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80)
11. 지하 미궁, 기묘한 모험
단언컨대 내가 이 세계에 빙의한 뒤 가장 지옥 같고, 길고, 수치스러웠던 시간이었다.
나는 총 십팔 번의 탈출을 시도했고 십팔 번을 다섯 명의 을사오적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왔다.
여기서 을사오적이란 루트비히, 아카샤, 코리, 어셔스 그리고 리지다.
어째서 농사 동아리도 아닌 리지가 여기에 껴서 내게 [속박] 마법을 걸고 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태극기 앞에서 삶을 반추하며 필승을 다지는 독립운동가처럼, 모든 걸 포기한 채 [헥스]라는 민족의 꿈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아카샤는 불세출의 사이코패스였다.
그녀는 사관생도들은 대부분 관심도 보이지 않는 각종 화장도구를 구해 와서는 내 얼굴에 분칠을 했고 머리엔 하늘거리는 가발을 씌웠다.
도저히 맞는 치수를 찾을 수 없을 거라고 호언장담했던 내 눈앞에 거의 속옷이나 다름없는 슈미즈 드레스를 맞춤 사이즈로 대령했으며.
정말 여기가 이세계가 맞나 의심하게 만드는 패드를 네 장 가져와 내 양쪽 가슴과 엉덩이에 집어넣었다.
가슴 라인을 얼마나 파 버렸는지 볼륨감을 높이기 위해 넣은 패드가 절반이나 튀어나온 기괴한 복장은, 그야말로 입체주의 괴작이나 다름없었다.
나를 죽이기 위해 치밀하게 준비된 설계라고밖에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투닥거리며 내 남성성을 거세한 아카샤가 ‘어머, 화장 너무 잘 먹었다, 언니.’라며 대형 거울을 내 앞에 들이민 순간, 나는 선 채로 죽었다.
모든 걸 포기한 채로 넋을 잃은 내게 리지의 깔깔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예쁘다, 러셀! 확 납치해서 내 신부로 삼고 싶은걸……?”
“그거 보세요. 러셀 님도 잘할 수 있잖아요.”
루트비히의 말에도 내겐 대꾸할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내 죗값의 시간이 그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덜컥, 문이 열리고 특별반 장학생 동기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이 세계에 여신 따위는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으하하, 진짜 하고 있잖아? 주디, 만 골드 줘라.”
“러셀은 절대 안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시 러셀이 가짜인 거 아닐까? 사람의 형상을 모방하는 마물이라든가… 그 언노운 마물 중에 모습을 훔치는 종이 있었잖아.”
“그럴 리가 없지. 당장에라도 여기를 부수고 싶다는 표정이잖아. 저건 러셀이 분명하다고. 설마 던 블라이아 엘프는 약속을 가볍게 여기는 거야?”
“아잇, 진짜. 줄게, 준다구. 그나저나 조금… 묘하게 어울려서 더럽다고 해야 하나… 보고 있기 불편하네…….”
“하하. 말이 너무 심해, 주디.”
주디는 뾰족한 귀 끝을 매만지며 파에게 1만 골드를 건넸다.
“그, 음. 힘내…….”
휴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안쓰럽다는 듯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동물원 원숭이가 탄생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구경하러 달려온 구경꾼 녀석에겐 위로받고 싶지 않았다.
“잘 어울려요.”
“그, 말은 좀 실례인 것 같아, 로벨리아.”
“그런가요? 하지만 칭찬인걸요. 이런 것도 외모가 수려해야 도전할 수 있는 무모함이라 생각해요.”
“진짜 다 뒤지고 싶냐…….”
결국, 다 포기한 채 침묵으로 시위하던 내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 나갔다.
당장에라도 옆에 놓인 월광쌍익을 붙잡을 것 같은 기세에 동기들이 혼비백산해서 흩어졌다.
똑똑. 정갈한 노크 소리 뒤에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후배님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멈칫했다. 내가 봤다.
