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88)
12. 별빛의 보금자리
침울한 분위기 속, 훌쩍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과하게 감정을 이입한 마음 약한 코리와 어셔스 그리고 아카샤까지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샘을 터트려 버린 것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온 이들은 슬픔을 견뎌내지 못하고, 되레 미마 못지않은 풍파를 겪었던 이들은 끝끝내 감정을 조심조심 수납한다.
에뜨랑제는 말없이 그녀를 껴안고 도닥여 주었다. 얼마나 힘들었니, 라는 조악한 위로마저 건네지 못한 채 그저 가만히 고통을 공감할 뿐이었다.
루트비히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그 멍한 시선은 어쩌면 지난 마신전쟁 때 자신만을 남기고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난 밤의 일족들을 떠올리고 있을 거다.
러셀은 그들의 반응을 말없이 기다리고 있다가, 훌쩍거림이 잦아들 때쯤 시간을 힐끔 확인하고선 무심하게 내뱉었다.
“즙들은 다 짰어? 그럼 이제 작전도 짜자.”
이런 상황에서까지 라임을 맞추는 무심함을 넘어 냉정하기까지 한 반응에, 몇몇 동기들이 마물 사체라도 본 듯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진짜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냉혈한이네요.”
“쓰레기.”
“마지막 누구야.”
티 나지 않는 복화술로 자신을 비난하는 범인을 색출하려던 러셀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헤집었다.
“그래서 이대로 쟬 넘겨줄 거야?”
“그건 아니지만….”
“그럼 얼른 작전부터 짜야지. 시간이 없다. 오늘 저녁은 디데이야. 무조건 놈들이 찾아올 거다.”
러셀이 손뼉을 쳐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라고 감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일말의 죄책감까지 느끼고 있었다. 죄책감의 크기만큼, 책임감도 무거웠다.
“미마의 말을 종합해 보면, 특별히 주의해야 할 건 두 가지야. 첫 번째로 ‘위치 추적 기능’, 두 번째로 ‘원격 제어 기능’. 이 기능들이 있는 이상 사실상 충돌 없이 미마를 지키거나 빼돌리는 건 어렵다.”
담담히 현 상황을 전파하는 러셀의 입을 바라보는 부원들의 시선에 결연한 의지가 담긴다.
“두 기능, 파훼할 순 없는 거지?”
“응.”
미마는 소프트웨어에 탑재된 기능이라 따로 분리하는 건 어렵다고 덧붙였다.
“자. 이렇게 하자. 미마, 좀 고통스럽더라도 내 말대로 해 줄 수 있겠냐?”
의문을 품고 바라보는 미마를 향해 러셀이 차근차근 작전을 설명했다.
그러자 미마의 눈동자가 터질 듯이 커졌다.
“그걸, 어떻게….”
“내 얕은 지식에 따르면, 자동인형들은 대부분 ‘특별 기능’을 갖고 있는데 맞지?”
기상천외한 러셀의 지시에, 미마와 부원들 모두 얼굴이 하얗게 질릴 수밖에 없었다.
* * *
같은 시각.
폴리티아의 세 추적자는 정식으로 절차를 밟아 그림로어 교수동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리타니아 대륙은 과학이 많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여길 와 보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봐.”
추적대의 대장, 라이카는 학사 부지 곳곳에 달린 마법 장치들을 보며 감탄했다.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바다 너머, 섬 도시인 레인가르가 제법 과학기술이 발달했다고 들었습니다. 그림로어는 그쪽의 기술을 도입해 만든 군사도시입니다.”
“글쎄~ 폴리티아와 비교하면 그냥 미개해 보이는걸?”
“미개한 건 네 고정관념이 아닐까. 문화라는 건 발전 정도와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마땅한 거야.”
“뭐라고오!?”
“브리누스, 카논. 그만해. 틈만 나면 싸우는 것도 지겹지 않니?”
라이카는 서로를 향해 무장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 두 대원을 떨어트려 제지했다.
제 말에는 불복하지 않는 충성심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잠깐만 긴장을 늦춰도 두 사람은 시시때때로 부딪혀 사건 사고를 일으키곤 했다.
어린애들을 데리고 소풍을 다니는 보육교사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특히 평소엔 한없이 늠름하고 어른스러운 브리누스가 왜 카논과만 붙어 있으면 저렇게 티격태격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리고 대장. 꼭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해요? 폭격으로 일망타진하고 미마만 쏙 빼서 데려가면 되잖아요.”
“하하. 이제라랑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니? 물론 최후의 방법으로는 무력도 생각하겠지만, 가급적 조용히 목표만 확보하는 게 좋아. 카논, 우리가 지금 다른 대륙과 전쟁까지 치를 여력이 될까?”
