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Indomitable Martial King RAW novel - chapter 118
레펜하르트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뭐든지 다 잘하는 놈이 꼭 좋은 왕이 되라는 법은 없어.”
왕은 무엇이든 할 줄 아는 자가 아니다.
왕은 다스리는 자다.
뛰어난 능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를 훌륭히 다루는 것이 바로 훌륭한 왕의 자격이다.
무엇을 하건, 그에 걸맞은 인물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제왕학의 본질인 것이다. 뭐,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전문가를 고르는 안목 또한 높을 테니 역시 훌륭한 국왕이 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여러 요소 중 하나이지 가장 중요한 자격은 아니다.
쉽게 말해 바보나 딴마음 품은 놈만 안 골라도 어지간해서는 좋은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저것이 가장 힘든 일이라 세상에 좋은 국왕이 드문 것이고 간신들이 날뛰는 것이지만…….
“유벨 왕자도 좋은 왕이 될 수 있을 거야.”
피니아라는 고성능 거짓말 탐지기를 가진 유벨은, 적어도 충신과 간신을 구별하는 안목만큼은 카르사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이라도 거짓이라면 확고하게 내칠 수 있을 만큼 공정한 성품 역시 지니고 있다.
“세상에는 머리로 알면서도, 눈앞의 칭찬에 감정이 흔들려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는 군주가 얼마든지 있지. 저 왕자는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어.”
이해했다는 듯 시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유벨 왕자의 자질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시리스가 갑자기 눈빛을 매섭게 빛내며 물었다.
“정말 모르는 일인가요?”
“응?”
“예전에 레펜하르트 님은 말씀하셨죠. 원래는 카르사스 공자가 왕위에 올라야 했었다고.”
차분한, 그러나 매처럼 날카로운 눈으로 시리스가 추궁하듯 질문을 이었다.
“미래의 일, 보통은 모르는 것이 당연하죠. 하지만 정말 모르나요? 당신이?”
레펜하르트는 눈을 감았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사실 카르사스가 국왕이 되고 나서 크로방스 왕국은 상당한 태평성대를 누렸지.”
그리고 속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 태평성대를 박살 낸 게 나긴 하지만.’
확실히, 안타레스 제국의 전쟁의 불길이 전 대륙을 뒤덮기 전까지의 크로방스 왕국은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부강한 국가였었다.
“그렇다면, 그자는 운명이 정한 진정한 국왕이군요.”
시리스가 우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시대를 거슬러 온 누군가가 그의 운명을 희롱하지만 않았다면…….”
그녀의 말이야말로 이 전쟁에 참가하며 계속 가슴 한구석을 찔러 오던 것이었다. 레펜하르트는 분명 이종족을 위해 유벨 왕자를 선택했지만, 그로 인해 정당한 인간의 국왕과 한 국가의 운명을 희롱한 것도 사실이다.
‘차라리 카르사스가 폭군이었다면 아무 문제 없이 편한 마음으로 일을 진행했을 텐데…….’
“그를 죽일 건가요?”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지만…….”
레펜하르트는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시리스의 말이 옳았다.
인간의 운명을 희롱하는 것도 모자라, 그의 목숨까지 취해야 하는가?
자신의 꿈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물론 그는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각오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지금 카르사스의 희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인가?
“모르겠다. 확실히 그는 이런 내 손에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물이지.”
레펜하르트가 잠시 고민에 잠겼다. 시리스가 차분한 얼굴로 입술을 닫고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러던 중이었다.
“마법사니임!”
공터 저편에서 병사 하나가 뛰어오고 있었다. 볼일이 없다면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 했으니 뭔가 일이 터진 모양이다. 레펜하르트 일행이 전원 경계 어린 표정을 취했다. 하지만 정작 병사의 얼굴을 보니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닌 듯했다. 그냥 당혹스럽고 놀랍긴 하지만, 그렇다고 두렵다거나 하는 그런 표정은 아니다.
“무슨 일이오?”
다가온 병사가 꾸벅 인사를 하더니 말했다.
“찾아온 여자가 있습니다요.”
“엥? 나를?”
“아니, 정확히는 어린 성자님을 찾아온 분입니다만…….”
병사가 갑자기 애매한 표정을 짓더니 레펜하르트의 거구를 올려다보며 뺨을 긁었다.
“아무리 봐도 마법사님을 찾아온 것 같아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그게?”
3
의아해하며 레펜하르트는 손님이 와 있다는 응접실로 향했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여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 연한 흑발에 검은 눈을 지닌 미녀였다. 미리 이야기를 들었는지, 여인이 레펜하르트를 알아보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처음 뵙겠습니다, 레펜하르트 공. 세이어 님을 섬기는 한 자루 검, 팰러딘 크리스틴입니다.”
