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ro in the military academy suit RAW novel - Chapter (98)
13. 학기말 평가
자그마치 10초짜리 스턴기를 얻어맞은 파는 아찔한 듯 표정이 얼어붙었다가 간신히 평정을 되찾았다.
“리지의 제안을 말해 줄게.”
“마이 로드라고 불러야지, 이 충성심 없는 뱀파이어 자식아.”
물론 러셀은 얻어걸린 놀림거리를 그대로 놓아줄 생각이 없었고, 파는 다시 한번 스턴기의 향연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애써 러셀을 무시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둘째 날까지는 탐색전으로 하자. 오후 보급품 획득을 방해하지 않을 테니까, 저녁 보급품 때는 영역을 반으로 갈라서 골고루 배분하는 거야.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수학동 쪽은 너희가, 수련동 쪽은 우리가.”
파의 제안에, 정확히는 리지의 제안에 루트비히는 고개를 기울였다.
보급품이 부족하리란 사실 정도는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그런데 저녁 보급을 정확하게 반으로 딱 갈라먹는다? 이쪽에 전혀 나쁜 것 없는 제안이다.
그래서 더 수상했다.
“…그게 끝인가요? 그쪽 진영에 너무 불리한 조건 같은데요.”
“대신, 첫 번째 대형 보급품은 우리가 먼저 가져가게 해 줘. 첫날은 우리가, 둘째 날은 너희가 가져간 뒤 셋째 날부터는 본격적으로 경쟁하는 거지.”
그러면 그렇지.
루트비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손해 보는 거래를 할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굳이 이런 제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무슨 의도로 그들은 공격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틀이란 시간을 허비하느냐.
그것은 아마도 용족 견제다.
루트비히가 고민했던 것처럼, 리지 또한 용족이 막강한 제3세력이란 걸 인지하고 처음부터 소모적으로 나가 그들이 유리한 판을 깔고 싶지 않은 거다.
이건 그런 제안이다.
당장 우리끼리 치고받기 전에, 먼저 용족의 동향을 파악하자고.
모든 정황을 파악한 루트비히는 짐짓 젠체하며 파를 떠보았다.
“우리가 거절하면요?”
“전쟁이지.”
“여러분은 여기서 전부 탈락할 텐데요.”
“자기 한 몸 빼낼 자신 있는 사람들만 모아 온 거 안 보여?”
그렇게 말하며 씩 웃는 파는 예의 모습을 되찾은 듯 보였다.
특유의 호쾌한 몸짓이 어쩐지 조금 아니꼬워 보인 러셀이 히죽 웃으며,
“여윽시 로드의 신임을 받는 뱀파이어의 패기는 다르군!”
이라고 말하며 파의 속을 긁어놓았다.
저 자식. 인간 진영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끈질기게 정신 공격을 할 리 없다.
파는 흐린 눈으로 러셀은 시야에서 지워 버린 뒤 두 번째 협상안을 제시했다.
먼저 비슷한 조건을 제시한 뒤, 조금 더 달콤해 보이는 조건을 던진다.
이건 물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할 거라는 리지의 말을 떠올렸다.
“만약 수락한다면 성물 탐색도 사흘째 오전부터 시작한다고 하더라. 만약 뱀파이어들이 그 전에 성역에서 모습을 보이면 언제든 협정을 파기해도 좋다고.”
사전 답사는 이미 진행 중이었지만, 인간 진영에서 알 리 없었다.
그렇기에 루트비히는 제법 괜찮은 제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 성물이 안전하다.
‘이건 좀… 제가 한 방 먹은 것 같네요… 리지 님.’
루트비히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해서 한 번 더 협상을 던졌다.
“저희가 오늘 대형 보급을 확보할게요. 내일 당신들의 차례인 걸로 해요.”
“어허. 그건 좀 곤란하지. 혹시라도 그렇게 얘기하면 협상은 결렬이라고 미리 언질 받았어. 이만큼 양보했으면, 너희도 어느 정도는 양보해야 하는 것 아니야?”
정론이었다.
효력이 없는 언약이지만, 적어도 지인 간의 약속이란 무게감이 있다.
물론 약조가 깨질 리스크도 있다.
하나 가볍게 깨 버리기엔 서로가 얻을 이해득실이 명확하다.
루트비히는 반사적으로 제 진영 생도들을 돌아보았다.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
아직 누가 아군이고 누가 간자인지 파악하지 못한 상황.
