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83)
12. 별빛의 보금자리
떨어지는 소금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몬은 푹 한숨을 내쉬고선 말했다.
“어릴 땐 분명 귀여운 맛이 있었는데.”
“지금도 귀엽단 소리 종종 듣긴 해.”
레몬이 보일 듯 말 듯 미간을 좁히며 반문했다.
“…정말?”
“당연히 거짓말이지. 말이 되냐? 내 덩치를 봐.”
나는 수도 없는 단련으로 벌크업된 대흉근을 두드렸다.
그러자 피식 웃음을 흘린 레몬이 그 나이대의 소녀처럼 천진무구한 표정을 짓는다.
내가 그녀의 정체를 몰랐다면, 그 순수해 보이는 탈 아래 악귀의 본체가 숨어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을 거다.
그만큼 그녀의 연기는 훌륭했다.
“아무튼 가급적 마주치지 말자. 마주쳐도 아는 척하지 말고. 뭐 좋은 사이라고.”
“너무하는걸. 이번엔 네게 들려줄 소식이 있어서 찾아온 건데. 그것도 두 개나.”
레몬은 검지와 중지를 펴 보이며 생글거렸다.
“듣기 싫으면 그냥 돌아가도 좋아. 하지만 분명히 말하는데, 후회할 거야?”
이건 숫제 사탄의 속살거림이었다.
그녀가 내게 떠들어댈 얘기는 들어서 좋을 리 없다. 분명 4막에서 날 이용하기 위한 밑 작업을 치는 걸 테니까.
하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간사하기도 하다. 말할 게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궁금증이 치민다.
독약인 줄 알면서도 그 맛이 궁금해 마시게 되는 거다.
결국, 나는 레몬을 따라 으슥한 오솔길로 들어갔다.
여름의 초입.
간헐적으로 내리는 비와 쨍한 햇빛 덕분에 프리마관의 산책로는 어느 때보다 풍성한 초목이 자라나 있었다.
오늘따라 선선한 바람까지 불어와 산책하기 딱 좋은 날씨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옆에 있는 산책 파트너가 사람을 찢는 마인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본론.”
“성질 급하긴.”
레몬은 여유로웠다.
지금으로선 마인들이 무슨 개수작을 부리는 중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나, 한없이 좋아 보이는 레몬의 기분을 보면 추측건대 계획이 순항 중이란 방증이리라.
“으음. 뭐부터 얘기해 줄까.”
레몬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한참을 뜸들이다 천천히 본론을 꺼냈다.
“시레니아 해양림 안쪽에 카오스 게이트가 발생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려나?”
“……?”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나는 표정 관리를 실패했다.
카오스 게이트란 건 흔한 헌터물 웹소설처럼 아무 데나 갑자기 생기는 균열이 아니다.
대기 중 소울 농도가 극단적으로 떨어진 ‘사멸의 땅’이라 불리는 곳에서 발생하는 게 대부분이며, 그 외의 지역에서 발생하는 건 극히 드문 일.
그것도 대부분 팬픽의 에피소드 전개를 위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몇 건 없는 카오스 게이트 발발을 잊어버릴 리 없다. 특히나 사관학교 인근에 발생하는 거라면 더더욱.
이레귤러 사건의 등장이란 뜻이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파격적인 소식이었는데, 뒤이어 레몬이 내뱉은 말은 충격의 도가니였다.
“그 게이트에서 3명의 이방인이 등장했는데, 폴리티아의 자동인형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
폴리티아는 해양 장벽에 가로막힌 다른 대륙 속 과학 강국의 이름이었다.
현대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한, 안드로이드들의 도시.
그곳은 미마의 안드로이드 인생 2막이 시작된 곳이기도 했다.
“듣기로는 폴리티아를 탈출한 두 개의 자동인형을 추적해 넘어왔다는데… 우리 1학년 수석이 아마 자동인형이었지? 레인가르 아카데미에 들어가지 않은 걸 보면 레인가르산은 아닐 거고. 역시 폴리티아에서 탈출한 인형이려나?”
나는 필사의 노력으로 표정을 관리했다.
레몬 애시그린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진실을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녀가 불확실한 사실을 나를 통해 떠보려는 수작이라면, 절대로 그 어떤 힌트조차도 줘서는 안 됐다.
“흐음. 놀라지 않네. 꽤 고급 정보라 알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우리 동생, 연기에 꽤 능숙하구나?”