그 순간 레펜하르트는 병사가 왜 그리 애매한 말을 했는지 바로 이해해 버렸다.
‘허? 테스론에게 여동생이라도 있었나?’
물론 처음 뵙겠다는 저 인사말을 볼 때 그럴 리는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의심을 하게 된다.
눈앞의 이 미녀는 무려 레펜하르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슬슬 신장이 2미터를 넘을락 말락 하다 보니 요즘 고민이 많은 그였다. 짐 언브레이커블에서 배운 일명 ‘신장 촉진 호흡법’은 조금도 안 하고 있거늘, 그럼에도 이 무자비한 테스론의 육체는 여전히 쑥쑥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뭔 놈의 키가 20대 중반이 되도록 멈추질 않고 자란단 말이냐!’
이러다가 정말 전생의 테스론처럼 230센티미터의 무식한 괴물이 될까 봐 요즘 잠도 잘 오지 않았다. 그런데 눈앞의 이 요염한 미녀는 그런 레펜하르트와 거의 비슷한 거구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당황하면서도 애써 레펜하르트는 표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상대를 살폈다. 성기사답지 않게 여행객의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크리스틴의 옆구리에 차고 있는 것은 틀림없이 주신 세이어의 성기사만이 쓰는 검이었다. 자루에 두 개의 칼날이 구름과 뇌격을 동반한 문양이 그려져 있으니 틀림없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런데 주신 세이어를 섬기는 성기사께서 어쩐 일로 저를?”
크리스틴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제가 찾은 이는 필라넨스의 신관, 실란 필 마르시스입니다. 왜 그런 오해를 하시는 건지는 잘 알겠지만요.”
“무슨 일로 실란을 찾아온 것인지 물어도 될는지?”
막 크리스틴이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뒤늦게 시리스와 함께 실란이 방으로 들어섰다.
“누가 절 찾았다던데…….”
크리스틴과 실란의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실란이 창백해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악! 크리스틴!”
“아, 실란!”
크리스틴이 실란을 보더니 얼굴 가득 화사한 웃음을 피웠다. 눈부신 미녀가 웃음꽃을 피우니 그것만으로 방안이 환하게 밝아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뭐, 사이즈가 사이즈다 보니 좀 지나치게 밝아진 것도 같다.
크리스틴이 두 팔을 활짝 벌리며 사랑에 빠진 목소리로 실란에게 다가갔다.
“내 사랑, 언제까지 운명을 피할 건가요?”
사자 우리에 갇힌 토끼 같은 표정으로 실란이 사정없이 뒤로 물러섰다.
“내가 왜 당신의 사랑이야?”
“그야 우리의 만남은 운명이기 때문이죠.”
“아니, 그러니까 그게 왜 운명이냐고!”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멍한 표정으로 저 두 남녀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구울의 손톱 앞에서도 안색 하나 안 바뀌고 악마의 칼날 앞에서도 담대하기 그지없던 실란이 지금 극도의 공포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참으로 돈 주고도 보기 힘든 광경이었다.
“으이이익!”
결국 계속 뒤로 물러서던 실란이 후다닥 방 밖으로 도망쳐 버렸다. 눈을 빛내며 막 쫓아가려는 크리스틴을 레펜하르트가 가로막았다. 도저히 이 질문만은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체 실란과 무슨 관계입니까?”
자신을 가로막은 레펜하르트에게 원망의 눈길을 보내며, 크리스틴이 또박또박 대답했다.
“위대한 신의 이름으로, 혼약을 허락받은 사이입니다.”
“에에에에엑!?”
☆ ☆ ☆
자신의 숙소에서, 실란은 정신없이 짐을 챙기고 있었다.
“도망쳐야 돼, 빨리 이곳에서 떠나야 해.”
평소의 단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손에 집히는 대로 막 옷이며 여행물품을 구겨 넣는 실란이었다. 그때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며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이, 실란.”
“으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려는 실란의 어깨를 두꺼운 손가락이 꽉 붙잡았다.
“나야, 레펜하르트.”
“아, 레펜 씨.”
그제야 버둥대던 실란이 창백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을 보며 레펜하르트와 시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얼마나 넋이 나갔으면 레펜하르트의 음성조차 못 알아들을 수가 있지?
“크, 크리스틴은? 그녀는 어디 있죠?”
“일단 접대실에서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러니까 좀 진정해.”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실란을 애써 달래며 레펜하르트가 침대를 툭툭 두드렸다. 실란이 심호흡을 하며 침상 끝에 털썩 걸터앉았다.
“대체 무슨 일이야? 너, 약혼했었냐?”
“하아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실란이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크리스틴 실 에스타나.