“아니요…….”
“그러니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겠지?”
“그렇죠…….”
시무룩해진 카논을 보며 라이카와 브리누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동인형답지 않게 감정이 풍부한 카논은 때때로 골치를 썩였지만, 그래도 사랑스러운 인형이었으니까.
세 사람은 안내받은 길을 따라 교수동 총장실로 올라갔다.
그림로어 사관학교 건물 중 가장 층고가 높은 건물 꼭대기 층.
학교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총장실 앞에서 비서가 그들을 맞이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고마워요. 얘들아. 너희는 밖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어.”
라이카는 살짝 심호흡하고 홀로 총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카논이나, 배려라는 의사소통 방식을 어려워하는 브리누스는 협상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여기서부턴 오롯이 제 몫이었다.
“어서 오시오. 방문자여. 그림로어 사관학교 총장 오리건 샤론이라 합니다.”
“폴리티아 전투부대 지휘관 라이카입니다.”
“먼 길 오느라 고생이 많았소.”
“환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생각보다 거부감 없는 반응을 보여 라이카는 안도했다.
역시 다양한 인간, 수인, 자동인형까지 섞여 산다는 대륙답게 개방적인 분위기다.
“여기는 다이크 로필런. 그대들이 신변 확인을 요청한 생도의 담임교수요. 그리고 여기는 크릭. 그 생도가 속한 동아리의 전임교수지.”
오리건 총장의 소개에 다이크와 크릭이 가볍게 묵례했다.
“생도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관련 교수들을 동석시켰네만, 괜찮겠소?”
“네. 그럼요.”
라이카가 힐끔 두 사람의 관상을 살폈다.
한쪽은 표정을 잘 갈무리했지만, 은은한 경계심을 드러냈고 다른 한쪽은 얼굴에 귀찮은 일에 엮였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 대충은 들었소만. 우리 생도에게 볼일이 있다고?”
“네. 말씀드린 미마라는 생도는 폴리티아에서 도망친 자동인형입니다. 현재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고요. 저희는 해당 개체를 회수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원하시는 조건이 있다면 본국에 전달할 테니, 자동인형 미마의 신병을 인계해 주시길 요청합니다.”
“허허허.”
오리건 총장은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어 주었다.
“그래. 그쪽도 그쪽의 이유가 존재하는 법이겠지. 일단 사정은 알아들었소. 교수들은 어찌 생각하는가?”
“불가합니다.”
“이유는?”
다이크는 단박에 거절했다. 오리건 총장은 예상했다는 듯 그 이유를 물었다.
“미마는 1학년 전체 수석입니다. 차후 주요한 전력이 될 영웅 후보생을 넘겨줄 순 없습니다.”
정석에 가까운 대답. 너무도 다이크다운 답변에 총장은 허허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크릭 교수의 생각은?”
“글쎄요. 당사자가 선택할 일이겠죠? 당사자가 떠나겠다는데 뭔 명분으로 막겠습니까?”
“이렇게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한 내용을 보면 아마 당사자는 원하지 않을 것 같구먼. 아니 그런가?”
오리건 총장의 반문에, 라이카는 말문을 열지 못했다.
처음 눈을 마주했을 땐 그저 정정한 노인네 정도의 인상이었는데, 협상이 진행되면 될수록 그 안에 뱀 수십 마리는 똬리 틀고 있을 것 같은 강퍅함이 느껴졌다.
라이카가 대답하지 못하자 크릭이 코웃음을 쳤다.
“당사자가 싫다면 안 되는 거죠. 어디 남의 나라에 와서 감 놔라 배 놔라 할 수 있습니까. 그쪽 대륙은 예의라는 걸 배우지 못한 모양이죠?”
“진정하게나, 크릭 교수.”
총장의 말에 크릭이 어깨를 으쓱하고선 다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고약한 노인네.
어차피 답을 다 정해 놓았으면서 교수들을 이용해 판을 제가 원하는 대로 끌고 가려는 속셈이다. 덕분에 담배도 다 피우지 못하고 장초만 버린 채 끌려왔다.
“자자. 라이카 지휘관. 자네도 들었겠지만,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한 생도를 내어줄 순 없겠네. 그림로어는 생도를 보호할 의무를 지니지. 꼭 수석이고 재능 있는 생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외부인이 와서 감히 생도의 안위를 겁박할 순 없다네.”
“하지만, 총장님.”
“돌아가 주었으면 하네. 어차피 학사 기간은 4년. 정 그 아이의 신병확보를 원한다면 학사 커리큘럼이 끝나고 졸업생 신분일 때 다시 찾아오게.”
“그렇다면 미마와 대면할 기회를 주실 순 없을까요?”