잠깐 시선을 돌려 러셀을 바라보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고 말하는 듯 심드렁한 표정이다.
그가 용살자라면, 두 진영 간 싸움에는 별 관심이 없을 테니 그럴 수 있다. 그저 정체를 밝히는 용족만 잡아 처리하면 될 테니까.
문제는 용족들도 이 거래를 모두 듣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도 생각이 있다면… 이 협정이 자신들을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것쯤은 알아챘을 터.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 상황에 어떤 대처를 할까?
‘다른 건 몰라도 용족들을 초조하게 만들려면 뱀파이어 진영과의 협정은 필요해.’
고민은 길었고 결정은 빨랐다.
“조건, 받아들이죠.”
“잘 생각했다. 역시 루트비히는 똑똑한 아이라니까.”
“정말 여러분은 학습 능력이라는 게 없는 걸까요? 저는 아이가 아닙니다. 파 님보다도 나이가 많다고요.”
“하하하. 그럴 리가? 그림자 엘프들이 얼마나 오래 사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야?”
루트비히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으하하, 갑자기 극존칭을?”
“…….”
파의 표정에서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직감한 루트비히가 주먹을 쥐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친한 사람들이 생긴 건 솔직히 기쁘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편해지고 싶진 않았어….
차마 입으로 내뱉을 순 없는 말이었다.
“그럼 고생들 하라구.”
파는 손을 휘적휘적 저은 뒤 잽싸게 사라졌다.
“우리도 서두르죠. 시간을 좀 허비했네요. 시민분들도 점수 경쟁을 해야 하니까 각자 흩어져서 보급품을 수색하고 먼저 발견하는 사람이 태그하는 거로 해요. 다른 사람들은 돌아가요.”
루트비히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눈치를 보던 시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튀어 나갔다.
* * *
두 진영이 약조한 대로 저녁 보급은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진행됐다.
루트비히는 왕의 회랑으로 전달된 보급품 물량을 확인하며 생각에 잠겼다.
“물통 15개. 건식량 140인분… 그리고 무선통신기 3개.”
300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모여 있다는 걸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한 분량이다.
심지어 방해 없이 오후 보급을 확보했는데도 이 정도다.
최대치란 의미다.
‘식량을 어떻게 나눌지도 고민해야 하고… 대체 왜 나한테 이런 귀찮은 역할을….’
어차피 장학금 같은 것에는 목메지 않는다.
여왕의 추천서를 받고 입학한 이상, 학비 따위가 문제일까.
성적도 개의치 않는다.
지금은 그가 잘해 내도 기뻐하거나 칭찬해 줄 이들이 없으니.
다만 특유의 승부욕 때문에 저절로 좋은 성적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때려치울까….’
이런 유치한 역할극 같은 건, 아무래도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또 나름대로 책임감은 있는 성격이라, 제 선택에 성적이 걸려 있는 수많은 인간 진영 생도들의 기대감 어린 눈빛을 마냥 외면하지는 못하겠다는 점이다.
“지금부터 모든 생도는 3명씩 짝을 이룰게요. 경비병들은 교대로 성역을 순찰하시고 수호자들은 대강당 입구에서 불침번을 서면서 제게 접근하는 사람이 없도록 해 주세요.”
루트비히는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대충대충 하는 건 제 성향과는 상극이었다.
“서로서로 감시하면서 수상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얘기해 주시고요. 수호자 외에 다른 분들은 제가 취침할 땐 대강당으로 들어오지 말아 주세요. 창가에서 바람 정도는 쐬어도 괜찮지만, 본관 건물 밖으로는 나가시면 안 됩니다.”
아예 포기한다면 모를까. 시작되었다면 그래도 최선을 다한다.
일족에 부끄럽지 않은 주시자가 되기 위해서.
* * *
“생각보다 잠잠하네.”
나는 수학동 본관 옥상에 올라와 별 반짝이는 밤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딱히 감상에 젖는 취미 같은 건 없었지만, 이 세계의 비현실적인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보면 이따금 한 폭의 예술작품 같은 배경에 빠져들고 마는 것이었다.
“조원은?”
“당연히 버리고 왔지. 거추장스러운 것들.”
짝을 맺게 된 ‘성전사’들이 혼자 행동하면 안 된다고, 왕에게 고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그러든가’라고 짧게 대답하고선 올라왔다.