그녀는 대륙 남부에 위치한 할라인 왕국의 유서 깊은 가문 출신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녀의 미모는 왕국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열 살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가 눈웃음을 칠 때마다 나이 든 남자들조차 부끄럽게도 가슴이 설레는 걸 자제할 수 없었으니, 그녀가 성장하면 그야말로 일국을 멸망시킬 정도의 엄청난 미녀가 될 거라며 수군대곤 했다.
과연, 크리스틴은 성장해 굉장한 미녀가 되었다. 문제는 너무 성장해 버렸다는 것이다.
아무리 절세 미녀라도 남자는 여자가 자신보다 키가 크면 좀 저어하는 면이 있다. 물론 개중에는 키 큰 여자 좋아하는 타입도 분명히 있지만, 그것도 정도껏이다. 2미터는 너무 크다.
어릴 적엔 그토록 무수하던 혼담도 그녀가 사춘기에 접어들자 뚝 끊겨 버렸다. 아무리 귀족가의 결혼은 정략이라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서로에게 흠이 없을 경우다. 들어오는 혼담이라고는 상대 남자가 장애자거나 정박아 같은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에스타나 가문은 멀쩡한 상대에게 흠이 있는 딸을 밀어붙일 정도로 권세도 강하지 않았고, 또 뻔뻔하지도 않았다.
크리스틴의 아버지, 에스타나 백작은 고뇌했다.
불쌍한 딸, 차라리 못생기기라도 했으면 모르겠는데 어릴 적부터 미녀로 칭송받아 온 아이였다. 어떻게든 여자다운 행복을 찾게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세이어께 매일 기도를 올렸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무려 주신 세이어로부터 신탁이 내린 것이다.
-그녀는 신의 딸, 신의 힘을 행하기 위한 검으로 살며 위대한 이의 어미가 될 것이다. 태양의 사내와 마주치는 그날, 그 인연이 이어질지니.
세이어 교단은 크리스틴을 받아들이고, 신탁에 따라 성기사로서의 수행을 쌓게 했다. 그렇게 교단의 검으로 살아가던 그녀가 어느 날 바실리 왕국에 파견을 나갔을 때였다. 영지전이 격렬해져 세이어 교단에서 중재를 나서게 된 일이었다.
그곳에는 이미 필라넨스 교단에서 신관들을 보내 부상자를 치유하는 중이었다. 그곳에서 크리스틴은 운명의 연인, 실란 필 마르시스를 만났다.
그는 태양처럼 붉은 머리를 휘날리고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우아하게 전장을 누비며 부상자들을 돌보는 실란의 모습은 그야말로 크리스틴이 꿈꾸던 이상형 중의 이상형이었다. 한눈에 반해 버렸다. 상대가 고작해야 열두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세이어 교단으로 돌아와 크리스틴은 선언했다.
신탁의 인연이 이어졌다고. 위대한 이의 아비가 될 자를 찾았다고.
교단은 발칵 뒤집혔다.
크리스틴과 달리 세이어 교단은 지극히 상식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 모여 있었다. 이십대 중반의 여인이 열두 살 어리디어린 소년을 덮치겠다는 엽기적인 주장을 좋다고 받아들일 만큼 변태들은 아니었다는 소리다.
당연히 그녀를 달랬다. ‘그대가 뭔가 착각한 것이 틀림없다.’, ‘설마하니 세이어께서 점지하신 인연이 저런 어린아이겠느냐?’ 등등.
그때 또다시 세이어의 신탁이 내려졌다.
-걔 맞다.
뭔가 이번 신탁은 대단히 신성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세이어의 성직자들이 혹시 수신 잘못되었나 의심할 정도로.
하지만 어쨌건 주신 세이어께서 크리스틴의 주장을 증거하셨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결국 세이어 교단은 정중히 필라넨스 교단에 청혼장을 보냈다.
주신 세이어는 인간을 가호하는 다른 열두 신보다 위에 선 신이다. 그런 만큼 세이어의 교단도 다른 교단에 비해 권세가 강했다. 필라넨스 교단 입장에서는 함부로 거역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리고, 사실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실란이 아무리 어려 보여도 사실은 그 당시 이미 열일곱이었다. 어쨌거나 숫자상으로는 나이 차가 크지 않다. 딱히 크리스틴의 취향을 비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필라넨스 교단은 그 특성상 저런 변태적(?) 취향도 관대히 넘어가 주는 부분이 있었다.
사랑의 여신을 섬기는 입장에서 사랑이 없는 결혼을 인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무려 주신 세이어의 신탁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 그래서 필라넨스 교단은 애매한 조건 아래 승낙을 내렸다.
-그녀가 그의 사랑을 얻는다면, 허락하겠습니다.