열린 문 사이로 에뜨랑제가 차분하게 걸어 들어왔다.
곧바로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옮겼으나 움찔거리는 그 큰 움직임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그…….”
에뜨랑제는 차마 내 앞까지 다가오지는 못하고 중간쯤 와서는 더듬더듬 말했다.
“아카샤 후배님에게 귀족 영애의 걸음걸이와 몸짓을 가르칠 사람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
“어머, 선배님. 배움이 필요한 신입 귀족 영애 여기 있답니다?”
나와 아카샤를 몇 번이나 번갈아 바라보던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 표정을 보니 선배만큼은 이 역모에 가담하지 않았구나, 하는 한 줄기 위안이 들었다.
“그…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귀족 영애치고는 복장이 너무…… 정숙하지 못한…….”
“조금 천박한가요? 흐으음. 하지만 곤란해요. 이제 와서 드레스를 새로 맞출 수도 없고, 이번 컨셉은 엄밀하게 섹시 도발이라구요.”
“그, 그래도 조금 더 조신한 편이 낫지 않을까요… 눈을 둘 곳이….”
“안 돼요, 안 돼. 눈 둘 곳 없다는 분치고는 너무 힐끔거리시는데? 역시, 보기 좋은 거죠?”
“……!”
이제 에뜨랑제의 피부는 흡사 리지만큼이나 창백해졌다.
“그럼, 연습을 시작해 볼까요! 러셀 님. 준비됐죠?”
하나둘씩 모이다 보니 친하다 싶은 사람들은 죄 모여 있었다.
미마만 빼고.
나는 나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 보이는 이 무저갱에서 그나마 나를 구경하러 오지 않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는 데 안도했다.
쾅!
그때였다.
닫혀 있던 대기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날다람쥐 미마가 호흡을 씩씩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고는 부릅뜬 눈으로 내 모습을 일견하고선, 인상을 팍 구기고 다시 문을 닫았다.
“…….”
“…….”
진짜 그런 반응은 상처받는다고… 나도 상처받아… 진짜로….
* * *
울긋불긋한 조명이 런웨이를 비추고 있다.
활주로처럼 길게 뻗은 무대 아래로 거의 모든 생도들이 북적북적하게 모여 있다.
런웨이 안쪽 백스테이지에는 여장대회 참가 희생양들이 가지각색의 표정으로 생을 견디는 중이다.
이곳은 전우들의 무대였다.
내기에 져서, 믿었던 동료들에게 뒤통수를 맞아서, 또는 알 수 없는 독특한 취향이라서, 잘 어울릴 거라는 친구들의 성화에, 상품을 탐내서.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이곳에 산 채로 효수되어 있었다.
삐쩍 말라서 뼈밖에 보이지 않은 채 하늘거리는 원피스를 입은 참가자.
오로지 남을 웃기는 것 외엔 다른 목적 따위는 보이지 않는 거구의 미니스커트 참가자.
정글러라 불리기 충분할 정도로 풍성한 털을 자랑하는 핫팬츠 참가자 등등.
강함을 정도(正道)라 추구하는 사관생도의 남학생들답게, 대부분 잘 다져진 근육과 탄력 있는 몸매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무대 아래는 웃음을 기다리는 축제가 있었고, 무대 위에는 도축을 기다리는 축생들이 있었다.
악업을 지어 죄가 많은 이는 죽어서 축생도(畜生道)에 태어난다 했다.
너희는 무슨 죄가 있어 이곳에 있냐….
내 죄는 친구를 지옥에 팔아넘기려 했던 배반의 대죄다….
-다음 순서는 2학년 B클래스 샨드라 생도입니다! 아아… 구두가 저렇게 안타까워 보일 수도 있군요……!
대회 사회자의 멘트에 무대 아래에선 폭소가 터져 나왔다.
30여 명의 희생자를 세워 두고 낄낄대며 웃음을 던지는 그들끼리만 행복한 축제.