“나한테 그런 이야길 하는 이유가 뭔데.”
“그냥~ 점수 따는 거랄까. 사랑스러운 동생에게 밉보였으니 이참에 잘보여 두면 좋잖아? 조만간 네 친애하는 동기가 위험에 빠질지도 몰라. 납치라든가, 암살이라든가. 그러니 미리 대비하렴.”
“인상착의는?”
“정말…. 외투를 벗어 주었더니 속옷까지 내놓으라는 격이네?”
“진위 확인이야.”
“동생 이기는 누나 없다니까. 한 번 속아 넘어가 줄게. 한 명은 머리에 뿔처럼 기계 장치를 달고 있었고 한 명은 주변에 기계가 둥둥 떠다녔대. 나머지 한 명은 어깨에 비행 장치가 달려 있었고.”
레몬의 설명에 머릿속에 들었던 의혹이 사실로 바뀌었다.
지휘형 라이카.
폭격형 카논.
지원형 브리누스.
에우레카 대륙의 강자들이며, 기계 도시 폴리티아를 탈출한 안드로이드들을 회수하기 위해 파견된 추적자들이다.
‘녀석들이 본격적으로 이쪽 대륙에서 활동하는 건 5막부터인데…?’
대륙을 호령하는 강자들답게 주인공 일행이 일정 수준 성장을 이루고 나서야 적으로서 만나는 이들이다.
그런데 왜, 지금 모습을 드러낸 거지?
이건 명백한 사고였다.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개발자 노트] 권능을 발현했다.
내가 인지한 순간, [개발자 노트]에는 새로운 설정 변경값이 업데이트된 채였다.
변경 사항 : 에피소드 「폴리티아의 추적자들」
다소 지루해질 수 있는 전개를 보완하고 긴장감을 높이기 위해 폴리티아의 추적자들 등장이 앞당겨집니다.
폴리티아 출신의 자동인형 ‘날다람쥐 미마’가 추적자들에게 납치되며, 2막과 3막 사이에 ‘날다람쥐 미마’ 구출 에피소드가 추가됩니다.
실패 시 : 날다람쥐 미마 폐기
“이 개새끼들.”
대상을 알 수 없는 욕설에 레몬의 몸이 움찔거렸다.
주인공 일행이 자리를 비운 사이 미마가 납치된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게 된 동기들이 그녀를 구출하기 위해 말려들고, 실패 시 미마는 그대로 폐기되어 시나리오에서 사라진다.
이건 절대 흘려넘길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앞으로 있을 에피소드에서 미마가 상대해야 할 적이 한 트럭이고, 그녀의 활약상은 줄줄 나열하기만 해도 A4용지 한 페이지를 넘어간다.
‘대체 무슨 의도로…? 왜? 어째서?’
[개발자 노트]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분명하게 ‘내 존재’를 인지하는 것만 같았다.마치 2막이 2개의 트랙으로 나뉘어 움직인다는 걸.
주인공 일행이 구르고 구르는 동안 또 다른 무대의 한편인 나와 농사 동아리의 일상이 단조로워지길 원하지 않는다는 듯.
너희를 위한 무대를 따로 준비했다고 말하는 것만 같다.
그렇지 않다면야 이 ‘설정값 변경’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5막에서 폴리티아의 자동인형들이 이곳에 등장하는 건 개연성을 지적할 만한 부분이 없다.
실제로 원작에서도 사라진 자동인형을 찾기 위해 추적자들이 리타니아 대륙으로 넘어온 건 팬픽의 5막 시기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건 원작 게임과 팬픽의 타임라인을 맞추기 위한 내 집착적인 설정이었다.
되레 이 시점에 그들이 등장하는 게 원작의 개연성을 해치는 짓이다.
그럼에도 변경을 강행했다는 건, 분명 다른 의도가 있다는 뜻이다.
‘위기감 조성’ 따위의 그럴듯한 변명거리가 아니라.
나를 의식하고 있는 거다.
그리고 스토리가 날 중심으로 조금씩 개편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다.
언제든 모든 것이 뒤틀리고 뒤바뀔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표정을 보니 내가 전해 준 정보가 도움이 되었나 보구나.”
레몬의 말에 부정하지 못했다.
이건 몰랐다면, 반드시 낭패를 보았을 중요한 정보였다.
