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04
레펜하르트 일행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공용어를 쓴 칼켄이었다.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레펜하르트가 반색을 하며 오크어로 입을 열었다.
“기쁜 일이오, 푸른 곰 부족의 칼켄이여. 이제 형제가 되었으니 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막 용건을 꺼내려는 레펜하르트를 만류하며 갑자기 칼켄이 손을 휘저었다.
“나중에.”
“응?”
그리고 어리둥절해하는 레펜하르트를 보며 씨익 이빨을 드러내 웃었다.
“일단 술 먹자.”
“…….”
“칼로 대화했으니 술로 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술 먹자는 소리에 오크들이 좋다고 또 환호를 지른다. 뭐, 호투의 의식은 오크 부족들 간의 관계를 다지기 위한 의식이니 끝나고 축제가 이어지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칼켄이 다른 일행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공용어로 호쾌하게 외쳤다.
“우리 집 가자! 거기 술 많다!”
오크어를 알아듣는 레펜하르트가 있음에도 굳이 공용어를 쓰는 것은 칼켄이 외모와 달리 사려 깊은 성품이라는 걸 증명한다. 듣기엔 우스워 보이지만 다들 칼켄의 배려에 감사하며 말을 불러 모았다. 오크들도 다이어울프에 올라타고 떠날 채비를 갖췄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느덧 저녁, 황혼의 석양이 황야의 대지 위로 깊게 드리운다, 오크들과 레펜하르트 일행은 사이좋게 머리를 나란히 하고 길을 떠나기 시작했다.
3
어둠이 깃든 황야의 대지를 밝히며 커다란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레펜하르트 일행을 맞이한 푸른 곰 부족이 만남의 축제를 벌인 것이다.
모든 오크들이 공터에 모여 앉았다. 레펜하르트 일행도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 의자라는 개념이 없는 오크들이다 보니 그냥 땅바닥 아무데나 주저앉는 것이지만, 그래도 레펜하르트 일행은 귀빈 취급을 해 주는지 자리에 짐승 가죽을 하나씩 깔아 주고 있었다.
모닥불 앞에 서서 칼켄이 뿔로 만든 술잔을 들어 올리며 고함을 지른다.
“새로운 형제를 만났으니 실로 기쁜 일이다! 모두 술잔을 들어 축하하자!”
“와아아아!”
레펜하르트 일행을 향해 오크들이 반가움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환대 어린 함성을 보냈다. 물론 당하는 일행 입장에선 눈을 번들거리며 고함을 내지르는 것이 어째 당장이라도 잡아먹힐 것처럼 보였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오크어를 모르는 실란과 러스가 삐죽거리며 어색하게 술잔을 마주 들었다.
“분명 좋은 의미라는 건 알지만요…….”
“이거야 원 살벌해서 술 먹겠나…….”
하여튼 오크들이 진심으로 일행을 맞이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인간의 침입을 경계하며 나간 동족들이 엉뚱하게 그들을 형제랍시고 데리고 왔는데도, 오크들은 아무도 의심하거나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심지어는 그 속에 레펜하르트의 마법에 당했던 오크 스카우터들도 있었는데, 그들조차도 납득하는 분위기였다. 위대한 전사들이 인정했으니 당연히 그들도 인정한다는 식이다.
‘참 변함이 없구먼. 이래서 옛날에는 많이 당하기도 했었다는데…….’
옛 기록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뺨을 긁었다. 상대가 어느 종족이건 강함을 선보이면 형제처럼 대하는 오크들의 습성은, 그만큼 인간들에게 자주 이용되기도 했다. 인간이 대륙을 지배하기 전에는 저러다가 인간에게 속고 배신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던 것이다.
덕분에 한동안은 동족 이외의 전사는 아무리 강해도 전사로 인정하지 않는 편협한 시각이 오크족 사이에 만연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대부분의 오크들이 오지로 밀려나고, 인간이 굳이 계략을 써서 오크들을 상대할 필요가 없어진 지금은 오크들도 다시 예전의 순박한 상태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원래 모습을 되찾았으니 좋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도로 멍청해졌으니 나쁘다고 해야 할지…….’