어차피 나는 용살자니까 인간들의 왕 따위에게 눈치 볼 필요는 없다 이 말이지.
내 옆에는 어떻게 알고 올라왔는지 미마가 난간 옆 벤치에 앉아 식빵을 굽고 있었다.
가끔 보면 다람쥔지 고양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니까.
“너희 조원들은?”
“자.”
“너도 가서 자야지. 늦었는데 여기서 뭐 해. 잠이 안 와?”
“응. 너는?”
“나도 딱히. 낮에 하도 자서 말이지.”
양측 진영이 잠잠한 탓에 첫날은 의외로 비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저주를 핑계 삼아 낮잠을 실컷 잤다.
내부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루트비히를 곁눈질하며 자는 잠은,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있잖아, 러셀.”
“어어.”
“러셀은 용족이야?”
훅 들어오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려 미마를 응시했다.
“말해 주겠냐고.”
“말해 줘.”
“왜?”
“도와줄게.”
“……?”
얘가 뭘 잘못 처먹었나.
난데없는 협조 선언에 나는 고개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미마도 나름대로 성적에 목메는 타입의 생도다. 이 녀석은 장학금을 빼면 지원받을 구석이 아예 없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성적은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먼저 누군가를 돕거나 나서는 타입도 아니었고.
“왜?”
“…그냥. 이유는 말할 수 없어.”
“어이가 없네.”
내 한숨 섞인 대답에 미마는 들릴 듯 말 듯 쿡쿡 웃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수군대듯 속살거렸다.
“저번에 있잖아.”
“저번에?”
“막 무서운 얼굴 하고서 나한테 털어놓으라고 윽박지르던 그때… 살아남으라고… 나 살리려고 치열한 표정을 지으면서 건방지게 굴었던 거 말이야.”
그녀는 스스로도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는지 정제되지 못한 횡설수설을 의식의 흐름대로 늘어놓았다.
뭐지. 시비 거는 건가.
꿀밤을 준비할까 하다가 미마의 표정을 보고 그만두었다.
시비 거는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묘하게 기쁜 듯, 기분 좋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는 잠시 미마의 말을 그녀의 언어로 번역기를 돌려 보다가 되물었다.
“고맙다고?”
“응.”
“아아. 그럼 도와준다는 것도 결국 빚을 갚고 싶단 뜻이지?”
“…응.”
그럴 줄 알았다.
아무래도 지난 폴리티아의 추적자들 에피소드에서 내게 진 빚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묘하게 달라붙는 듯한 태도도 그렇고 뭔가 어울리지 않게 잘해 주거나 조심스럽게 구는 게 이상하다 싶었는데, 아직도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이야.
은혜를 아는 설치류 같으니.
덤덤충 캐릭터가 사라진 건 아쉽지만, 나름대로 마뜩할 만한 변화이기도 했다.
미마 정도 되는 생도가 이 정도로 협조적이면… 차후 에피소드들은 더 편해지지 않을까?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주워 담다가 픽 웃고는 목 뒤로 손깍지를 낀 뒤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받쳤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서라, 인마.”
“……? 1등이 하고 싶은 거 아니야?”
“하고 싶지. 근데 나는 그냥 1등을 하려는 게 아니야. 쟁쟁한 경쟁자들이 아등바등 노력하고 이뤄낸 성적을 정정당당하게 짓밟고 올라서서 승리의 비틱질을 하고 싶은 거라고. 알간?”
“…….”
“그렇게 괴상망측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진 말고.”
“넌 진짜 이상해.”
“사돈 남 말 하시네.”
그저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큭큭거리며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미마도 웃음을 참는지 어깨를 들썩거린다.
어쩌다 이 녀석과 이런 대화까지 나누게 된 걸까.
“아무튼, 딴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해서 최대한 좋은 점수 따라. 다음 학기에도 같이 프리마관에서 생활해야지. 그냥 넌 너대로 최선을 다하면 돼.”
“…응. 다음 학기에도… 같이.”
이만하면 제대로 의미가 전달됐는지, 미마는 고개를 수그린 채로 내 말을 중얼거리듯 되뇌었다.
언뜻 보면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듯도 싶다.
말 잘 듣는 관상용 애완 수인의 모습을 보니 어쩐지 대견했다.
“근데 혹시 네가 1등 하면 권능석은 나 주면 안 되냐?”
“…….”
방금은 좀 없어 보였나…?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