비록 내게 개 같은 저주를 건 호로자식임에는 틀림없으나, 재미 삼아 던진 정보가 앞으로의 판도를 바꿨을지도 모르는 분기점이 됐다.
“솔직히 꽤 도움이 되긴 했어. 보답의 의미로 이제 앞에서는 호로자식이라고 안 부를게.”
“뭔가 엄청 손해 보는 기분인걸? 웬만하면 뒤에서도 그렇게 부르진 말아 줘. 나도 이미지란 게 있잖니.”
“됐고. 두 번째는?”
처음 레몬이 내게 수작을 걸어 왔을 때보다는 다소 누그러진 태도였다.
첫 번째 용건이 큰 도움이 되었으니 두 번째도 들어 볼 만하다는 판단에서였다.
“흐응… 괜히 심술이 나서 말해 주기 싫지만…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봐준다. 이 세계의 비밀에 대해 할 말이 있는데.”
이어진 레몬의 말은 그냥 시답잖은 수작질이었다.
사실 우리가 섬기는 여신 디체는 기만자이며, 본인의 욕심 때문에 이 세계는 멸망과 재생을 반복하며 희망 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는 이야기.
그 과정에서 계승자라는 이름으로 선택된 전사들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져 잊혀진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는 사실까지.
이 세계관에 등장하는 악역 대부분이 좌절하고 인류를 배반하게 만든 진실.
레몬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전쟁을 끝내려면 사실 여신을 포기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며 고민 섞인 어조로 귓속말했다.
자칫하면 이단으로 낙인찍힐 수 있는 내용이다.
혹여라도 이단심문관의 귀에 들어간다면 수용소에 갇혀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고문을 당할 이야기.
그렇기에 남 얘기하듯 이렇게 중립적으로 떠드는 것일 테지.
모든 이야기를 끝낸 뒤 레몬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하겠지만, 내 충격받은 얼굴을 기대하듯 눈망울이 반짝거렸다.
아마 첫 번째 정보를 굳이 전해 준 것도 내 경계심을 누그러뜨려 두 번째 정보를 확실하게 각인시키기 위함일 것이었다.
물론 그 기대에 부응해 줄 생각은 전혀 없다.
“뭐 어쩌라고. 그래서 호로자식의 말에 홀라당 넘어가서 여신과 인류를 배반하기라도 하랴? 그런 건 명예로운 우리 일족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호로자식이라고 안 부른다며. 그리고 나도 네 일족이거든?”
“너는 가문의 수치야.”
“진짜 귀여운 맛이 없네…. 누나라고 불러야지, 러셀.”
“아무튼, 못 들은 걸로 한다. 너도 아무 데나 떠들고 다니지 마라. 이단심문관 대장 한번 만나 봤는데, 팔이 네 개라서 오체분시하기 딱 좋아 보이더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남기고선, 나는 홱 돌아섰다.
이렇게 대놓고 수작을 부릴 줄이야….
아무렴 내가 대화 내용을 퍼트리더라도 꼬리를 밟히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겠지만.
역시나 레몬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좋겠다.
엮이면 X되는 마인이라는 걸 알면서도, 핏줄이 당기는 건지 아니면 뒷감당이 불안한 건지 마냥 미친놈처럼 굴기 어려운 경향이 있단 말이지….
* * *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농장에 도착했다.
폴리티아의 추적자들이라.
대체 어떻게 대비해야 하지?
카오스 게이트는 영구적이지 않다.
즉, 추적자들이 이미 튀어나온 이상 시간이 없다.
당장 지금이라도 3명의 전투 안드로이드들이 경계를 넘어 학사 안으로 침입할지 모른다.
학신목 안에는 미마가 천 바깥으로 꼬리만 내민 채 웅크려 있었다.
나는 미마의 꼬리를 홱 잡아당겼다.
누군 마음이 어지러워 죽겠는데 나무늘보처럼 팔자 늘어진 모습을 보니 어딘가 부아가 치미는 것이었다.
“……!!”
곧바로 팔짝 뛰어오른 미마가 학신목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고는 꼬리를 붙잡은 채.
“우으….”
하고 나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저 반응이 또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켜서, 나는 매번 꼬리가 보일 때마다 본능적으로 잡아당기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그쯤 되면 알아서 꼬리를 잘 수납할 법도 한데, 어째 꼭 꼬리는 볕 잘 드는 곳에 내밀어 말리기라도 해야 하는 모양이다.
“얘기나 좀 하자. 날다람쥐.”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