오크들은 단순하기에 강하다.
인간의 계략을 마주해 함께 머리를 쓰기 시작하며 오크족 역시 한때 교활해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크들에게는 오히려 독이었다.
교활해진 만큼 오크들은 약해졌다. 생각이 많아지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게 되고, 잡념이 늘어나며 그들의 비전, 스피리츠 웨폰과 맹수 길들이기 기술도 잃어갔다. 거기에 지나치게 허약한 항마력이 결합하니 결국 인간에게 터전을 빼앗기고 노예 신세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푸른 곰 부족의 오크들은 틀림없이 조상들의 원시적인 강함을 유지하고 있다.
갑자기 칼켄이 레펜하르트를 불렀다.
“형제! 내 술을 받게!”
칼켄이 자신의 술잔을 가득 채워 레펜하르트에게 건넸다. 덩치 큰 칼켄답게 그의 뿔 술잔은 실란이 모자로 써도 될 정도의 사이즈를 자랑하고 있었다.
술잔을 받으며 레펜하르트는 잠시 속으로 떨떠름해했다.
‘윽, 이거 그거군.’
그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크들이 주로 마시는, 양젖이나 말젖을 발효해 만든 이 시금털털한 액체를. 전생에, 안타레스 제국 황제 시절 이미 마셔 보았다.
‘그야말로 더럽게 독하고 더럽게 맛없는 술이었지.’
하지만 상대의 호의에 얼굴 찌푸릴 수는 없는 노릇. 레펜하르트는 애써 웃으며 술잔을 받았다. 예전엔 이거 한 잔 마시고 그대로 쓰러져서 오크들의 조소를 받았었는데…….
“어? 맛있네?”
역시 몸이 바뀌니 입맛도 바뀐 모양이었다. 하기야 사부 제라드 밑에서 온갖 악식은 다 경험해 본 그였다. 그랜드 포지에서 바실리스크 고기도 맛있다고 씹어 댄 그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지간한 음식은 다 맛있다고 느껴질 만큼 그의 미각은 망가져(?) 있었던 것이다.
“입에 맞나 보군? 인간 입에도 맞을지 조금 걱정했는데.”
자신들의 술이 칭찬받자 칼켄이 기쁜 표정을 짓는다. 뭐, 러스나 실란이 한 모금 마셔 보고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보면 딱히 인간 입에 맞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시리스나 틸라의 표정을 보면 엘프나 드워프에게도 비슷한 것 같다.
칼켄이 스탈라를 돌아보더니 버럭 소리쳤다.
“나의 형제가 우리의 술을 즐겨 하니 이 아니 기쁠쏜가? 마누라, 술통째로 들고 와! 오늘 형제와 화통하게 술통을 비워야겠다!”
“술 먹을 핑계는 귀신같이 찾는구려.”
핀잔을 던지며 스탈라가 천막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양팔에 술통을 하나씩 끼고 나왔다. 실란 정도는 구겨 넣으면 통째로 들어가고도 여분이 남을 거대한 술통이었다. 그것을 받아 들더니 칼켄이 각자 앞에 하나씩 놓고 레펜하르트에게 말했다.
“마시자!”
그리고 뚜껑을 따더니 술통째 들고 벌컥벌컥 비운다. 단숨에 술통을 싹 비운 칼켄이 불룩해진 배를 두들기며 트림을 거하게 했다.
“꺼억! 역시 술은 통으로 마셔야 맛이지!”
시리스며 틸라, 러스와 실란이 동시에 기가 차 입을 쩍 벌렸다. 오크들 무식하다는 소리 많이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니, 지금 사람더러 술잔도 아니고 술통을 한 큐에 비우라는 건가?
반면 레펜하르트는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운 사이즈구먼.’
사부 밑에서 저보다 더 큰 사이즈의 죽을 매일 입에 달고 살았던 적도 있다. 이까짓 술통 하나쯤이야?
짐 언브레이커블의 추억을 떠올리며 레펜하르트는 술통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참 동안이나 술통을 든 채 목청으로 벌컥벌컥 술을 넘긴다. 오크들의 표정에 놀라움이 번져 갔다.