내 앞에 있던 전우들이 하나둘씩 런웨이를 향해 걸어 나간다.
그들은 열화와 같은 함성, 우레 같은 박수 소리를 받으며 장렬히 전사했다.
관중들은 상냥했다.
이 축제를 골수까지 쪽쪽 빨아 즐기겠다는 듯, 누가 나오더라도 웃음을 아끼지 않았으니까.
그럴 만도 했다.
그들이 보고 싶은 건 ‘여장이 잘 어울리는 남자’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저 평소 사내다움을 여실히 드러내던 마초들이, 쭈뼛거리며 걸어 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는 부끄럽게 도망치는 모습을 구경하고 싶을 뿐일 터였다.
그제야 내 몸에 흐르는 반골의 피가 다시금 생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어차피 던져진 주사위고 엎질러진 물이며 깨진 유리 조각이다.
이 꼴을 보였는데 상품까지 타지 못한다면, 그것만큼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것, 반드시 우승한다.
필사의 각오를 다지고 나 자신을 내려놓았다.
한 번만 미치면 된다.
딱 한 번이다.
인류 구원을 위해 이 한 몸 화끈하게 불사르리라.
오늘날의 수치는 미래에 대륙의 역사가 평가해 줄 것이다.
빌어먹을 마신 놈, 내 이 굴욕과 수치는 절대 잊지 않으리라. 이제부터 네놈과 나는 불구대천의 원수다.
나를 이 꼴로 만든 네놈과는 도저히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노라.
나는 장작더미를 깔고 누운 부차이며, 곰 쓸개를 입에 문 구천이다.
-다음 순서는 1학년 프레스티지 카뎃 클래스 러셀 애시그린 생도입니다! 오오! 유일한 특별반 장학생 참가자군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해 줄지 기대됩니다!!
“우와아아!”
“러셀! 러셀!”
거대한 함성을 뚫고 멀리서도 들리는 휴고의 우렁찬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나는 미친놈이다.
이건 팬픽 빙의가 아니다. 나는 TS를 당한 거다.
단지 그것뿐이다.
빙의 전 유일하게 봤던 TS 소설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한번 전의를 다졌다.
부디, 러오네라 불러주시길.
발을 한 발자국 내디뎠다.
화려한 조명이 나를 감싼다.
큰 웃음을 기대하는 관객들의 눈빛을 한몸에 받으며, 나는 당당하게 걸었다.
에뜨랑제에게 속성으로 배운 귀족 영애의 걸음걸이, 귀족 영애의 몸짓, 귀족 영애의 눈빛.
한 치의 오점도 존재하지 않는 당당한 파워 워킹.
그리고 길디긴 무대의 끝에서 도도하게 콧날을 세우며 잡은 자세.
도발적인 복장에 어울리지 않는 정숙한 인사.
우아한 턴.
군더더기 없는 퇴장까지.
그 순간만큼은 귀족 영애 그 자체라 불러도 손색없었다.
우렁찬 목소리로 날 연호하던 동기들의 목소리들도 어느덧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훗날 사관학교 1학년 생도들이 일컫길.
‘진짜 광기(眞狂氣)’였다.
* * *
길디긴 한여름 밤의 악몽이었다.
미스 그림로어 우승자 에뜨랑제.
미스터 그림로어 우승자 파.
여장대회 우승자… 러셀.
철인 3종 경기 우승자 휴고.
우리는 목표로 했던 모든 전리품을 획득하는 데 성공해 축제의 끝을 완성했다.
당연하게도, 나는 그날의 기억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소거해 버렸다.
지금부터 내게 어제의 일을 끄집어내는 외적이 있다면 그때부터 생사결의 시작이다.
아침 일찍 농장에 도착한 나는 늘 그렇듯 학신목에 자리 잡은 미마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듣자 하니 내게 파트너 신청을 했던 사람 중 에뜨랑제는 단짝 여생도와 참여했고 미마는 아예 무도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그건 뭐냐.”
“장난감.”
