 접근하려는 해골 병사들의 머리 위로 리지가 소환한 마력 폭탄이 연달아 터졌다.
어차피 여기가 마지막 행선지다.
머라고라는 보스 룸 안쪽 전리품이 쌓여 있는 더미에 몸을 숨긴 채 덜덜 떨고 있으니 분실한 염려도 적다.
리지는 마음껏 마력을 펼쳤다.
[마력 폭탄] [마력 폭탄] [마력 폭탄]펑! 펑!
퍼버버벙!
“아하하하! 스트레스 풀려!!”
리지는 깔깔 웃으며 연주하듯 아낌없이 마력을 쏟아부었다.
“무서운 분이셨군요. 리지 영애님….”
“그건 오해랍니다… 왕자님…! 러셀! 저게 마지막이야!”
리지는 황급히 아이테르의 오해를 풀어 주며 동시에 러셀에게 신호를 보냈다.
마지막 해골 병사의 머리통이 터져 나가자마자, 러셀의 창날이 깔끔하게 구울의 목을 갈랐다.
[정신 오염]그와 동시에 구울의 마지막 발악이 시작되었다.
눈앞의 빛이 소등됐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