“곤란하지. 그대를 의심하는 건 아니네만, 혹시 생도를 겁박할 수단을 가졌을지도 모르잖나. 생도의 의견은 우리가 따로 물어볼 거네. 짐작건대…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지만.”
“…….”
“차 한잔 더 따라 드릴까?”
“이는 외교적 문제로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총장님. 어쩌면… 전쟁으로 번질지도 모릅니다.”
“하하.”
“막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겠습니다. 원하신다면 폴리티아의 일부 기술까지 이제라에 지원할 수도 있어요. 재고를 요청합니다.”
“마신과의 전쟁에서도 굴하지 않고 승리해낸 이제라에 전쟁을 논하는가. 폴리티아의 자동인형이여.”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라는 뜻입니다. 저는 양국의 전쟁을 절대 바라지 않아요.”
“장벽으로 단절된 대륙끼리 제대로 전쟁을 치를 수 없다는 건 지휘관인 그대가 더 잘 알고 있을 테지. 그리고 이제라 왕실 또한 자국으로 망명한 이를 함부로 넘길 만큼 막돼먹지 못하네. 아마 내가 생도를 넘기면 여왕 폐하께서 발 벗고 나를 치죄하실지도 모르지.”
커다란 벽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듯한 착각에 라이카는 머리가 하얗게 물드는 기분을 받았다.
협상할 때 가장 곤란한 상대는 강한 신념을 가진 이다. 그런 자들에겐 애초부터 협상이란 기술이 먹히지 않는다.
“4년은 짧은 시간이라네. 차나 한잔 더 들고 돌아가게나. 그 생도가 소속된 동아리에서 직접 재배한 찻잎이니. 허허. 향이 참 좋지 않은가?”
* * *
“조교수.”
“네. 교수님.”
총장과의 면담을 끝낸 다이크 로필런은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조교수를 불렀다.
“메이드장 앤 메이에게 한동안 프리마관의 경비를 더 삼엄하게 서도록 전달하라.”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1학년 교수진 전체에게 공문을 돌리도록. 혹시 모를 위급사항 발생 시 지원할 수 있도록 당직 인원을 자원받는다고 전하라.”
“네. 교수님.”
다이크의 조교수는 가타부타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애초부터 그런 자만을 조교로 들였기 때문에.
다이크는 발 빠르게 움직이는 조교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머릿속에 동기가 위험에 빠졌다고 역설하던 한 생도의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엔 반신반의하는 마음이었으나, 실제로 폴리티아의 추적자들이 학사를 방문했고 생도의 신병을 요구했다.
그렇다는 건 러셀 애시그린이 말한 대로 그들이 돌아가지 않고 무력으로 미마를 납치할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뜻이었다.
합리적 의심과 충분한 정황은 그를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적어도 제가 교수직에 있는 한 담임 생도들에게는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할 것이었다.
* * *
“어쩌죠, 대장?!”
“미안. 그들이 너무도 단호하네. 아무래도 온건하게 해결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세 사람은 협상이 끝나자마자 학사 밖으로 내쫓겼다.
그들을 안내하는 안내인의 태도는 사뭇 공손했으나, 축객이라는 의도 자체는 선명했다.
“감시가 붙었습니다. 대장.”
탐지 기능을 작동시켜 본 브리누스가 라이카에게 보고했다.
아무래도 그들이 그림로어를 떠나기 전까지, 학사 측은 그들을 감시할 요량이었다.
“이제라와 충돌을 일으키는 건 원하지 않지만… 임무 중요도는 ‘필행(必行)’ 반드시 해내야 해. 회수하자.”
“좋았어!”
“…결국 이렇게 되는군요.”
“사전 조사는 충분해. 성공확률은 79%. 저들 말대로 대륙 간 전쟁은 불가능해. 그러니 후처리는 고려하지 말자.”
그들이 리타니아 대륙에서 회수해야 하는 인형 중, ‘필행(必行)’ 등급은 두 개.
최초의 자동인형인 클로에와, 수인 출신 자동인형인 미마.
그중에서도 미마 확보는 즉각 수행 등급의 임무였다.
“오늘 새벽. 가장 시야가 어두운 시간을 노리자. 카논이 교수동에 폭격을 떨어트려서 최대한 소란을 일으켜.”
“네!!”
“그사이 내가 프리마관 입구에서 메이드들의 시선을 모은 뒤 제압할게. 브리누스는 창문을 통해 미마의 숙소로 침입한 뒤 [원격 제어 장치]로 미마의 기체 통제권을 가져오면 돼. 제어가 끝나자마자 신호 주면 각자 고속비행으로 카오스 게이트까지 퇴각할 거야. 알아들었니?”
두 자동인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폴리티아군 지휘관 라이카》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