나는 옹이구멍 한쪽에 놓인 머리통만 한 투명구슬을 힐끔 바라본 뒤 미마에게 말을 걸려 했다.
그러나 미마는 열어 두었던 천을 내린 뒤 홱홱 꼬리를 흔들었다.
축객령이었다.
아무래도 아직 앙금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네가 아무리 멘탈이 나갔어도 나만 할까. 지금은 누굴 위로할 기분이 아니었다.
그대로 동아리실에 들어오니, 다른 부원들과 리지가 한곳에 모여서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너는 왜 여기에 있는데?”
“나야 내 신부를 보러 왔지!”
“쫓아내라, 제군들. 회장의 명령이다.”
“아아아! 사실 이걸 보여주러 왔어!”
그들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보던 것은 방금 전 미마가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의 유리구슬이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아카샤가 특유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부연했다.
“학생회에서 파는 마법 영상구예요. 출제의 하이라이트 장면들이 영상으로 녹화된 아티팩트죠.”
이미 잊어버린 내 흑역사가 마녀구슬 안에서 재생되었다.
나는 순식간에 가라테 무술인에 빙의한 손날 내려치기로 그 사특한 물건을 깨 버렸다.
“안 돼에에에에!”
“이런 흉악한 물건을 지닌 자는 처단하여야 한다. 이 사문난적 같은 여자야.”
“무슨 소리야! …10개밖에 없는 한정판인데!!”
“그딴 게 10개나 있다고?”
내 반문에 이번에도 아카샤가 더 짙은 비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유일하게 완판된 상품이래요. 저도 구매하려 했는데 늦어 버렸지 뭐예요. 그러니 조금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구매자 명단 구해 와. 살생부에 이름을 올려야겠다.”
“걱정하지 마, 러셀! 내가 8개 샀으니까!”
“…대체 왜?”
“그야 내 신부의 노출 모습을 다른 사람한테 공유하고 싶지 않으니까…?”
“당장 폐기할래, 너도 같이 폐기될래.”
“학생회 세금 포함해서 개당 110만 골드씩 총 880만 골드짜린데!? 모아 놓은 용돈을 거의 다 썼다구. 웃돈 얹어서 1,000만 골드 주면 폐기해 줄게!”
“너 처음부터 내 말 들을 생각 같은 거 없지.”
“헤헤?”
도대체 뭔 학생이 용돈을 천만 골드나 가질 수 있는 거냐….
다른 사람들 손에 들어가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아닌가? 이게 더 수치스러운 건가…?
정신의 게슈탈트 붕괴 상태가 오는 걸 보니 내 멘탈은 개복치가 맞는가 보다.
“110만 골드가 조각났지만, 괜찮아. 아직 7개나 남았으니까.”
“리지야, 리지야. 진짜 딱밤 맞고 싶니?”
“어허. 하늘 같은 남편에게 무슨 그런 무서운 소리를.”
나는 결국, 리지에게 딱밤을 먹이고 말았다.
리지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다가 그래도 기분 좋다는 듯 싱글벙글했다.
남 놀리는 데 진심인 것도 저 정도면 중증이다.
“근데 나머지 두 개는 도저히 누가 샀는지 모르겠더라구.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건 좀 싫은데.”
리지의 말에 순간적으로 쿡쿡 웃던 에뜨랑제가 웃음을 멈추고 어깨를 움찔했다.
당연히 그 반응을 놓칠 내가 아니다.
“설마 선배….”
“아잠깐급한용무가있다는걸깜빡했어요그럼이만…….”
“거기 서, 이 자식아.”
에뜨랑제는 숨도 쉬지 않고 우다다 말을 내뱉고는 뒷걸음질 쳐서 사라졌다.
“어쩐지 선배님이 갖고 싶단 말을 안 하더라니… 그럼 나머지 한 명은 누구지…?”
리지의 의문을 들은 순간, 나는 남은 하나의 행방을 깨닫고는 아연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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