잠시 후, 레펜하르트는 술통을 싹 비운 채 거하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오크들이 환호를 터트렸다.
“오오오!”
“대단하다!”
“과연 투사다!”
원래 오크들은 술 센 놈이 힘도 세고 정력도 세다. 다들 레펜하르트를 대단히 위대한 수컷으로 보며 더더욱 친밀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밤이 깊어지고, 축제도 점점 더 무르익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푸른 곰 부족의 모든 오크들이 신 나게 술과 고기를 퍼먹었다. 마침 타이밍도 좋았다. 타시드가 잡아온 터틀 라이온에, 칼켄의 수확물인 엘더 드레이크 고기까지 있으니 먹을 것은 풍성하고도 남았다. 황야에서 살다 보니 소금기라곤 어쩌다 발견되는 암염이 전부, 어차피 장기 보존 방식이라곤 원시적인 훈제 수법밖에 가지지 못한 오크들이다. 먹을 게 생기면 그때그때 싹 비우는 습성이 뿌리에 박혀 있다.
배불리 먹고 마음껏 취한 오크들이 여기저기서 오크어로 노래를 뽑기 시작했다. 오크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전통요였는데, 격렬한 리듬이며 투박한 가락이 거의 군가나 행진가 수준의 열혈을 자랑하고 있었다. 노래에 맞춰 몇몇 오크들이 싸움박질을 시작했다.
“크아아! 덤벼! 덤벼!”
“눕혀 주마, 이 자식!”
원래 오크들의 축제에는 다른 종족들처럼 춤이란 개념이 없다. 대신 오크들은 축제를 시작하면 마음껏 먹고 마시고 싸운다.
“심지어는 결혼식 때도 신랑과 신부가 박투를 벌여 승리한 쪽이 패배한 쪽을 안고 신방으로 향하는 풍습도 있다?”
레펜하르트의 설명에 실란이 부들부들 떨었다.
“그, 그것참 섬뜩한 풍습이네요.”
왠지 다른 이유가 있는 듯, 유달리 덜덜 떠는 실란이었다.
싸우지 않는 오크들은 레펜하르트 일행에 관심을 갖고 서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주로 오크 여성들이었다. 여자 셋이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속담은 전 종족 공통이라는 놀라운 범용성을 지니고 있었다.
“엘프들은 저렇게 뚱뚱한가? 저런데도 강하다니 놀라워.”
“저 드워프 여자도 뚱뚱하잖아? 어떻게 전사가 될 수 있었을까?”
자신들을 향해 숙덕거리는 오크 여인들의 모습에 시리스가 슬쩍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
“뭐래요?”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뚱뚱하단 소리를 들은 시리스와 틸라의 표정이 팍삭 구겨졌다. 오크들에겐 아무리 겉보기에 가녀려 보여도 근육이 드러나지 않으면 뚱뚱한 것이다. 바로 레펜하르트에게서 설명을 들어, 오크들의 ‘뚱뚱함’이란 게 어떤 기준인지야 알았지만…….
“거참, 기분 묘하네요.”
“그러게요.”
팔뚝이 자기 허벅지보다도 두꺼운 여자들에게 뚱뚱하단 소릴 듣고 있자니 참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틸라가 신경질적으로 술을 들이 킨 뒤 캑캑 기침을 해 댔다.
그 옆에서, 실란은 눈앞에 수북하게 쌓인 고기를 보며 난처해하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오크 여인들이 계속 그 앞에만 자꾸 음식을 가져다준 것이다.
“아, 저 이제 배부른데…….”
“케찰드! 케찰드!”
전사들과 달리 이들은 일개 부족민이라 공용어까진 모르는지, 계속 오크어로 실란을 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손짓으로 저것이 먹으라는 의미임은 쉽게 알 수 있다. 음식을 계속 주는 걸 보면 상당히 환대하는 것은 맞는 것 같다. 난처해하면서도 실란은 기뻐하고 있었다.
물론 오크들의 말을 이해했다면 결코 기쁘지 않았겠지만.
“저거, 남자애래.”
“세상에! 남자애가 저리 말랐대?”
“곧 죽겠는데?”
“불쌍해라. 전사들 사이에 껴 있으며 얼마나 자괴감을 느꼈을까?”
곧 죽을 부실한 아이 취급을 받으면서도 실란은 아무것도 모른 채 방실방실 웃을 뿐이었다.
“아, 저기. 고맙습니다만 이미 배부르게 먹었어요. 정말이에요. 그만 주셔도 되는데…… 아이고, 또 주시네.”
한편 러스는 모닥불 옆에 앉아 오크들의 축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그도 레펜하르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오크들은 무식해 보이지만, 그만큼 감정이 있고 이성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용맹함과 전사에 대한 사상은 기사의 그것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기사란 존재도 무식하기는 꽤나 만만찮아서, 기사단에서 술판 벌이면 지금의 작태와 별로 다를 것도 없다. 러스 입장에서는 오히려 드워프 때보다 더 감성적으로 와 닿는다.
“으음, 이게 형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바인가…….”
☆ ☆ ☆
한창 축제의 밤이 깊어지는 중이었다. 갑자기 오크들 사이에서 작은 소란이 일어난다. 웅성대는 분위기에 칼켄과 대작하고 있던 레펜하르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음? 무슨 일이오?”
“아, 양치기들이 돌아온 모양이군.”
말술을 퍼마신 주제에 둘 다 전혀 취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둘 다 극도로 단련된 육체에 오러까지 구사하는 자, 어지간히 마셔서는 취기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뭐, 둘 다 적당히 얼굴이 붉어진 것이 취기 정도는 오른 것 같지만.
칼켄의 말에 레펜하르트는 그렇구나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별일 아니다 싶어 다시 칼켄과 대작하려는데, 축제에 끼어든 양치기 오크들 중 특이한 이가 하나 있었다. 다들 검붉은 피부를 지닌 데 비해 혼자서 녹색 피부를 지닌 건장한 오크, 그를 보며 레펜하르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그 오크도 레펜하르트를 보더니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은인이 아니시오?”
전생에 그의 충실한 수하였던 이, 그리고 이번 생애에서 자신의 손에 의해 운명으로 인도했던 미래의 오크 대전사, 타시드였다. 안 그래도 아까부터 찾고 있었지만 안 보여 의아해했는데 저기 있었던 것이다.
타시드가 화색을 띠며 레펜하르트에게 달려온다. 그 모습에 레펜하르트는 그리움을 느꼈다. 더 이상 타시드는 약하고 작은 소년이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건장한 체구에 용맹한 표정을 짓는, 기억 속의 친우였다.
“타시드!”
반가워하며 레펜하르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마주 달려와 타시드가 레펜하르트의 손을 잡았다. 타시드가 기뻐하며 말했다.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많이 변했는데도…….”
타시드가 레펜하르트를 만난 것은 아직 성인이 되기 전의 작은 소년 시절이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엄청나게 변했는데도 은인이 자신을 알아보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좋아하는 타시드를 보며 레펜하르트는 멋쩍어했다.
“아, 그건…….”
사실 그의 기억 속 타시드는 오히려 이쪽이 원본(?)이다. 못 알아 볼 리가 있나?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추억 속의 친우와 재회해 기뻐하는 두 사람을 보며 칼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아는 사이인가?”
“제가 이곳에 오도록 인도했던 은인입니다, 족장님.”
타시드가 어떻게 그들, 푸른 곰 부족을 찾게 되었는지는 칼켄도 잘 알고 있었다.
“허어! 이런 우연이 있나!”
칼켄은 새삼스레 레펜하르트를 다시 보았다. 물론 호투의 의식으로 상대가 믿을 만하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타시드 건으로 인해 더더욱 신뢰할 수 있는 자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제야 칼켄은 의아해했다.
‘그런데 이런 자가 왜 우리를 찾아온 거지?’
한참 전에 떠올렸어야 할 일을 칼켄은 이제야, 싸울 것 다 싸우고 술 마실 것 다 마신 다음에야 겨우 떠올린 것이다. 실로 모범적인 오크다운 태도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마누라가 뭔가 눈치를 주긴 했지?’
이제야 마누라의 눈짓이 뭔지 알 것 같다. 칼켄이 레펜하르트에게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